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village life with herbal elixir RAW novel - chapter 49
첫 화환이었다.
돌담길에 화환을 배치하니 이제 정말 개업을 했다는 실감이 났다.
“혼자 오려다가 요놈이 하도 떼를 써서 같이 오게 됐어.”
철수가 말했다. 옆에 있던 지훈이는 수줍게 핀 꽃처럼 머리를 긁적였다.
지훈이가 약초원을 오겠다고 떼를 쓴 이유를 짐작하자면 단 한가지 밖에 없겠지.
“장미꽃 차 때문에 왔구나.”
“네. 장미꽃 차 좀 사고 싶어서 왔어요. 저번에 시장에서 장사하실 때 샀는데, 금방 떨어졌어요.”
이제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을 때라 장미꽃 차 소진 속도가 빨랐다.
아마, 요 녀석도 나의 딸 연이처럼 혼자서 먹지 않고 친구들과 나눠먹는 것 같았다.
“때마침 잘 됐네. 이번에 장미꽃이 활짝 펴서 준비된 게 많았는데. 기다려봐.”
첫 손님이라 그런지 마음이 급했다.
우리 집을 찾아와 마법의 힘이 담긴 약을 달라는데, 약초꾼이 아닌 마법사가 된 기분이었다.
“천천히 해 도일아. 급할 거 없어.”
철수와 지훈이가 툇마루에 앉아 숲의 전경을 감상했다.
“나무를 통으로 사다가 심어버린 거야? 숲이 울창하네.”
“어. 약성이 좋다는 나무를 사다가 심었어. 돈 깨나 들었다.”
씨앗을 심었더니 며칠 만에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곤 차마 얘기하진 못하겠다.
믿을 사람도 없겠지.
철수와 지훈이에게 장미꽃 차 한 잔을 대접했다.
진한 꽃 향과 감미로운 목 넘김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맛이었다.
“정말 효능이 좋아요. 저희 반 아이들도 이걸 먹고 성적이 올랐거든요. 집중도 잘 되고 앉아 있기만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한다니까요.”
“그래서 성적이 얼마나 올랐어?”
지훈이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2등급이 됐다는 뜻이었다.
“지훈아. 이거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면 너 먹을 장미꽃 차도 줄어들 텐데 괜찮아?”
“네. 괜찮아요. 어차피 다 같이 잘되자고 하는 건데요.”
그랬더니 철수가 버럭 화를 낸다.
“이놈아, 너는 좋은 게 있으면 혼자서 누릴 줄 알아야지. 그걸 꼭 친구들에게 나누어서 경쟁을 해야겠냐?”
철수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사실 여느 아버지나 똑같은 생각이겠지.
공부의 비법인데 그걸 어찌 남에게 공유하겠나.
그런데 나는 그런 지훈이가 참 착해보였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시골아이 다운 생각이었다.
“우리 딸도 지훈이 생각하고 똑같아. 내가 백송이의 장미꽃을 연이에게 보내면 보름도 안 돼서 동났다며 더 달라고 한다니까.”
“와, 그러면 아저씨 딸도 공부를 잘하겠어요?”
“그럼. 너는 손가락 두 개를 펴서 2등급, 우리 딸은 1등급.”
“대박이다.”
“그런데, 대학갈 마음은 없나봐”
“네?”
“요즘 SNS를 보니까 다른 곳에 정신 팔려 있나 보더라고.”
“어떤 거요?”
“애가 머리가 똘똘해져서 대학을 가는 것보다 창업을 해서 돈을 버는 게 더 좋은가 보더라.”
똘똘해진 머리로 공부만 했으면 좋으련만, 연이는 다른 생각도 품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창업이었다.
SNS를 염탐해서 봤더니 창업에 대한 글이 잔뜩 써져 있었다.
철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녀석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니 자식만큼은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어 했다.
“대학을 안 가고 창업을 한다고?”
“내 짐작이긴 한데, 카페를 차리고 싶어 하나봐.”
“카페를?”
“어. 카페 창업관련 책을 SNS에 잔뜩 올려놨더라고.”
카페를 차려서 프렌차이즈를 만들어 부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우습게도 그 포부를 SNS에 당당히 밝혔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떤데?”
