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42
천하제일 시한부 (42)
서서히 해가 저물어 갔다.
악소패의 아지는 패거리를 모두 이끌고 주씨세가로 향했다.
그 시각 봉칠이도 남는 인원을 제외한 열 명가량의 인원을 데리고 주씨세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어?”
“어라?”
하필이면 두 무리가 같은 시간에 이동했기에, 주씨세가의 정문 앞에서 딱 마주쳐 버렸다.
“악소패, 거지새끼들이 여긴 어쩐 일이냐? 구걸하러 왔냐?”
도발은 삼거리파에서 먼저 시작했다.
“이야, 용구 새끼 뒈져 버리니까 이제 뵈는 게 없냐? 어째 같이 보내 줄까?”
악소패도 지지 않았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든 채,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끼익!
그 순간, 주씨세가의 정문이 열리고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는 광흑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들어오라.”
심상치 않은 기세에, 악소패와 삼거리파는 금세 쭈글해졌다.
그들은 무기를 넣은 채, 광흑의 뒤를 따랐다.
물론 따라가면서도 서로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끝나고 보자, 이 ×발 넘들아.”
아지가 낮게 중얼거렸다.
“오냐, 오늘 거지새끼들 배때기에 들어간 것 아주 다 토하게 해 줄 테니 기대해라.”
봉칠이도 지지 않았다.
난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킬킬 웃었다.
“심심하진 않겠네.”
왠지 앞으로가 기대된다.
난 봉칠과 아지를 더욱 세심하게 살폈다.
‘아지. 체구 자체가 작고 뼈대가 굵으나 반대로 유연한 신체. 생각보다 가르칠 맛이 나겠어.’
악소패를 끌어들인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신체 조건 때문이었다.
평생 사당패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날뛰던 그들의 본성이 어디 가지 않듯, 아직까지도 몸에 특유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봉칠. 셈에 능하고 눈치가 빠르며 협상을 할 줄 아는 놈.’
난 저들을 이용해 세가의 내실을 꾸리기로 결정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출신 성분부터 조사해야 하는 외부의 인사들보다야 아예 힘으로 굴복시켜 둔 상대들이 더욱 다루기 편하다.
더군다나 뒷골목 출신들인지라, 굳이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더욱 끌렸다.
“귀면.”
낮게 속삭였다.
내 부름을 들었는지, 뒤편에서 순식간에 귀면탈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귀면탈혼의 말에 난 가만히 아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놈, 네가 거둬 볼래?”
“예엣? 저 거지새끼들을 어따…… 아, 하하. 하라면 해야죠, 뭐.”
인상을 쓰기 무섭게 귀면탈혼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딱 봐도 싫은 모양이었다.
“대신 선물을 주지.”
“선물……이라면?”
귀면탈혼의 눈이 반짝였다.
“내가 알던 살수 놈이 하나 있거든. 그놈한테 배운 기술이 있는데…….”
“헙!”
귀면탈혼은 사례가 걸린 듯, 경직된 자세로 움찔거렸다.
큰 충격에 차마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싫냐?”
“시,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천하를 공포로 물들였던 살황의 무공인데.
뭐 살황의 무공이 아니더라도, 무공을 전수해 준다는 것 자체가 사실 엄청난 기연인 것이다.
‘신기단주가 무공을 하사한다?’
이건 못 참는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해야 된다.
“하겠습니다. 무조건합니다. 하하! 아주 야무지게 교육시켜 놓겠습니다.”
“그래. 착실히 가르치라고.”
그럼 나도 착실하게 뽑아 먹어 줄 테니까.
이런 내 속마음도 모른 채, 귀면탈혼은 행복한 상상에 젖어 들었다.
* * *
주씨세가의 안채가 시끄러워졌다.
아닌 밤중에 악소패와 삼거리파, 그리고 흑호방의 진청운까지 한자리에 다 모였다.
“다들 왔군.”
내 등장에 자리에 앉아서 서로를 탐색하던 이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대협.”
“오랜만입니다.”
모두의 인사를 받으며 나 역시,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간의 침묵 뒤,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형이 안으로 들어섰다.
“가주님이시다, 인사 올려라.”
