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43
243.
연적훈도 나가고 다시 방에 혼자 남아 쉴 수 있게 된 이린은 머릿속을 정리했다.
‘나에게 말하지 않은 진실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한숨이 나왔지만 동시에 납득이 가기도 했다.
정말로 지금 스물셋인 연이린이라면 더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연이린은 어쩐지 그냥 납득할 수 있었다.
‘나도 아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한가득이고.’
아빠도 어쩌면 알면서 내색하지 않은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사실 이린을 키운 것도 연적훈에게는 뜻밖의 사고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런데 한 번도 그런 내색 없이 이린을 아꼈다.
정작 이린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 같지만.
‘오빠가 위험한 곳에 가게 된 것도 나 때문이고.’
마음 같아서는 대문파와 세가의 자제들을 모아 혈교 근거지 앞에 밀어 넣고 다들 구하러 달려가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조용히 휴식을 취하던 이린은 그날 저녁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집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왜?”
“왜?”
이린의 앞에 음식을 놓아주던 곽선후와 연적훈이 동시에 묻자 이린이 민망한 얼굴로 ‘아, 연가장 얘기예요.’ 하고 부연했다.
곽건후는 나이에 맞지 않는 부루퉁한 얼굴로 딸에게 항의했다.
“네 집이 왜 연가장이야?”
“나고 자란 연가장이 제집이지 무슨 당연한 소릴.”
아니 왜 싸우시는데요.
별것도 아닌 걸로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며, 이린은 자신의 정체를 계속 숨기는 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아버지들이 도무지 조용할 거 같지가 않았다.
‘대외적으로만 숨길까.’
하지만 상단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외부로 유출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본래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무엇보다 검성에게 천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일이… 없겠지?’
이린은 오빠 연이현이 혼인에 대해 왜 그리 소극적이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복잡한 사정까지 알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겠지.’
게다가 신교에 검성에 이런 복잡한 집안. 잘못 엮이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아는 사람들은 또 신중해질 테고.
“어휴.”
식사가 끝나고 여전히 의미 없는 다툼을 벌이고 있는 아빠와 아버지를 남겨 둔 채 이린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고 보니 여기 연가상단이잖아?’
가족들이나 중요한 손님만 모시는 곳으로 외부인을 통제하는 곳이었다. 이린도 평소 장사에 오면 이곳에 묵었다.
이곳이 연가상단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한참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이들이 떠올라 이린은 고민에 휩싸였다. 분명 다들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텐데.
“알려야 할까.”
끼이― 끼이이―
“아, 미안. 미안. 배고파? 뭐 먹을 것 좀 달라고 해야겠다.”
청아를 소매 속에 집어넣은 후,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모퉁이를 돈 이린은 뜻밖의 인물과 맞닥뜨렸다.
“!”
“신 소저? 이제 일어나도 괜찮으십니까?”
남궁청휘.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곁에 있었던 인물이건만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아, 아. 괜…찮아요.”
아빠도 그렇지만 자신이 실종되고 5년이나 지났는데 계속 자신을 찾아다녔다는 남궁청휘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져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신 소저?”
“그….”
자신이 연이린이라는 걸 밝혀야 할까. 이린이 고민하는 사이, 청휘의 팔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끼이?
“홍아?”
“아.”
붉은빛이 도는 비늘의 백사, 홍아였다.
자신이 남궁청휘에게 맡긴 이후 계속 그의 곁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워낙에 낯을 가리는 아이라 그럴 만도 했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 남궁청휘와 동행할 때도 그렇게 낯을 가리는 아이가 자신에게 먼저 다가왔는데 얼굴을 바꾼 자신을 알아보는 걸까.
‘기특하기도 하지.’
감동한 이린이 홍아에게 팔을 뻗는 순간, 이린의 소매에서도 무언가 고개를 내밀었다.
끼이?
“……청아?”
무언가가 튀어나오자 경계하던 남궁청휘는 익숙한 뱀과의 조우에 얼굴이 굳었다.
저 빛깔, 저 기묘한 울음소리. 잘못 보려 해도 잘못 볼 수가 없었다. 이린이 홍아와 함께 데리고 다니던 뱀. 청아였다.
끼이이―
끼이― 끼이이이―
“…….”
“…….”
오랜만의 상봉을 기뻐하며 저들끼리 회포를 풀고 있는 두 마리와 달리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저도 모르게 슬슬 뒷걸음질 치려던 이린의 손목이 남궁청휘의 손에 붙잡혔다. 서로의 소매에서 나온 뱀들이 얽혀 있으니 도망치기도 용이하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남궁청휘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연 소저?”
“…….”
“연….”
얼굴을 더 가까이하며 다시 한번 자신을 부르려는 남궁청휘의 입을 손으로 막은 이린이 말 대신 전음으로 전했다.
―오랜만이에요 남궁 공자. 음, 어찌 보면 오랜만이 아니지만.
동시에 동요를 감추지 못한 남궁청휘의 눈이 커지며 동공이 바르르 떨렸다.
―설마, 그동안 절 속인 겁니까?
―아니에요!
이린 역시 말 대신 눈을 치켜뜨고 남궁청휘를 보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복잡한 마음이 요동쳐 제대로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둘이 거기서 뭐 해요?”
“아.”
여인의 한쪽 손을 붙잡고 벽에 밀어붙인 채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는 남궁청휘와 그 품에 파고들기 직전 같지만 잘 보면 한쪽 손으로 남궁청휘의 입을 막고 떨고 있는 이린(신수린)을 본 당자혜가 묘한 표정을 했다.
한눈에 봐도 청춘 남녀의 치정 싸움 현장 같았다.
“남의 치정사에 관여할 생각은 없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 주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닙니다!”
