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1
제181화. 천사의 눈동자
“…….”
“그림은 어찌했지?”
왜 대답이 없는가.
이안이 슬쩍 눈을 뜨자, 어색하게 웃고 있는 베릭의 얼굴이 보였다. 아코렐라를 호위하여 무탈하게 그림을 가져오는 게 임무였거늘, 그는 지금 맨손이다.
베릭은 이안의 등을 받쳐주며 꿍얼거렸다.
“잘 갖고 오는 중일걸?”
“베릭.”
“아니, 나는, 어!? 너 죽은 줄 알고, 어!?”
변명하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이안이 멀쩡해서 다행이긴 한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서둘러 달려올 걸 그랬다. 상대가 죄다 궤멸하여 공 세울 것도 없고, 덩달아 변명할 거리도 없다.
“되었다, 베릭. 가서 그림을 가져와.”
“아아! 맞다! 있지, 그거 보면 깜짝 놀랄걸? 엄청 크다? 그리고 막 눈알도 이렇게, 이렇게 빙빙 돌아간다? 아마 값어치로 따지면 돼지 한 마리 정도는 될 거 같아. 음음.”
“두말하게 만드는구나.”
“넵. 갑니다요.”
베릭은 희번덕 뒤집어 깐 제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알 수 없는 설명을 해댔다. 이안의 꾸중에 바로 일어섰지만 말이다. 그때, 저 멀리 아코렐라의 외침이 들려왔다.
“야이, 베릭, 또라이 같은 놈아!”
“어? 맞네! 알아서 잘 오고 있었네!”
“이걸 두고 가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어!?”
“다들 괜찮아요? 포탈이 왜 갑자기 없어졌는지, 헉! 벼, 벼, 변방족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림 앞부분을 잡고 오던 토미가 난장판인 광경을 보며 멈칫거렸다. 언덕처럼 쌓인 시체와 끝없이 흐르는 핏물. 느닷없는 변방족의 등장도 그러하지만, 부상 입은 마법사들의 존재도 이질적이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설명하자면 길다. 우선 상황을 정리할 것이라. 전사여. 그림을 안쪽 건물로 옮겨주게.”
“네. 이안 님.”
스윽.
가까이 있던 전사가 그림을 건네받았다. 토미가 조심하라고 경고하려는 찰나, 전사는 가볍게 한 손으로 그림을 들고 계단 위를 올랐다. 둘이서 바들거리며 옮겨왔건만, 어찌 전사에게는 신문지와 다름없어 보였다.
“대장들은 인원 파악 후 보호막을 새로 구축하고 정비하라. 아코렐라 대장은 나를 따라오게.”
이안이 중앙 로비를 가르며 명하는 동안, 아코렐라는 그 뒤를 총총 따르며 속삭였다.
타닥타닥!
“이안 님, 그림을 가져오는 길에 게일 저하를 만났습니다. 3황궁에 숨어있다가 저희를 보고 접근하였더라고요.”
그녀의 말에 이안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참으로 많은 걸 함축하고 있지 않나? 게일의 전력이 마리브에게 확실히 격퇴당했음을, 그리고 많고 많은 황궁 중 3황궁에 숨어들어 있던 이유를 말이다.
“게일도 황제의 비밀 통로를 알고 있나 보군.”
“아무래도 웨슬리 전 장관과 연인이었으니, 자세히는 몰라도 눈치는 챘을 것입니다.”
“한데, 그대들이 그림을 옮기는 걸 보고도 저지가 없었나? 전투의 흔적은 없는 것 같네만.”
아코렐라의 머리칼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지만, 그것은 노동으로 인한 것이지 전투로 인한 게 아니었다. 아코렐라가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며 보고했다.
“게일 저하가 전언해 달라 하였습니다. 기회가 난다면 은밀히 뵙기를 원한다고요. 아무래도 황궁 입구에 관한 부탁일 것 같습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불씨가 이제 겨우 사그라드는데, 바깥의 전력을 충원하여 다시금 궁을 혼란으로 태우란 말인가? 이안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가망 없는 부탁을 하는 자가 아닌데.”
“네. 하여, 여러 조건을 걸었습니다.”
