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98)
97악당의 인연
흐으음….
하인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신음을 삼켰다. 성력이 통하지 않는 질병이라면 여럿이 있다.
하지만 하인이 말한 증상에 부합되는 데다가, 특수한 약으로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라면 짐작 가는 것은 오직 단 한 가지뿐이었다.
‘잠자는 신의 향기’ …인가.
약과 병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던 악의 조직, ‘커스 블러드’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력이 안 통하는 무수한 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연구 도중 벌어진 실수로 그들은 자신이 만든 전염병에 몰살했고, 이후 대륙에서 그런 독약은 황금보다도 귀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커스 블러드’가 만든 독약은 나름 남아 있었지만, 해독약은 정말 씨가 마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비싼 독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필살의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뜻.
이런 흉흉한 음모에 잘못 휘말렸다가는, 치료사라도 목이 날아가는 건 금방이다. 그러니 원래는 여기서 물러나는 게 상책.
하지만 그냥 물러나기에는 좀 아깝다. 그만한 독이 사용됐다는 것은 상대가 꽤 돈이 넉넉한 가문이라는 뜻.
즉, 한탕만 제대로 하면 앞으로 생활비 가지고 쩔쩔맬 이유 따위는 없게 되는 것이다.
한탕 크게 벌어서 제대로 먹고 사느냐? 아니면 그냥 이대로 쫄쫄 굶고 사느냐?
고민 끝에 결심을 굳힌 나는 입을 열었다.
“세렌, 왕진 나갈 준비를 해라.”
** *
“아린, 집을 지키고 있어라.”
“아… 응.”
녀석이 왕진 가방을 챙기는 가운데, 계집애에게서 외투를 받아 걸치며, 나는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리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보통 때라면 이런 일에는 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녀석과 계집애가 있다.
특히 녀석은 천검자로 이름 높은 영웅. 녀석을 내세우면 횡액을 피할 수 있을뿐더러 분명 사례금도 톡톡히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족인 계집애는 여러모로 불안한 데다, 한 명쯤은 집을 지킬 필요도 있었던 만큼, 집에 두고 가는 편이 나았다.
“안내하시오.”
“예?”
“환자를 치료하려면 일단 만나 봐야 하지 않겠소.”
“아, 그렇다면…!!”
그렇다면은 뭐가 그렇다면이냐, 빨리 안내나 해라. 나사 하나가 풀린 듯한 모습에 일부러 짜증을 담아 냉혹한 분위기를 뿌리자, 하인은 허둥거리다가 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 제가 당장 마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 그냥 걸어서 가도록 하겠소.”
그렇잖아도 시선을 피해야 할 상황이다. 쓸데없이 마차로 주목을 끌 수는 없는 노릇, 미적거리는 하인을 재촉하기 위해 나는 앞장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하인의 길을 따라 걸어가길 한참.
빈민가를 벗어나 수도 중앙에 가까운 도심에서, 나는 큼지막한 저택을 보며 내심 만족했다.
좋아, 돈은 제법 있겠군.
과연 얼마나 뜯어낼 수 있을지를 계산하며, 나는 하인의 안내를 받아 저택에 들어섰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집사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알겠소.”
응접실에서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하인에게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차피 한낱 하인이 곧장 가주에게 안내해 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으니까. 일단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나는 눈을 감고 침묵을 지켰다. 이런 곳에서 섣불리 입을 여는 것은 위험한 일, 지금은 인내의 미덕이 필요할 때였다.
벌컥!
흠, 이제야 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눈을 뜨려던 순간, 나는 느닷없이 터져 나온 고함에,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당신들이 주인어른을 치료할 수 있다는 약술사인가!?”
우우웅―!
크헥, 내 귀!!
천둥소리라고 할 만한 쩌렁쩌렁한 고함에 일그러지려는 얼굴로 애써 무표정을 지키며, 나는 문 앞에서 벌건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는 늙은 집사를 보고, 내심 혀를 찼다.
젠장. 곱게 넘어가긴 틀렸군.
나 또한 예전에 집사 생활을 해 봤던 만큼, 보기만 해도 저 집사의 스타일을 알 수 있었다. 십중팔구 무척 깐깐하고도 다혈질인 성격.
