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88
00080 여학교의 유령 =========================================================================
미리암여학교는 올해로 개교한 지 삼 년째 되는 여학교로, 전교생 오십 명 정도의 작은 학교였으나 여학교로는 이미 명문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창립자는 김석란이라는 여류 사업가로, 본래 가난한 간호부였으나 금광 개발에 손을 대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무성한 여자였다. 금광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신식 여학교를 설립했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 자신의 세례명을 따서 학교 이름을 미리암여학교로 지었다고 했다.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나이나 외모, 결혼 여부 따위의 이야기는 전부 베일 속에 감추어진 채였다. 실제 학교의 운영은 경성 천주교여자청년회에서 담당했으며, 독신으로 신여성 교육에 일생을 바쳐 온 여류 교육가 박영순이 교장을 맡고 있었다.
김석란 자신이 천주교 신자인 탓인지 학교의 방침 역시 천주교 수도사의 그것처럼 상당히 엄격했다. 이성 교제는 물론이었고 그 외의 모든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은 모두 교칙으로 금지된 채였다. 때문에 인근의 남학교 학생들에게 미리암여학교 학생은 마치 절벽 위에 핀 꽃처럼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경성 안의 어떤 여학교보다 단연 세련된 신식 교복 역시 선망의 대상이었다. 흰 블라우스와 빨간 격자무늬가 들어간 스커트에 흰 양말, 검은 단화를 신은 미리암여학교의 학생들이 나란히 지나가면 남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일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해경은 턱을 괸 채 미리암여학교에 대해 실린 기사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대개는 학교의 설립 배경이나 교사들에 대한 것이었다. 크게 흥미로운 기사는 많지 않았다. 정숙이 말한 자살 사건은 작년 겨울의 일로, 단신(短信) 기사 하나가 전부였다.
― 경성부 가회동에 있는 미리암여학교의 학생인 김세란은 지난 팔일 새벽 한 시 경 학교 뒤편 동산에서 침대보를 찢어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는데 유서도 없고 가족과 급우도 원인을 모른다 하여 여학생의 심중 비관으로 짐작한다더라.
명문 여학교의 학생이 한밤중에 침대보를 찢어 목을 맬 정도의 일이 무엇이었을까. 해경은 그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한겨울의 깊은 밤, 기숙사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소녀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다. 잠든 동무들이 깨지 않도록 침대보를 가지고 잠옷 차림으로 눈이 내린 길을 밟으며 학교 뒤편의 동산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가져온 침대보를 찢어 나무에 걸고 거기에 목을 맨다. 잠옷 아래로 하얀 발이 몇 번 버둥거리고 곧 소녀의 몸이 늘어진 채 흔들린다……. 그 상상 속의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섬뜩한 것이었다.
“선생님, 귀신이라는 것이 정말 있나요?”
해경은 소화의 물음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숙의 말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굴에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해경은 소화를 보고 웃으며 되물었다.
“소화 양은 귀신을 믿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소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네에. 저, 그러니까 제사도 지내고 차례도 지내고 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요. 할아버지는 옛날에 귀신을 본 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동학 때 죽은 동네 친구 분의 귀신이었대요.”
“그렇습니까?”
“할아버지는 그 분이 돌아가셨는지도 모르셨대요. 타지로 가신 지 오래 된 분이라 소식이 끊긴 지도 한참이었어서요. 그런데 한밤중에 어떻게 알았는지 그 분이 술이나 한 잔 먹자고 집으로 찾아오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술상을 좀 봐달라고 하셨는데, 어머니 말로 할아버지가 아무도 없는데 잔을 두 개 달라고 하셨다지 뭐예요. 할아버지는 그 친구 분하고 밤새 술을 드셨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술을 달게 마신 적이 없으셨대요. 그런데 날이 새니까 그 분이 이제 가야 한다면서 내 생각이 나거든 어릴 적 자주 놀던 자남산 고목 밑에서 보자고 하셔서, 기분이 영 이상해 날이 밝고 그리로 갔더니 뗏장을 막 올린 무덤이 있더라는 거예요. 비석에는 그 분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요.”
소화가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했다. 해경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소화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그렇지요?”
배시시 웃던 소화가 곧 조금 풀이 죽은 표정을 했다.
