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87)
루이즈의 사정
“현….”
루이즈는 현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둠은 자신의 그림자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 아무리 내가 보고 싶어도 그렇지, 내 모습으로 외모까지 변경한 것이냐…?”
강신을 처음 목격한 루이즈였다.
유저의 외모변경에 대해선 언젠가 얼핏 들은 내용이 전부였으니 성별을, 골격을 바꿀 수 없단 사실은 잘 알지 못했다.
“후우….”
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감과 반가움. 그리고 약간의 어이없는 웃음기가 섞인 한숨이었다.
문득, 루이즈의 자아가 강해지면서 자아도취가 심해진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마. 아인도 같이 있거든.”
혹시 모르니, 현은 괜한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 마디를 덧붙여 두었다.
***
현은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루이즈의 이야기는 그동안의 의문들을 대부분 해소해 주었다.
“그날, 제사가 끝나고 약간의 기억이 돌아왔다. 아주 희미한 기억이다만, 덕분에 뭘 해야 할지를 알 수 있었지.”
“공감은 왜 봉인한 거야?”
“그것은… 아직 내 능력 밖의 힘이었으니까.”
루이즈는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있었다.
레벨은 300. 수많은 네임드 NPC들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수치였다.
인간의 육신을 벗어나지도 못했으니 루이즈는 아직 초월자라 하기에도 무색한 수준이었다.
공감을 힘으로 바꿀 능력도 없고, 오히려 공감 때문에 자신의 위치가 발각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루이즈는 공감을 봉인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나머지 힘을 마저 찾기 전까지.
“심연에도 천공의 간자들이 득실거린다. 현, 그대에게 아무도 믿지 말라는 이유도 그런 이유였지.”
설명을 듣던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자신도 카르마를 좀 더 의심했고, 도중에 정체를 깨달을 수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이런 곳에 숨어있던 것도 천공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야?”
“물론 그런 이유도 없진 않지만, 더 중요한 건 미궁에서 얻어야 할 재료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무슨 재료?”
“바로 이것, 마석이다!”
루이즈는 푸른빛을 내뿜는 돌멩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광택만 봐도 최소 13등급은 되어 보이는 마석.
루이즈가 미궁에서 5년을 보낸 까닭은 천공의 눈을 피함과 동시에 충분한 양의 마석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마석을 왜?”
“후후후, 세상 곳곳에 잠든 내 수하들을 깨우기 위한 것이다.”
루이즈는 자랑스러운 듯 웃으며 마석의 용도까지 설명해 주었다.
“마석으로도 깨울 수 있는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신석이 아니어도 되냐고 묻는 거야.”
샤틴과 샤티나를 깨우는 데는 신석이 필요했다.
루이즈가 부하를 깨우는 방법이란 아마 그와 동일할 터.
“물론, 돌아온 이 몸의 기억대로라면 확실하다!”
하지만 루이즈는 마석으로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부족한 신력은 어둠 본인의 능력으로 메워지는 것일까?
아니면 마기를 보유하지 못한 부하라도 깨우려는 것일지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니 현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부하를 되살린다고.’
루이즈의 계획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직은 어둠 본인보다 어둠을 섬기는 부하들이 훨씬 강력한 시기다.
‘하긴, 혼자서 거길 갈 순 없겠지.“
아스라 때와 같다면 다음 어둠의 행선지는 바로 하늘!
천인의 감시 하에 놓인 외딴섬이 바로 루이즈가 가야 할 장소였다.
본신의 힘으론 천인들에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어둠은 부하들의 힘을 빌려야만 하리라.
“신녀님, 먼저 움직이신 겁니까?! 제가 퇴로를 확보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으응?”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한 것은 현과 루이즈가 중요한 이야기를 다 끝낸 때였다.
파피는 현과 루이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미간을 좁혔다.
“왜 신녀님이… 두 명이지요?”
팟! 현은 지속시간이 남아 있던 강신을 해제했다.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래도 파피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입장에선 또 한명의 신녀가 모르는 소녀 한 명으로 변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이 소녀가 어째서 신녀님의 모습을 하고 있던 것입니까?”
그것은 루이즈가 끼어들어 해명해 주었다.
