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120
120. 동생보다 못난 형이라니
며칠 뒤, 제일 건설 본사 사장실.
“박재민 상무님께서 오셨습니다.”
노크를 하고 들어온 여비서의 말에 업무를 보고 있던 김원식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다시 출근하는 날이었군.”
“네.”
몸을 뒤로 기댄 김원식 사장은 썩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다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여러 가지 악재들이 한꺼번에 겹쳤다고 하지만 사실상 무리하게 메가시티 프로젝트를 추진해서 회사를 어렵게 만든 장본인이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결국 나까지 임기를 다 못 채우고 은퇴하게 생겼으니…….’
김원식 사장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공식적으로 발표가 난 건 아니었으나 윤경욱 기획 본부장에게 신년 정기 인사 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거라고 미리 귀띔을 받은 상태였다.
30년 넘게 청춘을 바친 회사인데 막판에 이렇게 될 줄이야.
사장으로서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에 박경수 회장의 결정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분하고 서운한 마음이 사라질 리 없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벌떡 일어나 집 안을 배회하다가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샌 적도 부지기수다.
아내가 하도 성화이길래 찾아간 병원에선 가벼운 우울증과 불면증이라고 했다.
덕분에 팔자에 없는 약까지 타 먹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태평하게 다시 복귀하다니.
‘역시 로얄 패밀리라 이건가.’
아무리 자숙 기간을 가졌다지만 결정적 원인 제공자나 마찬가지인 박재민이 회사로 돌아오는 꼴을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하긴 아무리 회장님을 오래 모셨다 해도 친아들한테 당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자신이 회사에 있는 동안엔 안 봤으면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씁쓸한 표정을 짓던 김원식 사장은 여비서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사장님.”
“아. 들어오라고 해요.”
“네.”
여비서가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고급 수제 양복을 입은 박재민이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원식 사장은 불편한 기색을 감춘 채 상대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내민 한쪽 손을 맞잡으면서 박재민이 대답했다.
이제 막 자숙하다가 돌아와서 그런지 제 성질을 감추고 얌전을 떠는 모양새였다.
“자네도 알겠지만 바람 잘 날이 없었지.”
뼈 있는 말에 박재민의 볼살이 살짝 실룩였다.
내심 쌓인 게 많은 김원식 사장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모르는 척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게나.”
김원식 사장이 돌아서자 뒤에서 박재민은 슬쩍 짜증이 난 표정을 했다.
하지만 금방 얼굴을 바꾸곤 얌전히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복귀 첫날부터 마찰을 빚을 만큼 머저리는 아닌 것이다.
각자 속내에 불편함이 있으니 대화는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여비서가 차를 내올 때까지도 실내에 어색한 공기가 가득했다.
김원식 사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먼저 입을 열었다.
“정부에서 추진 중인 비전 2020 사업에 대해선 알고 있나?”
“네.”
박재민이 눈을 빛내며 머리를 끄덕였다.
“총 사업비만 25조 원이 넘는 매머드급 토목 프로젝트일세. 다른 건설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경기 침체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로선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에 참가해야만 하네.”
“알고 있습니다.”
국책 공사라 수익률은 높지 않았으나 일단 수주를 맡게 되면 몇 년간 안정적인 수입과 일거리가 확보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힘든 시기에 건설사들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가뭄 속의 단비와도 같았다.
“총 사업비 25조 가운데 최소한 3조 원 이상 공사를 수주하는 것이 우리 목표네. 곧 전담 조직이 꾸려질 텐데 자네도 여기에 속해서 일을 하게 될 거야.”
박재민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장인과 친분이 있는 현동우 전 의원이 사업단장을 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 예상하고 있었다.
문제는 박경수 회장이 화를 누그러뜨리고 그를 받아 주냐는 것이었는데 역시 절호의 기회를 놓치긴 싫었던 모양이다.
만약 정부 사업이 없었다면 복귀는 한참 뒤로 미뤄졌을 터였다.
‘오히려 잘됐어.’
박재민은 홀가분함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골칫덩어리가 된 메가시티 프로젝트 대신 중요한 사업 수주를 담당하게 됐으니 이거야말로 전화위복이었다.
기세등등해진 박재민의 모습에 박원식 사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동안 포장 공장에 내려가 있으면서 반성한 것이 많을 거라 믿네. 이번엔 실수하지 말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게나.”
곧 있으면 떠날 자리지만 한평생 뼈를 묻은 건설사이다 보니 나중 일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정작 충고를 귀담아들어야 할 박재민은 영 시큰둥했다.
김원식 사장의 퇴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아는데, 보따리 싸서 떠날 노인네가 주제에 훈계를 지껄이는 게 같잖아 보였다.
‘참자 참아.’
딱 한두 달 정도만 얌전하게 있는 거다.
그렇게 성질을 눌러 죽이며 맛없는 차를 홀짝이고 있으니 여비서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가?”
“박재성 이사님이 전화를 해오셨습니다.”
“그래?”
마침 연락을 기다리던 중이었기에 김원식 사장은 반색하며 말했다.
“이리로 연결하게.”
“예.”
이내 협탁 위에 올려진 전화벨이 울리자 김원식 사장이 바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오! 박 이사. 어떻게 시노펙하고 협상은 진척이 좀 있나?”
자신을 대할 때하고는 목소리부터 달랐다.
확연히 밝은 말투에 박재민은 줄곧 표정 관리를 하고 있던 것도 잊고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김원식 사장은 그러든 말든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통화를 계속 했다.
[방금 계약을 끝마쳤습니다. 오늘 중으로 4억 6천만 달러가 회사 계좌로 입금될 겁니다.]희소식에 김원식 사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찰나에 무려 4억 6천만 달러라는 거액이 한꺼번에 들어오게 됐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걸로 당분간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정말 수고 많았네.”
