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12)
111악당의 밀회
을씨년스러운 정원에서 나는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미 황제에게 낙인찍힌 이상,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왕궁까지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다고 해도, 황제가 진짜로 병력을 동원한다면,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붙잡히고야 말 테니까. 더구나 중요한 것은 황제만이 아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황제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나를 골치 아프게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머리의 열기를 식혀 보고자, 나는 정원을 서성이며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것이 최악의 자살행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켁! 이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냐?!
정원 한가운데 있는 작은 분수대에 앉아 달을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다행스럽게도 달구경에 정신이 빠진 건지, 녀석은 내 기척을 느끼지 못한 상황. 이대로 물러나면 녀석의 피하는 것도 가능했다.
아니, 가능해 보였다.
바스락.
…하필이면 뒷걸음질 치던 발에 마른 잎사귀가 부스러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작은 소리였지만, 녀석은 단숨에 나를 돌아보았다.
이런 망할.
이 빌어먹을 상황에 대한 저주를 신과 악마에게 공평하게 반반씩 퍼부으며, 나는 겉으로는 침착하게 부동자세를 지켰다. 여기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의심을 사게 될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묘책을 짜내기도 전,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입을 벌렸다. 단지 그 작은 반응만으로도 충분했다. 변장이 들통났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이런 망할.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도망치기는 틀렸다. 황제의 충신인 녀석이, 내가 도망치는 것을 두고 볼 리가 없으니까. 더구나 저 원망 어린 눈이라니.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날 그런 눈으로…!
오싹! 녀석의 시선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 이 상황을 넘길지 머리를 굴리던 중, 나는 문뜩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있다.
아니, 이건 단지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목덜미에 칼날을 대고 있는 듯한 감각, 단순한 살기나 살의를 넘어 피를 얼어붙게 하는 무색투명한 기세가 내 생존 본능에 경종을 울리게 하고 있었다.
그런 위기감 속에서도, 나는 몸을 긴장시키지 않기 위해 애썼다.
여기서 섣불리 동요를 드러내는 순간, 목이 날아가리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묵묵히 갈등하던 끝에 나는 천천히 녀석과 거리를 좁혔다.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일단 녀석과 같이 있을수록 내 생존 가능성은 높아질 터였으니까. 주변의 기척을 눈치챈 것인지, 녀석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기에 나는 무사히 녀석의 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하기야, 어지간히 정신을 팔고 있지 않은 이상에야, 내가 눈치챈 걸 녀석이 모를 리가 없지.
문제는 이제부터다. 녀석에게 검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척 보아하니 검 한 자루도 보이지 않는 상태. 이 장소에서 이대로 습격을 받았다가는 아무리 녀석을 방패로 내세운다 해도,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 것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기 위해, 나는 천천히 녀석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 만큼 계획을 설명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녀석이라면 깨달으리라는 기대가, 내게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있게 했다.
망설이던 녀석이 내 손 위에 손을 올린 순간, 나는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심정으로, 녀석의 팔을 끌어당겼다. 만약 지금이 평소였다면, 이것만으로 내 모가지 반쯤은 절단 났겠지.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녀석 또한 긴장감으로 몸을 굳혔을 뿐, 내 목을 조르거나 팔을 분지르지는 않았다.
젠장, 근데 하는 행동이 왜 이렇게 목석 같냐?
연기하고 있는 게 다 티 나잖아!
“등을 곧게 펴라.”
내가 그 가느다란 허리를 다른 팔로 감싸 안아, 몸을 더욱 밀착시키며 입을 열자, 녀석은 움찔하며 곧게 등을 폈다.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봐라.”
혹시라도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귓가에 대고 자그마하게 속삭인 소리에 녀석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기가 없이 포위된 긴장감 때문일까? 목각인형처럼 뻣뻣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목덜미에서부터 귓불까지 새빨갛게 붉히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는 나는 내심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힘을 빼고 흐름에 몸을 맡겨라.”
녀석은 내 말에 따라 몸에서 힘을 빼냈다. 지나치게 힘을 빼고 몸을 기대 온 탓에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한 위기에 나는 팔다리와 허리에 힘을 줘, 겨우겨우 녀석의 몸을 지탱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댄스의 스탭에 따라 걸음을 옮기는 척, 눈으로는 은밀하게 사방을 훑는다. 하여 분수대를 몇 바퀴 도는 사이, 주변의 그림자를 샅샅이 훑어본 나는 내심 신음을 흘렸다.
젠장. 적어도 대여섯 명 이상인가? 아까 전 느꼈던 섬뜩한 기세를 생각해 보면, 완전무장을 했어도 싸움은 피해야 할 숫자다. 하물며 맨손으로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
…이렇게 되면, 이 녀석을 미끼 삼아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군.
나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일개 시종으로 위장한 나를 노릴 리는 없다. 그러니 녀석과 떨어지기만 하면, 굳이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녀석을 어떻게 미끼로 삼느냐는 것인데….
“뒷일은 내게 맡기고, 폐하께 가 보거라.”
나는 그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 왕궁에 이런 것들이 들어와 있다면, 가장 위험한 대상은 바로 황제.
제국의 기사인 녀석으로서는 황제의 안전은 무엇보다 우선되는 일일 테니까.
그리고 나는 여기에 미끼로 남는 척, 암살자들을 따돌리고 튀어 버리면 된다 이거지.
“고작 이 정도 일로 네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나는 약하지 않다.”
“…….”
미끼를 자처하는 내가 걱정되는 듯,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길 잠시.
녀석은 결국 천천히 손을 떼고 물러나,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정중히 인사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마주 허리를 숙인 후,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정원을 벗어나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좋아, 이제 살았다.
이걸로 놈들은 녀석을 쫓아갈 터, 실제로도 주변의 기세가 줄어든 것을 느끼며, 나는 어디까지나 여유로우면서도 느긋하게 절대 도망치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 태도로 분수대를 벗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이대로라면 뭔가 큰 사건이 터지게 될 터.
그 순간이야말로, 내게 있어서는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채 열 걸음도 옮기기도 전 나는 그대로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검을 뽑아 든 채, 앞뒤를 가로막은 세 암살자를 둘러보길 잠시, 살기가 철철 넘쳐흐르는 시선을 받으며, 나는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시여…. 뒤로 나자빠져 코나 깨져 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