내 말에 모두가 다시 벌떡 일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흑호방주, 진청운이라 합니다, 주씨세가주님.”
“악소패, 양아지라 합니다. 아지라 불러 주십시오, 가주님.”
모두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가며 인사를 건네자, 형 역시 손을 들어 그에 화답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지 놈 성이 양씨였다니.
참 묘하다.
‘그래도 강씨가 아닌 게 다행일지도.’
아지는 내 속도 모른 채,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자리에 앉았다.
“다들 반갑소. 주씨세가주, 주상진이오.”
형 역시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들어가겠소.”
형의 말에 모두가 긴장한 채, 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형은 품에서 둘둘 말린 서찰을 꺼내 쭉 펼쳐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본 주씨세가는 과거 악안에서 누렸던 영광을 되찾으려 한다.”
쿵!
실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대충 이야기의 전말을 알고 있는 봉칠만이 제법 담담한 표정이었다.
“현재 흑호방이 쥐고 있는 사망회의 조직 해산 이후 가져간 권리, 삼거리파가 쥐고 있는 영업권, 악소패가 가지고 있는 영역 또한 모두 주씨세가에 속할 것이다.”
형의 말이 끝나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놈.’
난 청운의 반응을 살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
아무런 감정조차 없어 보였다.
“협박입니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진청운이었다.
담담한 그의 대답에 형도 꽤 놀란 눈치였다.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들렸다면 그런 거겠지. 본 세가가 마땅히 되찾아야 할 일부일세.”
“그렇군요.”
진청운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지금 저희 악소패가 관리하는 구역의…….”
“악소패는 앞으로 주씨세가에 소속된다. 삼거리파도 마찬가지. 또한 추후에 걸맞는 직위와 봉급을 지급할 것이며 명칭 또한 달라질 것이다.”
형은 아지의 말을 끊었다.
아지가 냉큼 입을 다물었다.
‘이거…….’
아지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엄청 좋은데?’
사실 아지로서도 슬슬 뒷골목 생활이 지겨운 참이었다.
허구한 날 쌈박질하던 때가 차라리 재밌기라도 했지, 지금은 서로 눈치만 보고 간만 보는 싱거운 신경전이 일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봉칠은 내게 먼저 들었기에, 별 거부감 없이 냉큼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이미 동의한 부분입니다요, 가주님. 믿고 써 주시지요.”
“좋군.”
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청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치 어쩔 테냐는 듯한 행동이었다.
“하나만 여쭈지요.”
청운이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흑호방은 해산합니까?”
“마음 같아서는…… 사실 모조리 불태우고 싶네만.”
형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새삼 처음 보는 형의 섬뜩한 미소였다.
“내 아우가 대신하여 복수했다 하니, 참는 중일세.”
“그렇군요. 그 점은 거듭 사과 말씀 올립니다. 하지만 저희가 해산할 수는 없습니다.”
청운이 냉정한 표정으로 형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어째선가.”
형의 물음에 청운이 담담하게 답을 이었다.
“저 역시 한 가문을 이끄는 수장입니다. 섣불리 주씨세가에게 모든 권리를 양도할 수 없습니다. 멸보다는 공생 쪽으로 방향을 틀어 주시는 것이…….”
“못 들었나?”
형이 청운의 말을 끊었다.
형의 단호한 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흑호방을 모조리 불태우고 싶은 이 심정을 간신히…… 아주 간신히 참고 있는 거라고.”
“…….”
“거듭 사과한다라, 누구에게? 대체 누구에게 사과를 하는 건가? 사과한다고 지금 이 결과가 달라지나? 그대가 선택할 것은 단 두 개일세. 죽던가, 비굴하게나마 살던가.”
난 가만히 상황을 주시했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형이 나보다 더 단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 흑호방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뭔가 아닌 것 같기도 했었으니까.
“휴, 어쩔 수 없군요.”
청운이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흑호방의 현판을 포기하겠습니다. 주씨세가의 일원으로는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 말은 즉, 수호 가문이 되겠다는 소린가?”
수호 가문.
하나의 문파가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성 단위로 거대한 지역구에 모조리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오대세가나, 구대문파가 하는 방식으로서 속가제자, 수호 가문이 바로 그 방법 중 하나였다.
