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83
83.
“아가씨는 안 드세요?”
“나는 또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아이들에게 들고 온 당과를 고루 나눠 준 이린은 아이들 사이에서 놀고 있는 청아와 홍아를 낚아채 당과가 들어 있던 바구니에 챙겼다.
“연아, 월아. 그거 다 먹으면 운아 재우고 공부해야 한다. 알았지?”
“네!”
“네!”
“네에.”
마지막까지 당부하고 떠나는 아가씨를 향해 아이들은 당과를 우물거리며 배웅했다. 연가장의 아가씨는 언제나 바빴다.
“아가씨는 만날 뭐 하시는데 저렇게 바쁘신 걸까.”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장주님도 소장주님도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걸 보면 상관없겠지. 공부하시는 걸 못 봤는데도 누가 뭘 물어봐도 막히는 일이 없으시고. 그러고 보니 월아 이제 천자문은 뗐던가?”
“헤에. 언니, 저는 머리보단 몸 쓰는 게 더 적성에 맞는 거 같아요.”
“……공부해라.”
“연 언니!!”
“공부하자. 언니가 가르쳐 줄게.”
“운 언니까지 너무해!”
“머리 나쁘면 무술도 못 익힌댔어. 자, 모처럼 단것도 먹었으니 머리를 써야지.”
“히잉!”
워낙에 어릴 때 연가장에 온 오월이는 거리에서 지냈던 기억은 어느새 흐려진 듯 해맑게 웃으며 투정을 부렸다.
이린의 강권으로 다들 호신술 정도는 익혔지만 오월이는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무술을 배우고 있었기에 오히려 잡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도 언니들이랑 같이 있을래.”
“언니들은 무술에 재능이 없지만 월아는 다르잖아.”
“맞아. 네가 무술을 익혀야 여차할 때 우리를 지켜 주지.”
“어? 그런 거야?”
그렇게 고운을 재워야 한다는 이린의 당부조차 잊고, 언니들의 말에 홀랑 넘어간 9세 오월이의 집중 교육이 시작됐다.
* * *
‘책은 이제 이 정도면 됐고, 준비는 끝냈으니 오늘 가서 정리하자.’
일부러 낡은 종이를 찾아 위조된 책을 만들었다. 파기한 내용이 많아 실제 원본과 비교하면 꽤 얇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어 어지간하면 속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런 류의 책을 한눈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니까.
‘헛수고라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혈교의 비고(秘庫) 혹은 혈교 교주의 무덤에 대한 장보도(藏寶圖)가 떠돌게 되는 건 앞으로 몇 년 후의 일.
남궁청휘와 원적 선사, 당자혜 같은 이들이 연가장을 찾아왔던 것도 비천산에 그 장보도의 지도와 일치하는 동굴이 있다는 정보를 뒤늦게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린도 그전부터 비천산에 숨어드는 정체불명의 자들과 대치한 적이 있었으니 어딘가에서 정보가 퍼졌다는 소리였다.
‘그전까지는 누구도 그 동굴이 비천산에 있다는 걸 알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또 어떨지 모르지.’
이린이 방해한 덕분인지 원래대로라면 혈교의 손에 죽었어야 할 인물들 중에 살아남은 이들이 제법 많았다. 이린이 모르는 곳에서 또 죽은 사람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자신이 바꾼 사실로 인해 또 무슨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그들 중 누군가 예전보다 빨리 비천산의 동굴에 대해 알아낼지도 몰랐다.
그렇다 보니 만약 이번에 혈교가 먼저 찾아낸다면 누군가 그곳을 털었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적당히 위장해 두는 것이 가장 나을 듯했다. 다만 이미 수년 전 다른 이가 지냈던 흔적이 있는 그 공동은 제외했다. 이린이 뭔가 덮기엔 이미 흔적이 너무 많았다.
‘그 사람이 다시 찾아올 수도 있고.’