“가감 없이 전하라.”
이안은 복도에서 멈춰선 다음, 벽에 몸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으나 아코렐라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만큼 이안의 자세와 움직임이 자연스러웠기에.
“황제 폐하의 비밀 통로에 관한 정보. 그리고-”
“흐음.”
별로 구미가 당기진 않았다. 마법으로 세운 통로였으니, 마법사들이 조금만 노력한다면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마리브가 생포 당한 지금,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고. 무엇보다 황제가 정세를 알게 되면 스스로 나타날 가능성이 컸다.
“현재 황궁에서 보유한 마력봉인석의 관리, 권한, 위임입니다. 저, 솔직히 이거 듣자마자 눈 돌아갈 뻔했습니다.”
감정이 꾹꾹 눌린 아코렐라의 목소리가 진실되었다.
상급 위의 상급. 감히 규격을 함께 묶을 수 없을 정도로 마법사들에게 의미가 깊은 원석 아니던가.
“아시다시피 게일 저하는 현 황궁에서 마력봉인석을 제일 많이 가진 분 아닙니까. 상황만 잘 본다면 이번 사태에 편승하여 마법부의 영광을 도모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하고는 있었으나, 이안은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오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력봉인석을 연구해 보고 싶나?”
“그렇습니다. 바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봉인석의 원리를…….”
저도 모르게 진심을 뱉고 말았다. 아코렐라가 뒷말을 흐리며 차렷 자세로 허공을 응시하자, 이안은 주머니 속 호박색 원석을 꺼냈다.
“받으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리브가 만든 새로운 종류의 마력봉인석이다.”
“네에에에!? 어떻게요?”
아코렐라는 콧김이 드릉드릉 나오는 걸 느끼며 소리쳤다. 경악과 환호 그리고 경외와 호기심, 그 어느 사이에 있는 탄성이었다.
“기존의 마력봉인석과는 작용 방식이 다른 것 같았으니, 그대와 마력석관리부 마법사들은 지하로 내려가 바로 연구하게. 나키나를 비롯한 마법사 몇몇이 그것으로 만든 화살에 맞은 후 마력을 내지 못하고 있으니 각별하게 주의하고.”
“마력을 내지 못한다고요?”
“일시적인 현상일 것 같으나, 추측일세. 바깥에 널린 호박색 화살이 모두 잔해이니, 수거하여 진행하라.”
“제가, 예, 제가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아코렐라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세상 소중하다는 듯 원석을 품에 안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밖으로 달려나가는 발걸음이 다급하다.
타닥타닥!
“그, 이안 님! 그림 말입니다. 리퀴석으로 그린 게 분명하고, 베릭 말로는 천사의 눈동자가 막 움직였다고 합니다. 아마 찾으시던 게 맞을 겁니다.”
“알겠네. 알아보지.”
“네. 그럼, 마력석관리부! 집하아아압!”
그녀의 외침을 뒤로하고, 이안은 회의실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
그림이 왼쪽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아코렐라와 토미가 그림을 운반하였으나, 게일이 저지하지 않았다. 이미 그가 확인했다는 뜻이로다. 그리고 수많은 통로의 입구 중 하나라, 상관없다는 생각이었겠지.’
이안은 뒤로 살짝 물러나며 그림을 쭉 훑었다.
그 역시 황제였을 때, 그러니까 크로니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황궁을 빠져나가기 위해 이러한 통로를 이용했다.
“폐하. 듣고 계십니까.”
대답이 없다. 하지만 이안은 그것이 선택적인 침묵임을 알고 있다. 황제는 아마 어둠 속에 앉아 있으리라. 하여, 그림이 걸려 있는 곳을 동시에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안에 계신 것 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계시기에는 불편한 자리이니, 이리 나오십시오. 베올스도 그곳에 있는가?”
역시 대답이 없다. 모르는 자가 봤다면 이안이 미친 사람처럼 보이리라.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리브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마리브 황자를 생포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현신하여 상황을 수습해 달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맨 왼쪽 천사의 눈동자가 이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것이 사실인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 늙은 황제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옥타브가 높다. 이안은 가볍게 경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법부에는 리퀴석으로 그린 그림이 없다. 있다 한들, 맞은편의 벽면만 보일 것이니 시각적인 정보는 극히 제한되었을 터. 들리는 것도 폭발음이나 굉음 따위가 다일 것이라. 황제는 정세가 어찌 돌아가는지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는 듯했다.
