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269
269. 한 달 안에 결판이 날 거예요. 날 믿어봐요.
일본 도쿄 니혼바시.
시내 중심가답게 고층빌딩들이 즐비하게 서 있고 많은 행인들이 거리를 오갔다.
이곳의 상징이자 렌드마크인 미쓰이 타워 27층에 데이비드가 직접 이끄는 Downfall(몰락) 프로젝트 팀이 한 달 전부터 자리를 잡고 치열한 공매도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넓은 사무실 안에 40명이나 되는 트레이더들이 각자 모니터가 5~6개씩 설치된 책상에 앉아 거래를 하고 있었다.
“GPIF에서 도쿄전력 1억 엔 매수!”
“현재가 얼마야?”
“그래프 꺾이잖아. 어서 매도 주문 넣어!”
“도요타도 매수 들어오고 있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 소리와 컴퓨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겨울인데도 덥다고 느낄 정도로 사무실 온도가 올라갔다.
데이비드는 마치 전장에 나선 장군처럼 전체적인 상황을 살피며 트레이더들을 지휘했다.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서 나오는 각 종목별 주가 그래프를 주시하던 데이비드가 미간을 좁혔다.
“도쿄전력 주가가 왜 저래!”
“갑자기 매수 주문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치프 트레이더인 샤피로가 머리에 헤드셋을 쓴 채 뒤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메인화면에 도쿄전력 시세 창을 띄워봐!”
옆에 있던 직원이 재빨리 컴퓨터를 조작하자 커다란 모니터에 도쿄전력 가격과 거래량이 주르르륵 나타났다.
어디선가 대량 매수 주문이 나오며 자신들이 쏟아낸 물량을 빠르게 쓸어가 버렸다.
그러자 주당 2천 엔 언저리까지 끌어 내렸던 도쿄전력 주가가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GPIF 놈들이야?”
“아닙니다.”
“그럼 어디야?”
“노무라 증권입니다.”
“뭐?!”
깜짝 놀라 쳐다보자 샤피로 치프 트레이더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노무라 증권이 150만 주를 매수한 걸 확인했습니다.”
“이것들이…….”
“매수 주문을 계속 늘리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상승으로 마감하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왼편 벽에 설치된 시계를 보자 장 마감까지 겨우 20분 남짓밖에 안 남았다.
“이 타이밍에 들어오다니……. 완전히 계획적이군.”
매수창을 보자 어느새 –150엔에서 주가가 올라 오늘 시작가인 2천 300엔에 근접해 있었다.
“이렇게 장이 끝나면 주말 사이에 기껏 꺾어둔 매수세가 되살아날지도 모릅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연기금을 상대하면서 주가를 끌어내리는 것도 힘든데 여기에 개인 투자자들이 달라붙으면 일이 아주 골치 아파졌다.
“맞아. 여기서 밀려서는 안 되지.”
무겁게 머리를 끄덕인 데이비드는 샤피로를 보며 말했다.
“남아 있는 도쿄전력 주식이 얼마나 돼?”
“1천 5백만 주 정도 남았습니다.”
“좋아. 오른 걸 한 번에 왕창 빼버리자고. 2천 100엔에 5백만 주 매도해!”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샤피로가 재빨리 매도 주문을 넣었다.
그러자 걸려 있는 매수호가들이 줄줄이 체결되면서 올라가던 주가가 다시 꺾여 아래로 떨어졌다.
2천 100엔에 거의 도달한 걸 보고 데이비드가 미소를 지으려고 할 때 다시 변수가 발생했다.
갑자기 2천 300엔에 6백만 주나 매수 주문이 나온 것이었다.
주가 그래프 방향이 다시 꺾인 걸 보며 데이비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또 노무라 놈들이야!”
“아닙니다. 이번에는 닛코 증권입니다!”
“다이와 증권에서도 도쿄전력 매수가 들어옵니다!”
도쿄전력을 담당하는 트레이더들이 연달아 외치는 소리에 데이비드는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순간 무언가 일이 크게 잘못됐다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이 평정심을 잃으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애써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이대로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돼!’
주식은 분위기였다.
이대로 기선을 빼앗긴다면 지금껏 쌓아온 것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계획이 헝클어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생각을 끝낸 데이비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지시를 내렸다.
“남아 있는 지분을 다 밀어 넣어!”
“예?!”
“뭐 해. 어서 서두르지 않고!”
“바로 주문 넣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트레이더들이 일제히 매도 주문을 넣었다.
