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3
….어쩌면, 이미 이 세상의 메인스트림은 한참 전에 시작된 것이 아닐까?
고민에 빠진 레녹이 침음성을 흘리는 사이, 옆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젊은 아가씨가 식견이 상당하네. 그 말대로야.”
목청을 높이지 않았는데도 귓가를 파고드는 선명한 목소리.
하지만 그 사이에 섞여있는 마력의 농도는 결코 평범한 수준이 아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레녹이 고개를 홱 돌렸다가 입을 살짝 벌렸다.
검은 단발머리. 짙은 녹색의 눈동자.
어디 거래처에 나가는 것처럼 검은 빛의 블레이저를 어깨에 걸치고, 셔츠에 슬랙스 차림을 한 세련된 자태.
차분하면서도 무표정한 미모가 인상적인 젊은 여자가 손에 든 술잔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제대로 얼굴을 마주친 것은 몇번 안되지만 그 인상적인 모습을 잊어버릴리 없다.
시정부의 에이전트. 이벨린 마르시아.
크로켄 아실러스와 정면에서 대담을 나눌수 있는데다, 취미로는 채소가게를 운영하는 독특한 감각을 가진 기인이 이곳에 있었다.
그제서야 이벨린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본 딜런도 기겁을 하면서 자리에서 튀어올랐다.
“에, 에이전트….!!! 언제부터 여기에!!”
“………”
제니도 이벨린의 얼굴을 모르지는 않는지, 빠르게 놀란 표정을 가다듬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잠깐의 소란에 순식간에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되고, 그녀를 알아본 손님들이 하나같이 기겁을 하면서 움츠러들었다.
“씨, 씨발…. 저거 뭐야.”
“혀, 현궁(玄弓)이다…. 현궁이 여기 와 있어.”
“언제부터 와 있던거지?”
“제니가 에이전트 놈들이랑도 거래를 튼 거야?”
레녹은 그 짧은 순간에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주워담았다.
현궁이라…. 그건 아마 그녀의 전투스타일이나 상징적인 능력을 일컫는 말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때 그녀가 보여준 힘을 감안하면 그럴싸한 이명 하나는 붙어있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레녹은 그녀가 가진 또 다른 이름보다는, 방금까지 그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귀신같은 은신능력에 더욱 관심이 일었다.
‘분명 누군가가 내 옆에 앉는건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이벨린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이벨린이 레녹의 마력감지를 완벽하게 속이고 쥐도새도 모르게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것은 아니다.
레녹은 분명히 술집으로 들어온 손님이 그의 옆에 앉아서 술 한잔을 주문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 손님이 이벨린 마르시아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것은 틀림없는 그녀 자신의 실력이었다.
더불어 그녀가 스스로의 마력패턴을 완벽하게 속여낼 수 있는 초인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초인의 등장에 술집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바에 앉아서 한가하게 술잔을 흔들고 있는 저 여자가, 이 자리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은 제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마 내 술집에서 이만한 유명인사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 의외네. 우리는 당신같은 브로커들을 잘 알고 있거든.”
“………”
“적당히 유능하고 적당히 눈치빠르고, 적당히 인망좋고, 또 적당히 냉혹하지. 이쪽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기에는 아주 적합한 태도야. 카이세를 보고 쓸만한 교훈을 얻었나보네.”
“뭐가 좋다고 날 도발하려는지 모르겠는데.”
그 이름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않은 제니가 싱긋 웃었다.
“쥐새끼처럼 우리 대화를 엳듣고 있던 이유나 말해줬으면 좋겠어. 설마 에이전트님께서 시시한 기싸움이나 즐기려고 여기 놀러온 건 아니겠지?”
“……….”
분명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왠지 사방에 불꽃이 튀기는 듯 하다.
두 사람 사이의 무력 격차는 압도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지만, 제니는 마치 당장이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처럼 이벨린의 말을 받아치고 있었다.
