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180
180. 네놈 하는 거 봐서.
주말의 나른한 오후.
정원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박경수 회장은 뒤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서재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허어, 이놈 참.”
따뜻한 차향을 음미하려던 그는 찻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신문 기사에 집중했다.
거기엔 재성이 일본 정부로부터 받아낸 문화재들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한다는 기사가 크게 실려 있었다.
제법 잘 나온 막내아들의 사진을 보며 박경수 회장을 턱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칭찬만 듣는 것도 힘든 일인데 말이야.”
발 빠르게 움직여 치료제와 백신을 만들어서 판 건 확실히 영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큰돈을 벌면 당연히 시기와 질투가 따라오는 법이다.
특히 재벌 3세라는 배경 덕에 가만히 있어도 고깝게 보는 인간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언론을 자기편으로 만든 뒤,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 대단했다.
설령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지금 같은 분위기 속에선 씨알도 안 먹힐 거다.
“생각하는 게 다르단 말이지.”
집안의 골칫덩어리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게 불과 얼마 전 같은데 그때와 비교하면 완전히 환골탈태한 수준이다.
박경수 회장은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득 노크 소리가 났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허락도 안 받고 그냥 들어올 거면 노크는 뭐 하러 하는 거냐?”
입도 떼기 전에 먼저 발부터 들여놓는 재성의 등장에 박경수 회장이 불퉁하니 답했다.
“그냥 예의상 하는 거죠.”
재성은 자기가 못 올 데를 왔냐며 넉살 좋게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아들 녀석이 자주 얼굴을 보이는 게 내심 싫지는 않았던 박경수 회장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어? 이 향은…….”
재성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말했다.
“제가 선물해 드린 보이차네요.”
“향이 좋아서 가끔씩 마신다. 매번 커피만 마셔대니 가끔은 다른 게 당기거든.”
“입맛에 맞으시면 제가 또 구해 드릴게요.”
“그러던가.”
박경수 회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뭔가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 같은데? 뜸들이지 말고 말해봐.”
이리저리 말만 빙빙 돌리다가 시간을 끄는 건 박경수 회장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재성은 자세를 바로 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제일 글로벌 주식을 큰형한테 넘기려고 해요.”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박경수 회장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지금 제일 글로벌이라고 했냐?”
“네.”
“그곳이 어떤 역할을 하는 회사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물론입니다.”
“그런데도 지분을 네 큰형한테 넘기겠다는 거냐.”
날카로운 박경수 회장의 시선을 재성은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마주 쳐다봤다.
“그렇습니다.”
대답을 들은 박경수 회장의 얼굴에 서운함과 실망감이 뒤섞였다.
지주사인 제일 글로벌 지분을 처분한다는 건 그룹 후계자 경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막내아들한테 기대하는 것이 점점 많아지던 참이었기에 섭섭한 마음이 더욱 컸다.
무거운 침묵 속에 박경수 회장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재성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박경수 회장의 대답이 떨어지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박경수 회장이 재성을 바라보며 닫혀 있던 입을 뗐다.
“그룹 후계자 경쟁을 포기하겠다는 거냐.”
그러자 재성이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차기 회장은 큰형님으로 사실상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세상에 확실한 건 없는 법이다.”
“…….”
박경수 회장이 평소 숨기고 있던 속마음을 드러내자 재성은 내심 살짝 놀랐다.
순간 욕심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는 바로 마음을 접었다.
‘앞으로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후계자 다툼에 발목이 잡혀 있을 순 없지.’
더군다나 주력 계열사인 건설은 둘째 형이 거하게 삽질을 해놨고 또 다른 주축인 전자 역시 첫째 형이 제대로 폭망하는 테크트리를 타는 중이었다.
앞으로 고생길이 뻔한데 그걸 굳이 큰형을 밀어내고 차지할 이유는 없었다.
‘태풍에 휘청거리기 전에 챙길 거 다 챙겨서 얼른 내리는 것이 낫지.’
재성은 이런 걸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말했다.
“그룹 회장실을 저한테 주실 수도 있으시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감사하지만 제 몫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재성의 대답에 박경수 회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제일 그룹이 성에 안 찬다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럼 방금 한 말은 뭐지.”
“둘째 형은 그렇다 쳐도, 큰형이 가만히 있을까요.”
그러자 박경수 회장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입지를 단단히 굳히고 있는 박재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태자 자리를 빼앗긴다면 그걸 용납하기 어려울 건 불을 보듯 뻔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최근 금마그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만 봐도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경영권을 두고 형제간에 싸움을 벌이고 그룹이 쪼개지는 모습을 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일 글로벌 지분을 네 큰형한테 넘기겠다는 거냐?”
“그게 제일 확실하고 깔끔한 방법이지 않겠어요.”
“으음.”
“지금처럼 그룹 안팎이 어수선한 상황일수록 안정이 더욱 중요할 거예요.”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이야기에 박경수 회장은 몸을 뒤로 기댄 채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이내 재성을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녀석 말은 정말 잘하는구나.”
“서로 더 가지려고 형제들끼리 싸우는 것만큼 불효도 없지 않겠어요.”
“사자는 새끼를 낭떠러지에 떨어뜨려서 거기서 살아남는 놈만 키운다고 했다.”
