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24)
최후의 문지기 베티
“현, 여기 기억나? 우리 예전에 같이 클리어 한 곳이잖아.”
“그랬나? 난 혼자 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흐응…? 혼자?”
아인이 묘한 시선으로 현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현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차, 생각해 보니 아인의 말대로 예전에 함께 왔던 것 같다. 잠깐 실수했다.
“아니… 같이 왔었네. 맞아. 그 때도 함께였지.”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점도 존재했다.
차이점을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아스라 시절엔 중간보스급 몬스터 하나가 문을 가로막고 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지금은 없는 듯하다.
“맵이 조금 바뀐 것 같지 않아?”
“그래, 방금 나도 똑같은 생각 중이었어.”
아인의 물음에 현이 긍정했다.
생각해 보면 아스라 시절에는 던전의 이름도 ‘악의 씨앗’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기억나진 않지만… 악의 씨앗처럼 기억에 남는 명칭이었다면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왜 바뀌었지?’
아스리안의 세계는 전작과 미묘하게 달랐다.
루이즈라는 정체모를 NPC의 등장.
대칭 세계란 것의 존재.
심지어 던전의 이름까지 바뀌었다.
뭔가 알 듯 말 듯 묘한 느낌이 들었다.
잘만 하면 이것들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퍼즐처럼 갈라진 여러 단서들을 떠올리며 현이 생각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여기가 마지막이구나.”
프렉티스의 중얼거림이 상념에 빠진 현을 현실로 끌어올렸다.
망자의 문을 올려다보며 기가 질린 듯 중얼거렸다.
“딱 봐도 최종보스가 있을 만한 장소네.”
“그렇지.”
프렉티스의 말대로 퀘스트 클리어까지 남은 적은 단 하나.
망자의 문 안쪽에 버티고 있을 녀석이었다.
꼼수로 지나치는 방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이곳이 일행이 최후의 전투를 벌일 장소였다.
공략에 앞서 현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상대는 ‘베티’라는 이름의 네임드에요. 마법을 사용하는 박쥐 계열 인간형 몬스터인데, 아스라에선 박쥐녀라고 불렀죠.”
“베티라고요…?”
갑자기 현의 설명을 듣던 지니가 반문했다.
베티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녀의 기색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에 프렉티스가 의문을 던졌다.
“누나 뭔가 아는 거라도 있어?”
“베티라는 네임드에 관한 정보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스타더스트는 각종 몬스터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얼마 전 영입한 코치가 아스라 온라인 경력을 바탕으로 만들어둔 것이다.
베티라는 이름은 지니가 그 자료를 읽던 도중 우연히 발견한 이름이었다.
“235레벨의 네임드 보스. 2차 전직을 마친 유저가 최소 열 명은 되어야 공략을 시도해 볼 수 있는 몬스터가 바로 베티에요.”
“235레벨 보스라고? 정말?”
“확실해요!”
지니는 곧바로 캡슐 기능을 통해 스타더스트의 데이터베이스를 일행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세상에….”
프렉티스의 입이 벌어졌다.
네임드, 그 중에서도 네임드와 보스라는 수식어가 동시에 들어가게 되면 적이 얼마나 강해지는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궁극기를 배운 시점에서 40레벨 근처대의 네임드 보스를 공략하려다 호되게 당한 유저들의 흑역사는 유트브에 수없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하물며 문 안쪽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상대는 200레벨이 넘어가는 네임드 보스가 아닌가.
얼마나 강할지 예측이 불가능한 존재 앞에서 덜컥 겁에 질리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뭐야, 갑자기 다들 왜 그렇게 쫄아?”
현의 핀잔에 프렉티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아, 이길 수 있는 거 확실해…?”
“당연하지. 방금 전에 얼음가시 던전에서 만났던 거대한 새는 400레벨 네임드 보스였다고.”
“그거랑 싸우진 않았잖아.”
“흐음… 그렇긴 하네. 그래도 괜찮아. 우리 파티 정도면 충분히 공략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
현의 장담에 지니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현의 말을 진리처럼 믿고 있었다.
자신보다 그의 판단이 더욱 정확할 터!
