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285
제285화
촤악―!
검붉은 핏물이 지면에 흩뿌려졌다.
치이익.
뜨거운 암석의 열기에 피가 말라붙고 머리가 떨어진 악마는 용암 속으로 떨어진다.
용암이 금방이라도 끓어 넘칠 듯 넘실댄다. 그 아래를 내려다본 렌과 아엘리나는 고민에 빠졌다.
“더 이상 죽일 악마도 없어.”
“그럼 남은 건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네요.”
이곳까지 올라오며 백이 넘는 마족들을 베고 정확히 스물의 악마를 죽였다.
이제는 정말 렌도 한계에 달한 상태.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했다. 제대로 먹은 것이라곤 그전에 챙겨두었던 열매 정도.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한 수준이었다.
“만약 아니라면 너는 그냥 무가치한 죽음을 맞이할 뿐이야.”
“맞다면 죽지 않겠죠.”
“그리 태평하게 말할 일이 아니라고.”
그녀는 진심으로 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느끼기에도 저 안쪽에 신검의 칼날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강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신의 힘과 악마의 힘이 교묘하게 섞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신검의 칼날이 아니라면, 어딘가에 숨어 있을 악마가 만들어둔 함정이라면?
그렇다면 렌은 그저 용암에 뛰어든 머저리가 될 것이고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대륙도 멸망하게 되겠지.
지금에 이르러서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렌 아르젠이라면 대륙을 침공한 악마를 막을 수 있음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가 없다면 대륙은 반드시 무너지리라는 것이었다.
“신검의 칼날을 얻는 일이야. 우선은 이곳에서 하루 정도 쉬고 가자.”
렌은 또다시 안 된다고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그녀에게서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느껴져서였다.
“너무 급할 필요 없어. 네 마음 알지만 그렇게 급하다가는 신검의 칼날은 영원히 찾지 못해.”
“알겠습니다.”
“이제야 내 말을 좀 듣는구나.”
“저는 항상 아엘리나 님의 말이라면 다 따랐습니다만.”
“말이나 못 하면.”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마법으로 지면의 온기를 낮췄다.
“여기라면 쉴 수 있어. 푹 쉬어.”
“감사합니다.”
렌은 그녀의 배려를 기분 좋게 받아들이며 잠을 청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악마가 나타나면 어떡하나, 용암이 갑자기 솟구치면 어떡하나, 별의별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서서히 긴장이 풀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렌은 잠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하루가 넘게 흐른 뒤였다.
“제가 그리 오래 잤습니까?”
“그래.”
렌은 다급히 주변을 보았다. 자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훨씬 개운해졌습니다.”
그간의 피로가 너무 심하게 쌓여서 그런지 하루 잔 정도로는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자면서 고민은 많이 해봤어?”
저 꿀렁대는 용암으로 들어갈 건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꿈에서 또 결계에 들어갔습니다. 그 옆에 아엘리나 님이 계셨죠.”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그곳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습니다. 100일 정도를 그곳에 있었는데, 그 시간 동안 아엘리나 님과 토론을 했죠.”
“그래서?”
“결국 들어갔습니다.”
“그 한마디면 될 걸 뭐 그리 장황하게 이야기해?”
그 말에 렌이 가볍게 웃었다.
긴장을 풀기 위함이었다. 직접 뛰어드는 일이었다.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일 터.
렌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저 안에 뛰어드는 게 맞을지 아닐지.
“들어가면 아마 나는 따라가지 못할 거야.”
“이제 헤어지는 겁니까?”
“그래.”
아엘리나의 목소리에 약간의 시원섭섭함이 담겨 있었다.
근 1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으니 그럴 법도 한가.
렌 또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마지막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갑니다?”
“가라, 가!”
다 포기한 듯 그녀가 소리쳤고 렌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뛰어들었다.
안쪽에 들어서니 바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몰아쳤다.
‘다르다. 여기는…….’
공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져 있다. 뜨거운 열기로 인해 발생하는 아지랑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위에서 보고 느꼈을 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차이.
곧장 초혼을 꺼내 기를 끌어올려 비틀린 공간을 찌른다.
콰직! 콰드득!!
용암에 빠져들기 직전.
그 표면 위로 유리창이 깨지듯 금이 생겨나며 용암이 부서져 내렸다.
그것을 둘러싼 유리창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가 어둠 속에 내려앉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과 흰색이 번갈아 가며 물결치는 듯한 무늬의 피부, 깊은 바닷속을 연상하는 듯한 검은 눈동자, 그 아래로 화장이 번진 듯한 다크서클.
허리까지 내려온 기다란 검은 머리칼과 굽어진 허리, 렌보다 두 배는 더 큰 키와 삐쩍 마른 몸과 긴 팔다리.
