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52)
51마왕의 노동
외상으로 벤에게 약을 받은 이후.
나와 세레나는 여관의 개장을 도왔다.
물론 그 사내는 모르는 일이었다.
약값을 버는 걸 승낙해 줄 리 없었기에 그에게는 숨기기로 입을 맞췄으니까.
다행히 사내는 거동이 불편한 상태.
게다가 둘 중 한 명은 항상 집에 남아 있었기에, 그의 눈을 피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문 위에 새로 만든 간판을 달고, 깔끔하게 칠한 벽에 그림을 그리고, 테이블을 싹 새롭게 갈아 치우는 등등, 새로 개장하는 만큼 할 일은 많았다.
하지만 이미 약을 선불로 받은 처지.
게다가 힘쓰는 건 벤이 도맡아 했기에, 특별히 피로가 쌓이지도 않았다.
대신, 좀 거슬리는 게 있기는 했지만.
“…왜 이런 옷을 입어야 하는 건데?”
“그야 이게 종업원복이니까 말이다. 일하려면 일에 어울리는 복장을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
벤의 말은 상당히 논리정연했다.
하지만 저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라니.
왠지 불쾌감이 뭉클뭉클 솟아오른다.
당장이라도 거절해 버리고 싶을 만큼.
그러나 이 또한 약값에 포함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2층의 객실에서 머리를 묶어 정리하고 벤에게 받은 치렁치렁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1층으로 내려온 나는 식당을 돌아보았다.
창을 덮어서 좀 더 어두워진 공간에서 은은한 등불이 차분한 분위기를 풍긴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식당 안쪽에 새롭게 만들어진 카운터. 온갖 술병이 들어 있는 선반과 그 앞으로 길게 뻗은 테이블의 안쪽.
본래라면 지배인이 있어야 할 그곳에서 긴 손가락으로 술병을 정리하는 것은, 벤이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
희고 검은 두 가지 색의 정장 때문인지.
가녀리기보다는 균형 잡혀 보이는 체격.
거기에 새하얀 피부에 부드러운 턱선과 오뚝한 콧날에 유려하게 휘어진 눈썹, 거기에 우수가 묻어나는 눈동자까지.
어딜 봐도 완벽한 미청년인 바텐더에게, 나는 떨떠름히 말을 걸었다.
“세레나. 괜찮아?”
바텐더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내게는 익숙한 부드러운 미소.
그 모습에 나는 일말의 괴리감을 느꼈다.
세레나가 절세미녀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장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평소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리스야말로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별로.”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무 불편했다.
그래도 남장한 그녀보다야 나았기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주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리에게 이런 복장을 하게 만든 원흉, 벤을 노려보기 위해서.
“오오오! 으, 으으음. 크흑….”
…내가 너무 무섭게 노려봤나?
눈이 튀어나올 듯.
턱이 빠질 듯.
멍한 표정으로 나와 세레나를 보다가 눈물마저 찔끔 흘리는 벤을 보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맛이 간 인간은 전쟁터에서도 가끔 봤다.
하지만 노려본 것만으로 이렇게 정신이 나간 사람을 본 것은, 나로서도 처음이었다.
“음, 음. 좋습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대체 뭐가 좋고, 뭐가 훌륭하다는 걸까?
아주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니었는지.
불끈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길 잠시.
벤은 고개를 휙휙 내젓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준비는 끝났고… 아리스, 슬슬 상단이 올 때가 됐으니 마중을 좀 나가 다오.”
“…알았어.”
상단이 오는 걸 어떻게 아는 건지, 절로 궁금해지는 말이었다.
그래도 헛소리를 할 벤은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여관을 나섰다.
치렁치렁한 건 잔뜩 붙어 있는데.
정작 옷은 얇아서 조금은 쌀쌀했다.
그래도 추울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가볍게 옷깃을 추스르고, 종종걸음으로 마을 입구로 걸어갔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벤의 예측이 정확했던 것일까.
입구에서 기다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길 저편에서 나타난 십여 대의 짐마차.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나를 본 듯 그들은 서서히 속도를 늦추다가, 마을 앞에서 우뚝 섰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쪽의 짐마차에 앉아 있던, 작은 청년과 통통한 중년인을 향해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어서 와.”
흥. 누가 ‘어서 오세요.’라고 할까 봐.
벤의 신신당부를 무시하며 말을 걸자, 쑥덕거리던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다시금 청년과 뭔가를 얘기한 중년인은 가볍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꼬마 아가씨, 우릴 기다리던 거니요?”
…츄리온 사투리인가?
조금 기묘하게 들리는 말투.
그래도 뜻은 알아들을 수 있는 질문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관. 마중 나왔어.”
