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65
165. 내미지상(內媚之相)의 절세미녀
“무위도장께선 고수를 거느리고 선두에 서는 것이 좋겠소. 심목풍을 따라 온 적들을 상대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형과 두형은…”
“…”
“손선배를 대신해서 제이대(第二隊)의 고수를 거느려 심목풍을 견제하며 때에 따라서는 파산신
뢰를 사용해도 좋소. 나머지 일은 상황에 따라 내가 적절하게 처리하겠소.”
“그게 좋겠소.”
무위도장과 중주이고가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자 우문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노선배에게 파산신뢰를 드릴 테니 받으시오.”
그는 품 속에서 파산신뢰를 꺼내 손불사에게 주었다. 그것은 오리알 정도의 크기에 새빨간 색깔
의 물체였다.
‘저것이 그토록 큰 위력이 있단 말인가? 겉으로 보아서는 두부나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파산신뢰가 너무도 작은 것에 백리빙은 이런 생각을 했다. 손불사는 그것을 받아 들고 손에 굴
리며 한동안 들여다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이 산을 폭파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니…”
우문한도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노선배께서 그것을 가볍게 쓰지 않기를 바라오.”
“심목풍과 함께 죽을 수 없는 경우엔 이 폭약을 쓰지 않겠소. 아직 나도 헛되이 죽고 싶지 않으
니까…”
우문한도는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이 폭약은 무거운 충격만 주면 터집니다. 이것을 심목풍에게 던져 폭파시키면 가장 좋겠지요.
그렇지 못할 경우엔 내공을 이용해서 땅에 던지면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것이 있는데…
”
“…”
“이 폭약의 위력이 미치는 넓이는 고작 일 장 이내요. 일 장 밖에서는 부상을 입는 정도에 그치
니 기회를 잘 포착하시오.”
“알겠소.”
“내일 오전에 심목풍이 이곳에 도착하면 그는 악소채와 옥소랑군에게 먼저 도전을 받을 것이오.”
백리빙이 끼어 들었다.
“소영오빠가 이른 말이 있어요.”
“무엇이오?”
“악언니는 심목풍의 적수가 못 되니 소녀에게 최대한 그들의 싸움을 말리도록 하라고 그랬어요.”
우문한도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은 내가 적당히 할 테니 낭자는 걱정하지 마시오. 특히 내일 백리낭자는 절대로 함부로 움
직이지 마시오. 소릴 지르거나 해서 우리의 계획이 그르치면 큰일이니까요.”
“좋아요. 약속하겠어요.”
우문한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대협은 요절할 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분이 죽었단 말을 듣고 반신반의 했었소. 그러
나 그 엄청난 불더미 속에서 살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했었소.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이
렇게 살아 왔으니 이건 기적이오. 여러분들도 이제 적이 마음이 놓일 테니 운기조식을 하는 것이
좋겠소. 내일은 한바탕의 치열한 격전이 있을 테니…”
우문한도는 백리빙에게 얼굴을 돌리며 다시 말했다.
“나는 이미 낭자를 위해 숙소를 마련했소. 악낭자의 곁방이며 중간엔 한 겹의 휘장이 막혔을 뿐
이오. 낭자는 안심하고 운공을 하시오.”
네.”
“그러나 한 마디의 말도 해서는 안 되오. 악낭자는 매우 귀가 밝아 낭 자의 한 마디로 곧 정체
를 밝혀낼 수 있으니까.”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녀는 몹시 배가 고파요. 무엇이든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낭자는 방에 가 계시오. 그럼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다시 변장을 하는 것이
좋겠소.”
백리빙은 다시 얼굴에 변장을 하기 시작했다. 약물을 바르고 수염을 달자 노인으로 변했다.
우문한도의 뒤를 따라 나선 백리빙은 꾸불꾸불한 통로를 얼마쯤 지나서 하나의 작은 방에 당도
했다. 백리빙이 들어서자 문은 소리없이 닫혔다.
방에는 나무침상이 한 개 준비되어 있었다. 침상 위에는 흰 이불과 요가 깔려 있었다.
‘이곳은 영당 뒤의 가장 좋은 방인 것 같구나. 필경 귀인을 맞으려고 준비한 방이다.’
백리빙은 침상으로 가서 걸터앉았다. 그러자 소복한 소녀가 음식상을 들고 들어왔다.