이대로 집사의 말을 받아 준다면, 신분 확인에서 능력 검증까지 온갖 절차를 다 거치고 나서야 가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체를 숨기고 있는 데다가 약술사로서 삼류에 불과한 내게 있어 그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치료할 수 있다는 소리는 한 적 없소.”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나는 일부러 싸늘한 음성을 꾸며 냈다.
여기서 기세에 밀렸다가는 이래저래 귀찮을뿐더러 사례금 또한 줄어들게 될 터.
일단 기선 제압을 할 필요가 있었다. 집사 영감은 내 말에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치료약을 만들 수 있는 건 나고, 지금 목숨이 급한 것은 저쪽이다.
‘황동의 왕좌’와 ‘악마의 황금률’만 잘 쓰면, 저 늙은이가 아무리 고함을 질러 대도, 기선 제압을 하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감히 트레이브 가문을 상대로 장난을 칠 셈인가!!”
헹, 마음껏 소리를 질러 봐라, 내가 꿈쩍이나 하는지. 집사 영감이 버럭 고함을 지르든 말든 싸늘한 얼굴을 가장해 내심 조소를 흘리던 중, 나는 뭔가 턱 하니 걸리는 것을 느꼈다.
뭐지? 이 느낌은? 뭔가 잘못된 듯한 불길함을 되새기기 잠시, 머리를 한계까지 굴린 끝에야 그 불길함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그 순간 경직돼 버렸다.
잠깐, 방금 트레이브 가문이라고 했나?
내가 치료해야 할 사람이 트레이브 가문의 가주라고?
…이런 젠장!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단지 환자를 보기 전까지는 치료할 수 있는 확답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에잇! 그게 그 소리 아닌가! 쓸데없이 변명만 하다가 또 무슨 만병통치약인가, 뭔가나 팔아먹고 갈 생각이라면 당장 돌아가게!”
녀석의 말도, 집사 영감의 우렁찬 고함도, 내 귀에는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좀 전에야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이 심장을 탭댄스를 추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으윽! 내가 이런 실수를…!
하인에게 가문을 묻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래, 호랑이 굴에 들어왔지만 늦지는 않았다.
숙련된 악당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탈출로를 마련할 수 있는 법!
나는 순식간에 계산을 끝냈다.
그리고 유일한 탈출로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무례하군.”
“……!”
더 냉혹하게, 더 무정하게, 더 위압적으로! 나는 단순히 기세를 잡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건방을 팍팍 떨었고, 집사 영감은 내가 예상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뭐, 뭣이 어째?!!!”
크헥, 제발 소리 좀 그만 질러라!
무슨 보약을 먹었기에 이렇게 목청이 좋아?
화산 같은 고함에 머리가 울려올 지경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머금으며,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트레이브 가문에서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할 줄은 몰랐소.”
“이, 이…!”
흐흐흐. 어떠냐? 열받지?
자아, 어서 쫓아내라. 쫓아내!
분노한 듯 입을 뻐끔거리는 집사 영감을 보며, 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이대로 집사 영감에게 쫓겨나면 된다. 그러면 그 늙은이와 대면할 필요도, 그 늙은이를 치료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 상황까지 온 이상, 그 누구도 이 집사 영감을 말릴 수 없을 터! 그렇게 내 계획은 완벽하게 이뤄지는 듯싶었다. 단지, 하나의 변수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진정하시지요. 제일러 집사님.”
캑, 이 녀석은 또 왜 끼어드는 거야?!
갑자기 참견한 녀석을 슬쩍 째려본 순간, 나는 문득 좀 전에 스쳐 지나갔던 것과 같은….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욱 큰 불길함을 느꼈다.
“지금 진정하게 됐…응? 자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나?”
의아한 얼굴로 녀석을 보는 집사 영감의 모습에, 나는 그 불길함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이 집사 영감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나와 계속 붙어 있던 녀석이.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나의 추측은 녀석이 모자를 벗으며, 집사 영감의 눈이 크게 뜨여지는 순간, 확신이 되어 나를 강타했다.