“일종의 스킬이다. 유저들 중에 특이한 자들이 많지 않느냐? 그러니까… 음… 비슷한 원리로 나를 닮은 모습을 지니게 된 거지.”
“유저…? 신녀님이 아는 자입니까?”
“그래! 그러고 보니 너에게도 예전에 말해준 적이 있구나!”
루이즈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바로 라디에트가 인정한 유저다!”
“그 라디에트님께서… 인정한 유저라고요?”
“후후, 그래 보거라. 유저인데도 그녀의 손등엔 천인의 룬이 새겨져 있지. 내 말이 맞다는 증거가 아니냐!”
‘잠깐…!’
가만히 대화를 듣던 현은 깜짝 놀라 루이즈에게 동화했다.
루이즈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다.
라디에트의 이름을 팔아 아인의 첫인상을 좋게 만들어 주려는 거겠지. 하지만.
「야, 아인 천공 아니야! 너 때문에 심연으로 바뀌었어!」
「응? 심연?」
「그래, 메인 퀘스트 끝나니까 이렇게 됐다고!」
루이즈의 말실수로 첫 만남부터 의심을 사게 되는 것일까?
“크, 크흠….”
아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이기지 못한 듯 식은땀을 흘리며 장갑을 벗었다.
손등에 슬쩍 드러난 것은 천인의 룬.
하지만 진짜 천인의 앞에서 거짓된 룬은 금방 들키고 말 것이다.
그렇게 들킬 것을 걱정하며 손을 내밀자,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뒤따랐다.
“정말… 이군요.”
‘응?’
“놀랐습니다. 그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었다니… 솔직히 신녀님의 말은 허무맹랑한 곳이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후우, 후… 이 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느냐…?”
‘뭐지?’
현은 순간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호구라도 명색이 천인인데, 파피가 룬의 진위를 못 알아볼 수가 있을까?
‘잠깐, 설마.’
찰나, 어떤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현은 자신이 연기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인보다는 훨씬 낫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NPC들은 아인의 거짓말에만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왜일까.
‘설마, 칭호?’
[기만자]-마력 15
-상대를 속일 때 좀 더 들키지 않습니다.
아주 초반에 얻어서 가끔은 존재조차 잊고 있던 아인의 칭호.
‘기만’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들어간 칭호치곤 애매한 성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효과가 천인마저 속여 넘길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는데. 정말로 칭호 때문이야?’
현은 나중에 기만자의 효과를 자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일루나에서 신녀님과 함께 있었다는 유저분이….”
아인의 룬을 확인한 이후부터 파피의 목소리엔 의심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는 다시 루이즈를 보며 몇 가지를 확인하듯 물었다.
“신녀님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응.”
“라디에트님께서 인정하신 유저와 깊은 친분이 있단 말도 사실이고요…!”
“아, 그건 다른 유저인데… 라디에트의 인정을 받은 유저가 한 명 더 있거든.”
“하하… 그런 유저가 둘이나 도와준다면 신녀님도 곧 마기를 지울 수 있겠군요!”
“그렇지…?”
현이 이상함을 느낀 것은 가만히 파피의 말을 듣던 도중이었다.
「야, 잠깐만 너….」
「아, 그대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군! 이 천인은 날 도와주고 있는 녀석이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현은 여태껏 파피가 루이즈를 돕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천인이 왜 대악마와 함께 있는 것인가?
지금 옆에서 루이즈가 중얼거리는 이야기도, 자신이 아는 내용과는 뭔가 상당히 달랐다.
「대악마가 왜 마기를 지워?」
「아, 그건 말이다.」
「넌 힘을 되찾는다고 하고, 얜 지우는 게 목적이라고 하면 어느 쪽의 말이 진짠데?」
「그야, 내 말이 진짜인 게 당연하지 않느냐…?」
루이즈는 한참 만에 더듬거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야기는 조금 멀리 되돌아간다.
과거에 루이즈와 사냥하며 놀아줄 때, 현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었다.
아스라 곳곳의 신기한 장소들. 재미있는 사건들. 특이한 NPC들.
그 중엔 파피라는 천인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은 그의 흑역사를 이용해 등골을 빨아먹는 방법을 신나서 해 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루이즈는 그 쓸데없는 잡담들을 다 기억했던 모양이었다.
