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09
제109화
괴수들과의 전쟁은 언제나 피로 가득하다. 지금도 그렇다. 수백의 괴수들의 살점이 허공을 나부끼고 피 웅덩이들이 새하얀 눈을 붉게 적시고 있다.
기사들이 충혈된 눈으로 괴수들을 베어냈다. 놈들의 투기에 압박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서걱!
오크의 머리통이 초혼에 베여 바닥을 구른다. 투기가 일렁였다.
‘확실히 괴수들을 마주하니 투기의 운용이 쉬워지네.’
시꺼먼 투기가 번들거렸다. 4가지의 투기(鬪氣)를 합쳐 만들어낸 새로운 투기(透氣).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좀 더 진득한 살기가 투기에 실려야 했다.
파각.
실시간으로 빠르게 쌓이는 눈발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쟌과 소렌이 검귀와 싸우고 있었다.
‘투기 없인 못 이겨.’
놈은 이 설산에 있는 그 어떤 놈들보다 투기를 잘 다룬다. 검술은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기사들보다도 뛰어나다. 물론 나를 제외하고.
‘검을 두 개로 줄였다. 왜지?’
이상하리만치 검에 대한 자존심이 강한 녀석. 처음 보았을 때는 4개였던 게 이제는 2개로 줄어들었다.
지난번에는 제대로 맞붙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검을 맞댈 수 있게 된 건가.
우웅-
초혼이 울었다. 그 희미한 진동이 내게 말하고 있다. 아, 초혼은 지금 검귀가 들고 있는 2개의 검을 향해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게 보검이라도 되냐?”
우웅-
초혼이 또다시 울었다. 그 뜻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초혼이 분명 저 두 자루의 검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는 건 저 두 자루의 검도 초혼 못지않은 명검이라는 뜻이었다.
좋다. 투혼의 의지가 내게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다.
투기가 한껏 더 선명하게 샘솟는 느낌이랄까. 나는 그 감각을 몸에 되새기며 앞으로 내달렸다.
카앙!!
검귀의 검과 내 초혼이 맞부딪혔다. 시뻘건 검신과 회색빛의 검신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은 검들이었다.
‘저번에 싸울 때와 다른 검이군.’
검귀는 이상하리만치 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놈의 시선이 내 초혼에게로 향했다. 탐내는 것이다. 초혼을 말이다.
‘어림없지.’
검귀의 검술은 정말로 신기하다. 투박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하고, 또 새롭다.
인간들의 검술을 베낀 듯하면서도 새롭게 발전시킨 것 같은 형태의 검술.
괴수가 검술을 발전시켰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내 감상은 그랬다.
“크륵.”
검귀가 얕은 신음을 흘렸다.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다. 그렇겠지.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힘이 차이가 날 테니.
‘지금의 싸움이 내 투기를 한층 더 완벽하게 만들어줄 테고 말이지……!’
파앙!
나의 투기와 놈의 투기가 맞부딪히며 폭음을 자아냈다. 사방으로 바람이 일었다. 분수처럼 치솟은 눈덩이들은 시야를 가렸다.
투기가 점점 더 짙어진다. 서로 간의 적의와 살의가 더욱더 선명해지고 뜨겁게 일렁였다.
주변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눈앞에 있는 저 액체 덩어리를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만이 내 머리에 자리했다.
주변의 소음이 사라졌다. 고요함이 나를 덮쳐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리, 괴수들의 괴성, 기사들의 비명, 발소리, 바람 소리…….
하나둘 잦아들던 소음이 없어지고 검귀의 비릿한 얼굴만이 눈에 들어왔다.
놈의 끈적한 적의와 나를 죽이겠다는 강렬한 살의가 허공으로 솟구쳐 악마의 형상이 되어 일렁였다.
그에 맞춰 내 몸에서 잿빛의 무언가가 기사의 형상을 이루더니 검을 쥐었다.
악마와 기사가 부딪혔다. 치열하게 벌어지던 공방이 서로를 할퀴고 베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때마다 그 의념은 더욱더 커지고 강대해졌다.
‘아…….’
알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여기서 지는 쪽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몰락하게 되리라.
“윽.”
토가 쏠렸다. 지독한 압박이 나를 짓눌렀다.
북부의 수호신들이 만들어낸 투기가 얼마나 끔찍하고 위태로운 것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처음에 느껴졌던 그 울렁거림은 어느새 사라졌다. 내 몸이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크륵.”