“딸의 선택을 존중하긴 하는데, 희숙이 생각은 또 다를 수가 있으니까.”
철수가 잠시 생각한 뒤 말문을 열었다.
“너희 집 약초원에서 나고 자란 꽃잎으로 카페를 만들면 장사가 꽤 잘될 것 같긴 해. 효능이 워낙 좋잖아. 그런데, 내가 만약 연이 아빠라면 절대 반대다. 대학은 가야지. 내가 그 설움을 얼마나 잘 아는데.”
대학을 나오지 않은 철수는 아이러니하게도 학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설움 받은 기억이 머릿속을 자근거리게 만든 원흉이었다.
“지훈이 생각은 어때?”
그런데, 이젠 시대가 바뀌었다.
연이와 또래인 지훈이의 생각이 궁금했다.
“아버지 말씀처럼 일단 대학을 가고 나서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 너는 대학을 가면 무슨 전공을 하고 싶은데?”
“그건 아직 못 정했지만···일단 가고 나서···”
지훈이가 아버지 눈치를 살살 살피며 말했다. 나는 녀석의 눈빛에서 거짓을 보았다.
“지훈아. 내가 새롭게 만든 꽃차가 있는데, 한 번 맛볼래?”
“정말요?”
『진심』의 특전이 담긴 꽃 차였다.
이참에 특전의 효능을 제대로 시험할 수가 있겠다.
나는 작업실에서 꽃차를 제조한 뒤 철수와 지훈이에게 한잔 씩 건넸다.
“이게 무슨 차냐?”
“설강화, 매화, 국화, 작약을 달여 만든 꽃차야. 맛도 뛰어나고 효능도 좋아.”
“하나같이 약성이 뛰어난 꽃들이네.”
“한 번 마셔봐. 아까 나도 마셔봤더니 정말 깊은 향이 나더라고.”
“그래.”
녀석들이 꽃차를 한잔 마신 뒤 깊이 음미했다.
나도 한잔 마셔보니, 속에서 따뜻한 기운이 퍼짐을 느낄 수 있었다.
포근함과도 같은 따스함이었다.
그리고 지훈이를 바라봤다.
지훈이의 입에 들썩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저···아저씨.”
“응?”
“사실···존중해요.”
“존중한다니?”
“저도 대학보다는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었거든요.”
지훈이의 말에 철수가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잖아?”
철수가 지훈이를 보며 따지듯 물었다. 지훈이는 기죽지 않고 말했다.
“저도 아버지 사업 물려받고 약초꾼이 되고 싶어요.”
“뭐?”
“그래서 약초 공부도 열심히 했고, 가끔 산에 가서 버섯도 따곤 했거든요.”
지훈이는 아버지의 눈높이에 맞춰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진심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철수는 지훈이가 약초꾼이 되는 걸 매우 싫어했는데, 철수의 반응이 어찌 탐탁지 못하다.
이럴 때는 내가 정리를 해줘야겠지.
“약학대학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지훈이도 험한 산중을 돌아다니는 약초꾼보다 그게 더 나을 것 같지 않아?”
“아···”
나의 말에 철수가 매우 화색을 띠었다.
“그래, 약초가 그렇게 좋으면 약사학위를 따 인마. 딱 됐네. 아니면 한의학을 공부하던가. 내가 구해다 주는 약초로 너는 약을 만드는 거야. 우리 집안에 약초꾼은 나 하나면 충분하다. 엉?”
지훈이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 생각은 못해봤네요.”
“그럼 목표를 정한 거네?”
지훈이가 흐뭇하게 웃었다.
“여태 어느 학과를 갈지 결정하질 못했는데요. 약대나 한의학을 전공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목표를 정한 기념으로 장미꽃 차를 많이 챙겨줘야겠는 걸.”
나는 작업실에서 장미꽃 차를 대량 가져와 지훈이에게 건넸다.
지훈이가 기분이 좋은 듯 장미꽃 차를 받으며 히죽 웃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제가 성공해서 수십 배로 꼭 갚을게요.”
“갚긴 이놈아.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네!”
지훈이가 집밖으로 나간 뒤, 철수는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다 도일아.”