오죽하면 딜런이 달달 떨면서 제니의 어깨를 뜯어말릴만큼.
“저기 제니. 혹시 오늘 분량의 셰이커에 이상한 약을 집어넣은 건 아니지?”
“쫄지마, 딜런.”
제니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정부의 에이전트가 여기까지 와 있는 이유가 뭐겠어? 보나마나 자기들이 이 사건에 직접 개입하기 싫어서 쓸만한 프리랜서를 구하고 있는거잖아.”
“………”
“그리고 그런 사람이 고작 이런 말싸움 때문에 화풀이를 할리가 없지. 오히려 지금은 마음껏 개겨도 아무 상관없다고.”
“아가씨는 공무원이 뭐하는 사람들인지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이벨린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보기 드문 표정을 보았다고 놀라워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찾아온 것은 정말로 그녀 혼자뿐이었다.
레녹은 무의식중에 이 주위에 쳐놓았던 방음결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분명 이벨린은 결계의 범위 안에 들어와있지 않은데, 마치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 자연스럽게 제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결국 레녹은 한숨을 내쉬면서 소음마법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서 이벨린을 끌어당긴 뒤 물었다.
“제니의 말이 사실인가?”
“유감스럽지만, 정확해. 감이 아주 날카로운걸?”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에이전트 선에서 일을 처리하지 않는 이유는?”
“상부에서 그걸 원하지 않으니까.”
이벨린은 평탄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레녹은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그 이상의 어떤 대답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희미한 웃음을 띄면서도 지독하게 무기질적인 시선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취미로 채소가게를 운영하는 독특한 취미를 가진 여자가 아니라, 한명의 공무원으로서 이 자리에서 와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때 공장에서 본 뒤로는 처음이지?”
“……..”
“솔직히 좀 놀랐어. 그 영감한테 죽기 직전까지 몰려있던 두 애송이의 얼굴을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거든.”
평탄한 어조. 하지만 담겨있는 말의 의미는 레녹의 폐부를 날카롭게 찔러들어온다.
“특히 당신. 반이라고 했나? 최근 들어서 급격하게 몸값을 불린 모양이던데. 갱단을 혼자서 무너뜨리다시피한 괴물이라고 말이야. 확실히 그때 영감한테 죽지 않고 버티고 있던 모습이 인상적이기는 했지.”
그래서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는거기도 하고 말이야, 하고 말을 이은 이벨린의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런데, 당신 둘. 내게 빚진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잠깐의 침묵.
딜런이 멋쩍은 표정으로 수염이 듬성듬성 자란 턱을 긁었다.
“없다고는…. 말 못하겠군.”
“딜런.”
제니가 짜증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레녹은 그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했다.
그녀는 크로켄 아실러스가 어느정도의 괴물인지 모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선사하는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지 못한다.
만약 그 순간 이벨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정말로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벨린이 하는 말을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
되도않는 의리때문이 아니다.
그녀만한 실력자에게 받은 호의를 제때 돌려주지 않으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받은만큼은 갚아줘야 한다. 그것이 호의든 원한이든.
만약 이 자리에서 이벨린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언젠가 그녀에게 더 큰 대가를 내어줘야 할지도 모른다.
레녹이든, 딜런이든 그 사실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입학
심지어 레녹은 그러지 않아도 이 사건에 발을 들이밀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이벨린의 말에 레녹은 차분하게 손익을 계산하고는, 지금 그녀가 건넨 제안이 결코 손해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이벨린에게 진 목숨빚을 털어낼 수 있다면 오히려 이득이다.’
물론 그런 사실까지 그녀에게 말해줄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레녹은 태연하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연기했다.
제니는 레녹의 표정까지 살피고 나서야, 두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것을 깨닫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반…. 당신도 벌써 이쪽 사람이 다 됐어.”
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니가 뒤로 한발 불러나 셰이커를 집어들었다.