하루 거래량의 절반이 넘는 매도 폭탄에 도교전력 주가는 다시 밑으로 빠지면서 널뛰기를 했다.
하지만 상대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물량을 계속 받아냈다.
계약이 체결되는 알람과 함께 빠르게 줄어드는 매도 잔량에 데이비드는 입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조직적으로 물량을 받아내는 모습에 단순한 저가 매수가 아니라는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설마 노무라를 비롯한 일본 증권사들이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였던 건가…….’
불길한 기분이 엄습해 올 때.
다시 한번 엄청난 규모의 매수 주문이 들어와 골드원에서 내놓은 물량을 전부 걷어가 버렸다.
그러자 엎치락뒤치락하던 주가는 바로 시작가를 넘어 2천 5백 엔까지 뛰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장이 마감됐다.
2천 5백 엔에서 멈춘 도쿄전력 주가를 쳐다보며 데이비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려 2천만 주 가까운 주식을 쏟아붓고도 힘 싸움에서 밀리다니 이건 엄청난 타격이었다.
“으음…….”
데이비드는 커다란 메인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장이 마감되자 거짓말처럼 실내를 메우고 있던 소음들이 일시에 싹 사라졌다.
그 대신 넓은 트레이딩 룸은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 찼다.
다들 상황이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린 탓일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프로젝트 팀원들이 모두 데이비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치프 트레이더인 샤프로가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대표님.”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고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마지막에 터진 물량은 어디서 나온 거야?”
저도 모르게 목이 잠긴 건지 칼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확인이 안 됐습니다만 일본 증권사 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아무래도 다른 세력이 또 붙은 모양입니다만.”
데이비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답답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애써 눌러 참은 채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일단 역작전을 건 놈들이 누구고 얼마나 되는지 파악부터 해. 싸움을 하려면 적을 확실히 알아야 되니까 말이야.”
상대를 모르면 어떤 작전도 세울 수 없다.
데이비드는 샤피로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빠른 걸음으로 트레이딩 룸을 빠져나왔다.
팀원들 앞에서는 침착한 척했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데이비드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가득 들어찼다.
“제기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데이비드는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처음부터 불안하더라니. 제대로 물려 버렸어.”
쏟아내는 족족 물량을 받아내는 꼴을 보니 역작전을 벌이려고 단단히 계획을 세운 게 분명했다.
서둘러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데이비드는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타 외쳤다.
“하네다 공항으로. 빨리!”
* * *
그날 저녁.
재성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제일 호텔 로열스위트룸 창가에 서서 화려한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장님. 데이비드 씨가 오셨습니다.”
몸을 돌리자 급히 일본에서 날아온 데이비드가 권혁재 실장과 함께 서 있었다.
“어서 와요.”
재성은 가까이 다가가 악수하고는 데이비드를 소파에 앉혔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상황을 먼저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성은 너무 태평해 보였다.
속이 바짝 타들어가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데이비드는 내심 당황했다.
수백억 달러, 아니 그 이상을 잃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걸까?
‘원래 이런 분이긴 하지만.’
항상 다른 이들이 어찌할 바 모르고 혼란스러워할 때도 혼자만 해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위스키?”
“예.”
재성이 자기 것도 포함해서 손가락을 두 개 들어 보였다.
그러자 권혁재 실장이 한쪽에 설치된 바에서 언더락 잔을 꺼내 얼음을 채웠다.
거기에 위스키를 따르자 진한 호박색 액체가 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데이비드는 잔을 받아드는 것과 동시에 갈증을 채우려는 것처럼 단숨에 위스키를 삼켰다.
“저런. 목이 말랐나 보네요.”
“그럴 만한 상황이니까요.”
“그러면 위스키 말고 물을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데이비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오너.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계실 때가 아닙니다.”
“왜요?”
재성은 가볍게 위스키 잔을 흔들며 말했다.
“도쿄전력에 역작전 세력이 들어온 것 때문에?”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마냥 태평한 얼굴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연기금과 줄다리기를 하느라 힘이 빠졌을 때를 정확히 노린 것도 그렇고, 노무라를 비롯한 일본 증권사 세 곳이 동시에 움직이는 걸 보면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함정을 판 것이 분명합니다.”