「그대랑 아인도, 라디에트에게 속임수를 썼다 하지 않았나… 나도 그냥…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을 뿐이다.」
아니, 결코 쓸데없는 잡담이 아니었다!
덕분에 루이즈는 라디에트와의 친분을 이용해 파피를 속인 것이었으니!
「얘 네가 악마란 사실은 알고 있어?」
현은 문득 떠오른 의문을 물었다.
「….」
대답은 없었지만, 침묵 자체가 대답이 되었다.
루이즈가 변명 아닌 변명을 내뱉은 것은 한참 만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으니… 내가 먼저 대답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뒷말을 흐리는 루이즈의 목소리에, 현은 깊은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는 그 모습이 누군가의 행동과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에. 마치 거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원래 성장기의 아이들은 근처 어른의 행동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고 한다.
자신이 루이즈에게 너무 큰 악영향을 미친 것 아닐까?
「야, 이건 완전 악마 같은 짓이잖아? 아니, 악마가 맞지… 대악마가!」
그래도 5년 동안 속인 건 너무했다.
천인의 수명이 수천 년이라곤 하지만, 평범한 인간에겐 그 시간이 와 닿지 않았다.
현이 한마디 쏘아주려던 때, 갑자기 루이즈의 목소리에 울분이 섞였다.
「아주 잠깐 속인 것뿐이다!」
「뭐? 5년이 잠깐이라고?」
「그렇지 않은가? 라디에트는 그대에게 속아 종신형을 받았는데!」
‘…?’
「그리고 당시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대는 제사가 끝난 뒤의 일을 모르겠지! 그곳에서 전쟁이 일어났었어! 나도 살기 위해선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니었단 말이다…!」
루이즈의 변명에 현은 쉽게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라디에트의 이름이 스쳐간 순간부터, 다른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현은 격하게 떨려오는 루이즈의 감정을 한 곳에 치워두고 새로운 질문을 꺼냈다.
「라디에트가 어떻게 됐다고?」
「어딘가에 갇혀있다는 말을 들었다.」
「종신형…?」
「파피의 말이니 확실하진 않다만… 일단은 그런 모양이다.」
순간, 수많은 종류의 감정들이 현의 양심을 휘감아 돌았다.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은 한참 만이었다.
「루이즈.」
「서, 설마 파피에게 내 정체를 말할 생각인가?!」
「아니… 일단은 우리, 말을 맞춰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
루이즈 (Lv. 300)
체력: 295200/295200
마나: 7350/7350
마기: 7632740(+300300)/9899000(+300300)
[힘 302(+12)] [민첩 354(+29)] [생명력 966(+18)] [마력 468(+267)]–
상태 창을 살펴본 현은, 루이즈가 몸만 성장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300레벨 네임드 NPC치곤 살짝 모자라지만, 300레벨 유저나 일반 NPC들에 비하면 압도적인 스펙.
‘그때 실수로 선물해 준 무기를 잘도 쓰고 있네.’
‘흑색 창기사의 마력봉’이라는 유니크 무기.
마력봉이란 단어를 마법봉으로 읽어버린 탓에 루이즈에게 선물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봉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무기가, 어째서 장창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루이즈가 이런 병기를 다룰 수 있는 것도 모자라던 힘과 민첩이 보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스탯보다 눈에 띄는 것은 마기량의 변화!
‘최대치가 거의 천만인가…?’
그 비상식적인 수치는 그녀가 어둠이라는 반증이 분명해 보였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마기를 사용하는 건 파피에게 어떻게 변명했을까?’
미궁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문득 든 생각.
루이즈에게 물으니 쉽게 답을 알 수 있었다.
「그건… 기만에게 속아서 천사 대신 악마에게 기도하게 되었고, 그 결과 마기에 물들었다고… 말했다.」
「뭔가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인 거짓말이네.」
라디에트 이어 케이드리알까지, 루이즈는 여러 이름들을 팔고 다닌 모양이었다.
현은 루이즈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그래서 어둠인 건 들키지 않은 거고?」
「…아마도?」
「하긴.」
생각해 보면 루이즈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두 번이다.
첫 번째는 일루나에서 신녀의 모습으로.
두 번째로, 어둠의 땅에서 어둠 그 자체로!