배도 고팠지만 음식 맛도 좋았다. 식사를 끝낸 백리빙은 침상에 앉아 운기를 조식하려고 했다.
그녀가 막 운기조식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악낭자!”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들려왔다. 그것이 옥소랑군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백리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문한도가 나를 이곳으로 넣은 것은 저 두 사람와 얘기를 엿듣도록 한 것이었구나.’
백리빙이 귀를 기울이는데 악소채의 음성이 들려왔다.
“장대협이세요?”
옥소랑군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렇소. 내일 심목풍과의 결전에서 우리는 어쩌면 모두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오늘은 우리가
세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밤이오.”
옥소랑군의 무거운 한숨이 들리고 다시 말이 이어졌다.
“나는 악낭자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어떨는지요?”
“들어오세요.”
옥소랑군이 들어가는 기척이 들렸다.
‘악소채가 늘 거느리고 있는 두 시녀는 지금 방에 없나?’
백리빙이 궁금해 하는데 그녀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 옥소랑군이 묻는 소리가 들려
왔다.
“두 시녀는…?”
“바로 옆방에 있어요.”
“아, 그렇군요. 그 시녀들은 낭자를 매우 존경하고 있으니 내일 당신이 만일 심목풍의 손에 죽는
다면 그녀들도 따라서 죽겠지요?”
“그녀들은 몇 해 동안 나를 따라 다니며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으니 말릴 수
없지만, 장대협은…”
“오늘 영당 앞에서 낭자에게 이미 결심을 표명하였소. 이제 더 얘기할 필요는 없잖소.”
“나는 장대협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아 어떻게 갚을 길이 없군요.”
땅이 꺼질 듯한 악소채의 한숨에 뒤이어 옥소랑군이 말했다.
“무슨 보답이 있겠소? 이미 우리의 죽음이 임박했는데…”
“죽을 줄 알면서도 왜 이 일에 뛰어 들려고 하지요?”
“그것이 바로 애정이란 것이오.”
“허지만… 나는 당신에게 늘 무정하게 대했는데요?”
“나는 이미 낭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소.”
“장대협은 장씨 가문에서 대를 이어야 할 독자예요.”
“낭자가 죽으면 내가 살 수 없으니 대가 끊어진들 어떻겠소?”
“내가 무엇이기에… 나의 어떤 점이 좋으세요?”
옥소랑군이 서글프게 웃었다.
“내가 만일 낭자의 좋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면 이토록 짝사랑으로 애태우진 않겠소.”
악소채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장대협, 나의 두 시녀는 어때요?”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나무랄 데 없는 여인들이오.”
“소녀들은 아직 꽃도 피워보지 않았으니 죽이기에 아까와요.”
옥소랑군이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낭자는 그녀들에게 아무 일이나 맡겨 어디로 보내는 것이 좋겠소.”
“이미 내일의 일을 알고 있으니 떠나지 않을 거예요.”
악소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매우 신중한 어조로 다시 이었다.
“단지 장대협께서 그녀들을 데리고 멀리 떠나는 길밖에 없어요.”
“내가 그녀들을 데리고…?”
“그래요 그 길만이 그녀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어요.”
옥소랑군은 화난 어조로 말했다.
“알겠소이다. 나더러 그녀들을 맡으라는 것을 보니 낭자는 정말 내 진심을 모르는구려.”
“그게 아녜요. 장대협이 나에게 주는 정은 마음 깊이 새겨 두고 있어요. 다만 우리가 늦게 만난
것을 탓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내 얘길 마저 들으세요. 비록 나는 소영과 명분으로 얽히진 않았어요. 그러나 어머니의 유언을
거역할 수는 없어요. 그러므로 나는 소영을 남편으로 생각하니 장대협의 정의는 내세에나 보답할
수밖에 없어요.”
“소영은 악낭자를 두고서 또 백리낭자를 거느렸는데 낭자는 어째서 그에게 애정을 기울이시오?”
다시 악소채의 음성이 들렸다.
“소영은 어머니가 유서에 결혼을 허락한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나를 아내로 생각지도 않
아요.”
“그럼 무엇으로 생각합니까?”
“누나나 선배로 생각해요.”
“만일 소영이 낭자를 누나로 생각하고 우리가 사귀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나는 온 정성과
힘을 다해 그를 도와 주겠소.”