“고맙긴. 지훈이를 보고 있으면 딸 생각이 나는 걸.”
“지훈이가 약초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줄 생각지도 못했어.”
“진심으로 다가가서 대화하면 속마음이 열리길 마련이잖아.”
“그게 말처럼 쉽냐.”
“하긴···”
철수가 『진심』의 꽃차를 한잔 마신 뒤 따뜻한 숨을 내쉬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일었는지,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말했다.
“나는 지훈이가 원하는 일을 했으면 싶어. 대학이 뭐 별거 있냐. 가도 안 가도 상관없어 사실.”
“…….”
“나처럼 살아도 돼. 내 삶이 어때서? 고생 좀 하고 살아도 괜찮아. 다들 그렇게 살아.”
“…..”
“안 그러냐? 기술을 배워도 좋고 약초꾼이 돼도 좋아. 차라리 내 밑에서 일하는 게 마음 편하겠다. 착해 빠져가지고 사회생활이나 잘 하려는지 몰라.”
“하하.”
“내가 괜한 말을 했네.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
“아냐.”
철수가 손을 털며 툇마루에서 일어났다. 나는 녀석을 보며 말했다.
“나한테 이런 얘기 하지 말고 아들하고 깊은 대화를 나눠봐.”
“그래. 간다. 친구야.”
“가 봐.”
진심은 어렵다.
말이야 쉽겠지만, 어쩌면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길이 아닐까 싶다.
나의 과거 또한 진심을 담아 대화했던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영업이야 가면을 써야 한다고 쳐도, 가족들에겐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나는 진심을 다해 상대방을 대하면 될 일, 진심이 통하지 않음은 상대방의 몫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진심의 특전을 한결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진심과 인연이 함께 맞닿아 조화를 이룬다면, 내 삶도 한결 풍요로워지겠지.
누구에게나 이로울 수 있는 특전이었다.
***
철수와 지훈이가 떠나고 나는 또 다시 한적한 약초원을 배회하는 한가로운 주인장이 되었다.
손님이 없어도 마음이 풍요로운 것은 아직까지도 밝혀내지 못한 수많은 특전의 힘 덕이겠지.
그런데, 오늘은 연구를 멈추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일상을 보낼 참이다.
황복이가 내게 다가왔다.
숲에 핀 산사나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붉게 물든 과육이 실하게 열렸다.
“산사나무 열매 줄까?”
-월월!
싱그럽게 열린 열매를 몇 개 따다가 씨를 제거한 뒤 황복이에게 한 입 주었다.
황궁이도 냄새를 맡고 외양간을 나와 내게 다가왔다.
이참에 설탕물을 열매에 입혀 탕후루를 만들어 먹어봐야겠다.
산사나무 열매에 설탕물을 입히고 장작불에 익혔다.
한입 베어 먹었더니 도시에서나 사먹던 탕후루의 맛이 그대로 났다.
녀석들과 탕후루 맛에 빠져 있을 때 감나무와 금전수에서 특전의 힘이 발휘되었다.
[『인연』의 특전이 발휘됩니다.] [『부』의 특전이 발휘됩니다.]『인연』과 『부』의 특전이라.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문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일아!”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산수마을에는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한량이가 살고 있었다.
그 한량이는 왜인지 분노가 그득했고, 또 어째서인지 마을 주민에게 적대심을 품었다.
구구절절 과거를 털어놓지 않으니 구체적인 사연은 모르겠으나, 그 한량이는 우리 아버지를 만나 정신을 차려 공부에 매진하고 대학을 들어가는 인생 역전의 삶을 살게 된다.
한데, 그 한량이가 정치인이 됐고 도지사를 지내며 한 지역을 다스리는 거물이 됐다.
심지어 폐암에 걸렸던 해, 아버지가 느티나무와 돌배나무를 이용해 살리기도 했다.
우리 집을 찾아온 분은 최창훈 영감이었다.
영감님은 현재 서울의 성북동 다가구 주택에서 살고 계시는데, 권력을 만졌던 분이 재산 깨나 모으셨을 텐데 소박한 삶을 살고 계신다.
“도일아!”