“거친 풍랑이 휘몰아치는데 안에서 자중지란을 일으킨다면 그 배는 침몰할 수밖에 없겠죠.”
“쯧.”
저놈은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녀석이야.
어째 한마디도 지지 않는 막내아들의 모습에 박경수 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렇게 당당하고 재기 넘치는 모습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나.’
재성의 말대로 지금 형제의 난이 벌어진다면 그룹이 크게 흔들릴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엔 금마그룹처럼 그룹이 둘로 쪼개질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다 제 자식들 아닌가.
서로 원수처럼 물고 뜯는 모습을 보는 건 박경수 회장도 원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그래도 아직 가슴에 미련이 남았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으로 잠시 재성을 쳐다본 박경수 회장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대로 지금은 안정이 중요한 때이지.”
“그럼…….”
박경수 회장이 아쉬운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어찌 됐건 결정을 내리고 나자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눈을 가늘게 뜨곤 막내아들을 봤다.
“네 성격에 그냥 순순히 지분을 팔기로 하진 않았을 테고 대신 뭘 가져가기로 한 거냐?”
어차피 나중에 되면 다 드러날 일이었다.
그리고 원하는 걸 받아 가려면 박경수 회장의 허락이 필요했기에 재성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역시 아버지는 못 속이겠네요. 제일 병원하고 제주도 목장을 달라고 했습니다.”
“뭐어?”
박경수 회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너희들끼리 주고받고를 해? 그게 내 꺼지 너희들 꺼야!”
하지만 재성은 꼼짝도 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받았다.
“지주사 지분을 내놓는데 그 정도는 주실 수 있잖아요.”
“이놈아. 네 몫은 벌써 다 가져갔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다르죠.”
어이가 없어진 박경수 회장이 머리를 짚었다.
“잘났다 잘났어. 왜, 아주 이 집까지 달라고 하지 그래?”
“물려주실 거예요? 그럼 저야 좋은데.”
무슨 말을 던져도 능청거리면서 받아내니 화낼 의지조차 사라졌다.
박경수 회장은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면서 잠시 생각했다.
“제약사를 가지고 있는 네가 병원을 맡아서 운영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
“그러면 제일 병원과 목장은 제게 주시는 겁니다?”
“네놈 하는 거 봐서.”
어떻게 하면 저 얄미운 면상을 일그러뜨릴지 고민하는 것처럼 박경수 회장이 눈을 샐쭉하니 떴다.
“네놈 하는 거 잘 지켜봤다가 결정 내릴 거다. 아주 그냥 매의 눈으로 노려봐 주지.”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재성한테 주는 쪽으로 거의 마음을 굳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성은 하하 웃다가 슬쩍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할지 겁부터 나는구나. 뭔지 말해봐라.”
“이번 기회에 제가 지분을 소유한 회사들을 완전 계열 분리해서 나갈까 합니다.”
“흠…….”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박경수 회장을 보며 재성이 계속 말을 이었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났으니 이제 분리해서 나갈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박경수 회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일 데이터는 그렇다고 쳐도 씨네박스가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아주 큰 흑자를 봤다고 그랬지.”
“예.”
“거기다가 매년 1조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이는 게임회사가 있고 이번에 인수한 제약사 역시 돈을 갈퀴로 쓸어 담고 있으니 홀로서기를 하기에 차고 넘치겠지.”
“제일 병원하고 목장도 있고요.”
은근슬쩍 병원과 제주도 목장을 끼워 넣으니 박경수 회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놈아! 그건 아직 줄지 말지 결정을 안 했다니까.”
“그냥 그렇다고요.”
“아무튼 방심하지 못할 녀석 같으니.”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았다간 속옷까지 털어갈 기세였다.
반쯤 어이없이 피식 웃던 박경수 회장은 이내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이미 지분도 다 정리된 상태인데 계속 그룹 안에 남아 있는 것도 이상할 일이겠지.”
사실 법적으로 재성이 지분 100%를 모두 소유한 씨네박스와 제일 데이터는 이미 제일 그룹 자회사가 아니었다.
그랬지만 오랫동안 그룹 안에 있었고 경영진에서도 명확하게 선을 긋지 않았기에 계속 자회사처럼 취급되어 왔다.
원래대로라면 일찌감치 정리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박경수 회장이 재성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어 차일피일 미루어져 왔던 거였다.
“윤 본부장한테 말해놓을 테니 함께 상의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자신을 품을 떠나 이제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막내아들의 모습에 박경수 회장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 막내아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크게 커나갈지 기대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 문득 막내아들하고 술 한번 제대로 먹어본 적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다른 약속 있냐?”
“딱히 없는데요.”
잘됐다, 하고 박경수 회장이 말했다.
“그럼 나하고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저랑요?”
재성이 순간 머뭇거리면서 되물었다.
술 때문에 크게 혼난 적이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주춤거린 것이다.
그래도 이번엔 먼저 마시자고 한 사람이 박경수 회장이니 괜찮을 듯했다.
게다가 박경수 회장도 마음이 싱숭생숭할 테니 장단을 맞춰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죠.”
박경수 회장은 집사를 불러 아껴두었던 최고급 위스키와 시가를 가지고 오도록 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면서 그동안 한 번도 나누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