우울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렌에게 말했다.
“드디어 왔군.”
“넌 누구지?”
“나는 이 세계를 지배하며 슬픔을 관장하는 대악마, 돌로레우스다.”
렌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신검의 칼날이 아닌 대악마가 이곳에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그가 표정을 굳혔다.
아엘리나라도 옆에 있었다면 이 상황에 대해 물어봤을 텐데, 아쉽게도 그녀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
“나를 기다렸다는 게 무슨 소리지?”
“정확히는 너를 기다린 게 아니라 이곳에 올 놈을 기다리고 있었지.”
말을 하면 할수록 분위기는 더욱 우중충해지고 목소리는 심해로 가라앉았다.
“신검의 칼날을 찾으러 온 거잖아?”
“……그래. 신검의 칼날은 어딨지?”
“몰라도 돼. 네가 그걸 가져갈 일은 없으니까. 안 돼. 절대로.”
텅 비어버린 것처럼 공허한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린다.
마치 고요했던 바다가 출렁이는 듯했다.
“근데 왜 나를 기다린 거지?”
“보고 싶으니까.”
“뭐?”
“네가 좌절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그래야 내 세상이 더 고요해지니까.”
그리 말한 그가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을 가렸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뒤바뀐다. 잔잔하게 떠다니던 마기가 팽창하며 공기를 뒤덮었다. 숨이 턱 막혔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 안에 담긴 바닷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 듯, 답답하고 질척해진다.
공간의 모든 것들이 그를 잡고 끌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과연…, 대악마인가.”
렌은 파멸을 꺼내 들었다.
파직!!
뇌기가 솟구치며 사방으로 흘러 나가 그를 감싸던 마기를 밀어내고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르젠 검술 뇌신류(雷神類)
– 제4 검
– 뇌신 강림
파지지직!!
그의 몸으로 흘러든 뇌기가 심장에 모여들고 순식간에 혈액과 함께 뻗어간다.
[피의 주인]동시에 마력이 피로 스며들어 그것을 보조한다.
파밧!
렌의 온몸을 감싼 뇌기가 발광하고, 그의 안광이 전광을 내뿜었다.
카앙!!
돌로레우스의 꼬리가 렌의 파멸을 막아내며 격돌했다.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 둘의 격돌이 이어질 때마다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지축이 뒤틀리며 그 여파가 사방팔방으로 쏟아졌다.
공방이 이어질수록 그의 온몸에 있는 물결무늬가 진짜 물결처럼 파도쳤다.
흰색과 회색으로 된 바다가 출렁이듯, 그의 물결이 점점 거세게 진동할수록 그의 기세도 강해졌다.
그가 자신의 눈에 손가락을 올리고 다크서클을 집었다.
“눈물의 강.”
읊조리듯 그가 말함과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바다가 되었다.
“흡!”
출렁이던 바다에 빠질뻔한 렌이 바다의 표면을 발로 차며 뛰어올랐다.
스스로도 될 줄 모르고 시도한 것이 된 것이다.
하지만 놀랄 여유는 없다.
바다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놈의 마기와 진득한 악의를 느끼며 뇌기를 끌어올려야 했으니.
아르젠 검술 뇌신류(雷神類)
– 제1 검
– 뇌격일섬(雷擊一閃)
10번의 폭발과 동시에 가속하는 전격의 섬광이 바닷물을 밀어내고 아래로 밀고 들어간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섬광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밀려 나가는 바닷물.
드넓은 바다에 자그마한 구멍이 생겨나고 그 안에서 돌로레우스가 멍하니 다가오는 섬광을 바라보다가 얻어맞는다.
콰아아아앙!!
솟구친 바닷물이 렌의 시야를 덮음과 동시에 가라앉고, 배경은 다시 화산에 들어가기 전 악마들의 땅으로 바뀌어 있었다.
돌로레우스는 여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을 뿐.
‘이게 대악마인가?’
저 녀석이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만나왔던 악마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건 느껴졌다.
대륙에서 만난 악마들은 모두 하나 같이 누군가의 몸을 뒤집어쓴 강령 상태였지만, 이번엔 다르다.
진짜 악마를 마주한 느낌.
초월에 이르러 뇌신 강림을 제대로 펼쳐냄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이곳에 오기 전에 초월에 이르지 않았다면 조금 전 눈물의 강을 벗어나지도 못했으리라.
“하아아아아!”
그의 턱이 빠진 것처럼 벌어지고 그 안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렌이 피해 보려 했지만, 공간이 없었다. 뇌기와 바람을 일으켜 날려 보내는 것도 소용없었다.
화아악―!
검은 안개가 그를 뒤덮자, 세상이 바뀌었다.
