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96
96.
“응.”
“그래.”
이현에게는 답답해서 셋이 경공으로 가겠다고 말해 두었다. 이현은 세 사람을 말리지는 않았지만 함께할 수 없어 약간 서운한 눈치였다.
하지만 연가장 사람들을 이끄는 것은 이현의 책임이라 이린이 빠지는데 이현까지 일행을 두고 먼저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따라가니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청운 형님만 믿겠습니다. 린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무시하나?”
청운진인에게 이린을 부탁하는 이현을 보며 심여준이 심기 불편한지 불퉁하게 말하자 이현은 담담하게 답했다.
“자네는 어린아이를 싫어하는 데다 린아한테 불만이 많잖아.”
“!”
이현이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면사로 얼굴이 가려져 있음에도 당황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나도 린아를 돌봐 주는 것까지 바라고 부른 건 아니니 싫다는 사람한테 동생을 돌봐 달라고까지 부탁할 수는 없지.”
“…….”
이현이 벗들에게 와 달라 청한 건 혹시나 여행 중 생길지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이린을 지켜 줄 손이 필요해서이지, 딱히 이린을 보살피는 것까지 도와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이현이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한들 혼자서는 이린을 지키는 데 한계가 존재했으니 믿을 수 있는 이들을 부른 것이다.
그가 처음 강호에 나올 때도 함께한 노악의 사숙뻘인 형산파의 고수가 동행해 어린 소년들을 이끌었던 것을 보았던 이현이었다. 이번에도 이린을 지켜 줄 손이 이현 혼자였다면 연적훈도 여행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현의 말에 여준은 정곡을 찔린 듯 침묵했다.
그리고 이린 역시 칼같이 거절했다.
“아니, 나도 아저씨들의 보살핌은 좀.”
“연 소저. 그 말은 조금 심하지 않습니까.”
“저기? 나는 이현이랑 동갑인데 아저씨야?”
이린의 아저씨 발언에 충격받은 오빠 친구들의 항변에 이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우리 오빠뿐이니까.”
“맞아. 린아 오빠는 나뿐이지.”
면사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텐데도 오누이는 눈을 마주치며 싱글싱글 웃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헛웃음만 나오는 오누이의 모습에 하나같이 시선을 회피했다.
“그럼 저흰 먼저 가서 쉬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먼저 가 있을게. 쉬엄쉬엄 와.”
이린은 늘 떼어 놓지 않고 들고 다니는 가방 하나만 챙기고 자신의 짐과 말은 맡긴 채, 예정대로 청운진인과 심여준 둘과 함께 경공으로 장사를 향해 떠났다.
“괜찮을까.”
“뭐 별일 없을걸. 장사까지는 그렇게 먼 길도 아니고.”
희희낙락하며 떠난 이린과 대조적으로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이현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백리한은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말을 몰았다. 조급해 보이는 이현 때문이었다.
“네가 애지중지하는 그 꼬마 아가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도 보면 알겠던데.”
“그래 보여?”
“어.”
처음 연가장을 떠나 객잔에 묵었을 때, 백리한은 새벽에 일어나 몰래 객잔을 빠져나가는 이린을 발견했었다.
‘걱정되어서 살짝 뒤따라갔는데 따라잡을 수가 없었지.’
이현이나 함께하는 다른 벗들에 비하면 느릴지 몰라도 자신의 경공이 강호에서 느리다는 소릴 들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경공이 뛰어나다고는 들었지만 제법이라고 감탄했다. 하지만 역시 아직 어린아이라 들떠서 벌써 저렇게 체력을 소모한다고, 하긴 이런 것도 경험이겠다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린은 그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몰았다.
그리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이린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새벽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돌아와서 낮에는 말을 타고 멀쩡한 얼굴로 강행군을 했다.
‘아마 이현도 청운진인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시야가 좁은 심여준은 무공 외엔 주변에 도통 관심이 없었으니 그런 것을 눈치챘을 리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꼬마 아가씨가 그 콧대를 좀 꺾어 주면 좋을 텐데. 아쉽네.’
자신이 본 것만으로 판단하면 일단 연이린 쪽이 더 뛰어났지만, 장거리라면 역시 이린에게 불리했다. 체력도 경험도 내공도 여준 쪽이 압도적으로 우위일 테니까.
슬쩍 옆을 보니 두 사람이 실은 경주하기 위해 먼저 떠났다는 것을 모르는 이현의 축 처진 어깨가 자꾸 신경 쓰였다.
“그만 좀 해라. 동생이 오빠랑 같이 있기 싫다고 뛰쳐나간 것도 아니잖아.”
“그건 알지만.”
시무룩해 보이는 게 영 불쌍해서 백리한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기 시작했다. 숨겼던 이유도 이현이 걱정할까였는데 이러고 있으니 의미가 있나 싶고.
“실은 여준이 네 여동생이랑 티격태격하다 결착 짓겠다고 먼저 간 거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그것도 알지만.”
“뭐?!”
이현이 너무 아쉬워하는 것 같아 슬쩍 귀띔이라도 해 줄까 했던 백리한은 이현의 덤덤한 대답에 놀라 빽 소리를 지르다 뒤따라오는 마차를 의식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말을 몰았다.
“자네, 그 두 사람 사이 안 좋은 거 알고 있었나?”
“둘 다 표정에 다 보여.”
