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17
제117화
덜컹거리는 마차 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칼리 아르젠은 문득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휙 돌린다.
‘하씨!’
렌 아르젠. 고작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까먹고 있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북부에 다녀온 지금 그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 칼리. 북부에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후회해도 좋다면 말이다.
칼리의 아버지인 클레타 아르젠은 그리 말했었다.
– 너는 항상 직계가 아닌 것을 원망했었지. 맞다. 직계였다면 네가 할 수 있는 것들도 더 많아졌을 테지. 근데 직계가 아니라고 올라갈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인 것은 아니다.
– 렌은 너보다도 훨씬 어릴 때 가문의 도움 따위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났다. 강제로 떠밀리듯 간 게 아니다. 녀석의 의지였지.
그녀가 알고 있던 상식들이 북부에 다녀온 뒤로 완전히 박살 났다.
방계 출신으로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직계들은 다 배우는 결전기는 생각도 못 하고 절기를 배울 기회조차 흔치 않았다.
근데 렌 아르젠은 직계임에도 그 모든 권한과 기회를 발로 차고 스스로 가문을 떠났던 것이었다.
그의 재능이 부족해서 노력과 의지가 부족해서 떠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북부에서 증명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는 거지?’
항상 불만이 가득했다. 직계들은 가주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가문 내에서 온갖 지원은 다 받으며 어릴 때부터 실력을 키워나간다.
그에 반해 방계는 스스로를 증명하고 나서야 그나마 그들이 가진 권리 중 일부를 받아낼 뿐이었다.
근데 렌 아르젠은 그 어린 나이에 가문의 지원을 깡그리 포기하고 브릴런트에서 홀로 선 것이다.
‘나는……, 여태껏 뭘 한 거지?’
그녀는 스스로가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직계에 비해 재능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실력까지 올라간 것 또한 나의 온전한 노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검술은 물론, 궁술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며 기사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결국 타이란트까지 잡아내는 렌을 보고 박살이 났다. 그리고 그것은 곧 열등감으로 변모했다.
부정했었다. 그가 직계이기에 말도 안 되는 재능을 물려받아서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괴수 군단과의 전쟁이 끝나고 몸을 회복한 뒤에 렌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 붙자고? 왜? 억울하다고? 내가 직계여서?
– 한심하네.
옆에 있던 데본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렌까지는 갈 필요도 없다고 했다. 자신이 이겨주겠다며 붙자고 했다.
결과는 패배였다.
– 직계의 피가 부럽다고?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는 알아? 렌 경이 한 결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건지 네가 아냐고! 크, 큼! 렌 경을 옹호하는 건 아니고, 옆에서 보고 있는데 한심해서 말하는 거다.
데본은 그녀를 한참 꾸짖었다.
– 네가 아르젠에 있어서 모르겠지만, 직계뿐 아니라 방계가 받는 지원과 대우도 어마어마하다. 나 또한 귀족들치고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부유한 지원을 받았지만 그보다 못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네 처지가 얼마나 과분했던 건지 하나도 모르는군. 그러니 실력이 그 모양이지.
마치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수 백발의 화살을 한 번에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그녀에게 몰려왔다.
비슷한 나이대의 기사. 게다가 렌이 아닌 이에게 졌다는 사실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 의지가 중요한 거다. 상급 그 이상의 경지로 가기 위해서는. 큼! 마, 맞습…, 내 말이 맞지 않나? 렌 경.
그때부터였다. 렌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 게. 그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브릴런트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개화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얼마나 몰아넣었을지.
‘그런 의지력이 있었으니 저 경지에 도달한 건가? 나도…, 나도 렌처럼 되면 저 경지에 닿을 수 있을까.’
그녀가 다시 힐끔 렌을 보았다. 렌이 마침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여기저기 옮겼다.
“뭘 보는 거야?”
렌의 물음에 그녀가 그를 노려보고는 말한다.
“뭘 보든 무슨 상관이야?”
자기도 모르게 말이 사납게 나갔다. 습관이었다.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고.”
“흥.”
원래라면 더 사납게 쏘아붙였겠지만 렌과 더 싸울 맘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그녀의 마음속에 가장 닮고 싶은 인물로 렌 아르젠이 들어와 있었다.
* * *
로자리아 왕성의 알현실.
