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40
약먹는 천재마법사 940화
아나테마(14)
“교단의 새로운 신녀라…….”
나이드리의 이름을 계승 받은 교단의 신녀이자, 새로운 제사장.
본디 교단 총본산에 있어야 할 신녀 본인이 위성도시에 와 있었다는 말인가.
“신녀의 자리에 오른 지는 좀 됐는데, 외부활동을 시작하는 게 많이 늦었어.”
심드렁한 기색으로 귓가를 후비적댄 우레카가 손가락을 불며 말했다.
“전대 신녀가 진와의 저주에 걸려 죽어버린 뒤로, 교단 내외적으로 발생하는 권한의 부재를 처리하느라 시간이 걸려서 말이야.”
“…….”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관계자들의 목을 싹 다 치고 시체를 사도에게 먹였거든. 그랬더니 이게 뭐야?”
우레카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만신전에서도 쓸모가 없어진 이 불쌍한 순교자들에게 목줄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이거지.”
대대로 이어지는 신녀의 성격과 힘이, 각 후계자마자 조금씩 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같은 신도들을 참형해 그 시체를 사도의 먹이로 삼아 공능을 각성했을 줄이야.
새로운 신녀는 그간 활동하던 전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성정인 듯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도 겨우 본전을 채웠다는 사실은 인정해. 원래는 아나테마가 의식을 마치는 사이 두셋 정도는 죽여둘 생각이었는데…….”
요동치는 사막을 너머, 벼락이 번뜩이는 위성도시를 바라보던 우레카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군. 마음에 안 들어.”
“키리야, 물러서라.”
그 순간, 날카로운 검광이 사선으로 번뜩이며 하백이 신녀의 앞에 내려앉았다.
지켜보던 다른 초인들조차 지각할 수 없는, 칼날 사이로 공간을 찢고 나타나는 듯한 신기.
머리를 조아린 다른 사도들의 경계를 순식간에 돌파한 맹인이 신녀를 향해 돌아서며 검을 움켜쥔 순간.
카가가가각!!
신녀와 하백 사이에 수십 갈래 검광이 난무하며 눈부신 광채를 흩뿌렸다.
검을 뽑는 동작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하백과, 길쭉한 석장 하나를 들고 그에 맞서는 신녀의 모습.
“캬하하핫!!! 한번 해보자는 거야?!”
하지만 놀랍게도 신녀는 치렁치렁한 예복을 입고도 하백의 검극에 정면으로 맞서며 공방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표범의 머리 위에 선 채로 춤을 추듯 몸을 회전시키며, 손에 쥔 석장을 마치 창대처럼 휘두른 찰나.
묵직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하백의 검극을 상쇄하고 빗겨낸다.
콰아앙!!
흐릿하게 비틀리는 칼날 사이를 꿰차듯이 석장을 끼워 넣고 잡아채려던 순간.
맹렬하게 진동하던 칼날이 가속하고, 석장 사이로 미끄러지듯이 신녀의 어깨를 관통했다.
푸욱!!
대등하게 이어지던 공방의 균형을 기울이는, 시간을 쪼개어 가속하는 듯한 하백의 칼날과.
그 와중에도 심장을 노리던 칼날의 궤적을 비틀어 어깨로 받아내는 신녀의 대처.
하지만 꿰뚫린 칼날 사이로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고, 신녀의 표정에도 고통은 없었다.
으직!!
신녀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린 촉수 달린 가재의 앞발이 터져나가며, 끈적한 진액을 흩뿌렸을 뿐.
“나를 상대하고 싶다면 소우주로 장난질을 치는 정도로는 부족하지.”
칼날 사이로 맞댄 석장을 두들기며 신녀가 속삭였다.
“제대로 해, 늙은이. 여기서 죽고 싶은 거야?”
“그럴 리가 있겠나.”
석장 사이로 칼날을 맞댄 하백이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웃었다.
“다만 나 혼자서 추하게 춤추기에는, 관객들이 너무 많아 보이지 않나?”
그 순간, 사막 저편에서 거대지네의 시체를 매단 금속구체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신녀를 향해 접근해 왔다.
