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795
약먹는 천재마법사 795화
배신과 광신(2)
“……그렇군.”
속삭이는 듯한 영혼의 고백.
신녀가 힘겹게 내놓은 그 말을 들은 뒤에야, 레녹은 비로소 그렇게 답할 수 있었다.
“도래가, 교주의…….”
사방에서 무너져내리는 위령탑의 풍경조차 잠시 잊고 시선을 떨구었다.
승천자 도래(道來)가, 귀도 교주 본인이자 그릇 그 자체였다는 의미.
그것이 레녹에게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째서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이해할 것 같았으니까.
교주 본인이 언급했던 실패작. 란시아에게 배웠던 무예 구중도래.
신녀 세이나 나이드리의 존재와 저주를 관측하는 무간의 존재.
레녹과 교주 사이에 존재하는, 또 결코 확신할 수는 없는 연결고리마저.
당장 답을 내릴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수많은 의문들이 하나씩 선명한 확신으로 변해간다.
막연하게나마 상상하면서도, 그 본질을 결코 짚어낼 수는 없었던 무수한 미혹과 의심.
그 너머에서, 레녹은 자신이 교주의 새로운 일면을 마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신녀와의 대화마저 잠시 잊은 채, 레녹이 그 자리에서 걸음을 우뚝 멈춘 찰나.
드드득!!
“침입자…….”
“진혼정에 거역한 죄인이다.”
“탑 외벽에 목을 매달아야 해……!!”
음습한 목소리와 함께, 실체를 가진 군령들이 사방에서 솟구쳐 레녹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레녹을 진혼정까지 안내했던 탑의 안내인과 비슷한, 실체를 가지고도 살아 있지 않은 존재들.
위령탑의 일부이자 부품이면서도, 실체를 가지고 만귀야행을 지키는 병사로서 기능하는 귀신이다.
군령들이 제각기 흐릿한 영기로 둘러싸인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사이, 레녹이 신녀의 영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간 안에 보관된 도래가 무엇을 위한 안배인지는 알겠다.”
[…….]“다만 왜 그쪽이 이제와서 교주의 낡은 그릇을 찾고 있는지…….”
가면 너머로 흘러나오는 레녹의 안광이 순간 강하게 빛났다.
“그 사실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서 듣도록 하지.”
그 순간, 천장에서 거대한 군령이 입을 쩍 벌리더니 레녹을 덥석 집어삼키려 들었다.
[끄에에엑!!]끼이익!!
마력사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몸을 비틀어 의념을 사출.
폭발적으로 가속한 레녹의 신형이 군령의 아가리 너머로 직접 몸을 들이밀었다.
뻐어어엉!!
충격을 이기지 못한 군령의 머리가 폭발하며 레녹의 몸이 위령탑 층계 위로 솟구쳤다.
대번에 복도 천장을 뚫고 새로운 층계로 넘어온 레녹이 마력사를 재차 방사. 옆에 위치한 창가로 튕기듯이 넘어가려던 그 순간.
“이런, 안 될 일이지.”
창가 너머에서 나타난 만귀가 기다렸다는 듯 레녹을 강하게 걷어찼다.
콰아앙!!
그 충격으로 그림자 로브가 복도 벽면에 처박혀 십수미터 가까이 밀려났다.
“……!!”
실드로 몸을 보호하고, 진통제를 미리 복용했음에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충격.
억지로 숨을 들이키는 레녹을 두고 창문 바깥에서 걸어 내려온 만귀가 웃었다.
“판데모니엄의 특질계 술사. 조작계통과 공간계통을 동시에 다루는 괴물이라지?”
“…….”
“공간도약으로 도망칠 줄 알고 탑 외벽에 백귀들을 보내두었는데 걸려들지 않는걸. 예상하고 있었나?”
“……진혼정과 만나보니, 귀신답지 않게 바깥의 정보에 귀가 밝아 보이더군.”
레녹이 조소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면, 능력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두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
“후후, 겉보기와는 달리 신중한 성격이군. 아니면 싸울 때 유독 겁이 많은 편인가?”
도발을 한귀로 흘려넘긴 레녹이 빠르게 방금 허용한 타격의 피해 수준을 확인했다.
