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661
1002화 그렇습니다, 폐하. (2)
노비라는 두 글자와 노골적으로 원망과 멸시를 드러내는 황제의 목소리를 듣자 범한은 눈앞에 검은색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절름발이 노인이 떠올랐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황제를 노려보더니 이를 악물며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께서는 누구보다도 영민하시고 무예 실력도 드높은 분이시니 잘못은 모두 다른 사람의 탓이겠지요. 다만 소신이 이해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제 불쌍한 어머니께서는…… 도대체 어쩌다가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까?”
범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황제의 차가운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 늙은 개를 포함해서 경국의 쇠락을 바라는 놈들은 모두 오늘 어서방 안에서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을 거다. 네 놈은…… 그런 놈들을 실망하지 않도록 그들 바람대로 움직이면서, 짐을 실망하게 하고 있구나. 네 놈이 이토록 멍청하니 가르쳐 줘야겠지.”
범한이 한 번 눈을 꽉 감은 뒤 다시 떴다. 눈동자에 번쩍이던 분노는 사라지고 침착함이 돌아와 있었다.
“소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서 그럽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생각하지 말 거라.”
황제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오늘 범한에게 실망한 게 분명했다. 그는 범한이 섭경미의 죽음을 물었을 때 가까스로 의식의 바다 가장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그것이 떠오르지 않도록 억제했다. 그가 범한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짐의 앞에서 네 놈을 어디까지나 신하일 뿐이다. 그러니 짐은 네 놈이 쓸데없는 생각을 계속하도록 놔둘 수 없다.”
이건 위협이 아니라 아주 간단한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었다. 장 공주가 이전에 범한에 대해 평가했듯이 범한은 겉으로 보기에는 차갑고 무정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이 많아서 약점도 많았다. 과거 경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장 공주는 이미 뜻을 이뤄 굳이 범한의 약점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황제 폐하는 달랐다. 범한의 약점을 이용해 숨통을 조이는 건 그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차갑고 매정한 황제의 말에 범한이 몸을 꼿꼿이 폈다. 그가 지금껏 황제 아버지 앞에서 보인 적 없었던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폐하께서 그동안 소신을 잘 대해주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오늘 어서방 안에서 두 부자는 연기하지 않고 자신이 가장 말하고 싶어 하는 진심을 솔직하게 말했다. 특히 범한은 처음으로 당당하게 몸을 세우고 몇 년 동안 폐하와 함께한 일들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자신의 솔직한 진심을 털어놨다. 어서방 안에 난로가 우는 소리를 내고 연기들이 공중에서 몸을 꼬며 춤을 추는 게 두 부자 사이가 갈라지는 모습에 슬퍼하는 것 같았다.
경제는 지금까지 범한을 잘 대해주었고, 범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오늘 경제 앞에서 이 말을 한 사람이 황태자나 2 황자이거나 이씨 집안의 다른 아들들이었다면 아마 진작에 죽었을 거였다. 하지만 범한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경제는 원래 무정하고 몰인정한 사람이었기에 범한에게도 인정 넘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범한에게 더 관용적인 것도 사실이었다.
범한이 담담하게 말하는 지난 일들을 듣던 황제가 점점 몸을 꼿꼿하게 펴고는 피곤한 얼굴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짐은 너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죽이지 못하는 건 아니다.”
황제가 두 눈을 감고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짐은 너처럼 아랫사람에게 설명해 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짐은 그 사람들이 하늘 위에서 항상 짐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너는 짐과 그녀가 낳은 아들이니 그들이 이 세상에 남겨놓은 눈이라 할 수 있겠지…… 그래서 짐은 너를 죽이지 않고, 너와 너를 신경 쓰는 사람들 앞에서 짐이…… 옳았음을 증명할 생각이다.”
황제가 두 눈을 부릅뜨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 보일 것이다.”
범한이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소신 경도에서 얌전히 머무르며 폐하께서 세운 웅장한 계획을 실현해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겠습니다.”
범한은 황제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한 말에 감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고마워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그에게 살아서 지켜보라고 한 이상 그는 당연하게도 잘 살아야 했다. 섭경미와 진평평을 비롯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했다.
“얌전히 있겠다고?”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던 황제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리고는 정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
“그 말을 짐은 믿지 않는다. 아마 네 놈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짐은 네가 제멋대로인 게 단점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네가 짐이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경도에서 얌전히 있거라.”
범한을 바라보는 황제가 피곤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도 좋다. 하지만 감찰원과 황실 금고 일에는 더는 관여하지 말 거라. 짐은 네 놈 때문에 더는 마음을 쓰고 싶지 않다.”
황제는 범한에게 더없이 분명하게 지켜야 할 선을 알려줌으로써 마지막으로 그에게 살 기회를 주었다. 만약…… 범한이 정말 고분고분하게 지내며 황제의 말을 따른다면 그는 천수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황제는 범한에게 선을 넘으며 죽일 수 있다는 노골적인 위협을 했지만, 범한은 모르는 건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유는 황제 아버지가 마지막에 내린 결정이 그가 예상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범한의 모습에 황제는 순간 마음이 암울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과거 담주 해변에서 범한이 엉겁결에 자신을 부황이라고 불렀던 장면이 떠올랐다.