기사의 검이 악마를 베어냈다. 악마가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몸을 떨어댄다.
서걱―!
툭.
초혼이 검귀의 왼쪽 팔을 베어냈다. 액체처럼 꿀렁이던 팔이 적색 검과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검귀가 눈알을 빙그르르 돌리더니 뒤로 물러났다.
자기가 흘린 저 검이 아쉬운 듯 시선을 떼지 못하는 듯하더니 잽싸게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쫓을 수 없었다. 지금 비대해진 이 기사의 의념을 가라앉히는 것만 해도 바빴으니 말이다.
콰아아아아아앙!!
머리 위로 무언가 날아들었다. 바람이 홱! 하고 지나가더니,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나를 짜릿하게 만드는 이 감각. 이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것은 분명 타이란트의 투기였다.
성채를 보았다. 웃음을 흘리며 히죽이는 타이란트가 첨탑의 꼭대기에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합군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들의 탄식이 사방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절망의 씨앗이 여기저기 발아하기 직전이었다.
‘절망의 씨앗……. 그래, 너였구나.’
나는 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메인 퀘스트가 말하는 절망의 씨앗이 저 녀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절망을 꽃피우는 게 놈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는 안 되지.’
놈과 시선이 마주쳤다.
‘고작 네놈 따위가 무얼 할 수 있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가소로웠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검귀의 적색 검을 집어 들었다.
“적장의 목을 땄다아아아아아!!”
그리고는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그러자 양옆에서 스테판과 아더 또한 소리쳤다. 두 사람이 맨이터와 좌궁우도를 이긴 것이다.
‘스테판 경은 그렇다고 해도, 아더는 의외인데?’
벌써 좌궁우도를 이길 줄이야. 아더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다.
나는 슬쩍 연합군의 반응을 보았다. 전염병처럼 퍼져가던 절망이 확산을 멈췄다. 아니, 오히려 사라지고 있었다.
“검귀가 검을 버리고 도망갔다! 적장 셋이 패배하고 우리가 이겼다! 연합군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기세를 놓칠 순 없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사기 증진은 기본. 내 뜻을 알아챈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이 나를 따라 소리쳐주었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그들을 내리누르던 절망이 옅어졌다. 그때 카리나가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새하얀 안개가 연합군을 뒤덮었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이 공간엔 연합군만이 존재했다.
괴수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타이란트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에 이런 마법이라니…….’
나는 나름의 감탄을 속으로 되뇌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때마침 나를 향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아주 잠시일 뿐.
냉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너무 나섰나?’
괜히 카리나의 심기를 건드린 건 아닌가 신경 쓰였지만, 그 생각은 금세 잊었다.
코헨 님이 나를 지목하며 북부의 영웅이라는 낯간지러운 칭호를 내뱉었다.
스테판 경 또한 그걸 받아 나를 치켜세웠다.
‘이거 분위기가…….’
어느새 연합군 전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대로 분위기를 망칠 수도 없고. 나는 별수 없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때마침 바닥에 떨어진 아인 바이에르의 깃발을 보았다.
‘이거면 되겠군.’
그리고 그것을 들어 올리며 한껏 소리쳤다.
“우리는 이긴다!!”
투박하고 간단한 말이었으나, 그래서 그런지 연합군의 함성은 더욱 거셌다.
* * *
포전드의 영주인 카메론 비어맷츠는 북부의 지원을 위해 사병 일천과 기사단 하나를 지원군으로 보냈다.
포전드의 대표 기사단 중 하나인 백마 기사단. 그 기사단의 단장인 데본 비어맷츠는 처음 북부에 올 때까지만 해도 불만으로 가득했었다.
‘내가 왜 자신의 영지를 버리고 도망간 놈들을 위해 싸워야 하는 거지?’
검술을 연마하기도 바쁜 시간에 북부로의 지원이라니. 너무 큰 시간 낭비였다.
연합군이라고 모인 기사들은 하나 같이 그저 그랬다. 로자리아 왕국의 정예 기사단이라더니, 제국의 일개 기사단과 딱히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나마 있었던 일말의 기대감조차 사라졌다. 데본은 차라리 괴수들과의 싸움을 검술의 양분으로 삼기로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금세 깨어졌다.
‘이게 무슨……?’
좌궁우도. 표범처럼 생긴 그 괴수는 왼손으로는 활을 쏘고 오른손으로는 도를 휘두른다.