‘군령이 발휘하는 물리력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충격량이군…… 한 번이라도 더 맞으면 위험해지겠어.’
지금 레녹을 가로막고 선 백발의 청년은, 영락하지 않은 채 위령탑의 무간을 지키는 만귀.
요르타 내에서도 규격 외의 직급에 해당하는 강대한 군령이다.
일정 위계 이상에 도달한 군령들이, 영혼의 상태로도 현세에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방금 레녹이 느낀 충격은 그런 애매한 표현으론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강한 힘을 내포하고 있던 바.
“이 위령탑에서, 위대한 야행에 참가했던 군령은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여 존재하지.”
만귀가 그렇게 말하며 한 손을 휘두르자, 레녹과 만귀를 둘러싼 위령탑의 층계가 수직으로 비틀려 굽이지기 시작했다.
[끼게게게겍.] [끄아아아각.]그 안에서 찌그러지고 뭉개져 부서지는 군령들의 절규와 함께 위령탑의 층계가 통째로 그 공간을 바꾸었다.
쿵!!
텅 비어 있는 정육면체의 비좁은 공터. 레녹과 만귀 두 사람을 가두어 도망칠 곳을 없애 버린 밀실.
“어디로 도망치든,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탈출하려 하든 내 눈과 귀를 피할 방법은 없다.”
수천의 군령을 일시에 조작해 만들어낸 새로운 공간의 존재에, 레녹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엄청난 수준의 군령조작술이다……!’
방금 만귀가 위령탑에 복속된 군령들을 조작해 탑의 공간 전체를 바꿔버린 기예는, 레녹조차 거의 보지 못한 수준의 신기.
무간을 지키는 만귀의 진가는 그 막강한 신체능력이 아니라, 오니온에 비견되는 군령술식에 있었던 것이다.
“네가 도망치며 거리를 재는 모습을 보아하니, 대략 20여 미터 안팎에서 계속 바깥을 엿보려 들더군.”
“…….”
“아마 그쯤이 네 공간도약의 시전 사거리에 해당하기 때문이겠지?”
만귀가 그렇게 말하며 레녹을 향해 목을 죄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 정도 거리라면 네가 위령탑을 벗어나도, 즉시 붙잡아 다시 탑에 가둬 버릴 수 있지. 그러니 포기하고 우리에게 몸을 맡겨라.”
도망칠 곳을 잃고 홀연히 서 있는 레녹을 향해 만귀가 환하게 웃었다.
“교단 신녀의 영혼과 특질계 공간술사의 육체. 그 어느쪽이든 손상시키지 않고 손에 넣고 싶으니까.”
마치 지금부터 손에 들어올 보상을 기대하며 들뜬 듯한 청년의 모습.
“육신의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도, 여전히 다른 생자의 육신에 가치를 두는군.”
레녹은 그런 만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건 네가 아니라, 육신이 필요한 다른 영락한 귀신들을 위해서인가?”
“…….”
“그 모습을 보니, 왜 아직까지 무간 안에 승천자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군.”
순간 멍한 얼굴로 변한 만귀를 보며 레녹이 피식 웃었다.
“승천자의 시체를 필요로 했던 건, 역시 교주 뿐만이 아니라-”
“승천자……?”
그 순간, 만귀가 멍해진 표정으로 레녹의 말을 따라 했다.
“저것이…… 승천자의 시체였던가?”
“…….”
자신이 직접 설명했던 사실을 되묻는 만귀의 말에, 순간 레녹이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만귀는 머리가 아픈 것처럼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로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 아니…… 이게, 이게 아니야…… 나는, 분명…… 무간을 지키면서…….”
“…….”
“발칸에서 오백로를…… 아니, 대운하 프로젝트를…… 아니, 진와의 요청을…….”
“기억에 혼선이 있는 모양이군.”
그런 만귀를 보며 레녹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언동과 경직된 표정.
그것이 건망증에 가까운 심각한 망각의 발로라는 사실을, ‘결백’ 크로드 아즐란과 함께하며 알고 있었기 때문.
그리고 레녹은 만귀에게 그 증상이 발동하는 전조 역시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었다.
“무간 밖에 나와 있으면 오래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는 건가?”
“시끄럽다, 시끄러워……!!”