[아즐란, 조심하도록. 이 자는 미친 사도들을 제 뜻대로 부리고 있네.]금속구체를 회전시키며 어깨를 주무른 올리닉이 말했다.
[위계로 치환하면 8레벨 이상의 테이머. 교주의 비호까지 감안하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여기서는 내가 길을 막도록 하겠네.]“아, 금속을 다루는 놈이었군. 웃기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치고는 잘 싸우던데.”
[유감이지만 난 사도들의 먹이로 던져줘도 맛이 없을 거요.]올리닉이 지지 않고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다른 사람들부터 부탁드리지.]“재미없는 농담이군. 네가 내 신도중 하나였다면 이 자리에서 발목을 잘랐을 거야.”
[…….]펄럭!!
직후, 사막 저편에서 굉음이 폭발하며 거대한 흑색의 날개가 솟구쳤다.
활짝 펼쳐진 날개가 어찌나 거대한지, 정작 날개를 펼친 존재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
뼈가 드러난 앙상한 날갯죽지가 펄럭이자, 수백 개의 깃털이 사막의 하늘 위로 흩날리고.
검은 빛의 파동이 원형의 고리처럼 퍼져나오며, 신녀의 발 아래 머리를 조아린 사도를 짓눌렀다.
우레카 역시 즉시 상대의 기척을 느낀 듯이 웃었다.
“중재자 일족인가.”
끼기기기긱!!!
신녀가 타고 있던 눈알표범의 머리를 대번에 터트릴 정도로 막대한 압력.
하지만 정작 그 머리 위에 선 우레카 나이드리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다.
머리가 으깨져 뇌수를 줄줄 흘리는 표범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찰나.
흑발적안의 남자가 하늘 위에서 떨어지며 그대로 사막의 모래 위에 내려앉았다.
쿵!!
“슬레인……!!”
페이샤가 입매를 비틀며 짜증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레카 역시 슬레인의 존재를 진작에 인지하고 있었는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짜증 나는군. 이래서 비인외종이랑은 싸우기 싫다니까. 무슨 짓을 해도 싸움을 흐지부지하게 만들어버리니 원.”
“아즐란. 그리스번.”
머리 위에 펼쳐진 흑색날개를 순식간에 접어 없애 버린 슬레인이, 우레카를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살아있었군. 견뢰가 아나테마를 처리한 건가?”
“이 씹어먹을 새끼가……!!!”
페이샤가 으르렁거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아나테마의 현신을 주도한 놈이 왜 남의 일처럼 지껄이는 거냐!!!”
“교단의 신녀가 개입한 시점에선 무의미한 지적이군.”
페이샤의 살기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흘려낸 슬레인이 말했다.
“아나테마의 현신이 사전에 계획된 일임을 감안해도 사도화 진행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뭐?”
“추방당한 아나테마가 어떻게 사도 선정 의식을 미리 마친 건지 의문이 있었는데, 정답이 바로 앞에 있었지.”
새빨갛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신녀의 비웃는 듯한 표정이 선명하게 잡혔다.
“설마 교단의 신녀 본인이 위성도시에 직접 도착해 선정의식을 대신 치러주었을 줄이야.”
“왜, 쫄려?”
“새로운 신녀가 전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경파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번 일은 지나치게 무모하다 생각하지 않나?”
천천히 어깨를 푼 슬레인이 물었다.
“교단 최고 제사장이 본단에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공격받을 지부가 한두 곳이 아닐 텐데.”
“상관없어. 내게 필요한 건 권한이지, 재능이 아니니까.”
“……무슨 뜻이지?”
“그분께서 목소리를 뽑을때는, 그 시기에 가장 교단에 필요한 재능을 원하시지.”
우레카가 냉소했다.
“교리를 따르지 않는 불신자를 죽이고, 반항하는 신도들의 목을 자르고, 짐승이 된 사도를 부려 결말 앞에 도달하는 것.”
콰아아아앙!!!
저 멀리서 다가오는 올리닉과 하백, 초능력자 거한을 등진 우레카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교단에 필요하다 말씀하신 거나 마찬가지인데, 무엇을 망설이겠어?”
“…….”