자네 여동생 면사 썼는데?
입 밖에 내지도 않은 말이 얼굴에 쓰여 있었는지 이현이 알아서 대답을 했다. 목소리에서 의미를 알 수없는 자부심이 넘쳤다.
“린아 뒷모습만 봐도 안다네.”
“오라비가 아니고 어머니냐. 쳇, 놀라질 않으니 영 재미가 없네.”
“아하하. 사이가 안 좋고 공통분모도 없는 사람들끼리 갑자기 먼저 가 보겠다고 하면 자네는 뭐 하러 가는 건가 싶겠나?”
“드디어 둘이 싸우러 가는 건가 싶……지. 그런데 알면서도 그냥 보냈나?”
“중재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같이 갔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한참 어린 내 여동생에게 해코지라도 하겠나.”
얼핏 보면 그냥 무골호인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거참. 보기랑 다르단 말이지. 그럼 누가 이길 거 같은데?”
“아직 검도 없는 이린에게 싸우자고 덤비지는 않을 테니 경공이겠지?”
그것보다도 이제 막 강호에 나온 어린애랑 칼부림하겠다고 할 정도였으면 친구고 뭐고 이현이 먼저 패서라도 참교육을 했을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걱정 말게. 린아는 나보다 빠르니까.”
“엑, 그 말 정말이었어?”
당연히 동생 팔불출이 과장해서 하는 소린 줄 알았던 백리한의 말에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마다 비천산을 한 바퀴 돌고 돌아와서 수련까지 하는 아이라네.”
“비천산? 거길 무슨 수로……. 게다가 한 바퀴라니 누가 들으면 뒷동산 얘기하는 줄 알겠네.”
불신의 눈초리에 이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사실인걸.”
“동생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바뀌는 팔불출이 하는 소리라 원. 애초에 너 동생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동생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보통은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내 동생을 남의 집 동생들과 비교할 이유가 없지 않나.”
반론하기 어려운 정론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냈다.
“그럼 자네의 그 올곧은 신념과 사랑스러운 여동생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여동생인가?”
“신념?”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현의 반문에 백리한은 잠시 멈칫했다. 하긴 자기 행동 기조를 굳이 신념이라고 생각하고 다니지 않을 놈이었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설명하다 보면 그냥 자기가 나쁜 놈이 될 거 같고.
그래서 그냥 나쁜 놈 하기로 했다.
“20명의 선량한 사람과 여동생 둘 중 한 쪽만 구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을 택할 거 같아?”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한 멀건 얼굴을 보며 백리한은 조금 심술궂은 질문을 던져 봤다.
“그야 당연히 둘 다 구해야지. 그래도 린아의 안위가 위험하다면 그쪽을 우선시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린아가 생각보다 그리 약한 아이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기도 하고.”
“뭐라는 거냐.”
“정말일세. 하지만 글쎄 신념이라.”
이현은 곤란한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 신념을 잃어도, 중요한 사람을 잃어도 사람은 견딜 수 없는 법이라고.”
“그렇겠지.”
“그럼 자네는 내가 어느 쪽을 택하길 바라나?”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말라고.”
어차피 이 친구는 무모하다고 해서 물러설 성격도 못 됐다. 애지중지하는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좀 물렁하게 굴지 않을까 기대했을 뿐이지.
그 신념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은 것도 아니고.
“먼저 이상한 질문을 한 자네가 나빠.”
“됐어, 그래. 네가 여동생 구하러 가면 내가 20명 구하러 갈게. 됐냐?”
“고맙네, 백리한.”
분명 더 없이 기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을 텐데 면사에 가려져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아 백리한은 조금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네가 어느 쪽을 택하든 위험하다 싶을 때는 어차피 나도 따라 가야 할 테니까.”
“누가 들으면 자네가 내 보호자인줄 알겠군그래.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자네가 그런 말을 다 하지? 혹시 뭐 부탁할 게 있어 포석 까는 중인가?”
여전히 즐거운 듯 농을 던지는 이현에게 백리한은 히죽 웃으며 미끼를 던졌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기루(妓樓) 좀 같이 가지? 다들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데.”
“다들이 누군가, 대체. 그리고 동네마다 아는 기루라도 있는 겐가?”
“어허, 그 유명한 동정호가 지척에 있는데 동생 안 데리고 갈 거야? 당연히 서호도 가 봐야지.”
동정호(洞庭湖). 호남(湖南)과 호북(湖北)을 나누는 중원 최대의 호수이며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동정호도 좋고, 모처럼 나왔으니 자네 말대로 항주 서호에도 가 보면 좋겠지.”
“그렇지. 미인하면 역시 항주와 소주 아니겠나. 그리고 어디에나 자네를 기다리는 여인들이 있지.”
“애 데리고 어딜 갈 생각인가 대체.”
“어허, 거~언전하게 무희들이 많은 기루도 있다고. 잘 알면서 그러나.”
“평소에 뭐 하고 다니는지 정말……. 애 정서 교육에 안 좋아.”
“청운 형님은 기루도 안 가시니까 청운 형님한테 맡기면 되지.”
“청운 형님도 술은 마실 텐데?”
“앗. 그랬나.”
역시 말코도사. 청운진인이 들었다면 한 대 맞았을 소리를 당당하게 하며 두 사람은 일행과 함께 장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