“무간 밖에서 정작 무간 내부에서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레녹이 흥미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락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쪽도 멀쩡한 상태는 아닌 모양이야.”
“닥쳐라!!”
한 손으로 머리를 짚은 만귀가 허공을 움켜쥐자, 밀실의 면적이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천장과 벽, 바닥을 이루는 군령들이 삽시간에 압축되어 소멸하며 공간 전체를 압착한다.
위령탑의 일부인 만귀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으니, 공간 자체를 압축해 레녹을 눌러 죽이려는 심산인가.
이대로라면 레녹이 버틴다 해도 호흡할 공간마저 사라져 질식해 버리겠지.
말과는 달리 서슴없이 자신의 육신을 압착해 터트리려는 살벌한 반응.
레녹이 던진 말이, 요르타의 숨겨진 치부를 강하게 찔렀기 때문이 아닐까.
이대로라면 도망칠 곳 하나 없이 이 자리에서 눌러죽든, 질식해 죽든 마찬가지.
[귀하. 지금 이 자리에서 계시의 공능을 사용하겠습니다.]상황을 돌아본 신녀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공능의 힘을 빌려 제가 강제로 군령의 흐름을 유도하면 길이 열릴겁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준비를-]“나가서 설명을 듣겠다고 했을 텐데?”
하지만 레녹은 그런 신녀의 말을 무시하고 천천히 양 손을 합장했다.
흩날리는 로브 소매 사이로 레녹의 손이 미끄러져 비틀린 찰나.
“소환술.”
키이이잉!!
레녹의 등 뒤에서 공간이 쩍 갈라지며, 너덜너덜하게 기워 붙인 거대한 손 한 짝이 튀어나왔다.
당장이라도 공간을 찢어발기고 뛰쳐나올 것처럼 일렁이는 길쭉한 손의 형상.
하지만 그 형상은 진체를 드러내는 일 없이 그 자리에 멈춰서, 맨손으로 균열을 힘껏 벌리기 시작했다.
[그워어어!] [아아아악!!]군령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그 손아귀에 갈기갈기 찢겨 나가 자리를 비켜주고.
쩌저적!!
그것만으로 레녹을 중심으로 압축되던 방의 공간이 휘청이며, 벽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
만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한 순간, 레녹은 망설이지 않고 벽에 난 균열 너머로 점멸을 사용해 뛰쳐나왔다.
쐐애애액!!
엄청난 속도로 가속한 레녹의 신형이 무너지는 위령탑의 복도 아래로 떨어지는 사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거대한 손의 형상.
“아, 아…… 그래!! 무간을 엿본 죄인을 처벌하려고……!!”
레녹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깨달은 만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따라 달렸다.
“소환술의 간이영창만으로 탑의 공간에 강제로 균열을 일으킨 건가…… 공간술사다운 해답이군……!!”
특질계 인공소환수, 허수차원의 재단사 소환술식 간이영창.
하지만 그 진체를 제대로 소환하려면 레녹조차 막대한 마력 소모를 감당해야 한다.
그렇기에 레녹은 재단사를 온전히 소환하는 대신, 영창의 일부만을 빠르게 반복해 탑의 공간을 흔들었고,
아주 조금의 빈틈도 없이 압축되던 방의 구조에 균열을 일으켜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만귀의 군령술 조작이 워낙에 완벽하고, 밀실의 압착이 너무나도 긴밀했기에 외려 변수가 치명적인 비틀림으로 작용했던 것.
“도망칠 수 없다……!!”
콰아아앙!!
레녹의 신형이 무너지는 탑의 벽면과 바닥을 파고들며 아래쪽으로 떨어진다.
위령탑의 창구를 통해 탈출하는 것보다, 단순하게 탑 아래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이 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
만귀 역시 그것을 직감하고 탑의 공간을 뛰어넘어 순식간에 레녹의 로브를 움켜쥐었다.
촤악!!
목을 휘감는 서늘한 군령의 한기. 로브 자락을 움켜쥔 손길을 인지하지마자 레녹 역시 몸을 비틀었다.
차르르륵!!
손가락 사이로 휘감긴 수십 가닥의 마력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
만귀 역시 군령들을 팔에 한껏 휘감고 그 자리에서 레녹의 심장을 향해 전력으로 내뻗었다.