가늘게 뜬 눈으로 인간들을 바라보던 신녀가 말했다.
“이해했으면 썩 꺼지도록 해. 불신자들을 상대하는 것 말고도 내게는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그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로구려.”
결백이 묘한 표정으로 창을 고쳐잡았다.
철컥!!
“아나테마의 타락을 위해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더 이상 에타노크에 볼 일이 없을 텐데.”
“나는 이번 계획을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를 거듭해 왔어.”
그렇게 말하는 신녀의 표정은, 어딘가 굉장히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뒤틀려 있었다.
“이렇게 끝난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분께서 원하신다면 따를 수밖에 없잖아?”
“…….”
애초에 신녀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목적을 설명할 생각이 없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의 목적은 다른 초인들의 발을 붙잡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그 사실을 깨달은 결백이 곧바로 마모된 창대를 고쳐잡았다.
“그렇다면 더욱 허락할 수 없겠구려. 저 곳에는 막 싸움을 끝낸 마법사가 숨을 다스리고 있을 테니까.”
“…….”
“먼저 나를 뚫고 가시오. 적어도 탑주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마지막까지 응답해야 할-”
[아즐란.]결백의 귓가에 레녹의 전성이 울려 퍼지고, 그의 손길이 우뚝 멈춰 섰다.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리려던 다른 초인들 역시 레녹의 말을 듣고 시선을 들어올린 순간.
레녹이 조용히 말했다.
[보내줘라.]우우웅!!
대기중의 마력을 공명시켜 의사를 전달하는 육합전성.
바로 앞에서도 사용이 까다롭다는 기예를 도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용하는 솜씨에, 신녀의 표정마저 묘하게 변한 순간.
“탑주, 하지만-”
[교단의 신녀와는 안면이 있지.]레녹이 웃었다.
[다음 후계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한번 봐두고 싶군.]“…….”
마치 신녀를 잘 안다는 듯한 레녹의 대답에, 주변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아나테마를 죽인 당사자가 교단과 결탁할리는 없으니, 다른 식으로 신녀와 접촉한 적이 있었다는 말일 터.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신녀를 하대하는 레녹의 말에 우레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레녹의 대답에 살짝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기만 할 뿐.
눈썰미가 좋은 이들은 그녀가 일부러 반응을 숨기고 있음을 알았지만, 오래 관찰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침음성을 흘리던 결백이 창을 거두는 것과 동시에, 결국 길을 열어주었던 것.
“충성심이 좋네.”
표범의 머리를 재생시켜 올라탄 우레카가 결백을 돌아보며 웃었다.
“위계를 초월하고도 말을 잘 듣는 개는 흔치 않지. 교단 총본산에도 한마리 들여두고 싶은걸.”
“……아나테마 공은, 도시의 운명을 가르는 내전에서도 민간인을 먼저 생각하던 인격자였소.”
결백이 눈을 감은 채로 답했다.
“그와 같은 훌륭한 전사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오.”
“그게 바로 우리와 너희들의 차이인거야.”
신녀가 냉소했다.
“아나테마는 그 차이를 늦게서야 받아들였을 뿐이지. 그가 현명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겠어?”
“…….”
신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결백을 스쳐지나, 폐허 저편으로 사라진다.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동정하도록 해. 이제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주변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다른 사도들이, 백모래 아래쪽을 파고들며 모습을 감췄다.
에타노크 외곽을 가득 채운 거대괴수들이 순식간에 떠나 버리고 고요해진 사막 위.
“교단의 새로운 신녀라니……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사도의 체액이 흐르는 칼날을 느릿하게 털어낸 하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테마가 작정하고 교단과 결탁한 것과는 별개로, 그 이상의 비밀이 회담에 존재하는 듯하건만.”
“그건 너희 배신자 새끼들이 처음부터 교단과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지.”
페이샤가 무너진 벽에 기대앉아 조소했다.
번들거리는 시선이 사방에 서 있는 초인들을 돌아보았다.
“신녀에게 발이 묶였다고 지껄였지만, 사실 아나테마를 상대할 생각도 없었잖아.”
“…….”
“애완돼지가 된 사도들을 적당히 상대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겠지. 내 말이 틀렸나?”