“베올스와 함께 계십니까? 무탈하시고요?”
하여, 베올스를 보내 주위를 둘러보게 하였겠지. 그 순간순간을 헤일이 감지하여 궤를 추적했다.
“이제 그만 나오셔도 됩니다. 모두 마무리되어 안전합니다.”
하지만 황제는 눈만 깜빡이며 이안을 내려다봤다.
-마리브와 게일을 모두 보여라. 그 전에는 나갈 수가 없으니.
뜻밖의 대답에 이안이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 황제된 자라면, 서둘러 모습을 보여 상황을 정리하는 게 올바른 덕목 아닌가?
하지만 그는 지금 이안에게 안전을 증명하라 말하고 있었다. 여태 이안과 어떤 교류도 없었으면서.
“폐하.”
이안은 문득, 그가 유달리 장수했다던 기록을 떠올렸다.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진 채로 어찌 그리 오래 살았나 싶었더니, 저런 성정이라 그런 것이라.
죽음을 천벌처럼 무서워하여 황궁의 수습보다 자신의 안위 보장이 더 우선인, 그런 한심한 황제.
“게일 황자는 폐하의 의지를 따르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직접 나오시어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믿을 수 없다. 마리브는 내게 독을 먹였고, 게일은 상의 없이 귀족의 병력을 결집하였으니. 두 아들 모두 아비의 심장을 도려내다 못해 산산조각 내었도다.
황제가 게일을 밀어주기로 한 ‘거래’의 조건이었나 보다. 정치적으로 마리브를 밀어내되 황궁을 어지럽힐 만한, 그러니까 황제의 안위를 위협할 만한 병력은 금할 것.
하지만 보란 듯이 귀족들의 지원병이 황궁 곳곳에 시체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니 나오셔서 두 사람의 황자 직위 박탈을 선언하십시오. 폐하, 무서워하실 것이 없습니다.”
어이가 없다. 이토록 어르고 달래서 모셔야 하는 황제라. 그림 속 천사는 다시금 물었다.
-마리브와 게일을 황자에서 박탈하면, 아르센과 진이 남는다. 그대는 아르센이 후계자가 되었으면 하는 것인가?
이안은 문득, 황제의 뉘앙스가 묘하다는 걸 눈치챘다. 마치 아르센은 그 자격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였으니까. 이안이 잠시 시선을 내렸다.
“아니오. 마리브 황자가 굳건하였다면 다른 후계자를 세움으로 정통성을 박탈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우선은 공석으로 비워두시어 혼란이 정리된 다음 결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진을 후계자로 강권, 추대하고 싶으나 모든 일에는 절차라는 게 있는 법이다.
‘지금 진을 지지한다면 황제는 나까지 의심하여 더더욱 몸을 숨길 것이라. 적기이니까. 황제가 암살당해도 역사의 흐름이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적기.’
황제는 알고 있었다. 지금, 황궁에서 그와 맞먹을 정도로 상황적 지지를 받는 게 이안이라는 것을. 혹여 그가 권력을 잡고자 한다면 황제를 베는 반역 행위 따위는 쉽게 일어날 수 있음을. 그래서 더더욱 날을 세우고 이안의 목적을 살피려 했다.
‘진이 아르센을 넘어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선, 황제의 지지가 무조건 필요하다.’
이안은 그리 생각하며 기품 있게 엎드렸다. 진의 미래를, 그리고 이안이 기억하는 미래를 위해서라면 기꺼웠다.
“폐하. 제발 현신하시어 황궁을 돌보아 주십시오. 모두가 폐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긴 적막이 이어졌다. 이안은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베올스였다. 그는 여전히 경계하는 시선으로 이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안 경. 일어나십시오.”
“폐하는요?”
그의 손에 들린 서신 하나.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황제 폐하의 피입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이것은 폐하가 제게 남긴, 그리고 바리엘에 남긴 당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