“그런데 저는 아직 한 번도 할아버지나 부모님을 뵌 적이 없어요. 간절히 보고 싶으면 귀신이라도 꿈에 나와 준다는데……요즘은 어찌 생기셨는지 잊어버릴까 겁이 난답니다.”
“귀신이 무섭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는 그 친구가 귀신인 걸 알고서도 무섭다기보다는 고마웠다고 하셨어요. 무척 그립고 보고 싶었던 이라면 하나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아요.”
소화의 말을 듣고 있던 해경은 문득 누이를 떠올렸다. 꿈에서 만난 누나의 얼굴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형상이었다. 어찌 생기셨는지 잊어버릴까 겁이 난답니다, 하던 소화의 말을 다시 한 번 뇌어 본 해경은 쓰게 웃었다. 해경 역시 그날 누나가 자신에게 주었던 어릴 적 한 장 외에는 누나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볼 만한 것이 없었다. 만약 다시 만난다 해도 알아볼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마주치고도 스쳐 간 것이 아닐까……. 그 생각은 오랫동안 해경을 괴롭혀 오던 것 중 하나였다. 해경은 서둘러 머릿속을 지배하려는 생각을 떨쳐 버리며 말했다.
“귀신은 있다고 믿는 자에게는 있고 없다고 믿는 자에게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 걸까요?”
소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해경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 사건이 재미있는 것이지요. 한두 명이 본 것이라면 학교가 이리 뒤집힐 리 없지 않습니까? 여러 사람이 같은 귀신을 본다……그것도 목을 매어 죽은 동무를 본단 말입니다. 왜 보일까요? 있다고 믿기에 보이는 것이겠지요. 천주교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학교에서 아주 엄격한 천주교 교리에 맞춰 생활하는 여학생들이 집단으로 귀신을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이유가 무얼까요?”
“그걸 알아내는 것이 우리 일이겠지요.”
해경은 펼쳐 놓고 있던 미리암여학교에 대한 기사로 다시 눈을 돌렸다.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다 이성 교제가 금지되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학교 안이 금남(禁男)의 구역이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애초에 여학교에 들어가 자유롭게 조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해경은 어느새 찬장을 정리하고 있는 소화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연결하자 잠시 후 중년의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 미리암여학교 교무실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경성탐정사무소의 정해경이라고 합니다. 어제 미리암여학교의 이정숙 선생님께서 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고 방문을 하셨었는데요. 이정숙 선생님과 잠시 통화할 수 있겠습니까?”
해경의 말에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여자가 조금 당황한 투로 대답했다.
― 아, 아아, 네. 그런데 지금 이 선생이 수업 중이어서요. 연락을 드리라고 하지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해경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아 정숙의 연락을 기다렸다. 정숙에게 연락이 온 것은 한 시간 정도 뒤였다.
― 전화를 주셨다고요.
다급한 목소리였다. 막 뛰어온 듯 숨이 턱까지 찬 것을 애써 참는 투라, 해경은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네. 말씀하신 일에 좀 흥미가 생겨서요.”
― 그러면 언제 이리로 와 주실 수 있나요?
“방문은 언제든 가능합니다만 그 전에 미리암여학교의 교복 한 벌과 교과서 등 일체 물품을 준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뜻밖의 요구였는지 정숙이 해경에게 다시 되물었다.
― 교복과 책을 준비해 달라고 하셨나요?
“네.”
― 무엇에 쓰시려고요?
“미리암여학교가 금남의 구역이니 제가 직접 돌아다니며 수사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준비가 되시면 바로 방문을 하겠습니다.”
― 그건 지금 당장이라도 준비를 해 드릴 수 있어요. 언제 오실 수 있나요?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가볍게 넘길 만한 일은 아님이 분명했다. 해경은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 잠깐 망설였으나 사실 다른 방법도 없었다.
“가능하시다면 바로 방문하지요.”
― 기다리고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해경은 소화 양, 하고 책장 위의 먼지를 털고 있는 소화를 불렀다. 소화가 발돋움을 한 채 먼지털이를 흔들고 있다가 해경을 돌아보았다.
“네, 선생님.”
“지금 나와 함께 미리암여학교로 가지요. 괜찮습니까?”
“네, 그럼요. 그런데 제가 같이요? 제가 무슨 도움이 될까요?”
해경은 의아해하는 소화를 보고 빙긋 웃었다.
“이번에는 소화 양이 활약을 해 주어야 합니다. 신식 학교에 다녀 본 일은 없지요?”