중년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일 때.
그 옆에 앉아 있던 작은 청년은 왠지 실망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또 숨겨 놓은 딸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요. 하기야 그런 능력이 있으면 아직도 노총각일 리가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요.”
혼잣말치고는 너무나 분명한 말.
중년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싶을 때, 불끈 움켜쥐어진 주먹이 치켜 들려졌다.
따악!!
“꽤액!”
…그래도 비명에는 사투리가 안 붙네.
뒤통수를 붙잡고 끙끙거리는 청년 상인.
그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되새기며 나는 짐마차를 끌고 온 츄리온 민족의 방랑 상인들을, 벤의 여관으로 안내했다.
며칠 동안 열심히 새 단장을 한 결과 몰라보게 말끔해진 건 기본, 무척 고급스러워진 여관을 보고 상인들은 짧은 감탄을 토해 냈다.
하지만 진짜 감탄할 부분은 따로 있었다.
딸랑.
“별의 쉼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손님”
“…….”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정중하게 인사하는 세레나를 보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미청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
거기에 우아한 동작이 더해진 모습은 나조차도 순간 웬 백마 탄 왕자님이 여기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실제로 그런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닌지 상인들도 그녀를 보며 눈을 껌뻑거렸다.
“자자, 빨리 짐을 풀고 먹을 거 먹은 뒤 장사 시작하자요. 한시라도 빨리 일해야 돈을 많이 번다는 건 고요한 초원의 시현자도 인정한 진리다요.”
통통한 중년 상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그들이 짐을 풀기 위해 올라가자, 세레나는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고하셨어요, 아리스.”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녀를 나는 잠시 묵묵히 마주 보았다.
잊으려 했던 의문이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오른다.
…대체 세레나의 정체는 뭐지?
방금 그녀가 한 인사.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귀한 핏줄을 타고나 어릴 때부터 몸에 예절을 새겨 넣은 명가의 일원이나 가능한 인사였으니까.
의심스러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사내와는 어떤 관계인 것인지부터, 이전까지는 무엇을 했는지까지.
내가 세레나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
짐을 풀고 내려온 상인들이 테이블 여기저기에 앉아 주문하기 시작하자, 나는 머릿속의 의문을 일단 접어 둔 채 식당 안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여기 돼지고기 볶음요!”
“샐러드 한 그릇!”
“맥주 네 잔!”
과연 츄리온 상인답게 우렁찬 목청.
그들의 외침을 나는 하나하나 새겨듣고 주방에 있던 벤에게 전해 주었다.
“아리스, 너 메모지는 어쩌고 빈손인 거냐?”
새하얀 요리사복을 차려입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벤의 물음에, 나는 차갑게 응대했다.
“메모지는 왜?”
“아니, 외우기 힘들면 적으라고 준 게 있잖느냐.”
“그런데?”
고작 이십여 개의 주문이 왔을 뿐이다.
수백 개의 주문이 한꺼번에 쏟아지거나 알기 힘든 암호로 전해진 것도 아니고 이 정도쯤이야 누구나 즉석에서 외울 수 있을 텐데.
왜 메모지가 필요하다는 걸까?
“… 아니, 됐다. 일단 이것부터 내가 다오.”
뭔가 할 말을 잃은 듯.
나를 보며 입을 뻐끔거리길 잠시.
벤이 고개를 저으며 내민 요리를 받아 차례차례 주문받은 테이블에 내간다.
주방과 테이블 사이를 오갈 때마다 왠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
처음에는 그것이 묘하게 찜찜했지만, 정신없이 요리를 나르느라 바빠 곧 시선 따위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물론 바빠진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세레나 역시 바 테이블에 몰려든 상인들을 상대로, 바쁘게 손을 움직였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절도 있는 태도로 차분함을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내게 감탄을 느끼게 한다.
딸랑.
그렇게 새로운 요리를 받아 와, 하얀 후드를 쓴 손님에게 내놓았을 때.
허공에 울려 퍼진 방울 소리.
그것을 따라 여관 문을 바라본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
드문드문 흰색이 섞인 반백의 머리.
거기와 대조되는 온통 새까만 경장.
거기에 감정이 보이지 않는 얼굴에 싸늘한 눈으로 식당 입구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28대지에 서는 자 로스타나, 적월의 육 기사를 상대할 때조차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나였다.
하지만 식당에 깔려있는 어둠을 꿰뚫으며 정확히 내게 꽂혀 든 사내의 시선은 나에게 냉정한 판단을 떠나, 벤에게 교육받은 행동을 하도록 했다.
“어서 오세…요.”
쨍그랑!!
뭔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방금 내가 한 행동에 너무 당황해서 그리고 불이 난 듯 화끈거리는 얼굴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응? 무슨 깨지는 소리가….”