원체 움직임도 빠르고 궁술과 도술도 뛰어났다. 접근조차 하기 힘들었고 괴수들의 싸움 방식은 더욱이 악랄했다.
죽음을 도외시한다. 목숨을 던져서 상대의 몸에 생채기를 내면 성공이었다. 놈들의 눈에는 광기와 악의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잠깐의 전투였지만 데본은 북부의 괴수들에게 확 질려버렸다. 북부군이 도망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저 멀리 괴수들의 껍질을 벗겨 대충 만든 듯한 복장의 인간들이 하얀 늑대를 타고 달려왔다.
“북부의 기상을 잃지 마라!”
북부군이었다. 선두에 선 이는 스테판이라는 북부의 전 사령관.
그가 좌궁우도와 맞부딪혔다. 압도적이었다. 좌궁우도가 제대로 힘을 못 쓰고 물러났다.
북부군의 실력도 대단했다. 괴수들의 저 악랄한 투기를 받아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검을 휘두른다.
‘이게 북부군……?’
첫 전투가 끝났다.
북부군은 괴수들을 몰아내고 수십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일말의 성취감이나 의기양양함 따위는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데본은 저게 허세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실력을 보았으니까.
“하, 하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왠지 모르게 열정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괴수들이 온다! 전투 준비하라!”
괴수 군단의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제법 넓은 지역에서의 전투였다.
선두에서 로자리아의 두 정예 기사단이 뛰쳐나가 괴수들을 도륙했다.
데본은 우선 잠자코 지켜보았다. 이전처럼 오만방자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네임드가 나타났다!”
좌궁우도와 별개로 두 놈의 네임드가 더 나타났다.
좌궁우도가 강한 편이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셋 중 가장 약한 게 좌궁우도였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저 검귀라는 괴수. 어설픈 인간의 형태를 따라 한 놈은 두 기사단장을 상대하면서도 여유로웠다.
‘어떻게 괴수 따위가 저런 검술을 펼치는 거지?’
두 기사단장이 검귀를 상대하다 밀려났다. 북부군이 뒤늦게 합류하여 그들을 구해냈다.
‘저 자는…….’
세 명의 북부군 간부가 네임드들을 막아섰다.
스테판은 북부의 사령관으로 북부 최고 검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 옆에서 좌궁우도를 상대하는 아더라는 기사도 사령관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검귀를 상대하는 건 스테판도 아더도 아닌 제삼의 기사였다.
“허…….”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검귀와 저 잿빛 머리의 기사가 검을 맞부딪힐 때마다 심장이 저릿하는 것만 같았다.
‘무슨 검술이 저리 아름다운 거지?’
검귀의 검술은 적을 죽이기 위한, 끊임없는 살육을 벌인 섬뜩함이 있다면.
저 잿빛 머리 기사의 검술은 아름답고 조화로웠다. 마치 자연과 어우러지듯 부드럽고 편안했다.
“저, 저 기사는 누굽니까?”
데본은 뒤로 빠진 쟌이라는 기사에게 물었다.
쟌은 데본을 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렌 아르젠이라고 하더군.”
“렌…아르젠? 아, 아르젠? 저 사람이 아르젠의 사람입니까?”
데본은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젠의 검사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근데 아르젠에 렌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데?
“들어 보니, 아르젠인데 아르젠이 아니라더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어릴 때 가문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했네.”
“예? 왜…….”
“그것까진 나도 모르네만. 그 이후로 브릴런트의 묘지기로 살아왔다고 하네.”
“그럼 저 검술은?”
“소문에는 독학이라고도 하던데……, 설마 그렇겠나?”
데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왜 아르젠인지 못 알아봤는지 이해가 됐기 때문이었다.
‘아르젠의 검술은 저렇지 않아.’
지금 보니 비슷한 듯하지만 다르다. 애초에 아르젠의 검사들이 내뿜는 그 패도적이고 거친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정말 저게 독학이라고……?’
그 순간 렌과 검귀에게서 투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곳에 있던 상급 기사급 검사들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둘의 그 강렬한 의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괴수들이 몸을 떨고 있다….’
렌의 존재감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었다.
‘미쳤다…….’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렌의 검술을 눈에 담기에 바빴다.
“개 멋있어…….”
데본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도 몰랐다.
옆에 있던 쟌이 헛웃음을 흘리며 데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이겼다!!”
렌이 검귀를 물리치고 놈의 적색 검을 치켜들었다.
소름이 돋았다.
데본은 그곳에 있는 그 어느 사람보다도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