“설마, 라바일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니, 아가씨께서 어떻게…?”
…빌어먹을.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반신반의하며 녀석을 보는 집사의 모습에 나는 눈앞에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녀석이 트레이브 가문과 친분이 있을 줄이야!
물론 그 늙은이나 트레이브 가문의 특성상, 가능성이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내게 사형선고와 같았다. 녀석이 그 늙은이와 알고 있는 사이라면,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건 절대 불가능하니까.
크흑. 왜 하필 이 녀석을 데리고 와 가지고는…. 내가 계집애 대신 녀석을 데려온 것을 처절하게 후회하는 사이, 녀석은 집사 영감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당장 도련님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죄송하지만 제가 찾아온 건 비밀에 부쳐 주셨으면 합니다.”
“예? 아니, 어찌 그런 말씀을…?”
“그보다 이분과 함께 가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이분이라 하시면?”
언제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냐는 듯, 정중하게 물어 오는 집사 영감을 보니, 몹시나 기분이 우울해진다.
명색이 트레이브 가문의 집사라는 작자가 새파랗게 어린 녀석의 위세에 밀려서 태도를 싹 바꿔 버리다니! 물론 녀석과 집사 영감은 아는 사이고, 상대가 녀석 같은 대영웅이면 나라도 넙죽 엎드려서 빌었을 테지만,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허탈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주님의 치료를 위해 특별히 찾아주신 분입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무례했습니다.”
이왕 무례했던 거 좀만 더 무례하지 그러나. 영감. 응?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집사 영감에 대한 짜증을 꾹 억누르며, 나는 애써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소. 그보다 환자를 우선 보고 싶소.”
“예, 알겠습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끄으응.
녀석이 계획을 엉망으로 박살 내 버린 탓에 마음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키면서도, 나는 집사 영감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 악당의 계획은 아무리 잘 세워 놔도 영웅의 가벼운 행동 하나에 아작 나는 것이 진리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고작 푼돈 좀 벌어 보겠다는, 그리고 이 한목숨 건져 보겠다는 목표로 세운 계획마저 모조리 박살 내 버리다니….
크흐흑.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기분으로 나는 트레이브 가주의 침실에 들어섰다. 넓지만 조금 수수하고 황량한 침실, 그 침상에 죽은 듯 누워 있는 늙은이를 보고, 나는 내심 혀를 차며 녀석을 돌아봤다.
“나가서 기다리도록 해라. 그리고 아무도 주변에 접근하게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녀석이 의외로 선선히 밖으로 나가자, 나는 의자에 앉아 늙은이의 손목을 짚어 보았다. 뛰는 듯 마는 듯 약하기 그지없는 맥, 그런데도 약간 불그스름하게만 보이는 얼굴, 끊어질 듯 말 듯 가늘게 이어지는 호흡, 초점은 안 맞는데 이상하게 선명한 동공.
후우. 역시 이거였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후, 나는 미리 준비해 온 약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신중을 기울여 배합했다.
‘잠자는 신의 향기’의 해독제는 총 12종의 약재를 기본으로 만들어지는 것.
무엇보다 적절한 배합과 조절이 중요한 만큼, 정확한 조합법을 모르면 결코 만들 수 없기에, 오직 ‘커스 블러드’의 비전, ‘생명의 독수’를 아는 이만이 만들 수 있는 비약이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애쓴 끝에, 나는 가까스로 완성한 약을 늙은이에게 먹이고, 잠시 상태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으음.”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눈을 뜬 늙은이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뿐, 좀 전까지만 해도 의식불명이던 환자답지 않게, 담담한 태도로 주변을 둘러본 늙은이는, 이내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카인 R. 실드런?”
노쇠하지만 더없이 선명하고도 확실한 목소리, 묻기보다 확인하는 듯한 의미가 담긴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차피 이 정도의 변장으로 이 늙은이를 속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사실 나는 이 늙은이를 알고 있었다.
헤일 E. 트레이브.
검에 있어 정점에 이른 검사 중 한 명이자, ‘움직이는 요새’라 불리는 늙은이를 향해 나는 나지막이 재회의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오. 성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