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64
그게 왜 거기서?
보통 가방 속에 아이돌 앨범을 들고 다니나? 그것도 신인 아이돌인 테오라의 데뷔 앨범을?
“그게 왜 거기서…?”
아주머니는 내 휘둥그레진 내 눈을 보시더니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우리 딸이 테오라 팬 됐다고 앨범 사다 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더 눈여겨봤어요. 이 앨범 주인이면 꼭 사인받고 싶어서.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확신 못 해서 망설이면서도 용기 내신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착각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아셨을 텐데. 그래도 딸을 위해서 잠깐의 창피를 감수하신 거구나.
“이리 주세요.”
우리 팬에게 주는 사인이라 기꺼이 네임펜을 받아들였다. 멤버들 사인도 전부 들어갔다면 좋았을걸. 혹시 지온이 안 보이나 둘러봤지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따님 이름이…?”
“우리 딸 이름은….”
사인 아래에 짧게 ‘팬 되어줘서 고마워요! 힘낼게요!’하고 덧붙였다.
진짜 우리 팬이 존재하고 있구나.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는 거구나. 우리 앨범도 사고 응원도 해주는 팬이.
“마스크 안 벗어도 되니까 사진 하나 찍어도 될까요? 나랑 같이 찍어 주진 않아도 되고요.”
눈만 나온 사진이 쓸데가 있나?
“딸이 안 믿을 거 같아서요.”
눈밖에 안 보이는데 증거로 내밀 수 있을까?
나는 괜찮다고 대답부터 했다. 그다음 주섬주섬 휴대폰 카메라를 켜는 아주머니 앞에서 마스크를 턱까지 끌어내렸다.
찰칵찰칵찰칵?
제대로 찍히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셨는지 연속촬영으로 사진을 찍고 나서야 휴대폰을 거두셨다.
“고마워요! 얼굴도 예쁜데 마음씨까지 예쁘네요. 우리 딸이 날 닮아서 사람 보는 눈이 있네요!”
아주머니는 안면에 화사한 미소를 짓고 사라지셨다. 라면 코너를 배회하시던 건 나 때문이었구나.
카트를 끌고 지온과 매니저 형을 찾으려고 손에 힘을 주는데 카트가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
인간 장벽이 어느새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테오라 함이원이죠? 저도 사인 받을 수 있을까요?”
“같이 사진 찍어주실 수 있나요?”
“저도요!”
“저도….”
마스크를 급하게 올렸지만 뒤늦은 대처였다.
이런. 마스크를 내릴 때 방심해버렸다. 보는 눈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다들 어디 숨어계셨지…? 진열대 너머에서 매의 눈으로 보고 계셨던가?
연예인이라고 하니 우선 사인 요청을 하시는 듯했다. 내가 누군지 아는 분은 소수에 불과했다.
사인이나 사진 촬영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몇 명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저 멀리서부터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오는 분들도 있는데.
매니저 형이랑 지온에게 들키면 보나 마나 혼나겠지. 곤란한 표정으로 망설이자 한 분이 앞으로 나서셨다.
“우르르 몰려오니까 학생이 당황하잖소. 줄을 서야지!”
아니, 그게 아닌데요. 아저씨….
어쩐지 하늘이 보고 싶어졌지만 삭막한 천장으로 막혀있었다. 저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참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종이와 펜을 받아들였다.
“통행에 방해되지 않게 이쪽으로 와주세요. 한 분씩이요.”
세 명의 사인을 끝냈을 때, 저 멀리에서 매니저 형으로 보이는 커다란 체격의 남자가 달려왔다. 그 뒤를 유유자적 카트를 끌고 오는 지온이 따랐다.
“이원아. 어쩌다가 이런 사달이?”
“…….”
손으로는 기계적으로 사인을 남기면서 시선을 피했다.
나란히 줄 서 있는 손님들을 보고 매니저 형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사고뭉치로 찍힌 것 같았다. 고작 10분 내외의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고 사고를 쳐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이 몰린 탓에 마트 직원까지 동원되었다.
“죄송하지만 사인은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매니저 형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나도 옆에서 허리를 숙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손님들은 순순히 물러섰다.
매니저 형은 나와 카트를 챙겨서 계산대로 향했다. 나는 이목을 끈 죄로 먼저 차로 보내졌다.
카트를 끌고 차로 온 매니저 형은 트렁크에 장 본 물건들을 실었다. 더운 날씨도 아닌데 땀이 뚝뚝 흘리면서. 양심에 찔려서 매니저 형을 도왔다.
“어쩌다 들켰어? 마스크도 썼잖아?”
옆자리에 앉은 지온은 어떤 이유로 그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궁금해했다. 자기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왜 나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냐고.
“마스크 쓴 상태로도 어떤 분이 알아보셔서 사인해 드리다가 따님한테 줄 인증사진을….”
“이원, too naive.”
“순진하다고? 아니야. 그 아주머니가 우리 앨범도 내미셨단 말이야.”
“진짜? 테오라 앨범을?”
좌석에 눕다시피 기대있던 지온이 상체를 일으켰다.
“너도 신기하지? 따님이 우리 앨범 사다 달라고 했대. 근데 마트에서 딱 마주친 거야. 절묘하게.”
다시 떠올려도 기막힌 우연이다.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일어날 수 있는 우연.
“인증 사진을 찍어 주느라 마스크를 내렸군. 내가 붙어있었어야 했는데.”
운전하고 있던 매니저 형과 백미러로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움찔해버렸다.
“죄송합니다.”
“문제 안 생겨서 다행이다. 만약 무슨 사고라도 벌어졌으면, 어떤 식으로든 알려졌을 테니까.”