“앞으로는 일이 없어도 입궁해 문안을 올리러 오거라. 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는 짐에게…… 네가 짐을…… 부황이라 부르는 걸 허락한다.”
이때 어서방 안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조용한 어서방 안에서 범한이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공손히 대답했다.
“네, 폐하.”
* * *
어서방 안에서 황제와 범한이 무슨 내용의 대화를 나누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최소한 범한이 어서방에 나왔을 때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귀신으로 변하지 않고 멀쩡하게 범한을 보면서 황궁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황제 폐하는 범한을 원래 자리에 복직시킨다거나 애매모호하게 작위를 내릴 거라는 암시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범한이 어서방을 나가자마자 이미 준비해 놓았던 교지를 몇 부를 곳곳에 발송했다. 조정에서는 6부와 3사가 함께 협동해 감찰원 관리와 황실 금고 관련자들을 숙청하는 업무를 계속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소주 지주인 성가림, 교주 통판인 후계상, 황실 금고 전운사 소문무는 경도로 들어와 업무 보고를 하라는 교지와 언빙운을 감찰원 원장에 봉한다는 교지가 앞다투어 황궁 밖으로 나갔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걸 보니 궁정에서 일찌감치 준비해 놓은 게 분명했다. 황제 폐하는 아들인 범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범한을 죽이지 않고 경도 안에 가둬둘 방법이나 그가 함부로 날뛰거나 지나치게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둘 방법을 많이 알고 있었다.
한편 범한은 계년조가 사방에서 보낸 정보를 통해서 자신이 가진 패가 황제와 흥정을 할 수 있는 패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또 황제 폐하가 얼마나 민감하게 일을 예측할 수 있으며, 얼마나 강력한 행동력을 가졌는지도 보려고 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경국 황제 폐하보다 이 두 가지 점에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범한이 어두운 얼굴을 한 채 황궁 밖으로 나갔다. 출궁하는 그를 배웅하는 홍죽이 살짝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 없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 * *
범한이 홍죽의 안내를 받으며 조용히 황궁 밖으로 걸어 나가자 길에서 마주친 태감과 궁녀들이 하나 같이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했다. 가끔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태감이나 궁녀가 멀뚱멀뚱 서서 범한을 바라보면 지위가 높은 연장자가 한바탕 훈계를 하기도 했다. 범한은 이런 상황에 주의를 기울일 정신이 없었기에 그냥 묵묵히 걷기만 했다.
황궁 안에 사람들은 홍죽이 범한의 앞에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폐하가 다시 작은 홍 태감을 중용하는 게 아마도 작은 범 대인의 눈을 거슬리게 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범한은 홍죽을 엄하게 꾸짖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잖게 몇 가지를 물어봤고, 홍죽도 겸손하게 대답하는 게 사이가 상당히 정다워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들 이 장면을 보면서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다. 작은 범 대인과 작은 홍 태감 모두 보통 사람들이 아니니 보는 게 전부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속으로 감탄하며, 본심을 감쪽같이 속일 줄 아니까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경국 조정과 황궁 안에서 목숨을 지키고 승승장구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모두들 범한과 홍죽이 황궁을 나가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진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였다.
남들은 듣기 힘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두 사람은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각자가 맡은 역할을 아주 훌륭하고 소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고받는 내용만큼은 절대 평범한 내용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최근 며칠 동안 푸성귀를 즐겨 찾고 계십니다.”
홍죽이 고개를 숙인 채 공손하게 말했다.
“태의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원기를 북돋아 주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는 음식들이었습니다.”
범한은 홍죽의 얼굴은 보지 않고 시선을 앞에 고정하고 있었다. 그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3전 전에 경도에서 일어난 반란이 수습되고 상황이 점차 안정되자 홍죽은 냉궁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그는 황제 식사를 준비하는 어선방(禦膳房) 안에서 잡다한 심부름을 하는 일을 맡았다. 과거 단숨에 높은 지위까지 오를 정도로 약사 빠르고 영리한 홍죽은 그곳에서도 범한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점점 입지를 다져갔다.
이후 홍죽은 대 내관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게 되었지만, 어선방 안에서 그의 영향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사실 홍죽과 범한이 지금 주고받는 말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범한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홍죽 스스로도 작은 범 대인이 어째서 황제 폐하가 즐겨 찾는 음식을 궁금해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또 범한이 어째서 어선방이 황제 폐하에게 진상하는 음식에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홍죽은 범한이 황제 폐하가 먹을 음식에 독을 넣을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궁에서 황제 폐하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타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만성 독약과 급성 독약을 판별할 수 있는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항상 검사하는 데다가 매번 먼저 기미를 하므로 독약을 탄다고 하더라도 독살에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홍죽이 암암리에 황제 폐하의 식단에 들어가도록 손을 쓰는 식재료들은 태의원에서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것들이었다. 더욱이 남쪽에서만 생산되는 달고 매운 맛의 한근은 성질이 차가워서 몸의 열을 제거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몸에 열이 나거나 갈증이 나는 증상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탁월해 태원의 의정들도 매일 황제 폐하의 식탁에 올리라고 추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