데이비드는 심각한 얼굴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기다 장 마지막에 새로운 세력까지 매수에 가담했습니다. 미리 계획된 건지는 아직 모르지만 다른 헤지펀드까지 역작전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매우 심각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재성은 남의 이야기를 듣듯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위스키를 마시며 재성이 묻자 데이비드가 바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월요일에 다시 시장이 열리면 최대한 빨리 포지션을 청산하지요.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미 역작전 세력이 들어왔는데 물량을 쉽게 회수할 수 있겠어요?”
“물론 쉽진 않겠죠. 하지만 아직 초반이니 가능성이 있습니다. 손해야 보겠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발을 빼는 게 손실을 최소화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재성은 머리를 흔들었다.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자마자 바로 백기를 흔들고 뒤꽁무니를 보이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무조건 정면 대결을 벌인다고 능사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질 것이 뻔한 싸움이라면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보다 일단 한 걸음 물러선 뒤에 나중을 도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붙어보지도 않고 왜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순간 데이비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 3대 증권사를 한꺼번에 상대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거기다가 아직 정체를 모르는 다른 세력까지 붙었고요.”
답답한 마음에 데이비드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월요일 시장에서도 오늘처럼 밀린다면 눈치를 보던 월가의 승냥이 떼들이 침을 흘리며 달려들 겁니다. 함정에 걸린 저희를 뼈까지 다 발라 먹으려고 말입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컸다.
“아직 자금에 여유가 있다고 해도 몰매에는 장사가 없는 법입니다. 제발 그럴 일이 없길 바라지만 까딱 잘못했다가는 숏 스퀴즈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발행주식 수가 16억 주나 되는 도쿄전력 주식이 시장에서 싹 사라지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데이비드는 자꾸 숏 스퀴즈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공매도의 첫 번째 철칙이 뭔지 알아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데이비드가 미간을 좁혔다.
“바로 끝까지 버티는 쪽이 이긴다는 거예요.”
“설마 이대로 계속 끌고 가시려는 겁니까?”
“저들이 매수하면 우리도 계속 물량을 쏟아내요.”
“이미 확보한 물량을 다 밀어 넣어서 더 이상 매도할 주식이 없습니다.”
그러자 재성이 어깨를 으쓱이며 간단히 말했다.
“그럼 추가로 주식을 빌려오면 되잖아요.”
“여기서 리스크를 더 늘리라는 말씀이십니까?”
“9백억을 잃어버리는 거나 천억을 잃는 것이나 어차피 지면 펀드가 박살 나는 건 똑같아요.”
아무리 골드원이라고 해도 우려한 대로 숏 스퀴즈가 발생한다면 대규모 손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펀드가 청산될 가능성이 컸다.
“우왕좌왕하며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저들이 더 기세등등해져서 우릴 뜯어 먹으려고 들 거예요. 이럴 때는 강하게 맞서야 돼요.”
회의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데이비드를 보며 재성이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면 끈끈한 연대를 이루고 있지 않은 역작전 세력들 가운데 어느 한 곳이 먼저 차익을 내고 빠지려고 들 거예요. 그 순간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주가가 다시 폭락하게 될 테니 염려하지 말아요.”
“저희가 먼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그리 장담하십니까?”
재성은 손가락을 세워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한 달.”
“예?”
“한 달 안에 결판이 날 거예요. 날 믿어봐요.”
데이비드는 아무리 재성이라도 이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열심히 설득해 봐도 재성은 절대 뜻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데이비드에게 느긋하게 관광을 권하기까지 했다.
“이왕 서울까지 온 김에 주말 동안 푹 쉬지 그래요? 시간이 남으면 서울에도 멋진 관광지가 있으니 거길 둘러봐도 되고. 잠시 재충전한 다음에 도쿄로 돌아가면 딱 알맞겠네요.”
그러면서 재성은 몸을 일으켰다.
“이 객실을 빌려놨으니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은 여기서 쉬도록 해요.”
데이비드는 재성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권혁재 실장과 함께 문밖을 나선 뒤였다.
철컥 소리를 내며 잠기는 객실 문을 허망한 눈으로 쳐다본 데이비드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짱이 두둑한 건지 만용을 부리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쫓아가 설득해 볼까 싶었지만 저 모습을 보니 소용이 없을 듯했다.
“어쩔 수 없지.”
데이비드는 한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이러면 완전히 박살이 나더라도 끝까지 싸우는 수밖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보는 거다.
어차피 지난 몇 년간 평생 해보기 어려운 경험을 했고 돈도 충분히 벌어놨으니 여기서 은퇴한다고 해도 딱히 아쉬운 건 없었다.
데이비드는 도시를 뒤덮은 짙은 어둠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