“신식 학교에요?”
영문을 모르는 소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경이 대답 대신 따라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소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해경을 따라 나섰다. 택시를 불러 미리암여학교로 향하는 내내 소화는 무릎 위에 놓인 손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학교 앞에 도착한 해경은 교문 앞에 나와 서 있는 정숙을 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해경을 보자마자 반색을 하던 정숙이 해경의 뒤를 따라오는 소화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 아가씨는 사무실에서 일하던 아가씨 아닌가요?”
“맞습니다. 제 조수지요.”
“조수라고요?”
“어엿한 소녀 탐정이라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시지요.”
정숙은 무언가 묻고 싶은 것이 잔뜩인 얼굴이었으나 해경은 말을 잘랐다. 정숙이 아, 하고 입을 다물더니 앞서 걸어갔다. 소화는 그 뒤를 따르는 해경의 곁에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여기 와도 괜찮은 건가요?”
“물론입니다.”
해경은 딱 잘라 대답했다. 정숙이 두 사람을 안내한 곳은 비어 있는 음악실이었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고는 음악실의 문을 닫은 정숙은 창의 커튼까지 잡아당겨 치며 두 사람에게 의자를 권했다. 해경과 소화가 자리에 앉자 정숙이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도 세란이의 유령을 본 아이들이 있어요. 그 중 한 명은 아주 앓아누워 버렸답니다. 헛것을 본 것이 틀림없다고 하는데도 아이들이 몹시 불안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토록 다급하게 해경을 부른 모양이었다. 정숙의 말에 흠, 하고 고개를 약간 기울인 해경이 물었다.
“김세란 양은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사실 저는 세란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요. 저도 작년 가을에 여기에 왔거든요. 얼굴이 아주 예쁜 아이여서 몹시 눈에 띄었어요. 집도 잘 살았다고 들었고요. 아버지가 무슨 사업을 한다고 하더군요. 공부도 잘 해서 진도가 느린 하급생을 몇 명 맡아 따로 가르치기도 했어요.”
“자살을 할 만한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정숙이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하더니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어요. 그 정도로 친했던 것이 아니라서……다만 이상하게 조금 겉도는 느낌은 있더군요. 그래서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자살하기 얼마 전에 세란이의 언니가 학교에 새 영어 교사로 부임해 왔어요. 그 분이 오고 난 뒤에는 마음을 붙일 곳이 있어 보였는데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그리 되어 버린 겁니다.”
“언니가 교사로 있다고요? 김세란 양이 그리 된 뒤에도 아직 일하고 있습니까?”
“네.”
예쁘고 똑똑한 데다 집까지 잘 사는 여학생이 다른 동무들 사이에서 겉돌았다면 분명 이유가 없지 않을 터였다. 언니가 교사로 있는 와중에 유서조차 없이 자살해 버렸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 언니라는 분과 말씀을 나눌 수는 없겠습니까?”
“아마 지금쯤 수업이 끝났을 거예요. 이따가 제가 이야기를 좀 해 볼게요. 그나저나 저어, 말씀하신 교복과 책은 준비해 두었는데 그것은 어디에 쓰시려고요?”
“이 아가씨에게 입힐 겁니다.”
해경은 소화를 가리켰다. 곁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소화가 깜짝 놀라며 자기를 가리켰다.
“저, 저 말인가요, 선생님?”
“네.”
“이 아가씨에게 입힌다고요?”
정숙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해경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미리암여학교는 교칙이 매우 엄격한 것으로 압니다. 더구나 여학생의 자살이라면 아주 민감한 일이고요. 외부에서 남자가 들어와 여학생들에게 사정을 캐묻고 다닌다? 쉽지 않습니다. 학생들도 외부인을 경계할 테고요. 같은 여학생이라면 저보다 더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수사를 하시기 위해 이 아가씨를 학생으로 받아 달라는 건가요?”
“아니오. 이 아가씨가 직접 수사를 할 겁니다.”
해경의 말에 망연한 표정을 하고 있던 정숙이 눈썹을 좁히고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러면 잠시만……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정숙이 후다닥 음악실을 나갔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소화가 정숙이 나가기 무섭게 해경에게 물었다.
“선생님, 방금 그 말씀이 무슨 뜻이신지…….”