그 몸짓의 의미를 알아차린 이벨린의 입가에 다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이 자리에서 마법사 반과 딜런 오케이시에게 정식으로 의뢰를 넣도록 할게.”
“난 빼줘.”
딜런이 손을 들고 말했다.
이벨린이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우리 사무소 알잖아? 당분간은 외부 활동에 나서기 힘들다는 거.”
그 말을 들은 그녀가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넌….. 그렇네. 좋아. 안타레스와는 따로 이야기를 해야겠어.”
“………”
코앞에서 쏙 빠져나가는 딜런을 레녹이 곱지못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지금 이 자리에서는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는 모양.
이벨린에게 지워진 빚을 털어내는게 목적이니 딜런의 존재 자체는 크게 상관 없긴 하지만…. 레녹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구체적인 목적과 대가를 말해.”
“고작 프리랜서 한명에게 이번 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원하는건 아니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만한 능력이 있는것도 같기는 하지만…. 그딴식으로 일처리를 하고 상부에 보고를 올릴수는 없으니.”
이벨린의 손안에 든 술잔이 느릿하게 회전한다.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단번에 남은 술을 마셔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세한 내용은 거기 카이세의 공주님을 통해서 전달하도록 할게.”
“……….”
“그럼 나중에 보자.”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것처럼, 그녀는 아주 느긋한 걸음으로 술집을 걸어나갔다.
레녹은 끝까지 마력감지로 그 모습을 쫓았지만, 술집을 나서자마자 그녀의 기척을 놓쳤음을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최근 들어 급격하게 상승한 마력감지능력으로도 여전히 그녀의 움직임을 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정말 많이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있었다.
“제니.”
“하아…. 관련된 정보를 모아볼게.”
본의는 아니지만 의뢰를 받았으니 브로커가 해야하는 일은 정해져있었다.
에이전트 측에게 연락을 취해 정보를 끌어모으고, 해야 할 일과 보수를 알려준 뒤 작전에 돌입한다.
시작은 레녹의 개인적인 목적 때문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리저리 움직이다보니 결국 돌아오는 곳은 여기였다.
“할 수 있다면 그녀에 대한 정보도 모아줬으면 좋겠군.”
“현궁말이야?”
“그래. 그동안의 커리어, 전투 스타일, 출신이나 성격까지…. 아무거라도 좋아.”
그녀를 상대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정보라면.
슬쩍 마지막 말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레녹은 그만한 괴물과 함께 일하면서 넋놓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벨린 마르시아가 에이전트로서 어떤 사람인지 아예 알지 못하는 만큼,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레녹도 준비를 단단히 해두어야 했다.
생각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준비할 시간을 오래 주지는 않겠지.”
바 한켠에 걸어두었던 코트를 챙기면서 레녹이 대답했다.
“지금부터 서두르는 편이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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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걸걸한 목소리가 좁은 골방을 타고 울려퍼진다.
“지금 이 리볼버를 내게 개조해달라 이거냐?”
불쾌한 기분을 여실히 드러내듯 한껏 끌어올린 눈썹과 마구 꿈틀거리는 턱수염.
술에 취한듯이 벌개진 들창코.
거나하게 한잔 들이킨 취객과 같은 얼굴의 남자를 보며 레녹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좀 더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일단은 그게 맞습니다.”
“싫다.”
“뭐가 말입니까?”
레녹의 질문에 남자가 들고 있던 리볼버를 테이블에 휙 던져버렸다.
“난 이런 쬐그만 금속쪼가리는 만지지 않아. 이런 장난감 어디에 내가 만질만한 구석이 있다는 말이냐?”
“그럼 이건 뭡니까?”
남자는 대놓고 뻗대면서 불퉁거렸지만, 레녹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꺼낸 절단기를 보자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이 절단기도 영감님이 직접 개조해서 팔아먹은 물건일텐데….. 참 이상한 일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