하지만 어둠의 땅에서는 온몸이 마기로 뒤덮인 뱀파이어의 모습이었다.
NPC들의 입장에선 그 둘이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쉽게 깨닫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5년간 미궁에 숨은 루이즈는 몰라볼 만큼 성장했다.
얼굴은 물론 체격까지 상당히 변한 탓에 이제 와서 어둠의 외모를 알아보는 NPC는 거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후… 그래서 앞으로 계획은 뭐야?」
「세상 곳곳에 잠들어 있는 부하들부터 깨워야겠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음, 이제부터 찾아볼 것이다.」
루이즈의 대답에 현은 자꾸 한숨만 나왔다.
그녀의 계획은 정말로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이렇게 허술한 계획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었을까?
「…찾는 건 도와줄게」
현은 갱신된 메인 퀘스트를 다시 살펴보았다.
함께 퀘스트를 받았던 아인에게도 같은 메시지가 떠오른 상태였다.
-어둠은 아직도 간절히 그대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아무런 도움이 없다면 지상을 헤매다 쓰러져 버릴지도….
「하, 하지만 그대에게 또 신세를 질 생각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고.」
현은 이미 루이즈의 시종인 두 골렘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인터루프를 뒤져보면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그녀들과 같은 존재를 더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일행은 미궁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16층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파무르를 이용한 덕분에 금세 지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올라오는 도중 나머지 레전더리 재료를 수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좀 찾아보는 동안 프라이빗 룸에서 기다릴래?」
현의 제안에 루이즈의 루이즈의 표정이 순간 아련해졌다.
프라이빗 룸에서 지냈던 추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처럼 걱정 없이 뒹굴 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안 된다….」
하지만 루이즈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몸은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처지다.」
「왜?」
「내가 머무르는 곳엔 저절로 먹구름이 모여든다. 의식하지 않아도. 아마 태양빛을 가리기 위해서인 것 같다만.」
루이즈는 그나마 바깥과 격리된 미궁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들키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군데만 먹구름으로 가득해지면 신탁이 아니더라도 수상해 보이지 않겠는가?」
「프라이빗 룸도 안 되는 거야?」
「확실하진 않아… 그렇지만 괜한 모험을 하고 싶진 않다. 기억이 돌아오며 확실히 깨닫게 되었지. 지상 어디에도 완벽한 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어디서 지내게? 너, 갈 데도 없잖아.」
「아니야. 이 몸에게도 생각해 둔 계획이 있단 말이다.」
‘없는 것 같은데.’
아무리 자신 있게 말해도, 현은 루이즈의 말이 의심스러웠다.
일단 미궁은 돌아갈 수 없다.
그곳에서 카르마가 죽었으니 분명 천공의 세력들이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지상에 미궁처럼 안전한 장소가 존재할 것 같지도 않았다.
굳이 안전지대를 떠올려 보자면, 지상이 아닌 장소.
「대칭세계로 가려는 거야?」
「대칭세계…? 아, 지하를 말하는 것이구나.」
루이즈는 현의 의문에 고개를 저었다.
「현, 내가 그대에게 아무도 믿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지하라도 천공의 눈길을 피할 수 없어. 5년간 지상과 지하의 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이지.」
「아니, 그래서 어디에 숨는다는 건데?」
「후후, 어디에도 숨지 않을 것이다.」
루이즈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늘로 향하기 전에 신탁의 수를 좀 줄여둘 생각이다.」
「신탁을 줄여? 아…!」
그 순간 현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사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기사의 거리에서 보았던 루이즈의 현상 수배서를 기억해 보았다.
「(초상화)」
「해당 인물은 하르티아 신전에 침입. 무구한 신관들을 학살…… O년 O월 O일 센티넬 강 하류에서 치안대원 2명을 사살하고 도망…… O년 O월 O일 마지막으로 발견……」
「사악한 마기의 바람을 다루는 자이니 주의를 요할 것.」
「어째서인지 지금의 이 몸은 다음 신탁이 어디서 내릴지를 느낄 수 있구나.」
현은 루이즈의 그 말을 이해했다.
완전한 각성을 이루지 못한 루이즈는 초월자라 부르기도 우스울 만큼 약했다.