상식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잘못될 여지가 높기에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잘 보면 아인은 현의 말에 전혀 의구심이 없지 않은가.
가끔씩 말은 거칠었지만, 그녀는 절대적으로 현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구역을 앞두고 현은 베티의 공략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의 방법은 이론상으로 완벽했다.
문제는 이론상으로만 완벽하다는 사실이었다.
프로게이머를 포함한 일반적인 유저들은 현처럼 세세한 변수까지 고려하지 않았다.
인간인 이상 반드시 실수가 나오게 되고, 준비한 계획이 틀어지는 까닭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까지 준비하는 건가?’
현의 설명이 끝났을 때 프렉티스와 지니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 방식의 공략을 준비한다는 것은, 실수가 없을 거란 확신이 있기 때문일까?
‘자신감과 능력,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발상이야.’
‘보통 유저들이 따라한다면 오히려 자살행위가 될 지도…!’
고오오오-.
망자의 문이 갈라지며 내부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 사방에 펼쳐진 용암의 바다.
그리고 바다 한 가운데 하나의 거대한 섬이 떠 있었다.
“발밑을 조심해요.”
현이 모두에게 경고했다.
섬으로 향하는 길은 폭이 좁은 징검다리를 건너는 방법밖에 없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들끓는 용암에 빠져 버리리라.
민첩이 낮은 지니는 쉽게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위의 열기로 인해 10초마다 체력이 50만큼 감소합니다!]어느 순간부터 일행에게 지속적인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혼자서 심연 세력인 현은 10퍼센트의 화염 저항력을 갖춰 조금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주위의 열기로 인해 10초마다 체력이 45만큼 감소합니다!]가만히만 있어도 체력이 줄줄 새어나갔다.
통각 센서가 현실과 동일한 수준이었다면 인간이 견디지 못할 수준의 열기가 공간 전체를 감싸고 있을 것이다.
일행의 체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지니는 틈이 날 때마다 회복 스킬들을 사용해야 했다.
‘뜨거워. 사방이 불바다로군.’
프렉티스는 용암에서 전해지는 열기에 신음을 흘렸다.
현과 아인도 마찬가지. 가진 ‘천인’의 칭호도 추위를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이지, 더위까지 막지는 못했다.
쿠구구궁-!
일행이 용암의 징검다리를 모두 건넜을 때 입구의 문이 닫혔다.
이어서 용암의 파도가 밀물처럼 몰려들며 지나온 길을 삼켜버렸다.
“당황하지 마요.”
현이 말하지 않았어도 일행은 침착했다.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퇴로가 끊긴다는 사실은 공략정보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 전장으로 변할 섬은 축구장 정도의 크기였다.
쿠릉- 쿠르릉-.
사방에서 용암의 폭포가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일행은 안전한 곳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옆을 조심해요!”
갑자기 지니가 그렇게 소리치자 기이하게 생긴 마수 조각상의 입안에서 마그마가 뿜어 나왔다.
치이익-!
프렉티스가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자, 바위 녹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여긴 그야말로 불지옥이네….”
사방에 불길이 솟아오르지만 않았으면 제법 구경할 맛이 났을지도 모른다.
로마 시대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가져온 건축물 덕분에 섬의 모습은 수천 년 전에 버려진 지하도시 같았다.
일행은 가까운 계단을 올라 비교적 높은 곳에 도달했다.
한 건물의 옥상에서 바라보자 섬 전체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시 전체를 휘감아 장식하는 수백 가닥의 용암 폭포.
그것은 현이 아스리안을 시작한 이래로 본 가장 판타지스런 광경이었다.
“굉장해…‘
아인은 수백 가닥의 용암 폭포에 홀린 듯 넋이 나갔다.
화염의 물줄기는 계속 차오르고, 차올라서 도시의 건물들을 하나씩 집어삼켰다.
잠시 후엔 용암의 쓰나미가 덮치고 지나간 폐허가 되었다.
“온다.”
그리고 마침내 흐름이 멈추었을 때.
쿠우우웅-!
하늘로부터 무언가가 운석처럼 떨어졌다.
서서히 날개를 펴며 몸을 일으키는 마물의 실루엣.
지니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베티….”
‘악의 씨앗’ 던전의 최종보스.
