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verted to being a K-drama genius RAW novel - Chapter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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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산 있는 모험
* * *
SBC 드라마국.
래원이 출근길에 휘파람을 불며 들어섰다.
이사한 이후로 출근 시간이 반으로 줄어서 아침잠을 더 자고 나올 수 있다.
덕분에 컨디션이 확 좋아진 느낌이었다.
“래원아, 레장여 [노미령] 역할 캐스팅 어떻게 되고 있냐?”
래원이 책상에 앉자마자 황태수 부장이 턱을 들이밀고 물었다.
이에 래원의 휘파람 소리가 뚝 끊겼다.
“아직 입니다···.”
“주요 배역 중에 [노미령]만 남았지?
“네.”
“힘든 상황인 거 아는데, 그래도 다음 주 헤드 스텝 회의 전까지는 어떻게든 정리 좀 해봐. 원더빅 투자 들어오고부터 이 국장님, 김 부국장님 두 분 다 신경 많이 쓰신다. 어휴.”
“네,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하겠습니다.”
래원은 대본을 꺼내 펼쳤다.
캐릭터 분석을 좀 더 해볼 참이었다.
이번 단막극 의 주연은 3명이라고 할 수 있다.
1. 양수호 배우가 맡을, [안승헌]
동경에서 유화 유학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날 밤, 안승헌은 혼마치의 밤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쫓기는 한 여인을 만나 숨겨준다.
그녀는 독특한 레이스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아무리 귀족 행세를 한대도, 진실을 이길 수는 없지요.” 라는 미스터리한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다음 날, 안승헌은 경성 변두리의 오카무라 대저택에 입주 교사로 취직하여 이복자매 동생 [노미령]과 언니 [마리코]에게 유화와 일본어를 가르친다.
2. 아직 캐스팅 미정인, [노미령]
죽은 오카무라 후작(노 후작)의 둘째 딸이다.
조선귀족 후작 작위를 받은 아버지가, 생전에 맺어준 약혼자 [박규산] 남작과의 사랑 없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입주 교사 [안승헌]과 사랑에 빠지며 괴로워하다가 어쩔 수 없이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허나 결혼 후 돌연 사망한다.
3. 엄하늘 배우가 연기할, [마리코]
죽은 오카무라 후작(노 후작)의 첫째 딸이다.
이복동생인 [노미령]과 사이가 좋은 편이며, 동생이 결혼 후 갑자기 사망하게 됐을 때 이를 믿지 않고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그리고,
주조연에 해당하는 캐릭터가 2명 더 있다.
4. 구민준 배우가 맡을, [박규산]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가진 친일파.
집안이 맺어준 약혼녀 [노미령]과 결혼하지만 이내 사별하고 홀아비 신세가 된다.
5. 유하나 배우가 연기할, [연홍]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
특이하게도 얼굴이 [노미령]과 매우 닮았으며, 정신병이 심해져 끝내 ‘내가 박규산의 부인인 노미령이다!’ 라고 주장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노미령만 캐스팅하면 되는데, 후보는 단 두 명뿐···.”
래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연출 지혜영과 유찬이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 드라마와 일정이 맞고, [노미령] 배역 이미지 및 나이대에도 맞으면서, 다른 주연 라인업인 양수호-엄하늘과 견주었을 때 연기력과 평판이 꿀리지 않는 배우는
아무리 눈을 낮춰서 많이 쳐줘도 단둘 뿐이었다.
무엇보다 배역 설정상 [연홍] 역의 유하나와 비슷한 이미지여야 하는 것도, 후보가 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였다.
보통의 경우에는 둘에게 연락을 취해서 캐스팅을 진행하면 그만이나,
지금 래원이 이렇게 한숨까지 푹푹 쉬며 고민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두 명의 후보 양쪽 다 엄청난 결점을 하나씩 갖고 있다는 것.
지혜영이 알아본 배우는,
양수호의 전여친이라서 이 배우를 택하면 양수호가 껄끄러워할 것이다.
하필 [안승헌]과 [노미령]이 연인 관계의 배역이라 더 그랬다.
유찬이 알아본 배우는,
이 배우의 외증조부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됐다는 게 밝혀지면서 재작년에 친일파 후손 논란이 크게 있었다.
“양수호는 절대 포기 못 하고, 드라마 배경이 일제강점기라서 친일파 논란은 무조건 피해야겠고, 미치겠네···. 하아···. 이건 정말 난형난제(難兄難弟)다.”
그 두 배우보다 급을 낮춰서 찾아봐도
스케줄이 안 되거나,
스케줄이 되면 이미지나 나이대에 안 맞거나였다.
그렇다고 더 아랫급까지 내려가기에는 [노미령] 역할이 너무도 중요했다.
“결국 저 두 배우뿐인데···. 둘 중 하나를 쓰면서 논란이 없게 할 수는 없을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거야. 지금껏 그랬듯이.”