신녀가 도시 바깥에 성역을 선포하고, 지성이 없어진 사도로 이들의 발을 묶었다고 말했지만.
여기 모인 이들 중에서 진정으로 그 추격을 뿌리칠 능력이 없는 이가 있었을까.
[허헛, 틀린 말은 아니로군.]키리야가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올리닉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
[아나테마는 내전에서도 역전의 용사로 칭송받던 실력자. 대규모 초인전투에서는 그 판단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평가까지 받았었지.]올리닉이 머리 위에서 회전하는 구체를 턱처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길레온과 겨루던 아나테마가 사도가 된 시점에서, 누가 신녀를 무시하고 홀로 견뢰를 도우러 간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겠나.]“…….”
[자네는 오히려 견뢰의 뛰어남에 감사해야해. 걷기조차 힘든 몸을 끌고 아나테마와 싸우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이기기까지 하였으니…….]그렇게 말하는 올리닉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찬탄이 희미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 도시가 세워진 이래, 그 남자만큼 악조건에서도 빛나는 재능이 있었을까 싶군. 그런 부분에서는 감히 카이세 이상이라 말할 수 있을 듯해.]“웃, 기지 마…… 이 X새끼가 되도 않는 소리를……!!”
페이샤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그녀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일어서려던 찰나.
[아니,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손가락을 까닥인 올리닉이 대번에 페이샤의 몸을 찍어눌렀다.
콰아아앙!!
“큭……!!”
백모래 아래서 사철을 뽑아내 응집하고, 거대한 종의 형태로 만들어 짓누르는 기예.
금속입자의 편향과 조형, 통제와 조작. 그 모든 공정을 의식의 편린 속에서 처리하고 완성시켜 현실에 구축한다.
분명, 올리닉 역시 싸움에 이골이 나다 못해 숨쉬듯이 익숙한 굉장히 뛰어난 술사.
[건곤일척의 승부에서 자네가 서슴없이 견뢰에게 목숨을 걸 수 있었던 이유. 마음속으로는 느끼고 있겠지.]진작에 모든 기력을 소모한 채, 일어서지도 못하고 발버둥 치는 페이샤를 보며 올리닉이 말했다.
[직접 꺾여보았기에 얻을 수 있는 신뢰 역시 있는 법. 천번이 자네와 같지 않다면 좋으려만.]“하……!! 뒷짐지고 서서 잘난 체는……!!”
종에 깔려 발버둥치면서도 페이샤가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언젠가, 그 마법사 놈의 벼락에 찢겨 죽어도…… 그딴 개소리가 나오는지 보자고.”
[무력만이 이 세계의 기준이었다면 반궁은 진작에 하늘을 깨부수고 승천에 성공했겠지.]올리닉이 뒷짐을 진 채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신녀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는 슬레인이 놓여있었다.
[다만 나는, 조금 더 다른 것을 보고 싶을 뿐이네.]* * *
고오오오……!!
이른 새벽.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하는 하늘.
기온이 바뀌면서 싸늘한 바람이 불고, 엉망진창이 된 위성도시 인근의 폐허를 휩쓸었다.
매캐한 모래가 바람에 섞여 흩날리고, 피부 위로 저릿한 뇌전의 잔향이 흐르며 뺨을 찔렀다.
6사도 아르마스 폰 아나테마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밤과 낮을 뒤바꾸는 번개의 광채마저 새벽하늘 너머로 흩어진 뒤.
밤새 벌어진 격전의 여파만이 남아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드러낼 뿐.
그런 위성도시 폐허 거리를, 우레카 나이드리는 홀로 걷고 있었다.
저벅.
발아래서 그녀를 충실하게 보필하던 표범도, 그녀를 따라 움직이던 사도들도 어디에도 없다.
길쭉한 석장을 지팡이 삼아 땅을 짚으면서, 화려한 예복을 바람에 나풀대면서 걸음을 옮기는 모습.
하지만 시종일관 날카로운 냉소로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은, 지금 이 순간 모든 감정을 지운듯이 무표정했다.
마치 내면에서 들끓는 감정을 억지로 가라앉힌 것처럼.