나는 최 영감님의 목소리를 듣자 버선발로 뛰쳐나가 문을 열어 드렸다.
인연의 특전이 발휘돼서 그런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심지어 부의 특전도 발휘되지 않았던가.
저번에 상경하여 약초 몇 가지를 드렸더니, 현금으로 오백만 원을 투척하셨는데, 오늘도 영감님의 지갑이 두둑하게 열릴 것만 같았다.
“뭐 이런 걸 다 사가지고 오셨어요.”
영감님의 양손에는 짐이 한 가득하였다.
“별 거 없다. 강아지 간식하고 자네 먹을 주전부리 좀 사왔어.”
“네.”
주전부리라고 해서 열어보았더니 고급 한과세트 박스가 있었다.
박스가 큼직하고 두툼하니 꽤나 양이 많아 보였다.
영감님에게 짐을 받은 뒤 툇마루에 올려놓았다.
최 영감님은 우리 집의 숲과 정원을 둘러보며 감상에 젖었다.
“예전하고 많이 달라졌구나.”
“욕심 좀 냈습니다. 차 나 한잔 하시죠?”
“좋지!”
영감님을 위해 추억의 대추차를 달여 드렸다. 아버지가 영감님의 분노를 다스리는데 사용했던 차가 대추차였다.
“오랜만에 이 집에서 대추차를 먹는구나.”
“그때 보다는 맛이 덜하지요?”
“덜하긴! 똑같아. 아니 솜씨가 더 좋은 것 같은데? 허허.”
“연구 좀 했습니다.”
최 영감님과 나는 옆집을 허물어 숲을 만든 얘기와 용선 어르신의 치매가 호전된 기적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영감님 이제 곧 저녁인데 머물 곳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저희 집에서 하룻밤 지내고 가시죠.”
“됐다. 괜찮다. 나도 머물 곳이 있다. 이번 여름은 산수 마을에서 지낼 생각이거든. 우리 손자놈들하고!”
하긴, 예전부터 산수 마을에서 살고 싶다고 간혹 말씀 하셨다.
그런데 영감님의 집은 폐가라서 살지 못할 텐데, 어디 머물 곳이라도 있나?
“산수 마을에 빈 집이 몇 개 남더라고! 집주인에게 연락해서 한 달만 월세를 주고 살겠다고 하니 흔쾌히 허락하더라. 허허허.”
“그러면 기존의 집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한 달 동안 고쳐봐야지. 리모델링 업체 알아보니까 한 달이면 충분하단다.”
“그러면 아예 내려와서 사시는 건가요?”
“그래야지. 친구 놈들도 이곳에 많이 있고. 도지사 할 때 지인들도 다들 근방에 사니까.”
영감님은 한 달 동안 손주들과 시골에서 살고 그동안 폐가를 고친다고 했다.
그런데 영감님 연세가 있는데 손주들 나이가 몇이기에?
“강아지 녀석들이 나이가 몇이더라.···아무튼 쪼끄매.”
“쪼끄매요?”
“큰 손주는 이제 대학생이고··· 막내아들이 늦게 결혼했거든…강아지가 열 살이나 됐으려나.”
“하하. 그래서 그렇게 기분이 좋으셨네요.”
“티가 났어?”
“네.”
이제 벌써 여름방학이라니.
이곳에 왔을 때가 봄이었으니까.
시간 참 빠르고 재밌게 흐른다.
“녀석들하고 놀아주려면 이 노쇠한 무릎이 버텨야지 큰일이야.”
“하하. 그러면 제가 무릎에 좋은 약초를 좀 드려볼까요?”
“그럼 고맙고!”
무릎에 좋은 차가 뭐가 있으려나.
두릅 뿌리를 달여 드릴까 하다가, 무난한 우슬 뿌리차가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우슬 뿌리차를 달여 어르신에게 건넸다.
“크으, 내가 여태 수많은 우슬을 맛봤지만, 자네 집 우슬이 제일 맛좋다!”
영감님께서 우슬을 맛보시곤 무릎을 폈다 접었다 하며 점프까지 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였다.
TV에서나 봤던 호랑이 정치인의 모습과 대비되어 참 적응키가 어려웠다.