구역 수호자, 베티의 등장이었다.
여성의 체형에 검은색 날개를 가진 베티의 생김새는 박쥐를 닮아 있었다.
베티가 날개를 활짝 펼치자 그로부터 심연의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키익… 천공의… 종자들….”
[거대한 심연의 존재의 기세에 마주하였습니다!] [미미하게 저항합니다!] [모든 스탯이 20퍼센트 감소합니다!]현과, 아인에게는 조금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천인은 심연의 기운에 쉽게 굴하지 않습니다!] [모든 스탯이 5퍼센트 감소합니다!]‘역시 스펙 차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내려갈수록 난이도가 급상승하는 던전이다.
베티는 던전의 최종보스이니 만큼 압도적인 스펙을 자랑했다.
‘상관없어.’
처음부터 녀석이 내뿜는 심연의 기운을 완벽히 저항할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준비해온 공략은 스펙으로 맞서는 방법이 아니라 격의 차이를 넘어설 수단이니.
“지니, 시작해요!”
“알고 있어요!”
현이 말하기 전부터 지니는 일행의 가장 앞쪽으로 나서고 있었다.
“후우… 사제인 내가 선봉을 맡을 날이 오다니!”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지니는 최전방에서 물러서지 않고 베티를 마주보며 심연의 기운을 견뎌냈다.
어째서 사제가 최전방에?
그런 의문이 떠오를 만할 장면이지만 지니는 그저 현의 공략대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지니는 항상 베티의 바로 앞에 있어야만 해요.”
진입 직전, 현의 한마디에 지니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만 알았다.
무조건 파티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사제’에게 최전방을 맡긴다니!
하지만 현의 설명을 듣고 나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베티의 가장 무서운 스킬은 ‘후방도약’ 이에요. 순식간에 상대의 뒤로 순간이동해서 꼬리로 내려치는 패턴이죠, 지금 우리 수준으론 절대로 못 피해요. 막을 수도 없고요.”
“그럼 방법이 없는 거 아니야…?”
프렉티스가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지만 현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후방도약으로 노리는 대상은 무조건 정해져 있어.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상대. 즉, 파티의 후열이지!”
후열이란 일반적으로 사제나 마법사일 것이다.
그러니 사제인 지니가 보스의 첫 타겟이 되기 쉽다는 뜻이었다.
“알겠죠? 사제의 진형은 언제나 최전방을 벗어나면 안 돼요.”
팟-!
베티의 신형이 사라지는 동시에 지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만약 현의 말이 없었더라면 반사적으로 일행의 뒤편에 몸을 숨기거나 혹은, 자신에게 보호 스킬을 사용했을 것이다.
목숨이 위협받으면 생존 스킬부터 쏟아 붓는 것은 사제 직업의 공통된 습관이니까.
‘괜찮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현의 믿음에 목숨을 걸었다.
피하려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만약 자신아 노려진다면 그냥 죽는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현의 예측대로 베티가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파티의 가장 뒤편!
콰아아아앙!
베티의 꼬리치기가 일행이 딛고 있던 건물의 옥상을 반으로 쪼갰다.
용암의 바다에 동심원이 퍼져나갔다.
235레벨 네임드 보스의 위력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강력했다.
미리 대처하지 못했다면 최초의 한방으로 파티가 궤멸되었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좋아, 다들 무사해.’
그러나 피해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리부터 가장 뒷열에 자리 잡고 있던 현.
베티가 사라짐과 동시에 동화를 사용하니 꼬리는 애꿎은 허공만 후려쳤다.
‘지금이야!’
그 틈에 지니의 캐스팅이 완성되었다.
두 대상을 이어붙이는 스킬인 ‘결속’.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은 채 쏘아낸 빛의 끈이 베티에게 적중했다.
곧바로 하늘로 날아오르려던 베티는 지니의 결속에 붙잡혀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붙였어요!”
지니는 쾌재를 불렀다.
빠르게 움직이는 상대를 결속으로 잇는 건 매우 고난이도의 컨트롤이 필요했다.
상대가 사라진 순간부터 다시 나타날 위치를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결속에 걸린 베티가 잠시 멈칫한 사이, 프렉티스의 검이 녀석의 목을 갈랐다.