멜리사 여왕은 연합군의 승전보를 들으며 기분 좋은 나날을 보냈다. 왕국 내부에 흐르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도 북부의 소식 이후 상당히 가라앉았다.
“그래, 카리나. 북부에 갔다 온 소감은 어떻더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게 끝인가?”
“……렌 아르젠에 대해 듣고 싶으신 겁니까?”
“그래. 속 시원하게 말해보거라.”
북부가 괴수 군단을 몰아내고 아인 바이에르를 탈환했다는 소식이 왕국 전역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렌 아르젠. 그 이름이 어딜 가든 들려왔다.
카리나가 아닌 렌 아르젠이 연합군에게 승리를 가져왔고 연합군 전체에 공포를 심어줬던 타이란트란 괴수도 그가 잡았다고 말이다.
“북부를 구한 건 렌 아르젠이 맞습니다. 타이란트란 괴수는 마스터급의 괴수였고 놈을 잡은 건 온전히 렌 아르젠의 실력이었습니다.”
“마스터급의 괴수를 렌 아르젠이 잡았다? 다른 이들 도움 없이?”
“저를 포함해서 많은 상급 기사가 돕기는 했으나, 실질적인 도움은 크지 않았다고 생각되옵니다.”
“네가 그리 말할 정도라면 대단하구나.”
멜리사가 손으로 턱을 쓸었다. 잠깐 생각에 잠긴 듯 침음을 흘린 그녀가 카리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그렇다면 렌 아르젠은 북부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겠군.”
“예. 이미 북부의 사령관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렌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전우애 또한 깊어져 꽤 깊은 관계가 된 듯싶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지.”
멜리사는 이 상황이 재밌는 듯 얕은 미소를 지었다. 카리나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여겨 속으로 자책하고 있었고.
“죄송합니다.”
“아니, 됐다. 꼭 네가 마음을 얻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멜리사는 환하게 웃으며 카리나에게 손짓했다.
“고개를 들 거라.”
“예.”
카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 머릿결이 찰랑이며 흘러내리고, 보석이 박힌 것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멜리사를 빼다 박아 아름다웠다.
“너를 싫어하는 남자가 있겠느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스터급의 검사. 그것도 아르젠 가문이라면 배경도 출중하군. 인성은 네가 보인 반응을 보면 뭐…, 물어볼 필요는 없어 보이고 말이지.”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카리나가 표정을 굳혔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렌과의 만남을 재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북부는 현 대륙 최고 중요 지역이다. 왕국의 명맥을 길게 늘이기 위해서라도 그곳을 지키는 건 필수지.”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현 상황에서 북부의 주인을 바꾸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북부군뿐만 아니라 북부의 주민들 전부를 갈아치우는 게 아니라면 의미 없는 일이지.”
멜리사는 이미 머릿속으로 모든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아무리 보아도 이 선택만큼 최고의 선택지는 없었다.
“렌 아르젠은 다시 없을 북부의 은인이자 대영웅이다. 북부뿐만이 아니지. 로자리아 왕국까지 그가 지킨 것과 진배없다.”
“너무 과한 말이십니다.”
“정말 그리 생각하나?”
카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북부에 직접 다녀와 그 무지막지한 괴수들과 싸운 그녀로서는 부정할 수 없었다.
“렌 아르젠과 혼약을 진행하도록 하지.”
“폐하!”
“왜? 너도 싫은 건 아니지 않으냐?”
그녀는 카리나의 거부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상대의 의사도 모르고 이리 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어 그렇습니다.”
“너는 좋다는 뜻이군.”
“그게 아니라-.”
“좋다! 내 직접 렌 아르젠에게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지. 브릴런트에 정식으로 말이야.”
“폐하, 사실 지금 브릴런트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고 합니다.”
“알고 있다.”
멜리사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 정보쯤은 이미 진작에 멜리사의 귀에 들어온 지 오래였다.
“이미 지원군을 대기시켜 놓은 상태다. 렌 아르젠이 이미 먼저 출발했다지? 그렇다면 뭐 지원군이 필요할까 싶지만, 상황이 끝났다 하더라도 나쁘지 않겠지. 우리의 성의를 보이고 좋은 인상을 심을 수 있으니 말이다.”
카리나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조언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걸 또 한 번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었다.
“명을 받듭니다.”
* * *
“지원군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하인이 클레타의 집무실로 들어와 말했다.
“알겠다.”