수호 가문은 말 그대로 주인이 되는 가문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는다.
동맹과는 또 다른 개념으로써 보통 혼인과 같은 피를 통해 맺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허락해 준다면 기꺼이.”
청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를 보며 씩 웃었다.
‘의도했구나.’
청운은 미리 이걸 떠올렸을 거다.
제 아비보다 뛰어난 재지를 지닌 놈이다.
당연히 흑호방과 주씨세가가 같은 하늘 아래 공생한다는 생각은 허황된 것이란 걸 진즉에 깨달았을 것이다.
“어떠하냐?”
불현듯 형이 내게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찬성.”
당연히 찬성이다.
흑호방을 쓸 수 있는 범위는 상당히 넓다.
일단 기본적으로 데리고 있는 무사 숫자도 많고.
“좋다. 그럼 흑호가문의 내부 장계와, 내부 사업에 관련된 보고서는 내일 당장 받는 걸로 하지.”
“따르겠습니다.”
청운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예상과 달리 큰 잡음은 없었다.
‘싱거운데.’
사실 흑호방이 개기면 아예 모조리 풍비박산 내고 흡수해 버리는 쪽으로 생각을 굳힌 마당이었다.
하지만 청운은 눈치가 상당히 빠른 놈이다.
개겼다간 어찌 될지 뻔히 알았기에, 그는 쉽게 숙이고 들어왔다.
그 와중에 최소한의 권리는 챙긴 셈이고.
“오늘 회의는 이걸로 파하지. 악소패와 삼거리파의 내부 장계는 뭐 따로 적어 둔 것도 없을 테니 내가 직접 움직이는 걸로 하고.”
형의 말에 아지와 봉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별다른 잡음 없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 *
“너 나대지 마라. 내가 우리 대협을 잘 아는데…… 넌 조만간 깝죽대다 사지 하나 아작 날 거다.”
“흥, 웃기는 소리. 내가 어지간한 눈치로 악소패의 패주까지 올라온 줄 아느냐? 너보다 사회생활 더 일찍이…….”
“거지새끼가 사회생활 운운하네.”
“저 개자식이 근데 자꾸 말끝마다 거지거지…….”
재밌다.
난 문 앞에 서서 가만히 둘이 하는 말싸움을 지켜보았다.
역시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건 남이 싸우는 걸 구경하는 것과 불구경이라던데 그 말이 맞다.
오독오독.
내친김에 주방에서 기름에 딱딱하게 튀긴 옥수수를 꺼내 왔다.
그러고는 다시금 자리에 앉아 둘의 싸움을 관람했다.
“오라비, 뭐 해?”
이제 막 아지와 봉칠의 주먹다짐이 시작되려던 찰나, 서희가 나타났다.
“너도 여기 앉아, 저 븅신들 싸워.”
서희는 피식 웃으며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오라비.”
“왜.”
내가 대답한 그 순간, 봉칠이 먼저 아지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꽂아 넣음으로써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라비, 천하제일검이라며. 저런 음…… 수하들이라던가 같이 싸우던 동료들은 없었어?”
멈칫.
서희의 뜻밖의 질문에 몸이 굳었다.
그래 신기검단.
내 새끼, 내 형제들.
“있었지.”
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들에게는 내가 떠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나왔다.
그래도 녀석들은 이해할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떠나가는 자에게 익숙한 놈들이니까.
“보고 싶지 않아?”
“…….”
뭐, 딱히 보고 싶은 맘은 없었지만 그래도 인사는 하고 싶었다.
허나, 이왕 떠나온 것 뭐 어쩌겠는가?
“언젠가 만나겠지.”
“피, 됐어. 싱겁기는. 내일은 간만에 우리 잔치나 열자. 아지 아저씨랑 봉칠이 아저씨랑 다 모아서.”
그간 삼거리파 놈들이 서희를 괴롭혀 왔음에도 서희는 금세 적응했는지 봉칠이를 편하게 불렀다.
제법 대견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 간만에 내 동생 요리 솜씨나 봐야겠다.”
“아싸! 그럼 내일 장 좀 봐야겠네.”
난 기뻐하는 서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언젠가 만나겠지.
그러니까 지금은 이 행복에 그냥 다 잊고 젖어 들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