[‘정신 후려치기’가 치명타로 적중했습니다!] [잠깐 동안 상대를 기절시킵니다!]그 찰나의 시간!
아인이 불꽃으로 베티의 전신을 후려갈겼다.
거대한 박쥐의 신체를 난도질하는 한 쌍의 불꽃!
캬아아아-!
베티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결속은 한순간에 끊어졌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녀석이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까지 열 번이 넘는 불꽃의 일격이 베티의 몸에 박혔으니까.
천장 근처를 배회하는 베티가 일행을 노려보았다.
문득 현이 소리쳤다.
“지니, 후방에 있지 마요!”
깜짝 놀란 지니가 재빨리 전열로 튀어나왔다.
베티의 신형이 사라진 것은 그 직후였다.
‘동화!’
콰드드드득- 강렬한 충격이 대지를 갈랐다.
현이 발판으로 삼던 바위가 가루로 분쇄되며 양쪽으로 용암이 갈라졌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순간적으로 용암 아래의 지면이 모습을 드러났다.
베티는 온몸에 용암을 뒤집어쓰면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날뛰었다.
“큭, 마그마가…!”
프렉티스가 신음을 흘렸다.
난데없이 용암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하필 베티에게 접근하던 도중이라 용암의 분수를 뒤집어써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베티가 흩뿌린 용암은 아인에게도 튀겼다.
“웃…!”
아인은 반사적으로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붉은 색의 방울들이 아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인은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그 모든 부수적인 피해들을 피해내고 있었다.
‘이런, 또 온다!’
키기기-!
하늘을 선회하던 베티가 재차 움찔거렸다.
현의 시선이 재빨리 사방을 훑었다.
지금 베티와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프렉티스였다.
그는 맵의 가장자리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용암을 뒤집어써 빠르게 대열을 갖출 수 없던 탓이었다.
동료의 위기에 현의 정신이 번쩍였다.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팟-! 현은 재차 동화를 해제하며 어느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용암의 바다 상공.
더 멀리 베티와 떨어진 곳을 찾으려니 거기밖에 없었다.
직후, 베티의 꼬리가 허공에서 번쩍였다.
후우우웅-!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어쩌면 베티의 꼬리치기는 음속을 넘어섰을지도 몰랐다.
다행인 점은 그곳이 표면으로부터 3미터 정도 떨어진 상공이었기에 용암이 튀어 오르는 불상사가 발생하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모두 진형을 잡아요!」
현이 파티 대화로 소리쳤다.
파티 모두의 실력이 뛰어난 만큼 대응은 재빨랐다.
지니는 곧바로 최전방에서 베티를 마주보고 섰다.
프렉티스와 아인은 양쪽 대각선의 진형에 포진했다.
가장 후방에는 현이 자리 잡았다.
베티 공략의 정석 진형이었다.
집중력을 잃지만 않는다면 녀석을 잡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모든 일행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좋아, 각자 위치 확인하고! 무리할 필요 없어요!”
일행은 현의 지시를 따르며 일행은 베티의 체력 게이지를 차근차근 깎아나갔다.
현이 유인하고, 지니와 프렉티스가 고정하고, 아인이 딜링을 담당하는 방식의 공략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행의 마음속엔 두려움보다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카아아! 귀찮은… 것… 날려주마…!”
베티는 가끔씩 다른 패턴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베티가 양 날개를 펼치자 녀석을 중심으로 거대한 회오리가 솟아올랐다.
지하도시를 한껏 휘젓는 허리케인!
파괴된 건물들의 잔해들과 용암이 섞여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베티가 일으키는 회오리는 인간의 몸을 가볍게 날려버릴 만큼 막강했다.
가만히 있다간 한순간에 진형이 파괴되고 일행은 용암의 바다로 빠져 버릴지도 몰랐다.
“지니 누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패턴 또한 현이 미리부터 대비했던 것.
지니가 결속으로 모두의 신체를 연결했고, 한 번 더 단단한 지면에도 결속의 끈을 고정시켰다.
아무리 강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하더라도 하나로 묶여 있는 일행을 흩어놓을 수는 없었다.