“영감 님, 우슬 뿌리를 좀 담아다 드릴게요. 집에서 달여 드세요.”
“고맙네!”
우슬 뿌리를 담아다가 드렸다. 집에서 달여 드시면 언제든 약효를 볼 수 있으리라.
봉지를 받으신 영감님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자네는 큰 돈 벌 생각이 정녕 없는게야?”
“큰돈이라면…..?”
“좋은 인맥들 많이 소개 시켜줄 수가 있지. 정치 인생 몇 년인데, 인맥 하나만큼은 아직 안 죽었어.”
“괜찮아요. 아직까지는.”
괜찮다는 나의 말에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허허. 참. 돈이 싫은 게야?”
“아뇨. 돈이 싫은 게 아니라. 좀 천천히 가고 싶은 거죠.”
“천천히?”
“정치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있잖아요.”
“정치는 가늘고 길게.”
“한탕 벌었으면 진즉에 벌었을 거예요. 그런데,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네요.”
“그래. 자네 뜻 잘 알겠네.”
내게 돈 10억이나 100억이 있다고 한들, 나는 이 집에서 평생토록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과거의 우행을 쫓는다면, 많은 것을 놓치며 살겠지.
그러고 싶진 않다.
“내가 한 수 접어야겠구만.”
“예?”
“이제 자네도 진실을 들을 때가 온 것이야.”
“진실이라면?”
나의 질문에 영감님이 옛 과거를 회상하며 말문을 꺼내셨다.
“약초는 사람을 살리는 것과 동시에 잘못 음용하면 독성이 많다는 것도 자네도 잘 알 것이야.”
영감님의 말이 옳다.
아무리 뛰어난 약초의 효험일지라도, 몸에 맞지 않으면 독성만 쌓인다.
느티나무 또한 찬 기운이 많아 몸이 찬 사람이 먹으면 배에 탈이 나거나 부작용이 생긴다.
설강화도 마찬가지였다.
독성이 있는 식물이라 함부로 음용하였다간 구토와 설사를 유발한다.
물론 일반적인 약초에 한해서다.
우리 집의 약초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
“자네 아버지가 왜 이곳 마을에서만 은거하며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합니다.”
아버지가 단순히 소박한 삶을 추구했다는 것으로 치부하기엔 그 능력을 철저히 감추며 사셨다.
수많은 사람을 살렸지만, 왜 세상에 널리 알리지 않으셨을까.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으셔서?
아버지의 인망 덕에 금전적으로 모자라지 않게끔 많은 분들이 우리 집을 도왔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영감님께서는 차분히 옛 이야기를 꺼내셨다.
“문제는 방송에서 시작됐지.”
“방송이라면?”
“자네 아버지가 폐암에 걸린 나를 살린 이후 나의 추천으로 지역 방송에 출연했던 적이 있었어. 그때는 몰랐지. 그 작은 방송 하나가 큰 파국을 일으킬지.”
“…….”
“그해 아버지가 느티나무를 이용해 국회의원인 나를 살렸다고 했을 때, 전국의 의사들에게 온갖 비난을 받았고, 느티나무를 먹어서도 낫지 않는다는 전국의 폐암 환자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했어.”
“아…..”
“자네도 잘 알 것이야. 자네 아버지가 이용한 느티나무는 평범한 느티나무가 아니란 것을 말이야.”
“산수 마을의 느티나무였죠.”
게다가 특전의 힘이 깃든 느티나무였겠지.
“그렇지. 그런데 당시에는 아무 느티나무나 효험이 있는 줄 알았던 거야.”
“아..”
“그 해 아버지는 깊은 상처를 입고 마을 밖을 웬만해서는 나가질 않으셨어.”
“…..”
“전부다 나의 부덕함이지. 자네 아버지를 유명하게 해주기 위해 방송으로 끌어들인 나의 잘못이야.”
“…..”
“미안하네. 노망난 노인네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
“아…아닙니다 영감님. 영감님 마음이야 아버지도 잘 아셨을 겁니다. 순수한 목적이 간혹 오해가 쌓여 잘못된 방향으로 가곤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젠 잊으시고 맘 편히 생각하시죠. 영감님.”