서로의 동공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교차하는 수십번의 공방.
하지만 두 사람이 전력으로 격돌한 첫 전투는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끝나 버렸다.
쾅!!
위령탑의 층계 아래쪽에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레녹이 만귀의 영체를 움켜쥐고 바닥에 처박아 버렸던 것.
카가가가각!!!
“……!!”
비명도 지르지 못한 만귀의 머리를 짓밟고 탑의 복도 파편에 갈아 으깨버린다.
흐릿한 영기를 피 대신 흩날리며 몸을 비트는 만귀가, 연기처럼 사라져 레녹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네놈!!”
아까전의 여유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잔뜩 굳어 있는 만귀의 얼굴.
레녹이 그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군령이라 해도 마력과 의념의 충돌은 쉽게 무시하지 못하는군.”
“술사, 따위가……!!”
“그만한 물리력을 가지고도 정면에서 싸우기는커녕, 군령조작을 사용해서 날 짓눌러 죽이려 했지.”
손에 쥐고 있던 남은 마력사를 모두 풀어버리며 레녹이 말했다.
무간을 홀로 지키고 있던 것은 물론이고, 위령탑의 군령들을 손발처럼 자유로이 조작하는 강력한 군령술식.
레녹 역시 군령술사를 여럿 보아왔지만, 이 정도로 군령을 능숙하게 조작해 의지를 관철하는 술사는 오랜만이다.
생전에는 마드리치 오니온에 비견될만한 군령술사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만귀가 그러한 군령술을 지니고도, 철저하게 단순한 군령조작으로 레녹을 상대했던 이유.
“뛰어난 육체능력과는 별개로 전투에는 익숙하지 않은 거야. 생전에는 철저하게 후위에 특화된 술사였겠군.”
“…….”
“잡귀 따위에게 내 몸을 내줄 생각은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두지. 더 이상 날 막을 방법도 없을 텐데?”
대답하지 않는 만귀를 두고 레녹이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진혼정의 오래된 영령들은 영락해 나오지도 못하는 신세에, 무간을 지키는 만귀는 심각한 건망증에 시달리고 있다니…… 기구한 운명이군.”
“……아니. 하잘것없는 생자 하나를 죽이지 못해 이리도 서두르던 것이 아니야.”
무표정하게 굳은 표정으로 만귀가 대답했다.
“우리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이 위대한 결실을 훼손시켜, 침입자를 벌해야하는 불쾌한 상황을 피하고 싶었을 뿐.”
그 순간, 위령탑을 이루는 군령들이 천장과 벽면에서 강제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만귀의 의지에 따라 이리저리 조작당해도 탑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던 군령들을, 강제로 분리시켜 그러모으는 일련의 흐름.
그렇게 떨어져나온 군령들이 만귀의 손 안에 응집되어, 새하얀 빛의 구체가 되어 격렬하게 회전했다.
군령계열 고유술식
영체합주 강제반발
[원허마유타(怨虛魔有墮)]]고오오오!!
만귀의 손에 응집된 구체를 중심으로 귀곡성이 터지며, 싸늘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닥쳤다.
위령탑에 복속된 군령들을 억지로 떼어내어 군령술의 일부로 삼는 신기.
그 여파만으로 탑 하층부가 거세게 흔들리며 레녹을 향해 원망 섞인 살의를 쏘아냈다.
쩌저적!!
공간 전체가 압착되다 못해 로브 사이로 영창하는 실드가 짓뭉개질 정도의 억압.
레녹은 그제서야 어째서 만귀가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군령술을 영창하는데 필요한 군령들을, 위령탑에서 떼어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위령탑 자체가 만귀에게 있어, 끝이 없는 무한한 동력의 보고와도 다름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레녹의 마력이 전부 소모될 때까지 퍼부어서라도, 그는 이 자리에서 레녹을 죽여 버릴 생각이겠지.
만귀가 손을 가볍게 내려놓는 동작과 함께, 하늘 위로 솟구친 원념의 구체가 레녹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쿠과과과!!
군령계열 고유술식 원허마유타(怨虛魔有墮).
위령탑의 군령을 떼어내 갈아붙여 만들어낸 고화력의 응집체가 회전하며 내리 찍히자.