후웅-!
돌연, 현의 뒤에서 베티의 꼬리가 횡으로 그어졌다.
그야말로 기습!
하지만 강풍 속에서도 현은 베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채 주시했다.
집중하고 있는 현에게 빈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헛친 꼬리에 맞은 건물의 기둥 다섯 개가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현은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천장이 서서히 기울어지는 광경을 놓치지 않았다.
“피해!”
현이 외치는 소리에 접근하려던 아인과 프렉티스가 움찔거렸다.
쿠우우웅-!
육중한 금속재의 샹들리에가 베티가 있던 자리에 낙하했다.
건물을 지탱하던 기둥의 한쪽이 완전히 박살나며 천장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지형이나 구조물을 이용해 적에게 9128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현의 경고 덕분인지 붕괴에 휩쓸린 일행은 아무도 없었다.
낙하의 충격으로 바닥이 용암 가라앉았기에 일행은 재빨리 피신했다.
베티가 있던 자리를 지켜보던 프렉티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죽었나…?”
“아직이야.”
드륵, 드르륵- 거대한 바위의 잔해들이 들썩거리더니 베티가 용암 속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녀석의 머리 위에 떠있는 체력 게이지가 얼핏 보였다.
남은 체력은 약 30퍼센트.
캬아아아아!
성이 난 베티가 잔뜩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베티의 움직임이 처음보다 빨라졌다.
후방도약도 더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고, 회오리도 더욱 강렬해졌다.
그래도 일행은 당황하지 않았다.
공략만 따른다면 베티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대응하는 방식은 같았다.
프렉티스는 싸우는 도중 다른 생각을 할 여유마저 생겨났다.
‘대단해.’
얼핏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고작 100레벨도 되지 않는 자신들이 200레벨이 넘어가는 네임드 보스를 무리 없이 사냥하고 있단 사실은.
‘어떻게 이렇게 쉽게 가능하지?’
프로게이머의 눈은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해 냈다.
일행이 베티를 사냥할 수 있는 이유.
현이 공략의 가장 핵심 위치를 담당해 주고 있기 때문이며, 아인의 데미지가 말도 안 되게 강력한 덕분이었다.
‘둘이 없다면 절대로 불가능했겠지.’
아인의 딜은 어쩌면 대체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을 대신할 수 있는 유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동화’라는 스킬도 굉장하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이 더욱 감탄스럽다.
똑같은 스킬을 준다 해서 그를 따라할 수 있는 유저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일단, 자신은 따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반응속도는 어느 정도 따라갈지 몰라도 전체적인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과 기초적인 무빙의 수준이 현저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앞으로 자신이 배워나가야 할 과제였다.
“좋아, 다들 끝까지 집중해!”
같은 형태의 싸움은 수십 분 간 이어졌다.
다행인 것은 베티의 지능이 비교적 낮아 다양한 패턴의 공격을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
평범한 유저들이라면 모를까, 완벽한 파훼법을 들고 나온 현의 파티에게 베티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기나긴 싸움도 슬슬 종지부가 다가왔다.
‘이번이 마지막!’
후우웅-!
강렬한 꼬리치기가 애꿎은 허공을 빗겨가는 순간!
지니의 속박, 프렉티스의 스턴, 아인의 불꽃이 동시에 쏟아졌다.
“잡았다!”
아인이 외침과 함께 베티의 체력 게이지가 0까지 떨어졌다.
***
아스리안의 개발자 중 한명인 로버트는 현의 플레이를 감상하던 중이었다.
로버트는 손에 땀을 쥐고 화면을 지켜보았다.
그가 기발한 방법으로 네임드 보스를 무력화시키는 모습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모니터링을 이어가던 도중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잠깐, 뭐야?!’
개발진은 게임 내 모든 인과관계의 진행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현의 일행이 베티를 막 쓰러뜨리기 직전, 갑자기 시스템의 화면이 붉게 점등되었다.
그것은 방금 막 초월자가 근처에 개입하였다는 의미, 개발진의 모니터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신호와 동시에 로버트는 재빨리 로그를 분석해 보았다.
잠깐 사이에 대략적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아스리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로써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기존의 인과관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이벤트가 생겨나고 있었다.