하지만 각성하지 못한 덕분에 얻는 이점도 있다.
초월자인데도, 힘의 행사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
자아나 공감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 천인처럼 수명이 깎이는 것도 아니었다.
「한 달 정도 세상을 여행하면서 빛과 관련된 신탁들을 지울 생각이다.」
즉, 각성하지 못한 지금의 루이즈는 패널티 없이 인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유일한 초월자였다.
또한, 스스로의 장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루이즈는 초월자의 직감으로 신력이 모여드는 장소를 파악하는 것 같았다.
의외로 잔머리를 굴리는 영악한 모습에, 현은 자신이 루이즈의 교육을 제대로 시켰음을 느낄 수 있었다.
「너….」
「으응?」
「옷은 좀 자주 갈아입어라.」
「무, 무슨 실례인가! 나도 이제 그대와 비슷한 나이란 말이다!」
「아니, 뭘 하기 전에는 제대로 변장을 하라고.」
현은 수배서를 떠올리며 도움이 될 만한 충고를 건네주었다.
지금의 루이즈의 복장은 초상화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냥 내가 몇 벌 사주는 게 낫겠어.」
현은 마카롱. 아니, 카르마가 사용한 방법을 참고하기로 했다.
파피의 눈을 피하며 작업을 하기 위해선 여러 벌의 옷이 필요할 것이다.
***
캐시샵에서 다양한 옷들을 구매했다.
수많은 종류의 옷은 전부 루이즈의 인벤토리… 아니, 루이즈가 지니고 다니는 손주머니 안에 담겼다.
대충 모든 정리가 끝나고, 현은 루이즈의 일정을 물었다.
「한 달?」
「염치는 없다만, 그대가 도와준다면 한 달로 모든 준비가 끝난다.」
「그 뒤엔 바로 하늘로 이동한다는 거네?」
「그렇다!」
본격적인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는 것도 한 달 뒤.
현은 그동안 루이즈와 떨어져 있게 된다.
「후훗, 이 몸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여차하면 이것도 있으니.」
헤어지기 전, 루이즈는 귀환 스크롤을 보여주며 웃었다.
루이즈는 여전히 쉐이드 길드의 하녀로 등록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 의도를 확인한 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경고했다.
「스크롤에 의지하진 마, 사용 불가능한 장소도 있어. 예를 들면… 미궁 안이라던가.」
마나의 흐름이 뒤틀리거나, 특정 마법진으로 둘러싸인 등. 텔레포트 계열 마법이 불가능한 몇몇 장소가 존재했다.
그 말에 루이즈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잠깐, 미궁에서 못 쓴다고?! 그 중요한 사실을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느냐…! 그럼 난 5년간 쭉 위험했던 것이었던가?!」
「아니, 그래도 미궁이 제일 안전했겠지. 어쨌든 참고하라고.」
현은 루이즈와 따로 행동하기로 결정했지만,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어둠과 그림자는 서로의 기운을 느낄 수 있고, 여차하면 마의 구슬을 다시 사용해서 찾아갈 수 있다.
거기에 특정 날짜에 프라이빗 룸에서 루이즈와 만나기로 약속까지 해 두었다.
첫 접선은 사흘 뒤.
다행히, 루이즈의 계획 중엔 대도시의 신전을 습격한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것은 없었다.
외지 마을의 신전들만을 노린다는 것 같으니, 웬만해선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대화가 끝나가던 도중, 문득 루이즈의 얼굴이 아련해졌다.
「현… 있지 않은가.」
「응?」
「그대가 나랑 함께하는 것은… 안… 되겠는가?」
루이즈의 말에 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몸이 커졌어도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 걸까?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헤어지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앞으로 루이즈는 예전의 어린애가 아닐 테니까.
「그야, 한 달 후면 싫어도 같이 하늘로 갈 거잖아.」
「그, 그렇겠지…!」
「무리하진 말고. 그럼 나중에 보자. 네 부하들을 찾아봐 준다는 약속은 꼭 잊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었다.
팟! 동화의 대상을 변경한 현이 입을 열었다.
「아인, 결투장엔 내일 가도 돼?」
미궁에 다녀오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 새벽이 다 되어 있었다.
친구 창을 살펴봐도 온라인 상태는 아인과 타르타르뿐.