그 여파로 탑 사방의 시계가 비틀리며 레녹의 존재 자체를 찢어발기려 들었다.
머리 위에서 떨어져내리는 만귀의 술식을 본 레녹이 무심코 로브 안으로 손을 뻗었다.
‘……엘릭서를.’
아리스 리첼렌의 선물로 손에 넣은 엘릭서 희석액.
비록 레녹에게 한해서 적용되는 효과라고는 하자, 4초 가량 마력소모의 제한을 없애주는 말도 안 되는 성능의 소모품.
하지만 현재 마력량을 기준으로 소모되는 마력을 없애주는 힘이기에, 남은 마력이 충분한 이 시점에 사용해야 한다.
사용할거라면 확실하게.
지금부터 만귀가 노리고 있는 물량전에서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까지 밀어붙여야겠지.
하지만 레녹은 잠시 고민하다가, 엘릭서 희석액을 움켜쥐었던 손을 힘없이 풀어버렸다.
여기서 아리스가 선물한 엘릭서를 사용하더라도, 만귀를 상대로 물량전에 맞설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
하물며 위령탑의 보조를 받는 그를 죽이기 위해서, 엘릭서를 얼마나 사용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
그렇게 승리한다 하더라도 결국 무간 안에 들어갈 방법을 찾은 것도 아니니, 결국 의미가 없는 싸움이다.
도래의 시체를 본 대가로 진혼정의 눈밖에 나 추살당하게 생긴 이 시점에서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 바.
결국 당장은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레녹이 그렇게 결심을 다지고, 양 손을 합장해 다시금 마력을 끌어올린 그 순간.
“탑의 협정을 깨고 지상과 지하를 어지럽히는 무뢰한이 있구나!!”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
레녹과 만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그 울림에 움찔거리며 감각을 치환한 직후.
발아래 탑의 지면이 폭발하듯 양 옆으로 갈라지더니 엄청난 양의 물길이 솟구쳤다.
그 사이에도 지상으로 떨어져내리던 원념의 구체가 솟구치던 강물과 정면으로 충돌.
뻐어어엉!!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함께 탑 사방에 물줄기를 쏘아내며 증발시켰다.
해일이 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수량이 복도와 층계구간 사방으로 밀어닥친다.
콰아아아!!
레녹이 즉시 점멸과 마력사를 혼용해서 몰아치는 해일을 피해 거리를 벌리고,
만귀 역시 군령을 발 밑에 깔아 비행하며 넘실거리는 강물을 노려보던 찰나.
“하하하핫!!”
물길 아래서 큰 웃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유령상어가 뛰쳐올랐다.
희끄무레한 형체에, 미끈한 지느러미를 가진 특이한 외형. 초점을 잃은 멍한 동공.
피부 위로 거친 흉터와 상처가 나 있는 상어의 거체 위에는, 앳된 얼굴을 한 소년이 올라타 웃고 있었다.
“이 어르신이 멀쩡히 눈을 뜨고 계신데 소란을 피워대는 것이냐!!”
“……너는.”
무너진 위령탑 층계 사이에 매달려 있던 레녹이, 소년의 얼굴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레녹이 막 요르타로 들어올 당시 검문 때 마주했던 강력한 군령.
위령탑 지하 1층계를 맡고 있는 대심판관이, 위령탑 바닥을 깨부수고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탑의 지상과 지하 양면에서 일어난 소란은, 대심판관인 본인이 직접 처리해야 할 용무일 터.”
심판관은 뒷짐을 진 채로 엉망이 된 탑 내부를 보란듯이 행진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내가 데려가서 처벌해야겠으니, 얌전히 신병을 내놓거라.”
뻔뻔하게 큰 소리를 친 소년이, 슬쩍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무간 안에 존재하는 유해를 보고 온 모양이구나, 오니온의 후예야.]동시에 레녹의 귓가에 들리는 소년의 전성.
[그것은 진혼정이 기를 쓰고 숨기려는 치부이자, 위령탑의 모든 영적인 기록과 엮여 있는 아키타입 그 자체다.]“…….”
침묵하는 레녹을 두고 심판관의 속삭임이 빠르게 이어졌다.
[오래전, 교황성과 진혼정이 승천자의 시체를 두고 나눈 거래에 대한 일이다. 받아들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