특히, 악의 씨앗과 관련된 사건의 줄기가 통째로 바뀌었다.
‘갑자기 왜…?’
이유는 초월자의 영향력이 작용한 듯하지만 자세한 사항까지 알 수는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버트를 보고, 마리가 옆에서 물었다.
“뭐 버그라도 일어났나요?”
“아니, 버그는 아니지만….”
요즘 로버트는 한 유저의 모니터링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바로 현이라는 아이디의 유저.
최초로 스토리의 흐름에 간섭한 유저였으니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행적을 분석하다 보니 아주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바로 기만의 대악마, 케이드리알이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초월자가 개입했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케이드리알은 계속해서 현을 의식하듯 움직이고 있었다.
허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초월자가 고작 한 명의 유저를 신경 쓰는 일이 있나?”
로버트의 물음에 마리가 되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악마 한 마리가 현이라는 유저에게 아주 관심이 많은 것 같단 말이지.”
“뭐, 악마들도 자유의지를 지닌 인공지능이니까 불가능하진 않겠죠!”
“이걸 봐봐. 마리.”
로버트는 분석용 컴퓨터 화면에 무언가를 띄웠다.
그것은 아스리안 오픈부터 지금까지, 대악마 케이드리알의 행적을 분석한 그래프.
놀랍게도 현과 케이드리알의 자취가 거짓말처럼 일치하고 있었다.
그래프의 자취란 물리적인 경로 뿐 아니라 특정 사물, 지역, 인물 등에 대한 ‘관심도’의 합계를 수치로써 표현한 것이었다.
“와우, 둘의 관심이 거의 비슷하네요!”
“그렇지? 이 정도면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
“그럼요! 스토커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한데요!”
허나 그래프는 관계도의 결과만 보여줄 뿐 자세한 인과관계까지 보여주진 않았다.
개발자인 로버트도 아스리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파악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어째서 대악마인 그녀가 일개 유저 한 명에게 이토록 지대한 관심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조금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퀘스트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
같은 시각.
명예의 전당 랭킹 2위이자 다크니스 길드 소속 마법사인 메이데이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이거….’
메이데이는 깜짝 놀랐다.
광장을 지나가던 도중,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세상이 붉게 물들었고 태양이 검게 변색되었다.
어딘지 모를 세상에 자신만 홀로 서 있었다.
‘꿈이 아니야…!’
아스리안에서 두 번째로 유저가 ‘대칭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처음엔 게임에 버그가 발생했나 싶었다.
메이데이는 길드 대화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시도해 봤지만 모든 기능은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앗, 메이데이님? 괜찮으세요?!」
「메이데이, 사냥 가다 말고 말도 없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저도 모르겠어요…」
메이데이는 길드 채팅에 답하며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대도시의 거리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위에 서 있었다.
하늘로 향하는 길.
그 가장자리는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다.
‘여긴 어디지…?’
메이데이는 자신이 어디론가 텔레포트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쯤인지는 추측조차 불가능했다.
아스리안에 이런 장소가 있었나 생각될 만큼 완전히 다른 세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하나의 퀘스트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잠시 뒤였다.
[히든 퀘스트 : 악마의 거래]-기만의 대악마가 당신의 영혼을 빌려가려 합니다.
-거래에 응하려면 길을 따라 나아가세요.
‘뭣?!’
메이데이는 숨을 삼켰다.
그녀가 놀란 것은 퀘스트 메시지에 적힌 한 단어 때문이었다.
대악마.
세계관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초월자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존재가 아닌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한편, 그녀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퀘스트가 예고 없이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메이데이님 괜찮아요?」
「그래서 지금 돌아올 수는 없는 거야?」
「저… 방금 엄청난 퀘스트를 받은 것 같은데요? 대악마의 히든 퀘스트래요.」
「뭐? 대악마?!」
메이데이의 중얼거림은 길드 채팅에 어마어마한 소란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채팅창 한 페이지가 올라갔다.
어떻게 퀘스트를 받았는지, 무슨 내용인지, 그 외에도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대악마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메이데이는 숨을 죽이고 천천히 퀘스트의 내용을 다시 읽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