옥소랑군은 문득 소영이 죽었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이미 죽었군요.”
“그래요. 그는 이미 죽었어요. 그러니 나도 이제 따라서 죽어야 해요.”
악소채가 비장한 어조로 말하자 옥소랑군이 애끓는 탄식을 했다.
“낭자는… 소영의 복수를 해야 하오.”
“그래요. 나는 소영의 원수를 갚으려는 거예요.”
“나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소.”
“무슨 생각이에요?”
“우린 무공면에서 심목풍의 적수가 못 되오. 그러니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결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소.”
“물론이에요. 나는 남편의 복수를 하려는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무엇 때문에 목숨까지 걸고…”
옥소랑군이 허탈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허허, 낭자가 심목풍과 싸우다 죽는다 해도 소영의 원수를 갚은 것은 아니잖소?”
“나는 원수를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단념하지 않겠어요.”
“만일 우리 둘이 힘을 합하면 심목풍을 이길 가망이 있잖겠소?”
악소채가 잔잔하게 웃었다.
“이제보니 장대협께선 믿는 것이 있었군.”
“재수만 좋다면… 나는 고모님에게 영단과 무공을 얻은 적이 있소. 그녀는 자기 필생의 지혜와
노력을 기울인 결정이라고 했소. 나는 그 무공으로 심목풍과 대결할 생각이오.”
“그러니까 당신은 약간은 자신은 있는 것이군요?”
옥소랑군은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별안간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
었다.
“만일 우리가 이긴다면 그것으로 소영의 원수를 갚는 것이지요?”
“물론이에요.”
“소영은 심목풍의 손에 죽었소. 우리가 그 원수를 갚는다면 그도 지하에서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오. 원수를 갚아준 뒤에 우리는 그의 무덤을 만들고 삼년상을 치뤄준 뒤…”
갑자기 옥소랑군의 말을 끊으며 악소채가 괴로운 듯 소리쳤다.
“장대협!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나에게 좀 생각할 여유를 주세요. 너무 머리가 무거워서…”
“좋소. 그럼 나는 이만 가겠으니 낭자께선 신중하게 생각해 보시오.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소.”
“네. 안녕히 가세요. 멀리 나가지 않겠어요.”
그러나 옥소랑군이 악소채의 방에서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리빙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악소채가 옥소랑군이 제시한 것을 응낙하면, 소영이 멀쩡히 살아 있으니 필경 큰 혼란이
생기겠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악소채에게 소영이 살았다는 것을 알려야겠다.’
백리빙은 이런 생각을 했으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악소채에 대한 질투심이 부글
부글 끓어 오르기도 했다.
‘그냥 놔둘까? 그럼 악소채는 옥소랑군에게 승낙할 것이고 소영은 자연 나에게로… 아니야. 그
럴 수는 없어. 내가 왜 이토록 야비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무거운 머리를 움켜 쥐고 고민하던 백리빙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알려주자. 그녀에게 소영이 살았다는 것을 어서 알려주자.’
백리빙은 문 밖으로 걸어 나가려 하다가 다시 멈췄다. 소영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불길
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 때였다. 문자락이 펄럭 흔들리더니 옥소랑군의 성난 얼굴이 나타났다. 옥소랑군을 본 백리빙
은 얼른 침상으로 올라가 앉았다. 옥소랑군이 침상 앞으로 걸어오며 격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모두 엿들었지요?”
‘내가 만일 입을 열면 내가 여자라는 것을 쉽게 알아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백리빙은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키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옥소랑군은 미간
을 잔뜩 찌푸리더니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벙어리요?”
백리빙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옥소랑군이 차가운 미소를 띠며 다시 물었다.
“대개의 경우, 벙어리는 귀도 안 들리는데 당신의 청각은 어떻소?”
백리빙은 하마터면 말이 나올 뻔한 것을 급히 삼키며 머리를 끄덕였다.
“내 말소리는 매우 낮은데 어찌 당신은 그리 똑똑히 알아 듣소.”
백리빙은 속으로 찔끔했으나 머리를 흔들며 잘 알아 듣지 못한 척했다. 그러나 옥소랑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흥, 당신은 잘 알아 듣다가 말다가 하니 분명 벙어리 흉내를 내고 있군.”
백리빙은 매우 난처해졌다.