탁!
폐허 한복판을 걷던 신녀의 걸음이 멈춰선 것은, 반으로 쪼개진 너른 언덕 앞.
거대한 산이 벼락을 맞고 불타 스러진 것처럼, 그 흔적만이 남은 봉우리 끝에.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
헝클어진 머리칼. 먼지 쌓인 코트. 찢어지고 피멍이 든 옷자락.
반쯤 타들어간 연초를 물고 눈을 감은 채 주저앉은 너저분한 모습.
하지만, 그의 뒤에 고개를 처박고 고꾸라진 사도의 시체가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명한다.
쿠우웅!!
산양과 인간의 형상이 기괴하게 뒤섞인 시체 위로는, 수 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낙뢰가 꽂혀서 번뜩이며.
마치 사도의 시체 위로 묘비를 세운 것처럼 강렬한 뇌광을 흩뿌리고 있을 뿐.
빠직, 빠지지지직!!!!
아나테마의 심신을 불태운 뒤에도, 그 몸에 내려앉은 번개는 사라지는 일 없이 계속해서 타오른다.
사도의 시체 위에 자신의 마법을 보란듯이 때려박아 꽂아 넣고 전시해놓은 무도하기 그지없는 광경.
“…….”
교단 최고위 사도를 단신으로 토벌했음에도 그 몸에는 별다른 중상 하나 없고.
소도시 하나를 뿌리채 뽑아 불태워버렸음에도 전신을 타고 흐르는 마력과 의념에는 흔들림조차 없다.
분명, 이것이 교단 내부에서도 최고위 위험 인자로서 낙인찍힌 낙뢰술사.
8레벨의 대마법사들 중에서도, 가장 승천에 도전할 자격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괴물의 힘이겠지.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신녀조차도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고 불쾌한 기색으로 표정을 찌푸릴 뿐.
“일어나라, 불신자.”
탁!
신녀가 가볍게 석장을 두들기는 것과 동시에, 레녹이 천천히 눈을 떴다.
“불신자라…….”
멍하니 연기를 내뿜으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레녹이 쓰게 웃었다.
“이번 대의 신녀는 꽤나 입이 거친 모양이군.”
“전대 신녀와 알고 지냈다고 텃세라도 부리고 싶은 거야?”
우레카가 날카롭게 웃으며 칼칼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분의 사도를 죽여놓고 형편좋게 잠이 쏟아지는 모양이군. 난 다른 신녀들처럼 물러터진 성격이 아니야.”
“…….”
“하지만 아나테마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알면서도, 그를 서슴없이 죽여 버린 살성은 인정해 주지.”
레녹의 등 뒤에 쓰러진 사도의 시체를 바라보던 신녀가 비웃듯이 물었다.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친 걸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상관없다. 프로젝트가 실패할 당시 아나테마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중앙도시에서 추방당한 아나테마가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어렵다. 애초에 본인에게 들을 말이 많지는 않았겠지. 오히려 따지자면…….”
뒤에 쓰러진 시체를 가리킨 레녹이 웃었다.
“아나테마의 가치는 이 시체에 있지 않겠나?”
“…….”
올리비에라가 아나테마 본인이 아닌 그의 신체 일부를 원한 이유.
신녀가 굳이 아나테마의 시체가 위치한 이 장소를 찾아온 이유.
아나테마의 이름이 가지는 가치가 어느쪽에 치중되어 있는지, 레녹은 그의 비밀을 알아낸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상신뢰를 거둔 뒤에도 그 시체에 함부로 손을 대는 일 없이, 이렇게 보란 듯이 그의 시체 위에 벼락의 묘비를 꽂아 전시해둔 것.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신녀를 두고 레녹이 천천히 일어섰다.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일단 걷지. 그러지 않아도 방금 전까지 대화를 하느라 좀 피곤하거든.”
“하핫, 보란 듯이 아나테마의 시체를 걸어두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냐?”
“…….”
“오늘 일만 아니었어도, 이런 식으로 만나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
레녹을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인 우레카가 곧바로 등을 돌렸다.
“따라와라. 그분을 영접하기 위한 성역을 선포할 예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