타르타르는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으리다.
「오늘은 너무 늦었잖아.」
「어, 으응…?!」
「너 결투장에서 리그 매칭 하고 싶어 하던 거 아냐?」
현은 며칠 전의 아인이 몇 판만 더 매칭을 돌리자며 조르던 것을 떠올렸다.
「현이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는데…?」
「그럼 안 가도 돼?」
「물론, 가! 당연히 가야지!」
순간, 동화하고 있던 현은 움찔했다.
미궁에 다녀와 진이 빠진 기색이었던 아인의 감정이, 갑자기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타오른 까닭이었다.
「나… 내일 학교 가지 말까…?」
갑작스런 아인의 중얼거림.
현은 깜짝 놀랐다.
자신도 고등학교 시절까진 무단결석을 한 적이 없었는데.
아인은 벌써부터 이런 일탈을 생각하는 건가?
「너, 곧 방학 이라며」
「맞아!」
「그럼 이상한 소리 말고, 일찍 자기나 해.」
접속을 종료하기 전, 아인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현, 더 이상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고 했지?」
현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언제까지나 숨어 있을 순 없으니.
아니, 지니에게 영향력을 실어주려면 오히려 모습을 좀 드러내야만 했다.
루이즈와 엮이지만 않았다면 이미 명예의 전당에 아이디를 등록했을지도 몰랐다.
「유명해져도 상관없다는 거네!」
「오히려 그럼 좋지.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봐?」
「아, 아니… 그, 그냥. 확인 차?」
무어라 주절거리다가 로그아웃한 아인.
혼자 남게 되자 현의 동화는 저절로 해제되었다.
‘왜 저러지?’
현은 마지막 동화의 감각으로 아인의 의도를 추측해 보았다.
괜히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아인은 큰일을 벌이기 전에 항상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를 알 수 없어서 현은 금세 생각을 그만두었다.
‘나중에 말해주겠지.’
다시 라비린스에서 랜턴으로.
프라이빗 룸에 도착했을 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홀로 소파에 앉은 현은 메뉴 창을 열었다.
새로 바꾼 캡슐에는 수많은 기능이 존재했다.
화면 한쪽에 인터넷과 문서창을 함께 띄운 채, 현은 앞으로의 계획을 꼼꼼히 검토해 보기 시작했다.
‘좋아, 지니가 부탁한 재료들은 다 모았어!’
루이즈가 하늘로 향하는 것은 앞으로 한 달 뒤.
현은 본격적인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끝내야만 할 일을 정리해 보았다.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다.
‘200레벨부터 찍어야 돼.’
레벨 업은 가장 당연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200레벨을 얼마나 빨리 찍느냐에 따라 계획의 선택지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지금이 189레벨이니, 넉넉하게 5일 정도면 200레벨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전직을 해야 할 테고.’
예전에도 전직 퀘스트를 깨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빨리 200레벨을 달성해야 하는 이유도 2차 전직 퀘스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레전더리 아이템을 얻어야겠지!’
현은 여태껏 모은 재료들을 쭉 훑어보았다.
인벤토리에는 셰라트의 꼬리를 포함해 최상급 재료들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구상해 둔 레전더리 무기를 만들기 위해선 아직 한 가지 재료가 부족했다.
유니콘의 뿔.
하늘에 사는 성수(聖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마법재료다.
그동안 현은 심연과 연관된 재료들은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천공에 가까운 재료들은 좀처럼 얻을 기회가 없었다.
‘매물만 나온다면 얼마든 사줄 텐데, 영 올라오질 않네.’
현은 커뮤니티의 경매장을 뒤지며 혀를 찼다.
경매장의 기능 중엔 특정 물건의 마지막 거래 가격을 확인하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째선지 유니콘의 뿔은 매물이 올라온 기록조차 없었다.
‘그렇게 귀한 재료가 아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200레벨을 넘어가는 유저들이 슬슬 나오고 있는 시기.
심연 유저들이 공작과 엮이는 것처럼, 천공의 최상위 유저들은 이미 천인들과 엮였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유니콘의 뿔이 매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이것도 지니가 말해준 현실의 개입 때문일까?’
현실의 단체들이 재료 아이템의 시세를 뒤바꾸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