사실 비천산에 있는 동굴조차 찾아내지 못하던 그들이 공동과 이어진 그 수많은 동굴들 중에서 신물이 있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변수들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자신도 대비해 두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번에는, 아버지도 오빠도 절대 말하지 않겠지. 내가 그곳에 드나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덕분에 강시니 사술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쓸데없는 지식이 늘어나 버렸지만.
이린은 한숨과 함께 종이들을 책으로 엮은 다음 슬쩍 불에 그슬렸다. 그다음 청아가 책을 얼리고, 다시 그슬리는 것으로 책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사술에 대해 적힌 대부분의 책들은 처분했지만 이린의 기억에 이미 혈교가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만 변조해서 책을 새로 만들었다.
아마 이것이 혈교의 손에 들어간다면 꽤 혼선을 빚게 될 것이다.
그 동굴의 안쪽까지 누군가가 들어온 흔적은 보이지 않았는데 강시를 만드는 법이 어떻게 유출되었던 건지 솔직히 의문이었다.
‘다른 방법으로 전승이 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뭔가 단서가 있어서 그걸로 연구해서 방법을 찾아냈던 걸까. 아니면 아예 이것과 다른 방법이 있는 걸까.’
차라리 이어지고 있다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연구해서 찾아낸 거라면 희생된 사람의 숫자부터 다를 터였고, 무엇보다 그 연구가 지금 실시간 진행 중일 가능성도 있었다.
이린이 강시를 본 건 앞으로 10여 년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전까지 혈교에서 부리고 있다고 알려진 강시는 모두 뻣뻣한 몸을 가진 존재들로 누가 봐도 한눈에 강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남궁청휘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던 거야.’
만들기가 어려워 아껴 두고 있던 것일지, 연구 중이었던 것일지 이린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혼자 하기에는 버거운 일이구나.’
그렇다고 누군가를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으니 참 곤란한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오빠만은 이 일과 상관없이 안전했으면 좋겠는데, 그들이 위험한 일을 하는 이린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사실 반대 입장이래도 그런 걸 보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인 건 마찬가지고.
“나중에 알게 되면 화를 내겠지.”
분명 이린도, 아빠와 오빠가 자신을 지키겠다고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면 화를 낼 테니까.
끼이?
이린의 중얼거림에 어깨에 매달려 있던 청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언제나처럼 경공으로 동굴로 뛰어 들어온 이린은 자신의 경공에 익숙해져 있는 이 게으른 뱀들에게 노동력을 요구하기로 했다.
“청아, 홍아. 오늘은 너희들이 해 줘야 할 일이 있단다.”
끼이-
끼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피며 공동(空洞)까지 들어선 이린은 이제는 익숙하게 거대 붕어가 있는 동굴로 들어섰다. 경계는 아무리 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에 동굴 안에서조차 이린은 늘 경공으로 이동했다. 동굴에 익숙한 이린이 아니라면 뒤를 따라올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익숙하게 야명주가 붙어 있는 갈림길로 들어선 이린은 새삼스럽게 뱀들에게 당부했다.
“오늘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고 했지? 잘 들어. 청아는 평소에 하던 대로 해 주면 되는데 이번에는 좀 더 힘써 주면 좋겠고, 홍아는…….”
이린의 말에 어깨에 사이좋게 매달린 뱀들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검을 쥔 채 안으로 들어서는 이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익숙한 동굴 호수에 들어서자 이린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요하던 호수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청아, 여기 좀 더 서늘하게 해 볼래?”
끼이-
동굴 안의 기온이 확연히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이린도 내력을 끌어올렸다. 저쪽도 보통 물고기는 아니니 이 정도 추위에 움직임이 둔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촤악- 촤악-
“야, 나와 봐.”
이린에게 늘 당하면서도 겁 없이 늘 튀어나와 먼저 공격을 하던 거대 붕어는 오늘따라 호수 밑에서 나오질 않았다.