영감님께서 나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고맙네. 자넨 내가 배울게 참 많은 친구야. 언젠가 내 아들 놈들을 좀 데려와서 자네와 대화를 시켜주고 싶다니까. 나이만 처먹었지 철들지 못했어!”
“하하. 영감님 그런 말씀이 어딨습니까.”
“아냐. 석훈이가 정녕 허락만 해준다면 자네를 양자로 입양해서 내 전재산을 물려주고 싶다니까!”
“흐흐. 마음만 받겠습니다. 영감님. 그리고 언제 한 번 아드님과 방문해보시죠. 좋은 약초가 많으니까 아드님도 건강 신경 쓸 나이잖아요.”
“고맙네. 고마워.”
그나저나, 아버지에게 그런 과거가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긴 겉으로는 강하고 호랑이 같이 엄했어도, 아버지의 속은 누구보다 순수했으며, 때 묻지 않은 백의와 같았다.
아버지가 겪은 경험은 내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올바르게 이끌어줄 이정표가 되어 주리라 여겼다.
“영감님.”
“응?”
“아까 말씀하신 좋은 인맥이란 분들이 누구죠?”
“옛날 정치생활 할 적에 동료 의원들하고 작은 모임을 만들었어, 그게 소담(笑談)회라고 그저 재미난 이야기만 하며 떠드는 모임인데, 장소를 이곳에서 하면 어떨까 싶거든.”
“이곳에서요?”
“그럼. 이렇게 운치 있고 고즈넉한 곳에 모임을 가지면 다들 좋아할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이라는데 구태여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어떤 손님들이 오는지도 궁금했다.
“그럼 다음에 한 번 방문해보시죠. 저희 약초원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이니까요.”
“고맙네. 고마워. 자네 덕분에 내 기가 아주 살겠어. 허허.”
“별 말씀을요. 좋은 차 미리 준비해 놓을 테니, 전화만 미리주세요.”
“알았다.”
영감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니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영감님께서 우슬 뿌리를 들고선 나갈 채비를 했다.
“가시게요?”
“가야지. 손주 놈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가서 또 놀아주려면 오늘 하루가 바쁘다. 바빠!”
“들어가세요. 영감님!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그려!”
영감님을 집 문까지 배웅해드렸다. 영감님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아! 약초 값은 저기 과자 박스에 넣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자네가 이해혀!”
“예?”
영감님이 잽싸게 문 밖으로 나가더니 먼발치에 사라지셨다.
나는 다급히 고급 한과 세트의 박스를 열어보았다.
이거 뭔.
“이게 얼마야?”
황금빛으로 물든 돈이 빼곡한 게 아닌가.
나는 실소가 뿜어져 나왔다.
“하여튼…영감님도 참.”
직접 주면 될 것을 한사코 거부할 것을 뻔히 알기에 이렇게 또 옛날 버릇을 이용하셨다. 매번 이렇게 돈을 투척해 가시면···
‘용돈이라 생각하고 기분 좋게 받아야지.’
이제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할 때.
나는 대문에 걸려 있는 개점 팻말을 폐점으로 바꾸어놓았다.
폐점이라고 할지라도 오는 손님을 막진 못하겠지만, 사업장을 꾸리는 사장님이 된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조만간 큰 손들이 우리 집을 방문한다는데 무슨 차를 대접해야할까.
여러 가지 특전의 차를 대접하면 재밌기도 할 것 같았다.
『진심』의 특전이 담긴 꽃차를 내놓으면 서로 솔직해지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웃음』의 특전도 괜찮을 것 같다.
‘돈과 인맥에 연연하지 말자.’
사회생활을 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영업으로 다져진 인맥도 많았고, 받은 명함만 커다란 종이가방을 가득 채울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인맥의 덧없음을 너무나 여실하게 깨닫는다.
하지만 인맥과 인연은 엄연히 다른 어감이지 않을까.
인맥은 믿지 않지만, 인연은 믿는다.
옷깃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라고 했듯이, 우리 집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은 나와의 긴밀한 인연으로 오랜 시간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겠지.
우리 약초원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환희와 긍정만 가져갔으면 싶다.
첫 개점 1일차.
기분 좋은 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