래원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벌떡 일어나 탕비실로 갔다.
조용히 냉커피 한 잔을 타 마시며 생각했다.
‘현재에 더는 방법이 없다? 그럼 과거에서 찾으면 되지.’
래원은 머리를 굴려 가며 과거의 기억들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 * *
티딕- 티딕- 티딕-
래미는 침대에 누워, 콘서트 굿즈였던 응원봉의 스위치를 껐다 켰다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래미가 스위치를 켤 때마다 응원봉에 [Big Wonder World] 이라고 쓰인 네온사인이 무지갯빛을 발했다.
응원봉이 박자에 맞춰 반짝거릴 때마다
래미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다녀온 콘서트의 추억이 떠올랐다.
꿈만 같았던 그 날의 기억.
콘서트장의 함성, 그때의 공기와 열기, 쿵쾅거리던 심장.
그 모든 게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매년 2월에 열리는 원더빅 콘서트.
대부분의 무대가 전부 멋있었지만,
그날 래미의 마음을 홀딱 빼앗은 원더빅 소속 아티스트는 6인조 아이돌 걸그룹 ‘문걸즈’ 였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공식적인 마지막 그룹 무대였던 문걸즈는, 각자 개인 활동을 이어나갈 것을 공식 선언했다.
마지막이라 더 빛나 보였던 걸까?
무대 위의 문걸즈, 그중에서도 금발 머리를 찰랑이며 무대를 활보하던 민세라에게 래미는 온 시선을 빼앗겼다.
“민세라 언니는 걸크러쉬 그 자체였어.”
민세라의 파워풀한 춤선, 세련된 음색 그리고 카리스마 있는 무대 매너와 독보적인 외모까지.
래미의 머릿속에 계속 둥둥 떠다니듯 아른거렸다.
“이런 게 팬심일까···?”
그렇다고 래미가 문걸즈를 쫓아다니고 싶다든지 그런 건 아니었다.
“세라 언니처럼 무대 위를 날아다니면 어떤 기분일까···?”
래미는 경험을 반추해보며 그나마 가장 비슷할 거라 생각이 드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의 자신을 떠올려보았다.
다른 인물을 연기할 때는 자기 자신을 잊게 된다.
온전히 타인이 되는 순간의 즐거움이 있다.
반면, 무대에 서는 건 조금 다르다.
온전히 ‘나 자신’으로 서는 거니까.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본다.
“나도 민세라 언니처럼 그렇게 멋있게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될까?”
래미는 오빠인 래원이 ‘네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좋아하는지 찾아봐.’ 라고 말했던 걸 기억한다.
그리고 ‘넌 뭐든 될 수 있어.’ 라고 말해줬던 것도 잊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무대에 서 보고 싶어!”
이 같은 생각을 하다보니,
래미의 손에 들린 응원봉이 깜박거리는 박자에 맞춰서 래미의 심장도 두근두근거렸다.
가슴 깊은 속에서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꿈이라는 거, 뭔가가 되고 싶다는 거···. 그게 지금 이 감정, 이런 느낌일까?”
래미는 벌떡 일어나, 래원에게 카톡을 보냈다.
[래미] 오빠, 나 결정했어! 원더빅에서 트레이닝 받아볼래>_< 재밌을 거 같아~!지이이이이잉—
1분도 지나지 않아, 곧바로 래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 정말이야? 계약할 거야?
“웅! 나 할래! 해 볼래!”
– 콘서트가 좋았나 봐?
“어, 완전! 아직도 눈 감으면 생각나. 진짜 멋졌거든.”
래원은 래미가 충동적으로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래미가 콘서트에 다녀오자마자 마음을 정한 게 아니라, 열흘 넘게 지난 오늘에서야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 그 정도야? 뭐가 그렇게 멋지고 좋았는데?
“······.”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 민세라. 문걸즈 민세라 언니가 정말 최고였어.”
– !!!!!!
그 이름 석 자를 들은 순간,
래원의 머릿속에 느낌표가 한가득 떠올랐다.
“오빠···?”
– 어..어?
“왜 갑자기 말이 없어?”
– 아, 아냐. 오빠 지금 일하다가 잠깐 나온 거라···.
“그럼 이따 집에 와서 마저 이야기해.”
– 그래. 네 뜻은 알았어. 오빠가 원더빅 박 대표님이랑 다시 한번 자리 마련할게.
래원은 래미와의 통화를 끝내고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민세라.
지금은 걸그룹 ‘문걸즈’의 센터 멤버다.
아니, 정확히는 열흘 전까지 그랬다.
이제는 개인 활동을 선언했으니까.
개인 팬카페 회원 수도 가장 많고,
안티 팬카페 회원 수도 가장 많은,
한 마디로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멤버였다.
