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121
121. 형이나 잘해
경기도 하남시.
첫눈이 내려 주변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들판에 재성과 재경이 함께 서 있었다.
대형 아울렛 사업을 맡은 제일 백화점 조덕현 이사가 한쪽 팔을 들어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넓은 황무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맞은편에 보이는 도로까지가 하남 시에서 내놓은 공유부지입니다. 원래는 IT 기업들을 유치하려고 계획된 땅이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아 수년간 비어 있는 상태입니다. 산업단지로 조성돼 전기와 상하수도 같은 기반 시설들이 이미 다 갖춰진 상태라 부지를 매입하면 바로 건물을 올릴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회색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한 조덕현 이사는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한강을 끼고 미사대로가 연결돼 강남까지 30분이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교통도 편리합니다.”
재성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만족한 듯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보이는데 누나 생각은 어때?”
윤기가 흐르는 롱코트로 몸을 감싼 재경은 추운 듯 눈살을 찡그렸다.
저럴 바에야 그냥 두툼한 패딩을 입지 싶었으나 재경은 곧 죽어도 코트를 고수하는 파였다.
“이 자리를 제일 먼저 찍은 사람이 나야.”
쓸데없는 걸 물어본다는 말투였다.
“남양주도 생각했지만 거긴 한강 북쪽이라 제외. 광주는 땅값은 싸도 교통편이 불편하지. 이런저런 걸 다 고려해 본 결과 여기가 조건이 제일 좋아. 그리고 앞으로 신도시가 자리를 잡고 이 주변이 개발되면 땅값이 더 오를 수도 있고.”
재경은 오를 땅값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이득을 보면 봤지 손해는 아닐걸.”
“어련히 알아서 했겠어.”
재고 따지는 걸 좋아하는 재경이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거라면 믿을 만했다.
재성은 고개를 돌려 조덕현 이사에게 물었다.
“하남시에서 제시한 가격이 얼마라고 했지요?”
“280억입니다.”
“평당 50만 원이 조금 넘는군요.”
“원래는 70만 원까지 요구했었지만 최근 금융위기로 인해 부동산 시장에 찬바람이 부는 상황이라 크게 깎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예산을 넉넉하게 잡아놨지만 그래도 아낄 수 있으면 아끼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하남시 입장에서도 땅을 싸게 주더라도 오히려 이득이 많았다.
대형 아울렛이 들어와서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고 일자리가 늘어나면 지자체 수입이 증가할 테니 말이다.
“자가용을 이용한 접근성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대중교통편은 어때요?”
“대형 아울렛이 개장하면 버스 노선을 신설해 주기로 하남시에서 약속했습니다. 또 5호선 연장 구간이 곧 공사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재성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대형 아울렛이 개장되면 수천 명의 고객이 몰릴 텐데 그거 가지고는 부족하지 않겠어요.”
특히 지난 삶에서 지하철 5호선이 하남까지 완전히 연결되는 건 2020년 말이 되어서야 겨우 완공됐다.
그 때문에 주말만 되면 주변 지역 도로가 온통 차들로 막혀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래서 서울과 아울렛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따로 운용하고 동시에 7천 대의 차량이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예정입니다.”
나름 고심해서 만들어낸 대책이겠으나 재성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시내에 있는 쇼핑센터와 달리 아무래도 자차를 이용해서 오는 손님들이 많을 텐데 주차 공간이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부지 매입 대금으로 잡아둔 예산이 얼마였죠?”
“500억입니다.”
“그럼 남는 예산으로 주변 땅을 더 매입해 주차 공간을 최대한 넓히도록 합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재경이 끼어들며 말했다.
“기존에 계획된 주차 공간도 작은 것이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어?”
“방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울렛을 찾는 고객들 가운데 자신의 차를 이용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을 거야.”
위치 자체가 교외인 데다가 대중교통이 불편하니 자동차를 타고 오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럼 도착해서 첫 인상을 받는 곳이 주차장이 될 텐데 복잡하고 이용이 불편하다면 어떻겠어.”
“불쾌하고 짜증이 나겠지.”
“바로 그거야. 이용하기 불편하고 힘들다는 인상이 박히게 된다면 아울렛 운영에 좋을 게 하나도 없지. 그리고 부지를 넓게 확보해 두면 나중에 시설을 늘리기도 용이하고, 땅값이 오르면 그만큼 이득을 취할 수 있을 테니 손해 볼 것이 없잖아.”
이야기를 다 들은 재경이 잠시 생각을 해보곤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그렇네.”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는 데 문제는 없겠죠?”
그러자 두 사람을 대화를 듣고 있던 조덕현 이사가 얼른 대답했다.
“남아 있는 공유지가 5천 평가량 더 있습니다. 시청하고 협의를 해봐야 되겠지만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대형 아울렛 건설 예정 부지를 조금 더 돌아본 뒤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겨 차를 세워둔 자리로 돌아왔다.
“다음 주엔 약속한 5백억이 먼저 입금될 거야.”
“오케이.”
재경은 먼저 차에 타려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참. 이번에 집에서 나온다며?”
“응.”
“너도 드디어 독립하는구나. 언제까지 본가에서 살려나 싶었는데.”
“나라고 계속 붙어 있고 싶었겠어? 아버지가 허락을 안 해줘서 그랬지.”
재성도 자기 이름으로 된 다른 집이 있긴 했다.
고급 주상복합 건물의 맨 꼭대기 층으로, 언제든지 몸만 들어가서 살면 되었다.
그리고 거의 안 쓰긴 했지만 부산과 제주도에도 하나씩 증여받은 주택과 고급 아파트가 있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부모님 집에서 같이 사느냐 하면, 여러모로 사고를 친 전적이 화려해서 그렇다.