‘만일 내가 계속 이대로 있다간 옥소랑군이 점점 의심만 커가게 될 것이다. 수를 쓰자.’
이렇게 생각한 백리빙은 두 손을 내두르며 어서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옥소랑군이 코웃
음을 치더니 오른손으로 백리빙의 팔목을 잡으려고 덤벼들었다.
백리빙은 급히 다리를 굽혀 옥소랑군의 손을 피하며 왼손으로 벽을 탁, 쳤다. 악소채의 주의를
끌어 이 위기를 모면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리빙이 가볍게 자기를 피하는 것을 본 옥소랑군은 흠칫 놀랐다.
“이제 보니 당신은 정체를 숨기려고 수작을 부렸군.”
말을 뱉으며 두 손으로 백리빙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만일 옥소랑군이 전력으로 공격했다면 백
리빙은 매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이는 것보다 백리빙의 정체가 궁금했으므로
가벼운 공격을 한 것이다.
백리빙이 역시 가벼운 동작으로 피하는 것을 본 옥소랑군은 계속 십여 초나 공격을 퍼부었으나
백리빙을 어찌할 수 없었다.
“당신의 솜씨를 보니 분명 무링의 일류 고수인데 왜 반격하지 않소?”
백리빙은 악소채가 뛰어 들기를 기다리며 반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악소채가 나타날 기미
가 전혀 보이지 않자, 반격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으나 옥소랑군의 가벼운 공격 초식이 매우
예리한 것을 보고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백리빙이 대답을 않자 옥소랑군은 드디어 공격 수법을 바꾸었다.
“귀하, 조심하시오? 나는 열 초 이내에 당신의 생명을 빼앗아 버리겠소.”
백리빙은 이미 상대방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옥소랑군의 강한 장풍을 몸을 날려 피해 냈다.
그러나 옥소랑군은 잠시도 여유도 주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백리빙은 삼 초의 공격은 간신히 피해 낼 수 있었으나 사 초의 공격은 피할 틈이 없었다.
‘부딪치자!’
그녀는 오른손으로 옥소랑군의 장풍을 막았다.
펑!
두 장풍이 부딪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한 걸음씩 물러났다.
상대방의 장력이 의외로 센 데에 놀란 옥소랑군은,
“흥, 당신은 나를 얕보는 것 같군요.”
하며 다시 공격을 하려고 했다. 이 때였다.
“장대협, 잠깐!”
어느새 들어 왔는지 악소채가 방안에 서 있었다.
옥소랑군은 악소채를 보자 금방 얼굴에서 살기를 지우고 미소를 띠며 뒤로 물러났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요?”
“이 사람은 우리의 말을 엿들었소. 게다가 벙어리 흉내를 내는 것으로 보아 분명 심목풍이 보낸
첩자 같소.”
이 말에 가장 놀란 것은 백리빙이었다.
‘이 사람은 무공만 높은 줄 알았더니 제법 경계심도 강하구나. 나를 심목풍의 첩자로 알고 악소
채까지 나는…’
백리빙은 두려움을 느꼈으나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백리빙의 얼굴을 뚫어질듯 쳐다보던 악소채가 머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무위도장과 우문한도는 모두 지모가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심목풍의
첩자가 들어오게 놔둘 리도 없고 이곳에 묵게 할 리도 없어요.”
백리빙은 악소채의 말에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옥소랑군은 악소채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그 소코 영감과 우문한도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알겠어요. 그러나 내가 보기엔 저 분은 절대로 심목풍의 첩자기 아니예요.”
“설혹 첩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토록 추하고 기분 나쁜 영감을 낭자곁에 묵게 한 것은 무슨 이
유인지 모르겠소. 나는 가서 그 영감들에게 따져 봐야겠소.”
“그럴 필요 없어요. 저 분도 소영의 조상객인데… 찾아가서 따진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에요.”
그러자 옥소랑군이 풀죽은 어조로 말했다.
“좋소. 낭자의 체면을 보아 그 영감들을 한 번 용서해 주겠소.”
“그래요 그냥 들어가서 주무세요. 우린 내일 한바탕의 격전을 치러야 할 테니 피로하면 안 돼
요.”
“낭자의 말이 맞소. 내일 심목풍과 싸워야 되니 낭자도 어서 푹 주무시오. 그럼…”
옥소랑군은 가볍게 목례를 하더니 밖으로 걸어나갔다.