그리고 그녀는 앞으로 개인 활동을 하면서 더 훨훨 날아오를 것이다.
애초에 그녀의 진짜 재능은 가수나 아이돌이 아니라 배우였기 때문이다.
배우로 전향하자마자 첫 작품부터 연기 천재 소리를 들으며, 연예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민세라.
래원은 결심이 섰는지, 바로 원더빅 박현만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대표님, 도래원입니다. 혹시 오늘이나 내일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제가 대표님 편하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 * *
SBC 드라마국에 이제 회의실이 생겼다.
이곳에 이 국장, 김 부국장, 그리고 담당 CP인 황태수 부장과, 담당 PD 도래원이 모였다.
조연출인 지혜영과 유찬도 함께 자리했다.
이번 작품은 SBC 자체 제작이라 제작사가 따로 없어서,
캐스팅 디렉터의 역할까지 연출부에서 도맡아야 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캐스팅 회의였다.
주연 중 하나가 아직까지도 공석이라 모두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이 국장, 그렇다고 일제강점기 드라마에 친일파 후손을 캐스팅할 수는 없잖나?”
“김 부국장님, [노미령] 역할 파악은 제대로 하시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친일파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지만, 결말에는 의병 집안이었던 외가의 핏줄을 택하는 인물입니다. 그 배우와 상황이 비슷한 역할이라 오히려 이미지 쇄신에 도움이 될 수도 있죠.”
두 사람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서로 반대 의견을 주장했다.
“그건 모르는 거지. 요즘 시청자들 민감한 거 몰라서 그래? 이미지 쇄신이 될지 영원한 무덤이 될진 모르는 거라고!”
“그렇다고, 양수호 전여친을 쓸 수는 없잖습니까? 하필 연인 역할인데···.”
이 국장이 답답하다는 듯 말하자,
김 부국장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왜 안 돼! 배우가 공과 사도 구분 못 하면 그게 배우야?? 우리가 그런 배우 같지도 않은 놈들 입장까지 헤아려줘야 하냐고!!”
“하아···. 한류스타 양수호 복귀작이라고 세상의 이목도 많이 집중될 거고, 수호도 부담 많이 될 텐데, 우리가 그 정도 배려는 해줘야죠.”
두 사람의 견해차는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 안 되면, [연홍]역의 유하나 배우가 [노미령] 역까지 1인 2역을 하는 건 어떨까요?”
“태수야, 유하나 연기력으로 [노미령]을 어떻게 해.”
“대본 분석 제대로 안 했어, 황 부장? 둘이 같이 나오는 씬도 있잖아.”
오늘 처음으로 김 부국장과 이 국장의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제 말은. 캐스팅이 이렇게 난항이면 그 장면을 수정해서라도 1인 2역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는 말씀을 드···.”
“그건 안 되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 백미가 될 장면인데! CG로 하면 너무 짜치고.”
이 국장이 황태수 부장의 말을 잘라버리자,
황태수를 비롯해서 지혜영 그리고 유찬은 더욱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 국장과 김 부국장이 쌈닭처럼 구는 통에, 후배 된 입장에서 또 함부로 의견을 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저.. 국장님, 부국장님.”
래원의 차분한 음성이 지금 이 일촉즉발 사이를 파고들었다.
“제가 다른 캐스팅 후보를 한 명 찾아왔는데, 한 번 보시겠어요?”
“다른 후보? 누구? 유하나랑 닮은 배우가 둘 말고 또 있어?”
“얘네 둘보다 더 밑에 급으로 내려가면 곤란한데···?”
“밑에 급은 아니구요,”
래원이 확신에 찬 어투로 선을 긋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황태수, 지혜영, 유찬도 얼굴을 들어 래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래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민세라 입니다.”
이에 황당하다는 듯 반응하는 드라마국 사람들.
“··· 뭐? 민세라? 문걸즈 민세라?”
“네, 그 민세라 맞습니다.”
“문걸즈 접고 개인 활동 준비한단 얘긴 작년부터 듣긴 했어. 우리 대본도 간 적 있고. 근데 걔가 뮤직비디오나 가벼운 웹드라마나 조연 말고, 이런 정극 주연을 한 적이 있었나?”
“없습니다. 문걸즈 민세라가 아니라, 배우 민세라의 홀로서기 정식 데뷔작이 될 겁니다.”
김 부국장과 이 국장이 차례로 한마디씩 했고, 래원은 흔들림 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 국장이 이때다 싶었는지 래원에게 언성을 높였다.
“··· 야, 도 피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냥 단막극도 아니고 투자금도 크게 받아 가면서 하는 건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모험을 하자고? 그따위 막돼먹은 근자감은 어디서 배웠어?”
허나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대꾸하는 래원.
“모두 아시다시피 기존의 후보 두 명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하지만,”
래원의 안에는 근자감이 아니라, 근거 있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민세라는 분명 승산 있는 모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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