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280
621화 궁녀의 죽음 (1)
2월이 되어 봄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아직 온갖 꽃들이 하늘을 향해 활짝 피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훌륭한 솜씨를 가진 사람들은 천 위에 금실로 아름다운 꽃들을 새기며 봄기운을 심어 넣고 있었다.
첫날 동궁 황후가 주문한 서양 옷감이 마침내 황궁에 들어왔다. 전부 몇 장이 되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양에 황궁 태감들이 달려들어 힘을 써야 했다. 황궁 밖에서 천을 주문해 들여온 사람은 홍죽이었지만 힘을 써야 하는 사사로운 일을 직접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동궁 정전에 서서 황태자가 자리에 없는 걸 주의하면서 향로의 동판을 조심이 꺼내 향이 너무 빨리 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궁녀에게 황후께서 좀 있으면 책을 읽으러 나올 것이니 빨리 평상 위에 세 겹으로 된 솜이불을 깔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향기로운 바람이 불자 발이 열리면서 눈썹은 짙고 입술을 붉은 봉안 눈을 한 황후가 지친 모습으로 나왔다. 낮은 평상에 기대앉은 그녀가 잘 우려진 꽃차를 마시며 손에 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담박서국의 소설집이었다. 황후는 비록 범한을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고 두려워했지만 그렇다고 국모로서 취미 생활을 적게 누리고 싶지는 않았다.
책 몇 장을 대충 훑어보던 황후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미간을 찌푸렸다.
홍죽은 황후 뒤에서 안마해주고 있었는데 주먹을 쥐고 있는 손이 무척이나 깨끗했다. 그가 황후의 허약한 몸을 규칙적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황후는 평소 홍죽의 세심한 시중을 좋아했고, 특히 그가 등을 안마해주는 시간을 무척이나 즐겼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처럼 두 눈을 감고 안마를 즐기지 않고 멍하니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후마마,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홍죽이 살며시 웃으며 물었다.
황궁 안에서 태감과 궁녀들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와 다를 게 없는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황후와 같은 황궁 사람들이 기분이 안 좋으면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저 겁에 질려서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게 피하기 급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홍죽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범한에게 가르침을 받은 데다가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누리며 사는 황궁 귀인들의 삶은 겉으로만 좋아 보일 뿐······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황궁 안에서 답답해하고 외로워했으며 끊임없이 앞날의 안위를 걱정했기에 누군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했다.
홍죽은 어서방에서 심부름을 할 때도 일반 젊은 태감들과는 달랐다. 그는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비천한 신분이라는 걸 잊지 않았지만······ 행동은 과감하고 소탈했다.
사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황궁 안에 귀인들은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지만, 신분상 마음을 털어놓고 교류할 친구를 가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귀인은 옆에서 시중을 드는 젊은 태감이 소심하게 행동하는 것보다는 친근하게 대해 주는 걸 더 좋아했다.
홍죽은 황후를 포함한 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 과감하고 소탈하게 행동했다.
황후는 이미 이런 홍죽의 태도가 익숙해진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황궁 생활이 짜증이 나서 그러네. 장 공주께서 이틀 동안 명상에 잠겨 계시니 만날 기회를 가질 수가 없어.”
홍죽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노비가 말동무를 해드려도 되지 않습니까.”
노비라고 자신을 칭하기는 했지만, 표정은 비천한 노비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하찮은 노비이면서 감히 주인의 생각을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너랑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참! 며칠 전처럼 어린 시절에 밖을 떠돌아다니면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겠니?”
황후가 재미있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탐관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한 홍죽은 형과 함께 교주로 도망쳤고, 이후 몇 년 동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이에 그는 귀족 집안에서 성장한 황궁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린 나이에 세상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했다.
더욱이 그가 말하는 거지들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나 세상에 떠도는 소문, 백성들이 먹고사는 이야기들을 황후에게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신선하고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홍죽은 과거 세상을 떠돌며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기생집과 관련 있는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은 황궁이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이 나라의 국모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노골적인 표현은 피해 말했다.
그리고 황후는 눈동자를 살짝 떨면서 옅은 미소를 짓는 게 홍죽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재미있는 모양이었지만, 애써 하품을 하며 그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숨겼다. 황후 뒤에 있어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보지 못하는 홍죽은 자신이 계속 이야기하게 황후가 놔두는 게 약간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나이가 어린 홍죽은 신성하여 함부로 건들 수 없는 황후도 시장에 있는 아낙네들과 생각하는 게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지 못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황후가 탄식하며 말했다.
“민간에서 심한 고생을 하면서 흔치 않은 일들을 많이 보고 살았구나.”
홍죽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고생이야 많이 했지요. 마마처럼 존귀한 분들은 어렸을 때······.”
순간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 황후의 눈빛이 빛을 잃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사촌 오라버니였던 지금의 황제 폐하와 함께 놀았던 시간을 떠올리고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어서 그녀는 자신의 가족이 경도 피의 달 때 당한 일들을 떠올리고는 원망과 슬픔에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황후의 속눈썹이 흔들리는 걸 곁눈질로 주시하던 홍죽이 단어를 조심히 가려가며 화제를 바꾸어 어린 시절 황후가 항상 가지고 다녔던 물건이 뭔지를 물었다.
비천한 노비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써 울분을 참고 있던 황후는 홍죽의 말을 듣자 마음이 한시름 편해졌다.
이후 여러 차례 말이 돌고 돈 끝에 홍죽은 황후가 자연스럽게 황궁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옥결을 떠올리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황후가 그 옥결을 크기를 손으로 가늠해 보며 웃었다.