옥소랑군이 밖으로 나가자 악소채도 뒤따라 나가려고 했다.
‘결국 이 틈을 타서 알려 줘야겠다.’
백리빙은 이렇게 생각하고 몸을 날려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백리빙이 앞을 막아서자 악소채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 손을 쓸 자세를 취했다. 백리빙은 급히
몸을 굽혀 글씨를 썼다.
‘언니에게 긴밀히 할 말이 있어요. 옥소랑군이 들어선 절대 안 됩니다.’
이것을 본 악소채의 얼굴에 긴장한 빛이 스치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동생 백리빙이에요.”
악소채는 흠칫 놀라며 백리빙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다시 무엇인가 생각한 듯,
“우리 조금 있다가 만나요.”
나직하게 말하더니 총총히 밖으로 사라졌다.
백리빙은 악소채의 두 뺨이 약간 붉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악소채에게 있어서 내가 나타난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침착하
고 신중하구나.’
백리빙은 자꾸 격동하는 마음을 안정시키기에 애를 먹고 있었다.
‘소영의 소식을 그녀에게 알리자!’
‘안 돼! 알리지 않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다.’
‘알려야 된다.’
‘안 된다.’
마음의 갈등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악소채가 조용히 들어 왔다. 그녀의 얼굴은 범할
수 없으리 만큼 엄숙해져 있었다.
악소채는 백리빙을 다시 한 차례 훑어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의 가면을 벗어봐요.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옥소랑군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어떡하지요?”
“나에게 이미 준비가 있으니 걱정 안해도 좋아요.”
백리빙은 머리를 끄덕였다. 재빨리 얼굴의 약물을 닦아내고 수염을 뜯어냈다.
악소채는 백리빙이 얼굴에 발랐던 약물을 닦아 내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자 가볍게 탄
식을 하며 말했다.
“과연 동생이로군!”
그녀는 팔을 벌려 백리빙을 자기의 품 속에 끌어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이 많았지?”
백리빙은 그녀가 맨 먼저 소영의 소식을 물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자기를 위로해주자 가슴이
뭉클했다.
“오빠의 기지(機智)로 우리는 심목풍 화진(火陣)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어요.”
이 말을 듣자 악소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동생은?”
백리빙이 대답했다.
“그는 심목풍의 영당을 섬멸하려는 음모를 알아차리고, 혼자서 심목풍이 이끄는 부하들의 실력
을 알아보러 갔어요.”
악소채는 예쁜 눈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어째서 암암리에 나에게 한마디라도 해주지 않았을까? 내가 진작 마음 놓을 수 있게끔 말이야.”
백리빙은 곧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그 불길에 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심목풍이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
어요.”
“뭣 때문에?”
“심목풍이 오빠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반드시 다른 조치를 할 것이므로 아예 그가 모르
고 마음 놓고 있을 때 나타나서 심목풍이 손을 쓸 수 없도록 하려는 거예요.”
악소채가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소동생은 심목풍과 정면 대결을 하려는 거야?”
“오빠의 입으로 직접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 같아요.”
악소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그는 늘 사람의 생명을 아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기의 생명은 조금도 아끼려 하
지 않는군.”
악소채는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소영과 빙아는 어떻게 그 무서운 불길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지? 정말 놀라운 일이
야. 그 때의 얘기를 좀 들려주렴.”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때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악소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정직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 법이라지만 기적같은 일을 용케도 구나.”
백리빙이 말했다.
“언니께서 여전히 그가 세상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못 들은 것처럼 해 주세요. 그는 저에게 이
사실을 누설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 내 얘기 안하지!”
그녀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건 그렇고, 소동생은 내가 심목풍과 대결하려는 걸 알고 있는지?”
“그야 물론 알고 있지요. 언니가 영당에서 심목풍과 그런 약속을 할 때 우리는 그 자리에 있었
는 걸요.”
악소채는 그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자기가 소영의 아내의 신분으로 나타났던 사실을 생각하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아! 소동생도 나빠.”
백리빙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나무랄 수만도 없어요. 그가 만약 언니를 아는 체했다가는 모든 비밀이 탄로나고 말았을
테니까요…”
“그런데 나와 심목풍의 대결에 관해서 소제는 어떻게 생각하지?”
백리빙이 대답했다.
