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96)
95악당의 위장
아프면 신전에서 치료를 받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민간인이나 영웅의 이야기, 나와 같은 악당들에게는 조금 경우가 다르다.
예를 들어서 크게 다쳐 신전을 찾아갔는데, 어째서 이렇게 다쳤냐고 물으면?
‘아, 어떤 영웅과 싸우던 도중에 칼침을 맞아서 그렇소.’라고 대답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설령 부상의 원인을 속여 넘긴다고 해도, 결국 신전에 추적의 실마리를 남기게 되니 아무리 큰 부상을 입어도, 악의 조직에 속한 악당들은 신전에 가기 힘든 것이다.
그 때문에 규모가 있는 악의 조직이라면, 실력 좋은 약술사를 한두 명씩은 보유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 악당의 상식이다.
그러나 모든 악당이 혜택을 받을 수는 없는 법. 어느 정도 직위가 있는 고위 간부라면 몰라도 나와 같은 말단 간부나 조직원은 조직의 치료 혜택을 받기 힘들다. 아니, 오히려 치료를 극구 사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조직이 치료 혜택을 베푼다면 십중팔구는 인체 실험을 할 속셈이니까.
그렇다고 외부의 약술사를 찾아갈 수도 없으니, 적어도 무병장수를 꿈꾸는 악당이라면 스스로의 부상과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의 치료술은 그야말로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정체를 숨기려고 종종 약술사로 위장했던 만큼, 약술사로 도시에 잠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계획에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원래 약술사의 주요 수입원은 두 가지. 돈 많은 부자에게 보약을 팔아먹거나, 모험가나 여행자들에게 외상 약이나 해독제 등등을 판매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보약을 만들 약재가 없었으니까.
젠장할! 그놈의 멧돼지가 약초밭만 망가트리지 않았어도…!
엉망이 된 약초밭에서 멧돼지 털을 발견하고, 내가 그 멧돼지에게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그건 오직 악마들만이 알 것이다.
온천히 흐르는 수맥의 열기를 이용해 정성 들여 키워 놓은 약초밭이 망가진 탓에…, 값비싼 약초들은 거의 다 날아갔다. 남은 거라고는 그저 싸구려 약초들뿐.
덕분에 약술사로 위장하는 겸사겸사, 도피 자금까지 벌어 보려던 내 계획은 엉망이 돼 버렸다.
돈도 없으니 제대로 된 집을 구하지도 못해, 다 무너져 가던 빈집 하나를 겨우 찾아서 직접 손을 놀려 고생고생해서 고쳐 놓고, 빈민들을 상대로 약장사나 하는 꼴이라니.
위치가 빈민가인 탓에 손도 가난한 빈민들뿐 돈도 없으면서 아픈 데는 뭐 그렇게 많은지.
가난한 환자들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반면, 온종일 일해도 손에 남는 것은 고작 하루 세끼 챙겨 먹기 힘든 푼돈뿐이니. 정말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끄응.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데….’
끼이익.
내가 심각한 고민에 잠겨 있을 무렵,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녀석과 계집애가 집 안에 걸음을 들여놓았다.
“다녀왔어…요.”
“다녀왔습니다.”
그 인사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 식사를 준비하는 녀석과 계집애를 쏘아본다.
금발을 질끈 묶어 내리고 남장을 한 덕분에, 훤칠한 미청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녀석. 커다란 모자로 은발 머리를 가리고, 바지를 입혀서 예쁘장한 사내아이처럼 보이는 계집애. 젠장. 이것들을 달고 있으니 숨을 데가 없지.
나라면 어디든 어렵지 않게 숨어들 수 있다.
문제는 이것들의 외모였다. 변장에 특징적인 외모란 독약과도 같은 것.
그런데 이것들은 머리카락부터 번쩍번쩍해서 길에서 지나가기만 해도 눈에 확 띈다. 게다가 이렇게 예쁘장하기까지 하니, 이 정도라면 변장에는 ‘미친 용의 눈물’ 수준의 극독이라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복면을 씌워서 다닐 수도 없으니, 기껏해야 남장을 시키는 것 정도가 한계였고, 덕분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가지도 못하고, 빈민가에 숨어서 푼돈이나 벌게 된 것이다. 즉, 바로 이것들이야말로 개고생의 원흉이란 뜻.
나로서는 피눈물이 흐를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드러낼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애써 노기를 억누르던 도중, 문뜩 심하게 향기로운 냄새를 깨닫고, 슬쩍 옆을 돌아본 나는 기겁했다.
보글보글.
저, 저 계집애가 아까운 수프를 앞에 두고 뭐 하는 짓거리야?!
고개를 숙인 채 뭔가 넋을 놓고 있는 계집애와 펄펄 끓다 못해 졸아붙은 수프 냄비를 보고 나는 목까지 나온 고함을 억눌렀다.