함께 있는 박재민과 달리 공을 세우고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태도에 김원식 사장은 입가에 지은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다음 달에 돌아오는 은행 대출 만기 상환이 걱정이었는데 자네 덕분에 한시름 덜게 됐군.”
그러고는 수화기를 고쳐 쥐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는 보고를 드렸나?”
[저보다는 사장님께서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 아니겠습니까.]박재민 같으면 보고 체계 같은 건 무시해 버리고 바로 회장실로 전화를 걸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자신을 배려해 주는 모습에 김원식 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는 자네한테 이야기를 들으면 더 기뻐하실 테니. 어서 전화를 드리도록 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리하겠습니다.]어차피 자신은 경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날 처지였다.
그렇다면 저보다는 앞길이 창창한 재성에게 힘을 더 실어주고 싶었다.
김원식 사장은 재성이 박경수 회장의 눈에 들 수 있게 배려를 해주고선 물었다.
“그럼 이제 일이 다 끝났으니 귀국하는 건가?”
[예. 오늘 밤에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겁니다.]“그동안 수고했으니 급하게 올 필요 없네. 하루 이틀 정도는 천천히 쉬다 오게나.”
[알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돌아가서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흡족한 미소와 함께 통화를 끝낸 김원식 사장은 슬쩍 옆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거기엔 똥 씹은 얼굴을 한 박재민이 있었다.
“복귀 첫날이라 할 일이 많을 테지. 그만 가보게.”
그러자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고 있던 박재민은 굳은 얼굴로 일어섰다.
인사도 없이 쌩하니 돌아서서 나가는 걸 보며 김원식 사장은 혀를 찼다.
찬바람이 도는 얼굴에서 동생을 질투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동생보다 못난 형이라니. 쯧쯧.”
회장님도 고생이 많겠어.
김원식 사장은 고개를 흔들며 혼자 중얼거렸다.
* * *
마포 제일그룹 본사 회장실.
재성과 통화를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경수 회장은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두바이의 공사 대금 지급이 계속 미루어져 골치를 썩이던 참이었는데.
원유를 받아내고, 그것을 돈으로 바꿔서 떡하니 가져왔으니 막내아들이 예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만에 기분이 좋아진 박경수 회장은 책상 한쪽에 놓인 인터폰을 눌렀다.
[네. 회장님.]“윤 본부장한테 연락해서 지금 바로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얼마 있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윤경욱 본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그래.”
작게 머리를 끄덕인 박경수 회장은 책상 앞에 서 있는 윤경욱 본부장을 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지시한 것 있지.”
“뭘 말씀하시는지…….”
“제일 데이터 건 말이야.”
“아. 네.”
“준비는 다 끝내놨겠지?”
“물론입니다.”
비상장사인 데다가 지분 대부분을 제일 전자가 소유하고 있었기에 회사를 넘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지분 가치를 아주 낮게 잡아서 매각액은 불과 이백억 정도밖에 안 됐다.
“그럼 바로 진행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깔끔하게 뒤처리를 해두는 것도 잊지 말고.”
“예.”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윤경욱 본부장이 집무실을 나가자 박경수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통유리창 아래로 펼쳐진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낮게 웃었다.
씨네박스에서도 여러모로 놀랄 일을 벌이더니, 이번엔 또 어떤 식으로 즐거움을 줄지 기대가 되었다.
게다가 제일 데이터는 처음으로 자신이 원해서 가져간 게 아닌가.
박경수 회장은 뒷짐을 진 자세로 눈을 가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 * *
상가포르 창이 국제공항(Changi Airport).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용기에 탑승한 재성은 데이비드와 한창 통화 중이었다.
“메이튼 제논 스튜디오 회장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많이 당황하더군요.]“아무런 예고도 없이 회사를 매입하고 싶다 했으니 그럴 테죠.”
[그래도 바로 거절하지 않은 걸 보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아 보였습니다.]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그 뒤에 이어진 여러 가지 일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재성이 제일 먼저 눈독을 들인 건 바로 제논 스튜디오였다.
스틸 워리어가 전 세계적으로 대흥행을 하고 뒤에 이어진 비스트 역시 대박은 아니었으나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면서 제논 스튜디오 역시 할리우드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됐다.
하지만 제논 스튜디오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며 히어로 영화의 전성시대를 이끌어 나가게 될 것이다.
씨네박스를 멀티미디어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키울 계획인 재성이 이런 미래를 알고 있는데도 가만 놔둘 순 없었다.
‘내년이면 디즈니에서 제논 스튜디오에 접근할 거야. 더 머뭇거릴 여유가 없지.’
지금도 몸값이 크게 뛰었는데 경쟁자까지 붙으면 매각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를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더군다나 디즈니라면 현금 동원력이 결코 뒤지지 않아. 게다가 미국 기업에 할리우드의 큰손이라는 프리미엄까지 있으니…….’
제논 스튜디오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아직 디즈니가 움직이지 않았을 때 얼른 낚아채 가는 방법뿐이었다.
“스틸 워리어의 성공으로 눈독을 들이는 곳이 많을 겁니다. 다시 한번 만나서 설득해 봐요. 그리고 메이튼 회장과 파이슨 사장에게는 인수한 뒤에도 영화 제작에 대해 전권을 보장해 주겠다는 제안도 빼놓지 말고.”
[알겠습니다.]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스튜어디스가 다가왔다.
곧 이륙하니 안전벨트를 매달라는 요청이었다.
잠시 뒤, 재성을 태운 비즈니스 제트기가 활주로를 타고 공중으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