“그는 내일 오전 중에 영당으로 돌아온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심목풍과 생사를 건 싸움을 못하
도록 말릴 생각이에요. 그런데 이 동생이 언니를 위해 한 가지 걱정스러운 일이 있어요.”
악소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옥소랑군의 상사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백리빙은 악소채의 백옥같이 희고 윤기 있는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무슨 방법인데?”
백리빙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말씀드려도 화내지는 마세요.”
악소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해봐요.”
백리빙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만약 언니가 소오빠와 빨리 결혼해 버린다면 옥소랑군은 스스로 상사의 정을 단념할 거예요.”
악소채도 정색을 하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이미 빙아가 그런 방법을 말할 것이라고 짐작했었는데 과연 내 예측이 틀리지 않았군.”
백리빙의 서늘한 눈동자는 진실을 담고 다그쳤다.
“왜 그러세요? 이 동생이 얘기한 방법이 틀리기라도 했어요?”
악소채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시 나무 침상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나무 침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빙동생도 이리와서 앉아요. 내가 할 말이 있으니…”
악소채는 손을 내밀어 백리빙의 손목을 잡고 옆에 앉혔다.
“내가 영당에서 한 말은 모두 들었겠지?”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내 모친의 유언이었어. 나는 그것을 거역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아서 그와 이러한 명분으로 함께 오래 있을 수가 없었어.”
“왜 그러세요?”
악소채의 단아한 얼굴에 처연한 빛이 떠올랐다.
“나의 모친은 일찌기 금궁의 열쇠를 보전하기 위해서 멀리 망명을 했었지. 그렇지만 워낙 추격
해 오는 자가 많아서 그들과 싸우시다가 부상을 당했지. 우연히 소제의 부모께서 도와주셔서 당
분간은 소가에 머물러 있게 되었지만 끝네는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어. 모친께
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서를 남기셨는데 소영을 내게 맡긴다는 내용이었지.”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고인의 유언이라면 명분이 뚜렷한 것인데 왜 사양하십니까?”
“그 때 소제는 삼음절맥의 증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결코 이십 세를 넘길 수 없어 보였지. 그
래서 어떤 현숙한 아내를 맞이하더라도 장차 과부로 남겨야 할 운명이었던 거야. 모친께서 그들
에게 은혜를 갚으라는 뜻에서 했던 유언이지. 그리고…”
백리빙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언니, 왜 말을 하다가 중단하세요?”
악소채는 수줍은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내가 그와 결혼해서 소가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주고, 소영이 죽은 다음에는 그 아이와 소영
의 부모를 어디든 안전한 곳에 모신 후 비로소. 모친의 복수를 해달라고 하셨어.”
악소채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유언을 지키지 못했어. 그 뿐더러 사정이 달라져서 소동생이 기연(奇緣)을
얻어 일신에 절세의 무공을 익히게 되었으니 모친의 유언은 자연적으로 그 실현을 볼 수가 없게
돼 버렸지.”
백리빙이 의아하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비록 사정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언니에게 유리하게 된 것이 아니예요? 이제 소오빠의
병도 완치되고 강호를 진동시킬 만한 대협객이 되었으니 두분이 인연을 맺기에 알맞은 시기인 것
같아요.”
악소채는 고개를 저었다.
“내 모친의 원수를 갚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승에 대한 사랑과 의리의 빚이 아직 남아 있으니
내 어찌 마음 놓고…”
“모친 원수를 갚는 일이라면 소오빠께서도 사양할 수 없는 일이에요. 무엇하다면 이 동생이라도
도와 드리겠어요.”
악소채가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내 모친의 원수는 무공이 높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말할 수 없이 기지가 있는 사람이야. 그러므
로 소제가 그 일에 상관한다면 그는 또 한 사람의 강적을 만들어 내는 결과가 돼 버려… 그 뿐더
러 내가 그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해 냈으니 소제가 수고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동생, 내가 이런 일들을 알려주는 뜻이 어디 있는지 알아?”
백리빙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는데요.”
악소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빙아가 소영을 잘 모시기 바래요. 이 언니는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아마 그와 오랫동안 함
께 있을 수는 없을 거야. 이 언니는 모친의 유언대로 마음 속에 그를 남편이라고 새겨두긴 하겠
지만 아내의 구실을 다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러니 동생이 언니를 대신해 주어.”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는 제가 언니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악소채는 백리빙의 복스런 손을 어루만지면서 말을 받았다.
