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00)
99마왕의 독대
낡고 허름한 테이블.
그곳에 내가 내려놓은 찻잔을 들어 여인은 기품 있게 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흐음. 맛은 싸구려지만, 그래도 약차치고는 괜찮은 편이로군.”
…이 여자는 정말 예의라는 걸 모르는 건가?
행동만 보면 기품이 넘쳐흐르는데, 말만은 무례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나는 새삼 혈압이 솟는 것을 느끼며, 여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차를 마셨으면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
“이제야 겨우 한 모금을 마셨을 뿐이거늘… 참으로 무례한 소년이로고.”
“…당신한테 그런 말 들을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혀를 차며 찻잔을 내려놓는 여인을 보며, 나는 어이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가 예의에 서툴러도 자신이 세레나의 언니라면서 쳐들어와,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차부터 내오라고 말한 이 여인에게 무례하다는 소리를 들을 이유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어쨌든 약속은 약속. 그래,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당신이 세레나의 언니라는 것부터.”
나는 빠졌던 맥을 되찾았다.
그리고 의심을 담아 여인을 노려보았다.
내가 알기로 S. R. 라바일은 무남독녀고, 세레나도 언니의 이야기를 한 적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찾아온 여인이 세레나의 언니를 자칭하고 있으니, 의심이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흐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바일 경의 친언니는 아니네. 그저 라바일 경이 본인의 집을 여러 번 찾아오고, 둘이 같이 침실에서 함께 거칠고 뜨거운 밤을 지새우다 보니 어쩌다 의기투합해서 피의 잔을 나눈 의자매일 뿐이지.”
…잠깐, 지금 두세 군데 걸리는 게 있지 않아?
친언니가 아니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어진 말에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의형제끼리 피가 담긴 술잔을 나눠 마시다니, 케케묵다 못해 사라진 지 오래인 전통이다. 하물며 의형제도 아니고, 의자매를 맺는데 혈배를 나누다니, 내가 알기로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침실에서 거칠고 뜨거운 밤을 지새웠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침실에서 대련을 했다는 뜻은 아닐 테고, 거친 말싸움이라도 했다는 뜻일까?
“세레나한테 의자매가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는데.”
“당연하지 않는가. 강력한 힘을 지닌 이에게 나약한 의자매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 어떻게 될지도 모를 정도로 라바일 경은 어리석지 않네.”
…그건 일리 있네.
여인이 태연하게 내놓은 말을 나는 섣불리 부정하지 못했다. 천검자로 유명한 세레나에게는 적 또한 많다. 세레나의 위세를 이용할 생각이 아니라면, 가능한 숨기고 있는 편이 서로에게 좋은 일인 것은 분명했다.
“사실 본인으로서는 라바일 경에게 그대 같은 가족이 생겼다는 쪽이 더 믿기지가 않네만.”
“그래서, 불만 있어?”
나는 무심코 불을 부풀렸다.
물론 그녀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나 역시도 천하의 천검자 S. R. 라바일과 같은 가족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레나의 의자매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조금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록 그와 세레나는 상관없다고 말해 줬지만, 마족으로서 수많은 죄업을 쌓아 온 내게 과연 그들의 가족이 될 자격이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인의 말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고맙다고?”
예상치 못한 말에 떨떠름해하는 나를 두고, 여인은 무언가를 회상하듯 아련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본인이 처음 라바일 경을 만났을 때, 그 모습은 그야말로 예리한 칼날과 같았다네. 너무나 예리하고 섬뜩하게 갈려져서 자기 자신조차 상처 입힐 듯, 위험하고도 불안 불안하게만 느껴지는 칼날 말이네.”
나는 세레나의 과거사에 귀를 기울였다. S. R. 라바일의 영웅적인 업적만 잘 알 뿐, 세레나라는 개인의 과거사는 잘 모르던 내게 그것은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였으니까.
“가문을 부흥시켜야만 한다,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 보다 강해져야 한다. 라바일 경은 그런 수많은 의무를 짊어지고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었던 걸세.”
나는 마음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 심정이라면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마족을 위해 ‘로드 오브 킹덤’을 세우고, 끝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던 것처럼, 세레나 또한 몰락한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온갖 시련을 자처해야 왔을 테니까.
“그런 라바일 경의 짐을 덜어 줄 수 있는 상대가 생겼으니, 이 어찌 고맙지 않은 일이겠는가.”
…할 말이 없네, 정말.
나는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처럼 진심으로 세레나를 걱정하는 이라면, 정말 세레나의 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라바일 경은 대체 언제 돌아오는 것인가?”
“…글쎄.”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리는 여인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이미 해가 저물다 못해 밤이 깊은 시간. 그런데도 그와 세레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은, 나 또한 의문이었으니까.
“흐음. 어쩔 수 없군.”
여인은 턱을 괴고 뭔가를 고민했다. 그래,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는 없으니, 약속을 잡고 내일 다시 오는 수밖에 없겠지.
“오늘은 이곳에서 묵도록 하겠네.”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않겠다고?!
“침상조차 없는 곳에서 자고 싶지는 않지만, 라바일 경을 생각해서라도 봐줄 터이니 잠자리를 준비해 주게.”
잠깐, 당신! 누구 마음대로 그러는 거야? 아니, 그보다 묵고 가는 건 이미 결정된 거야?
“왜…!?”
“루바젤에 도착하자마자 라바일 경을 찾아다니느라 숙소도 잡지 못했네. 설마 라바일 경을 찾아온 본인을, 이 한밤중에 알아서 숙소를 찾아다니라고 길거리로 내보낼 셈이었던가, 냉정한 소년?”
할 말이 없다. 정말로 할 말이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세레나를 찾아온, 그것도 자칭 의자매를 쫓아낼 수야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우리 집이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구는 여인의 태도는, 왠지 무지무지 불합리하게만 느껴져서 화가 난다.
“아, 그리고 모포는 최소한 두 장 이상으로 깔아 주게. 본인은 몸이 차면 잠이 잘 안 오는 체질이라서 말이네.”
여인의 느긋한 음성을 들으며, 나는 집에 있는 모포를 모조리 화덕에 던져 버리면 이 여자를 내쫓을 수 있을지, 심각한 갈등에 잠겨 들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