“그 옥결은 색이 정말 아름다워. 물론 대동산에서 생산하는 헌상품과 비교할 수 없지만 왕후가에서는 구하기 힘든 품질이었지······. 게다가 선황이 본궁 집안에 하사해 주신 거라서 황제의 제식도 새겨져 있어. 그래서 밖에 드러내 놓지는 못하고 항상 옷 안에 숨겨두고 다녔지.”
황후가 무의식적으로 두꺼운 겨울옷에 가려진 자신의 명치 부근을 매만졌다.
홍죽이 살며시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거들었다.
“황궁에서 마마께서 차고 다니는 걸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옥결은 무척이나 윤이 나고 아름답지만 수청아라 얇아서······ 이전에 집안에서는 항상 차고 다녔는데, 지금 본궁에게는 맞지 않아.”
홍죽이 비위를 맞추었다.
“절세미인이신 마마의 아름다움은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니 수청아를 차고 다니 서도 어울릴 겁니다.”
황후의 표정이 순간 굳더니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말하는 게 갈수록 제멋대로구나!”
홍죽은 화들짝 놀라 재빨리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의 눈에 황후의 입가와 눈가에 만족한 미소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 * *
황후는 어제 옷감이 황궁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옷감은 황궁의 정해진 규정에 따라 각 궁에 보내졌다. 황태후가 가장 먼저 받았고, 이후 각 후궁들에게 보내졌으며 가장 마지막으로 장 공주가 있는 광신궁에 보내졌다. 비록 황후는 시누이가 싫었지만 자신의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신경을 썼다.
동궁 뒤채는 옷감을 나누느라 분주했지만, 황후를 모시는 홍죽은 할 일이 없었다. 그저 한가롭게 문밖에 서서 호리호리한 몸매의 궁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가 눈으로 궁녀의 풍만하면서 살짝 올라간 궁둥이를 훑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허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가 놀라 고개를 숙이자 미모가 아름다운 궁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수아, 너 미쳤어!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 조심해야지! 여긴 황궁이라고!”
감히 동궁 수령 태감을 꼬집을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젊은 궁녀는 범한도 이전에 들어본 적 있는 수아라는 궁녀로 홍죽의 외로운 황궁 생활 중에 찾은 동료였다.
수아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투덜거렸다.
“그러는 너는 어딜 보고 있는 건데? 너야말로 여기가 황궁이라는 걸 잊은 거 아냐?”
홍죽이 ‘히히’ 소리를 내며 웃으며 ‘눈으로 보기만 했는데도 질투하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어떤 일이 떠오른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
그리고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각 궁전에 옷감을 보내려는 건 아니지?”
그가 놀라는 이유를 모르는 수아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미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아니고······ 마마께서 갑자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을 기억하시고는 나보고 창고에 가서 찾아보라고 하셨어.”
홍죽이 마음을 놓으며 조심히 물었다.
“무슨 물건인데?”
“얇은 청색 옥결이라던데.”
수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누가 마마에게 그 물건을 기억나게 한 건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물건을 내가 무슨 수로 찾아낼 수 있겠어? 설마 찾지 못했다고 혼내시지는 않겠지?”
홍죽이 기뻐했다. 그가 한 말이 마침내 효과를 발휘해 황후가 옥결을 찾을 생각을 한 것이다.
이때 궁녀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두 사람 옆으로 걸어왔다.
수아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
“왜 웃는 거야?”
궁녀가 혀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두 분이 웃기니까 웃는 거죠.”
경국의 황실은 백성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화려하거나 훌륭한 곳도 아니었고, 허구의 소설처럼 어둡고 공포스러운 곳도 아니었다. 게다가 동궁의 황후는 자신이 힘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세심하게 곳곳을 신경 썼고, 궁녀와 태감들에게도 비교적 부드럽게 대했다.
홍죽 역시 세심하고 신중한 성격이라서 수령 태감이 되고도 아래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이에 궁녀가 두 사람을 가지고 스스럼없이 놀리는 것이었다.
“저건 어디로 가는 거지?”
홍죽이 옷감 묶음을 안고 궁녀 뒤를 따라오는 어린 태감들을 발견하고는 웃으며 물었다.
궁녀가 빙그레 웃으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저건 광신궁에 보낼 것입니다.”
홍죽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가보라는 표시를 했다.
그 궁녀의 이름은 왕추아로 성씨를 가지고 있다는 건 동궁 안에서 비교적 총애를 받는 사람이라는 걸 설명했다. 어린 태감 두 명을 데리고 광신궁에 도착한 그녀는 장 공주 마마의 습관을 알고 있었기에 어린 태감들은 밖에서 기다리게 한 뒤 혼자서 옷감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오자 안에 있던 장 공주를 모시는 궁녀들이 나와서 맞이해 주었다. 황후를 대신해 온 사람인만큼 장 공주도 궁녀에게 몇 마디 덕담해주고 황후의 안위를 물은 뒤 돌려보냈다.
광신궁 안이 조용해지자 장 공주가 병풍 뒤로 가서 얼굴 가득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태자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세 가지 계책은 모두 외웠니?”
황태자가 얼이 빠진 눈빛으로 장 공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쉽게 부서지는 옥석을 쥐는 것처럼 장 공주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는 자신의 볼이 갔다 대고 비비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건아는 이미 모두 다 외웠습니다.”
장 공주가 손으로 그의 미간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황태자의 눈썹 언저리에 있는 익숙한 흔적을 바라봤다. 순간 마음이 슬퍼진 그녀가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외운 걸 들려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