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52
893화 길고 긴 밤 (1)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범한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구나 그분은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게 이렇게나 어렵단다.”
진평평이 처음으로 범한 앞에서 한숨 섞인 이 말을 뱉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폐하를 과소평가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을 실행하기 전이나 실행하면서도 항상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조금의 실수도 하지 않으려 했어. 설사 실패하더라도 어떤 흔적도 남겨서는 안 됐고, 더더욱 너를 연루시킬 수도 없었다.”
진평평을 바라보던 범한의 마음속에 순간 공경심이 강렬하게 치솟았다. 그는 눈앞에 있는 절름발이 노인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진평평이 그에게 많은 일을 솔직하게 알려 주었기에 황궁 깊은 곳에 있는 황제 폐하보다도 진평평이 한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암암리에 황제 폐하와 맞설 계획을 세우면서 황제 폐하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진평평밖에 없었다. 감찰원의 창시자인 그의 음모 방면에서의 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억지로 상황을 계획하지 않고 천하대세가 흘러가는 대로 따르면서 이따금 수완을 부려 황제 폐하와 경국을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황제 폐하 역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모든 음모와 위기를 간단하게 돌파해 냈다. 하지만 진평평이 정말 대단한 부분은 일이 실패했음에도 조금의 빈틈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주 오래전에 퇴로를 계획해둔 상태였다.
진평평은 자신의 생사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마음에 두고 걱정하는 건 자신이 죽은 뒤 범한의 안전이었다. 그래서 현공 사당에서 그림자가 계획과 달리 범한을 공격한 뒤 그는 이 모든 걸 계획하기 시작했다. 산골짜기 습격 사건부터 황궁 안에서의 그 일까지 모든 건 범한을 자신과 분리하기 위해서였다.
설사 나중에 모든 일이 발각된다고 하더라도 진평평과 분리된 범한은 무사할 거였다. 설사 진평평이 벌인 일들에 대한 증거를 가까스로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황제 폐하는 진평평이 정말 범한을 죽이려 했다고 믿을 것이니 범한은 진평평이 저지른 일로 인해 화를 입을 수 없는 거였다.
진평평이 무슨 이유에서 범한을 죽이려 했는지는 황제 폐하가 알아서 고민할 문제였다. 범한은 현공 사당 사건에서 중상을 입고 하마터면 죽을 뻔했고, 산골짜기 습격에서도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제시하는 의미는 너무나도 강렬했다.
진평평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게 된 범한이 노쇠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진평평이 오늘 평온하고 참신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를 깨닫고는 너무나도 감동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진평평이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 일들은 3년 전에 너도 이미 알고 있던 것이지. 그날 진원에서 비슷한 말을 해놓고 오늘 또 다시 찾아와서 같은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폐하께서 의심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대인이 동이성에 해놓은 일도 있지 않습니까.”
범한이 말했다.
“대인께 이런 일들을 알려드리러 온 겁니다.”
“동이성 일은 3년 전에 계획해 놓은 것들이다. 네가 손을 놓으라 해서 이미 손을 놓은 사항이야.”
진평평이 웃으며 말했다.
“대인께서 모든 일에 손을 놓으신다면 저는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범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저를 감찰원 원장 자리에 앉히려 하시니 대인께서는 완전히 물러나셔야 합니다.”
“완전히 물러나라고? 지금도 이미 완전히 물러나 있지 않니.”
그 말에 범한이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제 앞에서 당당하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대인께서 물러나려 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10년 동안 원장 자리에 있어도 감찰원은 여전히 대인의 것일 겁니다.”
“음, 아니야.”
진평평이 다시 웃으며 호탕하게 말했다.
“감찰원의 폐하의 것이야.”
“음, 아니지요.”
범한이 진평평의 말투를 따라 하며 한숨을 쉬었다.
“감찰원의 2할은 폐하의 것이고, 3할은 저의 것이지만, 나머지는 전부 대인의 것입니다. 영원히 대인의 것이지요.”
범한은 감찰원에서 오래 일을 했기에 자신의 앞에 있는 절름발이 노인이 감찰원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황제의 개인 특수 기구인 감찰원은 이미 진평평의 개인 기구가 되어 있었다. 진평평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감찰원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황제 폐하가 자신이 가장 믿는 충신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감찰원에서 가장 높은 위신을 가진 진평평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관리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범한은 만약 황궁에서 교지를 내려 진평평을 공격해도 언약해나 7처 대머리 수장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진평평의 편에 설 거라고 확신했다.
모든 게 경국을 위해서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감찰원 안에 있는 평범한 말단 관리들에게 경국은 아마도 황제 폐하를 지칭하는 것이겠지만, 진정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중급 이상의 감찰원 관리들에게는 진평평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음······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게냐?”
진평평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범한을 향해 물었다. 마치 일상을 물어보거나 두 감찰원 원장끼리 업무를 주고받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진평평의 질문에 범한이 울상이 된 얼굴로 대답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언빙운을 만나 감찰원 여덟 처와 각 군에 있는 4처 지점에 손에 넣어 대인이 감찰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끊으라 명령했습니다······.하지만 만일 대인께서 손을 거두려 하지 않으신다면 저와 언빙운은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언빙운에게 제 아비를 상대하라 했단 말이냐?”