“말 그대로입니다. 소화 양이 이곳의 학생이 되어 다른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한 번 알아보라는 것이지요. 물론 허가를 해 주어야겠지만, 아마 지금 상황이라면 이 정도는 허가해 줄 겁니다. 경찰을 동원할 수도 없고 무당도 부를 수 없으니까요. 바깥에 소문이 나기 전에 해결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겠지요. 당연히 위험한 일을 하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무엇이든 이 일에 관련된 정보가 있다면 내게 전해 주면 되어요.”
소화가 얼떨떨한 얼굴로 해경의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숙이 돌아온 것은 잠시 뒤였다. 정숙의 뒤를 따라 두 명의 여자가 들어왔다. 한 사람은 오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갓 스무 살을 넘겼을까 싶은 여자였다. 정숙이 음악실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나이 든 여자 쪽을 먼저 소개했다.
“저희 교장 선생님이신 박영순 선생님이셔요. 교장 선생님, 이쪽은 경성탐정사무소의 정해경 씨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순이 고상한 태도로 목례를 건네며 인사를 했다. 해경 역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정숙이 젊은 여자 쪽을 가리켰다.
“이쪽은 세란이의 언니이고 영어를 가르치는 김세명 선생님이세요.”
세명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영순이 입을 열었다.
“이정숙 선생에게 대강 이야기는 들으셨겠지만 이 일에 학교의 존폐가 달려 있습니다. 지금도 이미 유령을 보았다는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고 있어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바깥에 말이 퍼지기 전에 이 일을 정리해 주셔야 합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학생을 잠입시키겠다고 하셨다면서요?”
그 말에 음악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화에게 쏠렸다. 소화가 우물쭈물하다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영순이 못 미더워하는 얼굴로 소화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그리 하지요. 저희 입장에서는 무엇이든 해 보아야 하니까요.”
해경은 소화 쪽을 보며 말했다.
“박소화 양입니다. 제 조수로 일하고 있고요. 저는 지금부터 소화 양의 오빠이고 젊은 사업가인 박재한을 연기할 겁니다. 인천에서 이리로 왔고, 여동생을 명문 여학교에 전학시키러 온 거지요. 이 일은 여기 계신 분들 외에는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소화 양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기숙사에서 생활할 겁니다. 여기 계신 세 분은 진짜 학생처럼 소화 양을 대해 주셔야 하고요.”
“그건 문제없습니다. 신식 공부는 해 본 적이 있나요?”
영순의 물음에 소화는 주눅이 든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경은 얼른 소화 대신 대답했다.
“신식 교육은 받은 적 없지만 머리가 아주 좋은 아가씨라 수업을 따라가기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좋아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김세명 선생님과 이야기를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영순이 선선히 그러지요, 하고는 정숙과 함께 음악실을 나갔다. 해경은 세명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세명이 해경을 바로 마주보았다.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눈빛이 몹시 강한 것이 인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해경이 입을 열었다.
“김세란 양에 대해 묻게 되어 죄송합니다. 세란 양이 자살을 결심할 만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세명은 그 말에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닌 동작이었으나 거기에는 희미한 고통이 느껴졌다. 침묵하던 세명이 대답했다.
“세란이가 자살할 아이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어요.”
“학교에서 겉돌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남과 쉽게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을 뿐이에요. 친절하고 상냥한 아이였습니다.”
“자살이 아니라면 짐작가시는 것은 있습니까?”
세명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해경은 흠, 하며 가벼운 숨소리를 뱉었다.
“세란 양에 대해 잘 아십니까?”
“……부끄럽지만 세란이와 저는 오래 떨어져 있었어요.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세란이는 조선에 남아 있었고, 저는 외국을 돌아다니며 몇 년을 지냈거든요. 작년 말에 돌아와 때마침 세란이가 있는 학교에서 교사를 구한다기에 세란이와 친하게 지내려고 지원을 했던 것입니다.”
세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그리 잘 알지는 못하는 자매 사이라면 분명 세명이 모르는 어떤 이유가 존재할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리 알고 저희도 일을 시작하지요.”
대답한 해경은 소화를 돌아보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소화는 약간 상기된 채 손끝을 뜯고 있다가 해경의 표정에 애써 웃는 얼굴을 했다.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소화라면 어떤 일이라도 잘할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경은 마음에서 고개를 쳐드는 작은 불안감을 누르며 마주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