그 소리를 들은 듯, 주방을 나오던 벤의 목소리가 뚝 끊기며 식당에 무거운 정적이 내리깔렸다.
단지 우리만이 아니었다.
사내에게서 흘러나온 위압감이 북적거리던 식당 전체를 뒤덮으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상인들마저, 숨소리를 죽인 채 우리와 사내 사이의 눈치를 보게 만들고 있었다.
그 숨 막힐 듯한 정적이 깨진 것은, 사내의 입이 처음으로 열린 순간이었다.
“얘기가 필요할 것 같군.”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싸늘한 음성.
차라리 정적이 그리워지는 그 목소리에 상인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벤은 기어가듯이 말을 흘려 냈다.
“허, 험. 굳이 얘기까지 할 필요가….”
“그렇다면 당장 돌아가면 되겠군.”
그리고 사내가 돌아갈 때는, 나와 세레나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주방에서 튀어나와, 사내의 팔을 움켜쥐었다.
“어허, 뭐가 그리 성급하십니까. 얘기하지요. 예, 해야지요.”
벤과 사내가 뒷문으로 나간 뒤에야 겨우 몸이 풀린 나는 세레나를 돌아봤다.
이 상황을 어떡해야 할지.
도움을 청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
하지만 세레나의 상태도 나와 같았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심각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에도 딱딱하리만치 똑바로 등을 편 채, 조용히 뒷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세레나.
버림받지는 않을까 불안해하면서도 곧은 자세로 자리를 지키는 충견처럼 그 꼿꼿하면서도 위태로운 모습에, 나는 망설임에 잠겼다.
…어떡하지?
잠시간의 고민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뒷문에 조심히 귀를 댔다.
“내게 고작 푼돈 때문에 가족을 팔란 말인가?”
“파, 팔다니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얘기는 이걸로 끝이오.”
“코드 씨! 30, 30%를 드리겠습니다.”
타협을 허용치 않는 듯한 단호한 음성.
예상대로의 상황에 나는 숨을 죽였다.
벤은 사내에게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떤 제안도 소용없다는 것을.
주군을 받들지 않기에 그 누구보다도 높은 긍지를 지니고 있던 자유 기사, 한때나마 그들의 수장이었던 사내가 고작 돈 몇 푼에 혹할 리 없었으니까.
“비키시오.”
“제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봐주십시오. 이대로 아리스와 세레나 양을 데리고 가 버리시면 저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예상대로 타협을 거부하는 그에게 벤은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그 간절한 애원이 통한 것일까?
고민하듯 잠시 침묵을 지키던 끝에 사내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빚을 봐서, 이번 한 번만 넘어가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후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일하는 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는 특히나.
하지만 일단 사내의 약값을 벌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안도할 일이었다.
“아가씨, ‘용의 진혼곡’은 멀었다요?”
“여기 주문 좀 받으라요!!”
“내가 시킨 닭 다리 구이는 언제 나오는 거니요!”
…아.
이제야 사내의 위압감에서 벗어난 듯.
떠들썩하게 주문을 외쳐 대는 상인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식당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위압감에 눌린 반동 탓인지 상인들은 하나같이 흥분해 있어, 도저히 수습하기 힘들 정도였다.
세레나는 아직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딱딱하게 굳어 있을 뿐이었고.
그런 그녀의 방관에 자신감을 얻은 듯.
점차 목소리를 높여 가는 상인들.
바로 그 순간, 하나의 목소리가 열기를 차갑게 식혔다.
“뭘 하고 있는 건가.”
결코 크거나 우렁차지 않음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오는 그 음성에 거짓말처럼 다시 정적에 빠져든 식당.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것일까.
검은 경장 대신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주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카운터에 있던 세레나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옷을 갈아입고 와라.”
“네? 하지만….”
“손님들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알겠습니다.”
반론 자체를 허용치 않는 단호한 음성.
세레나가 망설이다 주방으로 들어가자.
사내는 대신 카운터에 들어갔다.
그리고 앞에 앉아 있던 중년 상인에게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향했다.
“주문하실 게 있으십니까. 손님?”
“아? 아아, ‘용의 진혼곡’, 주문했다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도 안 돼.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저 무뚝뚝한 사내가 존댓말을 하다니.
도저히 현실 같지 않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것이 현실임을, 행동으로써 증명해 보였다.
찰칵. 찰칵.
여러 술병에서 술을 따라 내 얼음과 함께 셰이커 안에 넣고 천천히 쥐고 흔들어 가는 사내.
그 동작은 세레나처럼 우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숨을 쉬는 데 기품이 필요 없듯, 그의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손놀림에는 더없는 능숙함이 담겨 있었다.