렌이 눈을 떴다.
“응애!”
아이의 상태가 된 렌이었다.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당신의 아이예요. 그리고 지금은 갓난아기인데, 벌써 무엇을 알겠어요?”
렌의 어머니인 세이아가 플레처에게 따지듯 말했다.
렌은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머릿속에 기억도 나질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당시는 갓난아기일 때였으니까.
“재능이 없군.”
렌은 젊은 날의 플레처를 보았다. 분명 그의 눈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세이아는 그를 말리는 듯했지만, 그녀의 눈빛에도 분명 스치듯 아쉬움이 드러났다.
과거의 그였다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찰나였다.
‘어머니가 그랬을 리가 없어.’
이건 돌로레우스의 권능으로 발현된 기억의 일부를 형상화한 거짓이다. 이건 분명 그가 만든 환상에 불과하다.
“저는 그래도 렌이 태어나줘서 기뻐요.”
“나도 그러오.”
두 사람의 얼굴에 금세 애정이 드러났다. 정말로 렌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듯이.
렌은 혼란스러웠다.
장면이 바뀌었다. 밤이었다.
여전히 갓난아기인 렌은 누워 있고 그가 잠든 줄 아는 세이아와 플레처는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걱정돼요. 렌이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사는 것은 지장 없소. 하지만 아르젠의 기사로서는 부족하겠지.”
“아르젠의 기사가 되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당신의 아이가 이렇게 몸이 허약하다면…, 제 탓이겠죠. 제가 못나서 렌도 저런 건가 봐요.”
그녀가 렌의 허약함을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게 왜 어머니 잘못인가요. 그러지 마세요.’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봐야 할 뿐.
“당신 탓이 아니오. 나는 그 어떠한 것보다 당신이 중요하오. 그러니 울지 마시오.”
그리 말하며 세이아를 토닥이는 플레처의 원망 어린 시선이 렌에게로 향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며 렌은 정말 오랜만에 과거의 감정을 느꼈다.
쓸모없는 존재, 의미 없는 존재, 도움 안 되는 존재.
한때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며 얼마나 한탄했던가.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미안하고 무력하게만 느껴지던가.
‘나는…….’
장면이 뒤바뀌었다.
렌이 아직 가문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플레처가 렌에게 검을 들려주었다.
“검술은 검을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이것이 기본이다.”
파지법을 알려주고 몸에 힘을 주는 법을 알려주는 플레처의 얼굴은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아들에게 검을 가르쳐주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의무적으로 알려주는 느낌.
원래라면 훈련에 집중하느라 보지 못했을 얼굴이었다. 방금 본 플레처의 표정과 눈빛은 어린 날의 렌에게는 사각지대였다.
렌은 그런 플레처를 보며 정말로 그랬던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어린 시절에, 가문에 들어가기 전에는 플레처가 나름 자신에게 상냥했었다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가끔 그에게서 보였던 미소가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았기에 그렇게 생각했다.
가문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미소였고, 가문의 다른 직계들에게도 잘 보이지 않던 미소였다.
솔직히 다른 부분은 잘 기억나지 않아도 그때만큼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이건 거짓-.’
“식사하세요.”
때마침 세이아가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렌, 아버지에게 검술을 배우고 있었구나.”
그녀가 늘 그랬듯 상냥한 미소로 어린 렌을 대했다.
“네! 어머니!”
어린 렌은 대답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답이었다.
“금방 가겠소. 이 녀석이 아직 검을 쥐는 걸 헷갈려해서 말이오.”
플레처의 얼굴엔 부드러움이 가득했다. 물론, 그건 세이아를 향한 것이었다.
“그렇지? 렌? 자, 다시 해보자.”
어린 렌은 다시 플레처를 보았다. 그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 자리엔 상냥한 아버지가 존재했다. 렌이 기억하고 있던 그때의 아버지가. 그 당시의 장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빨리 오세요.”
“그러겠소.”
세이아가 떠나고 다시 둘만 남겨진 어린 렌과 플레처.
“다시 잡아봐라.”
플레처의 음색은 다시 단조로워졌고 렌은 검을 잡았다.
“웬일이지? 아까는 전혀 못 하더니.”
“잘했는데, 칭찬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플레처를 올려다보며 렌이 물었다.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검 잡는 건 누구나 하는 거다. 기뻐하지 말거라.”
플레처의 대답은 냉랭했다. 렌이 알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결국 그가 기억하고 있던 과거의 플레처의 애정조차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렌이 중얼거리는 걸 들은 플레처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당신 같이 약한 남자가 플레처 아르젠일 리 없다고.”
그리 말한 렌이 연습용 검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한 판 붙어봅시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