창문 밖을 보니, 저 멀리 저택의 입구로 켈빈 로저스가 말을 타고 지원군의 마차를 호위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켈빈 로저스, 너는 도대체 무얼 본 거지?’
오래전부터 레브 쪽 세력이었다. 지난 3왕녀의 성인식에서 흑마법사 사태로 가문이 휘청이기는 했으나 자신의 아들을 직접 죽이며 멸문은 막았다.
1왕자가 이번에 손을 내밀었을 때, 원래의 켈빈 로저스라면 그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적어도 클레타가 아는 켈빈이라면 그랬다. 가문을 살리기 위해, 왕권과 가장 근접해 있는 레브의 손을 놓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켈빈은 레브의 손을 놓고 반대편에 섰다. 결과적으로 1왕자가 흑성과 완전히 손을 잡았으니, 좋은 결정을 한 셈이었지만, 켈빈이 그걸 간파했을 리는 없었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건가.’
그가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켈빈은 렌을 만나며 자신의 도박이 성공했음에 기뻐하고 있었다.
‘렌 아르젠……, 북부에 갔더니 대륙을 구한 영웅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들려오는 소문이 전부 믿을 만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소문의 절반만 해도 대단할 정도였다.
북부군을 공포에 몰아넣은 트롤 대족장의 목을 벴다고 하질 않나, 연합군 전체를 압도한 마스터급의 괴수를 홀로 잡아냈다고 하질 않나.
이번 지원군에 바란 제국의 기사단이 합류한 것도 단순히 렌에게 감명받아서 그랬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하물며 일선에서 물러났다던 트레비스의 행정관은 그 나이에 경지를 뛰어넘어 상급 기사 최상위에 이르렀으며, 트레비스 가문이 렌을 따른다는 건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다.
‘3왕자의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다. 지난 시간 동안 봤던 3왕자는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뛰어나고 잠재력이 있는 인물. 하지만 그 능력이 렌이라는 인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어.’
켈빈 로저스가 1왕자가 내민 손을 무시하는 선택은 가문에 있어서 정말 큰 도박이었다.
자칫, 1왕자가 왕권을 잡기라도 하면 로저스 가문은 그대로 끝이나 마찬가지기에.
하지만 그것은 지금에 와서 전화위복이 되었다.
‘앞으로 브릴런트는 3왕자와 렌을 중심으로 다시 개편될 것이다.’
지금 왕국을 점거하고 있는 흑성의 세력이 강하단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마스터급의 괴수를 이긴 렌이 왔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놈들이 무슨 수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의미 없다. 렌과 함께 왕성에 돌입하면 상황은 끝이다.
“도착했습니다. 렌 경. 내리시죠.”
켈빈은 마차의 문을 열고 렌을 에스코트했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렌은 당황스러웠다. 북부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켈빈 로저스는 이렇게 자신을 깍듯이 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물론 왕성에서의 일 이후로 그를 신경 쓰는 눈치기는 했지만.
“렌, 드디어 왔구나.”
그때, 저택에서 나온 루이즈가 다짜고짜 렌을 보며 그를 와락 안았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루이즈는 렌을 북부로 보내게 된 것에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었고 그가 그곳에서 벌인 활약은 하나도 빼먹지 않고 모두 챙겨 들었다.
그에게 너무 고마웠다. 그곳에서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고 무사히 돌아와 주었으니 말이다.
“아닙니다. 3왕자 전하.”
렌을 팔을 잡고 그를 떼어내며 눈을 마주쳤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북부에 가기 이전보다 더욱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경지를 넘어섰군.’
투기를 익힌 탓인지, 영력 때문인지, 감각 스텟이 높아져서인지.
단번에 느껴졌다. 루이즈가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
“회포는 다 끝나고 푸시죠.”
아직 마지막 결전이 남아 있었다. 악마가 깨어나기 전에 어떻게든 레브를 죽여야 했다.
‘설마 싶기는 하지만, 악마가 소환되면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최선은 악마가 소환되기 전에 레브를 죽이고 모리스 국왕을 구하는 것이다.
‘아쉽군. 북부에서 얻은 투기는 괴수들을 상대로만 사용할 수 있으니.’
아니, 어쩌면 악마도 괴수와 비슷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악마를 상대할 때도 투기를 끌어 쓸 수 있다. 그리되면 마스터급의 실력을 낼 수 있겠지.
‘최선은 그 전에 상황을 종료시키는 거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