진평평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대단하구나. 언빙운이 늙은이들을 상대한다면 분명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진평평이 말한 늙은이들이란 감찰원 고위 관리들로 진평평에게만 충성하는 사람들이었다.
범한이 진평평 앞에 앉아 그의 주름진 손을 가볍게 잡으며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제 그만 손을 놓으십시오.”
“너나 놓거라. 내 손을 잡고 뭘 하려는 게냐?”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찰원에 뻗어 있는 내 손을 자르려 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보장하건대 늙은이들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힘을 발휘할 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내용이었다. 늙은이들은 감찰원이 세워지고 처음으로 배출된 인재들이었다. 이들이 오랜 시간 감찰원에 있으면서 키워낸 제자가 얼마나 많은지는 가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니 늙은이들을 모두 깨끗하게 제거한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범한이 속으로 욕을 하며 노기등등한 얼굴로 말했다.
“대인과 저는 몇 년 동안 잘 지내왔지 않습니까. 제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저와 싸우려 하시는 겁니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네가 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거다. 내가 왜 손을 놓아야 하는 게냐?”
진평평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범한이 잠시 생각한 뒤에 설명했다.
“폐하께서 이미 산골짜기 습격 사건과 현공 사당 일을 조사하기 시작하셨으니 언젠가는 대인을 의심하게 되실 겁니다. 설사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상황이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대인께서도 황궁 안에서 많은 사람이 죽은 이후 폐하의 성정이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만약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폐하의 마음속에 의심이 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강력한 수단을 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요.”
정확한 말이었다. 감찰원은 황제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힘 중 하나였다. 특히나 진평평에 대한 황제의 믿음은 각별했다. 그러니 만약 황제가 진평평이 다른 마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엄청난 분노를 쏟아낼 거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니.”
진평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나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니 설사 의심이 들더라도 직접 움직이려 하지 않으실 것이야. 그저 내가······ 죽기를 기다리시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인이 쉽게 돌아가시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지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돌아가시지 않는 것도 좋습니다. 대인은 죽을 마음이 없으시잖아요. 그러니 저는 대인에게 경도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시라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진평평이 웃으며 농담조로 욕을 몇 마디 내뱉고는 물었다.
“만약 내가 물러나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쩔 생각이냐?”
“그럼, 제 방식대로 움직일 겁니다.”
범한이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말했다.
“감찰원에 큰 혼란이 일어나는 걸 감수해서라도 대인과 싸울 겁니다.”
“무슨 명분으로 싸우겠다는 거냐?”
“당연히 산골짜기 습격 사건의 배후에 원장 대인의 흔적이 있다는 걸 조사해 황자로서, 그리고 다음 감찰원 원장으로서 대인을 사지로 몰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는 계속 설명했다.
“제가 이길 수 있을지는 상관없습니다. 제가 이 사건을 조사해 직접 나서는 걸 폐하께서 보시면 교지를 내려 원장 대인을 경도에서 내쫓으실 테니까요. 그럼 제가 원하는 바를 분노로 감출 수도 있고, 대인의 목숨도 지키면서 폐하와 대인 사이의 우정도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진평평이 하얗게 센 눈썹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이런 일들을 이용해 언빙운을 설득한 거냐?”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존재하지 않는 원한을 사용해 내재하는 진정한 위험을 덮겠다는 거구나.”
진평평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제 보니 이전보다 훨씬 발전했구나.”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한 달 동안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다가 궁정에서 산골짜기 습격 사건을 조사한다는 걸 알았을 때 이 점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평평이 피곤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범한이 걱정하고 있는 게 뭔지 알았고, 그래서 범한이 이처럼 많은 일을 벌이면서까지 자신을 경도에서 쫓아내려 하는 이유도 알았다. 범한이 조금 전에 감동했듯이 외로운 삶을 살아온 특수 기관 수장은 마음속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내가 경도를 떠나도록 하마.”
진평평이 범한이 손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이 활짝 웃으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일은 문제가 없습니다. 현공 사당 일이나 산골짜기 일에서 저는 하마터면 대인의 손에 죽을 뻔했으니까요. 궁정에서 뭘 조사하든지 대인이 침울해하며 경도를 떠난다면 모두 설명이 될 겁니다.”
“그때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네가 진원을 찾아와서는 내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때 범한은 진평평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들을 꾸미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훗날 장 공주가 지적을 받은 뒤에야 그는 비로소 진평평의 진정한 의도와 그동안 조심스럽게 두 사람의 사이를 떼어 놓으려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태평 별궁 살인사건은 진업이 저지른 짓이지요.”
범한이 갑작스럽게 이 말을 했다.
진평평이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진업은 폐하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한낱 개일 뿐이었어.”
범한이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씨 집안이 마지막에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저 때문입니까?”
“그렇다. 네가 섭경미의 아들이라서지.”
진평평이 웃으며 말했다.
“진업, 그 늙은 개가 한 일을 폐하께서 오랜 시간 비밀로 숨겨 주셨지만, 진업은 폐하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어. 만약 폐하가 너를 계속 중용할 생각이라면 네가 그 일을 진상을 알지 못하길 바라실 게 아니냐······. 그런데 진업은 그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허점이었어. 폐하께서 너를 키우시고, 부자의 정을 지키려 하신다면 그 일의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의 입을 모두 막으려 하셨을 거다. 그리니 진업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