“동생같이 아름답고 총명한 아내라면 그도 부족해 하지 않을 거야.”
“언니는 잘못 알고 있어요. 그는 언니만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어요. 그는 언니를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는 알 수 있어요.”
백리빙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악소채의 손을 힘껏 움켜 쥐면서 분연히 말을 이었다.
“그는 언니에게 대해서 불길 같은 열정을 품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열정을 감히 겉으로 표현하
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열정은 갈수록 더 강렬해졌는지도 몰라요. 그건 결코 이 동생이 대신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악소채는 서글픈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래요. 빙아의 말은 모두 진실인지도 몰라. 하지만 빙아가 말했듯이 그는 나를 사랑한다는 말
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 우리들의 정은 어디까지나 누이와 동생간의 정일 뿐이야…”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그는 감히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을 뿐이에요.”
악소채는 손을 들어 긴 머리채를 매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어.”
“그게 누군데요?”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
백리빙은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천천히 말했다.
“저는 비록 언니를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언니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어요. 언니의
일이 곧 저와 오빠의 일이에요. 오빠가 심목풍을 죽인 다음에 우리는 다시 힘을 합하여 언니의
복수를 해요.”
악소채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흐르
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언니는 동생을 설득시킬 수가 없나봐.”
백리빙이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러나 언니, 오해는 하지 마세요. 이 동생의 뜻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어. 나와 항상 함께 있자는 거지?”
“네, 바로 우리 셋이 같이 있자는 겁니다.”
악소채는 답답하다는 듯 약간 말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 언니는 많은 시비에 얽매어 있어 발길이 닿는 곳마다 반드시 살생이 뒤따르고 있어
요. 그 사실을 동생은 모르지?”
“그런 줄은 몰랐어요.”
악소채는 가볍게 탄식했다.
“동생도 이젠 쉬어요. 무슨 일이든 내일 다시 새롭게 의논하기로 하고…”
악소채는 백리빙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
하룻밤이 쉬 밝았다. 백리빙이 아침까지도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문 밖에서 우문한도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낭자, 일어나셨소?”
백리빙이 대답했다.
“네. 일어났습니다. 우문선생님이세요?”
방문에 내려친 휘장이 걷히면서 우문한도가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엄숙해 보였
다. 그의 수중에는 두 장의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악낭자가 낭자에게 편지 두 통을 남겨 놓았소.”
백리빙은 깜짝 놀랐다.
“악언니는 어떻게 됐어요?”
“이미 떠난 지 오래요.”
“어느 방향으로 갔어요? 빨리 뒤쫓아 가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때가 늦었어요. 악낭자는 이미 두 시간 전에 떠나갔어요.”
백리빙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떻게 하면 좋지요?”
“낭자는 그녀에게 소영의 소식을 알려 주었소?”
“저는 부득불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우문한도가 타이르듯 말했다.
“일이 이쯤 됐으니 낭자께서는 조급하게 굴지 마세요. 이 두 장의 편지는 악낭자가 낭자에게 드
린 것이오. 한 통은 낭자로 하여금 소영에게 전해주도록 한 것이고 한 통은 바로 낭자에게 드린
것이오. 우선 낭자께서 편지를 읽어 보세요. 그런 다음에 다시 생각해 봅시다.”
백리빙은 두 장의 편지를 받아 들었다. 첫 번째의 편지 겉봉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백리빙은 그 편지를 품 속에 간직했다. 그리고 두 번째의 편지가 백리빙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백리빙은 편지를 뜯으면서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장공자는 어떻게 되었어요?”
“옥소랑군 말씀이오?”
“그래요 그분도 갔어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낭자는 모두 세 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그 중의 한 장은 옥소랑군에게 주라는 것이었어요. 그
래서 저는 먼저 사람을 시켜 그것을 옥소랑군에게 전한 다음 이 편지를 들고 이리로 온 겁니다.”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악언니가 옥소랑군에게 준 편지에는 뭐라고 비어 있었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옥소랑군은 그 편지를 받아 읽고 난 후 마치 미친 사람처럼 뛰어 나갔다
는구려.”
백리빙은 그 이상 물어 보지 않고 편지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백리빙은 단숨에 편지를 다 읽고 나서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우문한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백리낭자!”
백리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악언니의 편지 사연은 모두 우리 자매간의 사적인 이야기에요.”