뉴스 같은 매체가 아니라 입소문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연예인을 쉽게 입에 담으니까.
TV에 출연하는 직업을 가진 방송인을 사람들은 은연중에 ‘공인’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공인’은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지만, 이젠 그 범위를 넓혀서 연예인들도 포함하는 듯했다.
공직자라는 의미의 ‘공인’이 아니라 공공연히 알려진 사람이라는 정의가 더 적합했다.
그러니까 테오라도 공인인 셈. 내 잘못으로 말썽이 커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공인이라는 이유로 대중의 욕받이가 될 수 있었다.
“조심할게요. 미안해. 지온.”
지온은 마트에서 장보기를 기대한 것 같았는데.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내가 빼앗아 버렸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친해지자는 의미로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한 건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을까?
“뭘 이런 걸로. 다음에 조심해. 그리고 나라도 그래. 우리 앨범 들고 있는 팬 만나면.”
“지온.”
운전석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지온의 이름을 불렀다. 자중하라는 경고였다.
“팬한테는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매니저 형.”
“예의라고?”
“초록이 가르쳤어요. 팬 만나면 최대한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주라고. 해줄 수 있는 건 사인이든 사진이든 뭐든 다 해주라고. 그게 예의라고.”
매니저 형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리시나? 그럴 만도 했다. 이걸 어디서부터 다시 설명해야 할지 막막할 테니까.
개성 강한 테오라 멤버들을 담당하는 매니저 형의 고충이 느껴졌다.
“그것도 상황 봐서 해야 하는 거다. 다음 스케줄이 있을 수도 있고, 안전 문제도 있으니까.”
“OK. 뇌에 적어뒀습니다.”
운전 중이라서 뒤를 돌아보지 못했지만, 매니저 형은 뒤로 돌아서 지온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진짜 이해하긴 했는지 비언어적으로 판단하려고.
“명심해라. 이원, 지온 둘 다.”
“네.”
“Yes, sir.”
매니저 형의 눈에 나나 지온이나 거기서 거기려나? 아니 내가 더 요주의 인물이겠지. 한동안은 얌전히 지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고 칠 의도는 하나도 없었다. 잠시 방심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다음엔 이런 일은 없을 거다.
…매니저 형이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원. 며칠 전에 어디 갔었어?”
데뷔 전부터 집에 들르는 경우만 제외하면, 숙소와 연습실, 작업실에서만 왔다 갔다 하며 살았다.
그러니 한 번의 예외가 궁금했을 수 있다. 별로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친한 형 기일이라서.”
이야기 못 할 이유도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테오라 멤버들이라면. 이들은 내 속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기일?”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보니 기일이라는 단어의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런 데서 외국 생활이 길었다는 티가 나는구나.
“해마다 돌아오는, 누군가가 죽은 날. Anniversary of one’s death.”
“어…. Sorry. 안 물을게.”
“아니. 우리 멤버들한테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 누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현오 형이 떠오를 때면 아직도 가슴이 저리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반가울 만큼 소중한 추억. 다른 누군가와 형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한테는 가족 같은 형이었어. 아이돌이 될 생각을 품게 해준 사람이기도 하고.”
“너랑 테오라로 데뷔한 건 그 형 덕분? 감사해야겠는걸.”
나지막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온의 말에는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현오 형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이돌 함이원은 없었을 테니까.
“맞아. 현오 형 아니면 아마, 음, 재즈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지 않았을까?”
특별한 변곡점이 없다면 내게 가장 익숙한 일을 하며 살았을 터다. 아무런 위기도 없이 평온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 대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도, 진정한 보람과 행복도 느낄 수 없었겠지.
“나한테는 은인인 형이야.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렸지.”
“그런 인연은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하지. 운명.”
운명.
지온이 꺼낸 한 단어가 가슴에 확 박혔다. 현오 형과 나의 인연을 이 단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초월적인 인과. 운명은 나에게 그런 거였다.
운명의 힘은 우리를 만나게 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했고, 죽음으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죽음 후에도 우리는 목소리로 연결되었다. 운명은 죽음마저 뛰어넘을 정도로 강했다.
“운명…. 정말 운명이었나 봐.”
“이원. 너에게 운명 같은 형이라면 우리와도 인연이었을지도.”
현오 형이 우리 멤버들과 만났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현오 형의 환한 미소가 눈앞에 저절로 그려졌다.
같은 업계의 후배를 만났다면. 그리고 그게 나와 같은 아이돌 그룹의 멤버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비록 망돌이었지만, 현오 형은 이 세계를 사랑해 마지아니했으니.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지온, 멘트가 보통이 아니야.”
운명이라느니. 인연이라느니. 낯간지러운 멘트를 낯간지럽지 않게 했다. 태연한 그 태도 때문에 담백해서 진심처럼 느껴졌다.
웬만한 사람은 자기 말에 공감해주는 지온에게 감격해서 홀라당 넘어갔을 거다.
“몸에 래퍼의 스피릿이 배어 있으니까.”
랩 가사를 써서 그럴까. 시적인 표현을 어색하지 않게 실생활에서 녹여내는 건.
“팬들은 좋아하시겠지? 나한테도 가르쳐줘.”
“Oh. 작곡뿐만 아니라 작사도 손대겠다고? 욕심쟁이. 하긴, 우리 타이틀도 이원이 적어준 글이 기둥이 되긴 했다.”
득실을 따지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던 지온은 흔쾌히 수락했다. 내가 ‘래퍼의 스피릿’을 배우면 이득이라고 결론이 난 걸까? 어쨌거나 내게는 이로운 일이었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온의 ‘래퍼의 스피릿’이 밴 멘트들이 팬들에게 향하게 됐을 때는 ‘플러팅’이 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