지, 진정하자. 진정해.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차분하게 가는 거다.
“수프가 끓고 있다.”
“… 아.”
내 말을 듣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허겁지겁 냄비를 꺼내는 계집애를 나는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렇잖아도 돈이 부족해 죽을 지경이거늘, 아까운 식사를 그대로 증발시켜 버리려 하다니, 할 수만 있다면 단단히 혼쭐을 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계집애를 지켜보는 녀석의 시선에 나는 끓는 속을 억지로 참아 눌러야만 했다.
하여 잠시 후, 약간 졸아붙은 수프를 먹으며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숙련된 악당은 돌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어야 하는 법.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이 늙고 지친 몸으로 식사마저 허하니, 그야말로 기력이 달려서 죽을 지경이었다.
보약을 만들면 나부터 지어 먹어야 할 정도니….
크윽, 내 반드시 이 상황을 탈피하고야 말겠다!
눈물을 삼키며 마음의 결의를 마치고, 나는 이 상황을 해결할 비책을 고심해 보았다.
녀석과 계집애를 노예로 파는 것은 자살행위. 하지만 어딘가에서 여급으로 일하게 하는 것 정도라면, 돈이 술술 들어올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정체를 숨기느냐 하는 건데….
“여보시오! 여보시오! 아무도 안 계시오?!”
탕탕탕!
이런 젠장, 어떤 놈이 문을 두드리고 난리야? 그러잖아도 벌어진 틈새로 찬 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문짝을 아예 때려 부술 듯이 두드려 대다니!
나는 들끓는 심정으로 문밖을 노려봤다. 그리고 마침 문가에 서 있던 녀석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런 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녀석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절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찾아오는 환자는 대개 골치 아프다. 숨 꼴깍 넘어가는 걸 살려 내라고 달라붙어서는, 만에 하나라도 못 살려 냈다가는, 그야말로 원망이란 원망은 모조리 쏟아 내기 마련이다.
고생해서 비싼 약을 들여서 살려 낸다고 해도, 치료가 끝나면 언제 그렇게 간절했냐는 듯 ‘돈이 없으니 마음만 갚겠습니다.’라고 하니,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나 몰라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런 내 단호한 결의를 느낀 듯, 녀석은 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늘 진료는 이미 끝났습니다. 내일 다시 오십시오.”
“미, 미안하지만 급한 환자가 있어서 그렇소.”
급하기는 다 급하지. 내가 급하지 않은 바에야 알 바 아니고….
“죄송합니다만, 진료 시간에 예외는 없습니다.”
“제발 부탁이오. 지금 우리 주인어른께서 생사의 고비를 헤매고 계시니, 죽은 사람 살리는 셈 치고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오!”
“…….”
응? 주인어른?
늙은 아버지나 어린 딸자식 등등의 얘기라면, 하품과 함께 흘려 버리려던 나는 귀를 쫑긋했다.
주인어른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해서, 상대가 꼭 돈이 많으리라는 법은 없다. 망한 가문의 마지막 충성스러운 하인이라든가, 뭐 그런 경우가 널리고 널린 게 세상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곳의 빈민들보다야 어느 정도 돈벌이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묽은 수프로 하루 세끼를 때우면, 영양실조로 먼저 쓰러져 죽을 지경이라는 확신이, 나의 결심을 도와주었다. 재빨리 계산을 끝낸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라.”
“…알겠습니다.”
뭘 보냐?
빨리 문이나 열지 않고,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듯, 흠칫 뒤를 돌아본 녀석을 시선으로 재촉하며, 나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했다.
그래, 정 안 되면 수면제라도 먹여서 재우자. 그리고 성력이랑 각성제 따위를 적절히 사용해, 일시적으로만 살짝 회복시키면 되는 거다. 그리고 후유증이 나타나기 전에, 치료비만 받아 튀는 거지. 크흐흐.
끼이익.
“들어오시지요.”
“…아, 예.”
나는 화덕을 보는 척 시선을 고정한 채, 거울을 통해 중년인을 매섭게 관찰했다. 특별히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빈티가 보이지도 않는 모습.
하인들이 주로 입는 수수해 보이는 옷. 그 조심스러운 태도 등을 통해 여러 가지를 추측하고 계산해 보기를 잠시. 좋아, 적어도 몇 개월 동안은 밥값 걱정할 필요 없겠군.
“그럼 얘기를 들어 보도록 하지.”
계산을 끝낸 나는 목에 힘을 줘서 입을 열었다.
‘황동의 왕좌’을 사용해 기세를 잡고, ‘악마의 황금률’로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내 필살 연계기 중 하나.
어지간한 영웅을 상대로도 먹힐 내 회심의 기술에 걸린 하인은, 그야말로 홀린 듯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일이 시작된 건 대략 며칠쯤 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