두 사람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은 한 귀로 흘리며, 당자혜의 시선이 두 사람의 팔에 얽혀 즐거워 보이는 뱀들을 향했다.
“네네. 그런데 뱀들이 여전히 이린을 잘 따르네요.”
“네? 아, 그야…….”
저도 모르게 대답한 이린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조용히 당자혜의 눈치를 살폈다.
“…….”
“…….”
“우리 얘기 좀 하죠.”
남궁청휘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은 이제 당자혜에게 붙잡혔다. 한쪽 손은 남궁청휘에게, 남은 한쪽 손은 당자혜에게 잡힌 채 이린은 생선 엮어 놓은 양 선두에 선 당자혜를 따랐다.
“저기… 제가 좀 가 봐야 할 곳이 있는데요….”
“얘기하고 가요.”
끼이―
끼―
어느새 이린의 어깨에 올라와 있는 뱀들이 소심하게 이린의 심적 공포를 대변했다.
“잠깐, 거기 뭐 하는 거야?”
“아, 사형….”
마침 이린을 찾아온 곽천영이 눈을 부라리며 당자혜를 막았다. 남궁청휘는 얼굴은 다르지만 상대가 곽천영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당자혜는 이린을 끌고 가는 것을 멈추는 대신 자신을 막아선 이의 손목까지 붙잡았다.
“그럼 당신도 같이 가시죠.”
“뭐?”
어이없어하던 곽천영은 이린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젓자 할 수 없이 순순히 그들을 따랐다.
“자, 이제 얘기 좀 하죠.”
자신의 방으로 청휘와 이린, 곽천영까지 세 사람을 데리고 온 당자혜가 문을 닫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속이려고 한 건 아닌데 속인 셈이 되어 버렸네요.”
이린은 죄인이 된 기분으로 사실을 털어놓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당자혜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왜 모습을 바꾸고 있었는지는 대충 알 것 같지만 지금 이곳에는 우리밖에 없으니 본래 모습을 보여 줘도 되지 않아요?”
“아.”
이린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병풍 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세 사람에게 익숙한 용모로 나타났다. 금발에 벽안은 변함이 없었지만 5년이란 세월이 지나 기억 속의 모습보다 조금 성숙해 보이는 여인은 분명 그들이 알던 연이린이었다.
“…연 소저!”
“?!”
그리고 오랜만에 이린의 얼굴을 보니 북받친 남궁청휘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린을 끌어안았다.
‘얼마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때는 홍아로부터 보호하려던 것이라면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굳어 있던 이린의 몸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당겨졌다.
“감동의 상봉은 거기까지.”
“곽 사형.”
이린의 낯선 호칭에 남궁청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 그간 있었던 일로 대충 어찌 된 일인지 알 것도 같았다.
“역용술로 얼마든지 용모를 바꿀 수 있는데 이린으로 변장한 다른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렇게 끌어안아? 아니, 상대가 이린이라도 네가 그렇게 끌어안을 이유가 있나?”
빈정거리는 천영의 말에 그제야 남궁청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런 두 남자를 보며 당자혜가 대신 이린을 꼭 끌어안고 안부를 살폈다.
“걱정했어요.”
“죄송해요.”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어요?”
“그게 그러니까….”
“이린이 천마와 보통 관계가 아니라는 건 이미 눈치챘으니 걱정하지 말고요.”
“하아….”
역시 눈치챌 사람은 대충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이린은 한숨과 함께 소림사에서 떠난 이후의 일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린이 정신을 잃고 있어 기억에 없는 부분은 할 수 없이 곽천영이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 감사하라고.”
중독된 이린을 둘러업고 나온 부분에서 곽천영이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그럼 그곳은 정말 혈교의 것이었을까?”
“그저 혈교가 먼저 발견해서 소문을 냈을 뿐일지도 모르지.”
“아, 그러고 보니 그 비고에 있던 사람들 중에 혈교와 내통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린이 말하는 곳들은 다들 내분이 일어났던 문파인 걸 보면 멀쩡할 거 같진 않군요.”
이린은 자신이 없는 동안 중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간결하게 왜 자신이 신수린이란 이름을 댔고, 두 사람을 모르는 척했는지에 대한 설명부터 이어 갔다.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있으니 오히려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럼 신수린이라는 이름은 그냥 지어낸 건가요?”
“아. 실은 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의 성함이신데 기억을 잃었어도 무의식에 남아 있었나 봐요.”
“아.”
어쩐지 신수린이라는 이름을 들은 연가장 사람들의 반응이 대체적으로 조금 이상하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그럼 이제 어찌할 생각이죠?”
“민아 덕분에 어차피 세간에는 제가 살아 돌아왔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부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 ‘신수린’이 천마의 딸이 되는 건가요.”
천마가 중원에 나왔고 어느 젊은 소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건,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이미 천마의 금지옥엽이 강호에 나왔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기분은 좀 이상하지만 연가장을 생각하면 차라리 별개의 인물로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차피 이번에 함께했던 남궁세가나 제갈세가 사람들 역시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른다. 그러니 더 복잡한 소문이 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친모에 대한 것도 그렇고.’
남궁청휘와 당자혜도 그 일에 대해 대강 알고 있는 눈치였으나 이린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마 이번 일로 뭔가 눈치챈 사람은 더 많을 것이다. 특히 이린을 직접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히 뭔가 석연치 않다는 걸 떠올리겠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제가 아니라 오빠와 그 벗들이에요. 무사한지 여부를 알 수 없으니….”
어느새 이린을 추궁하던 분위기는 위로의 장으로 변모해 버렸다. 그 사실 깨달은 천영은 내심 혀를 찼다.
이린이 가장 궁금해하던 소식을 가지고 연화문이 돌아온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