“‘용의 진혼곡’은 제국의 7대 황제께서 세상에서 사라진 용들의 긍지를 칭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칵테일이지만, 그런데도 ‘용의 진혼곡’은 고급술이 아니라 가장 탁하고 싸구려인 술만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에… 그건 모르겠다요.”
마치 몇 년 숙련된 바텐더처럼 나지막하게 중년 상인에게 말을 걸며 사내는 비어 있던 잔에 술을 따랐다.
“긍지란 단지 고귀하고 깨끗한 곳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탁하고 더러운 곳일수록, 그 무엇보다도 강인하고도 고결한 긍지는 생겨날 수 있습니다.”
여러 술이 뒤섞였기 때문인지 잔에 따라진 칵테일은 무척 혼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혼탁함은 뒤섞여 맑게 변하며, 종내에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호박색으로 물들었다.
“싸구려라 불리는 술에 담긴 오랜 세월을 맑은 물과 부드러운 바람으로 개화한 칵테일. 그리하여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은 진정한 긍지를 한 잔에 담아낸 것이 ‘용의 진혼곡’입니다.”
“…….”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식당에 있던 모두는 칵테일을 보았다.
마법보다도 신기한 칵테일의 변화가.
그리고 차분하게 흘러나온 음성이.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나도 포함돼 있었다.
내가 그렇게 멍하니 사내를 볼 때, 세레나가 식당에 돌아왔다.
나처럼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그러나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상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눈이 튀어나올 듯 그녀를 보았다.
나조차 잠시 넋을 잃을 정도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의 넋을 잃게 한 것은 조금 다른 부분이었다.
…뭘 먹으면 저렇게 크는 거지?
지금까지의 수수한 원피스와 달리 묘하게 몸매를 강조하는 복장.
그 덕분에 평소보다 도드라진 세레나의 가슴께를 힐끔 보고,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왠지, 이유 없이 분한 느낌이 들어서.
어쨌든 세레나가 옷을 갈아입고 온 뒤.
나는 그녀와 함께 주문을 받고, 요리와 음료를 내왔다.
사내가 분위기를 진정시켜 주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세레나를 보고 상인들이 갑자기 잠잠해졌기에, 밀려 있던 주문을 정리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부분의 주문을 처리했을 무렵.
한 줄기 비명이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뭔가 처절하게 느껴지는 비명.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고 있는 세레나와 그녀에게 한쪽 손목이 잡힌 채, 몸부림을 치는 상인을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세레나가 괜한 손님을 괴롭힐 리는 없고, 츄리온 상인이 시비를 걸 리도 없는 일.
내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두 상인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런요. 그러게 아가씨 엉덩이는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니라요.”
“그러게 말이다요. 돈을 내고 만져야 저런 꼴을 안 당하는 거 아니요.”
“별로 아프지야 않겠지만 망신이다요. 망신요.”
…엉덩이를 만져? 왜?
탁!
어리둥절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두 상인이 앉아있던 카운터 위에, 갑자기 두 개의 술잔이 턱 하니 놓였다.
“돈을 내셔도 안 되오.”
“아, 그런기요.”
“알겠다요….”
세베크의 빙산처럼 냉담한 사내의 눈.
그 시선에 두 상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이 술잔을 들이켜다가 움찔할 때, 나는 주방에서 쟁반을 들고나왔다.
음식을 한꺼번에 담아와서인지.
쟁반이 제법 무겁기는 했다.
다행히 집안일을 통해 단련되었기에,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나를 수 있었지만.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나는 등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가 창문을 연 걸까…?
무심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고 열린 창문을 찾지 못해 의아해할 때, 내 발에 둥그런 무언가가 와 닿았다.
이건… 술병?
그 물체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내가 밟은 술병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평소라도 대처하기 힘든 상황.
심지어 쟁반까지 들고 있던 탓에, 나는 영락없이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나의 부드럽고도 강인한 손길이 내 몸을 받쳐 들었다.
“괜찮으신가요, 아리스?”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 직전.
어디서 나타나 몸을 받쳐 준 세레나.
그 덕분에 가까스로 추태를 면한 나는,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세레나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 사실에 의아함을 느낀 순간, 뭔가 요란한 소리가 식당에 울려 퍼졌다.
콰장창!!
무언가 한가득 깨져 나가는 굉음.
그것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기겁하며 몸을 일으키는 상인들, 그 사이로 엿보이는 깨져 나간 술병과 큰 충격을 받은 듯 반쯤 찌그러진 쟁반.
그리고 붉게 물든 채 카운터에 걸쳐진 하나의 낯익은 손을 보며, 나는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