우문한도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우문한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낭자는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그리고 좀 쉬면서 정신을 새롭게 하시오. 악낭자와 옥소랑군이
함께 갔으므로 사정이 크게 달라졌소. 소대협은 영웅이며 담이 큰지라 그가 만약 이곳에 있었다
면 목숨을 걸고라도 나섰을 것이오. 앞으로 어려운 고비가 많이 있을 테니 낭자는 몸을 보살펴
두었다가 어려운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할 겁니다.”
우문한도는 포권을 한 다음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이 때 백리빙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문선생!”
우문한도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악언니의 편지에는 선생의 지략이 뛰어나므로 반드시 소오빠를 도와 심목풍을 대항하는 데 큰
힘이 될 거라고 했어요.”
우문한도는 미소를 지었다.
“악낭자가 저를 너무 추켜 올렸군요.”
백리빙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우문선생, 우리 악언니와 소오빠께서는 우문선생을 언제나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어요.
저는 당신의 솜씨를 믿어요.”
우문한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대협께서 나를 알아 주시므로 저 역시 힘을 다하여 그를 돕고 있습니다.”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선생의 가슴 속에는 전략이 가득 차 있으며 선견지명이 있다는데 다른 일에 대해서도 역시 그
와 같은 솜씨를 나타낼 수 있는지요?”
“낭자, 무슨 일이신데요?”
백리빙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머리 속에 고민이 가득 차 있어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군요.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요.”
우문한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가 낭자의 고민을 덜어 드릴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저를 믿으신다면 한 번 말씀해 보십시오.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낭자를 위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백리빙이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님은 관상도 볼 줄 아시는지요?”
우문한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약간…”
백리빙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소오빠가 요절(夭折)할 상인지 어떤지를 말씀해 보세요.”
“소대협은 상서로운 상이오. 그래서 저는 이번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소!”
백리빙이 말을 가로챘다.
“그렇다면 이후에는 소오빠에게 다시는 그와 같은 위험한 고비가 없겠어요?”
“제가 소대협의 관상을 자세히 뜯어 보지 않았으므로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소. 하지만 소대협
의 무공은 강호에 뻗치고 있으니 후일 몇 번의 파란곡절을 겪는다고 해도 쉽사리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백리빙이 대꾸했다.
“알았어요. 그는 아직도 많은 위험한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말이군요?”
우문한도는 정색을 하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지요. 천추에 이름을 빛낼 기반을 닦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백리빙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악언니는 어떻게 보세요?”
우문한도는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악낭자에 대해서는 저는 단언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우문한도는 천천히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악낭자는 그 인품이 엄숙하고 농담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하고 있지만 감
히 접근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으며 그
녀의 미소만 한 번 얻으면 죽어도 좋겠다는 정도입니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한도가 말을 이었다.
“기실 천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내기도 어려울 만큼 뛰어난 인재지요. 그런데다 또한 무
림의 딸로 태어났으니… 아아! 그녀가 만약 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더라면 한 마을에 물의를 일으
킬 정도로 그쳤을 텐데, 어쩌다가 무림의 딸로 태어나서 이처럼 많은 고수들의 불붙는 혈전을 일
으켜 놓는지…”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그것은 악언니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일 거예요.”
“그녀와 같은 상을 소위 내미지상(內媚之相)이라고 하지요. 얼핏 보아 그녀는 그다지 아름답다고
는 할 수 없지만 누구든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 마치 빨려 들어가듯 정을 쏟아놓기 마련이
오. 그래서 나중엔 스스로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빠져 들어가고 마는 것이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우문한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다행히 악낭자가 자중하여 낭자들에게 얼음장처럼 차갑게 대하니 망정이지 그녀가 만약 조금이
라도 방탕했더라면 반드시 엄청난 분쟁을 일으켜 놓았을 것이오.”
우문한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제 그만 이야기를 끝냅시다. 나는 다만 지금 우리들 사이에 주고받는 이야기가 바깥에 새어
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낭자, 아무 염려 말고 마음 놓고 쉬십시오. 심목풍이 오면 제가 사람을 시켜 모시러 오겠습니
다.”
그는 말을 마치자 백리빙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백리빙은 우문한도가 나가자 곧 그의 말대로 조식을 하기 위해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
나 머리 속에 천사만려가 떠올라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