‘거참 새삼스럽게 겁을 먹었나.’
처음부터 이렇게 조심스러웠다면 불쌍해서 안 잡았을지도 모르는데. 올 때마다 사람을 귀찮게 공격해 대니 이린도 짜증나서 살점을 떼다 먹는 엽기적인 짓까지 하게 되지 않았던가.
‘물론 실용적인 이유도 있지만.’
너무 크니까 잡아서 한 번에 먹기가 어렵다든가.
일부러 도발하듯 석실로 가는 좁은 길 위에 서 있자 호수가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온다.’
촤아악-
캬아아아아-
거대 붕어(영물)가 물속에서 뛰어오르는 순간, 이린도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청아, 지금!!”
카아아-!
이린의 말에 따라 호수 앞에서 대기 중이던 청아가 호수를 얼렸다. 미리 온도를 떨어뜨려 살얼음이 껴 있던 호수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이린은 자신이 서 있던 곳을 향해 입을 벌리며 낙하하던 거대 붕어의 머리를 가볍게 디딘 후 그 옆쪽으로 뛰어내리며 그대로 검기를 실어 검을 내리 그었다.
“홍아!!”
카아아-
영물의 목이 베임과 동시에, 홍아의 불길이 베어진 단면을 불로 지졌다.
쿵!! 쿵!
단단히 얼어붙은 호수 표면에, 거대 붕어의 몸이 먼저 떨어지고, 그다음 머리가 떨어졌다.
붕어의 거대한 머리와 몸체가 무사히 빙판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도, 이린은 어쩐지 불안해하며 조심스럽게 얼음 위에 착지했다.
“빙판 안 깨지겠지……? 후우, 깔끔하게 됐네. 너희들 덕분이야. 고마워.”
끼이-
끼이끼이끼이이-
애초에 저 거대 붕어를 죽이거나 피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이린이 죽기 전에도 혈교의 자객들 역시 금방 석실까지 따라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이 영물의 몸체를 호수에 빠뜨리지 않고 고스란히 얻으려면 꽤나 성가셨다. 죽은 다음 물 위로 떠오르겠지만 배가 있어도 힘들 일을 맨손인 이린 혼자 무슨 수로 옮기겠는가.
‘혹시 이런 게 더 있다면 성가시기도 하고.’
지하 호수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운 만큼 이린은 처음 동굴에 들어왔던 날 보았던, 이것보다는 작지만 자신을 덮치려 했던 정체불명의 물고기를 떠올리며 비슷한 생물이 더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방법을 모색했고, 혼자서는 무리였을 일을 이린의 작은 조력자들이 간단하게 해결해 주었다. 그간 비싼 고기를 먹인 보람을 톡톡히 느끼게 해 주었달까.
파삭-
“아.”
손에 들려 있던 목검이 파스스 소리를 내며 깨지자 이린이 작게 신음했다.
“또 동굴에서 부서져 버렸네.”
그간 꽤 손에 익었는데 아까운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오래갔는데.’
아무래도 목검으로는 검기를 버텨 내기에 무리가 있었다. 나뭇가지로도 진검처럼 싸우는 고수에 대한 전설 같은 것도 있지만 이린은 그런 고수를 자처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언제고 일어날 거라 예견된 일이었던 만큼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이린은 부엌에서 슬쩍해 온 생선 손질용 칼을 꺼내 껍질과 고기부터 분리하고 내단을 찾았다.
“음, 커서 좋다.”
청아와 홍아는 살이 썰리는 서걱거리는 소리에 진저리치면서도 이린이 던져 주는 고기를 삼켰다.
“앞으로는 이거 못 먹을지도 모르니까 지금 많이 먹어 두렴.”
끼이-
그동안 살점 떼어 낸 게 많아 다행히 생선살 정리가 생각보다 금방 끝난 이린은 껍질은 돌돌 말고 살점만 따로 떼어 석실 옆에 쌓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