덕분에 막내아들에 대한 신뢰가 바닥까지 떨어진 박경수 회장이 옆에서 본인이 직접 감시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지금은 물론 상황이 180도 달라졌으므로 이제 제대로 된 독립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너네 집 인테리어를 직접 하겠다고 아주 신나셨던데.”
“하아…….”
재성은 끙 소리를 내면서 이마를 짚었다.
“그냥 물건만 옮기면 되지 뭘 또 그렇게 일을 벌이시는지 몰라.”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이사하고 싶은데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또 일정이 미뤄졌다.
“일단 말려보긴 했는데 독립 선물로 해주고 싶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었어.”
“넌 역시 센스가 없어. 남이 해둔 걸 어떻게 그대로 써?”
재경은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눈을 치떴다.
“원래 되어 있던 기본 구조도 나쁘지 않아. 어차피 깔끔하게 청소만 하면 새 집이지.”
“재성이 넌 취향이란 것도 없니? 이사 들어갈 때 인테리어 바꾸는 건 당연한 거야. 다른 사람 손 탄 걸 그냥 쓰는 것도 기분 나쁘고.”
재경은 차라리 잘됐다며 말했다.
“엄마가 손대길 잘했네. 안 그랬으면 진짜 몸만 들어갈 뻔했어.”
“무슨 신혼집 차리는 것도 아니고.”
한숨을 삼킨 재성은 거의 포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대충 하시고 금방 끝내줬으면 좋겠는데.”
“어머. 얘기 들어보니까 아주 내부를 다 뜯을 생각이시던데?”
천장이랑 바닥부터 시작해서 진짜 집을 하나 새로 짓는 정도의 대공사라고 재경이 말했다.
“뭐야? 아 정말.”
일그러지는 재성의 얼굴을 보면서 재경은 꼴좋다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재경과 오전 스케줄을 끝낸 뒤, 서울로 돌아온 재성은 제일 건설로 향했다.
일전에 전화로 귀국한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김원식 사장과 나눌 이야기도 있어 겸사겸사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복도를 걷는 도중 우연찮게 둘째 형인 박재민과 중간에서 딱 마주쳤다.
재성은 크게 표정 변화 없이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박재민은 달랐다.
그는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야.”
그래도 동생이니까 먼저 아는 척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 건넨 인사에 모난 말이 돌아왔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삐죽삐죽 가시 돋친 말투였다.
“김 사장님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지.”
박재민은 대답을 가볍게 무시했다.
어차피 그냥 던진 말일 뿐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가 이번에 제일 데이터 지분을 너한테 넘기기로 했다며?”
“그래.”
박재민은 눈을 세모꼴로 사납게 치켜떴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용케 아버지를 잘 구슬린 모양인데……. 너무 나대지 마라.”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꼴이 꼭 제 몫을 빼앗길까 봐 예민해진 하이에나 같았다.
“네 몫은 딱 거기까지야. 더 욕심을 낸다면 그나마 받은 것도 다 잃게 될 거야. 내 말 알겠어?”
그걸 보면서도 재성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위축되긴커녕 가소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재성은 헛웃음을 내뱉다 이내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나한테 뭘 줄지 안 줄지는 아버지 마음이고. 형이나 잘해. 그 나이가 되어서도 다른 사람이 꼭 뒤치다꺼리를 하게 만들어야겠어?”
“뭐야!”
박재민이 고함을 질렀으나 재성은 무시했다.
마침 오늘 그가 직접 찾아온 이유도 뒤치다꺼리의 일환이지 않나.
일부러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재성을 보면서 박재민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이를 갈았다.
“저 자식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에 그는 걸음을 옮기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모든 걸 다 누리고 사는 건 순전히 부모를 잘 만난 덕이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욕심만 많다.
지난 삶에서 겪었던 본부장 놈을 보는 것 같았다.
“쯧.”
짧게 혀를 찬 재성은 더러워진 기분을 애써 씻어 내고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게!”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김원식 사장이 웃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바로 와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악수를 나누며 김원식 사장이 괜찮다는 듯 말했다.
“자네도 할 일이 많다는 걸 알고 있네. 그리고 필요한 이야기는 전화를 다 나눴지 않나.”
“그래도 직접 찾아뵙고 보고를 드리는 것하곤 다르죠.”
“하하하. 그건 그렇지.”
그렇게 좋은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두바이 상황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재성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길어봤자 내년 1분기를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
“자네 말대로 두바이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다면 또 한차례 전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이 오겠구만.”
예전 같으면 반신반의했을 터였다.
하지만 실제로 두바이 최대 국영 부동산 개발회사인 나킬사가 부채 상환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확인하자 재성을 완전히 신뢰하게 됐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까지 고공행진을 하던 국제유가가 폭락하면 산유국들의 재정이 팍팍해질 테니. 예전처럼 건설업체들이 중동 특수를 누리기는 한동안 어려울 겁니다.”
“그럴 테지.”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으나 어찌 됐건 국내업체들 입장에서 가장 큰 해외건설 시장인 중동이 침체에 빠질 거라고 하니 김원식 사장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아무튼 이번에 자네가 큰일을 했네.”
“아닙니다.”
겸손한 태도를 보인 재성은 힐끔 김원식 사장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메가시티 프로젝트가 제대로 진행되려면 빨리 분양이 끝나야 될 텐데 재분양은 언제쯤 실시할 계획이십니까?”
그러자 김원식 사장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말대로 공사비를 충당하려면 하루빨리 미분양 물량을 처분해야 되는데 알다시피 부동산 경기가 바닥이라 그게 쉽지 않은 상황이네.”
오죽했으면 메가시티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런 김원식 사장을 보며 재성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메가시티 분양을 제가 한번 맡아서 해볼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