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 밤의 귀족(2)
사라진 뱀파이어의 모습.
완전히 박살 난 보리스의 머리가 보인다.
이래서야 회생의 여지는 없다고 봐야겠지.
절로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다.
“에휴.”
그런데 내 착각인가?
어째 사건 사고가 끊이지를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데.
“우선 이것부터 받아. 지그문트.”
뭐든 간에 우선은 약속부터다.
나는 그대로 지그문트에게 검을 내밀었다.
뱀파이어도 사라졌으니 한동안은 검을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해서다.
“..아니, 일단은 자네가 쓰도록 하게.”
“..뭐라고?”
그런데 정작 지그문트가 검을 받으려 하질 않는다.
분명 신검이 있어야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물론, 주는 건 아니야. 나도 집에 가긴 해야 하니까. 그냥 다 쓰고 돌려주기만 하게.”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면서?”
내 물음에 지그문트는 웃었다.
“드워프의 삶은 길지. 고작 몇 년 정도 늦춰진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네. 그보다는 다시 한번 제자의 솜씨가 보고 싶군. 혹시 다른 쪽 검을 내게 줄 수 있겠나?”
“..상태가 썩 좋지는 않은데.”
“괜찮네. 감안하고 볼 테니.”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나는 그에게 검을 내밀었다.
“확실히 상태가 좋지는 않군.”
지그문트가 검을 받아들며 검날을 살핀다.
그런데 용사들과의 험난했던 전투 때문일까.
하르트의 마지막 검은 이미 절반쯤 녹아내려 있었다.
여기저기 이가 빠져 있었고 날이 진작부터 상해버렸다.
도저히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상태.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런 칼날을 보면서도 지그문트는 웃었다.
“그래도 대단해. 제자는 이미 나를 넘어섰군.”
“하르트에게 갈 생각인가?”
“그래야지. 힘을 보태야 할 테니까. 자네의 말대로라면, 머지않아 이 세계에 커다란 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거 아닌가.”
“무기를 만들겠다는 건가?”
“그게 대장장이의 역할이니까.”
지그문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니 내게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를 알려주게. 내가 그곳에 무기를 공급하지.”
“..인간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 연금술사들에게 그렇게 당해놓고도?”
“인간은 믿지 않네. 하지만 데이브 클락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군.
나는 하르트의 위치와 함께 팔레아스 령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물론, 이자벨을 비롯한 크루세이더들에 대한 정보도 잊지 않았다.
“그렇군. 그런데 그 십검이라는 자들은 어떤가? 과거의 용사들이 같은 편이 되어준다면 든든할 거 같은데.”
“그럼 좋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십검 그놈들은 아직 과거에 매여 있거든. 아무래도 조금 더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
“과거에 얽매여 있다라.. 마치 자네는 다르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자네 말에 의하면 아직 그들과 만나본 적은 없는 거 아닌가?”
“..아마 확실할걸?”
글쎄. 지그문트의 말처럼 협력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세계의 멸망보다 마왕을 죽이는 걸 우선시하는 놈들이 과연 나와 손을 잡으려 할까?
“뭐,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내 회의적인 태도에 지그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겠다는 듯한 태도다.
그런데 왜 그 모습에 괜히 가슴이 찔리는 것 같은 걸까.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너무 오랫동안 망치를 놓고 있었던 것 같아.”
“..고작 삼십 분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제자를 만나러 가는 시간도 생각해야지.”
“하여간. 장인 놈들이란.”
멋쩍게 웃으며 뒤돌아서는 지그문트.
드모어는 그런 지그문트의 뒤를 쫓아 걸어갔다.
“아, 같이 가요. 스승님!”
그렇게 두 명의 대장장이가 떠나간다.
그 뒤를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라크네, 란이었다.
“따라가려고?”
“그래, 저 두 사람을 지켜야지. 아마 이번 일로 연금술사들의 표적이 되었을 테니까.”
“..고맙다. 솔직히 너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도 마왕과 손을 잡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
“십검과는 손을 잡지 않으려는 건가?”
란이 내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갈등하는 눈동자.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래, 내가 네 적이 될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마왕보다는 연금술사들부터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설마 란이 내 편을 들어줄 줄은 몰랐는데.
나는 지금까지 상정하지 않고 있었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지그문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네.’
잘만 하면 란뿐만 아니라 십검들 역시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지금으로선 꿈만 같은 이야기지만, 가능하기만 하다면 우리 측의 전력은 단숨에 수배로 증가하게 될 거다.
“그보다 할 말이 있어. 데이브 클락.”
“할 말?”
란이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연다.
나는 그녀가 아직 숨기고 있는 것이 있음을 짐작했다.
“아마도 너는 되살아난 용사가 우리가 전부라고 알고 있을 거야.”
“아니라는 건가?”
“그래.”
“..파편들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상대는 너희와 같은 부활한 용사라는 건가?”
란은 내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아는 얼굴이었나?”
“아니,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
그리고 이어지는 부정.
그렇다는 건 란보다 후대의 용사라는 걸까?
예이츠 역시 자신의 시대 이전의 용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만약에 반대라면? 오히려 란보다 아득하게 앞선 시대의 용사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데 나는 왜 이 대답에서 불길함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 순간, 나는 내 안에 깃든 예지가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망막 위로 비치는 무언가의 그림자가 보인다.
아직은 불분명한, 아스라한 환영이다.
“아마 그 사람이 첫 번째였을 거야.”
“너 이전의 실험체였다는 건가?”
“실험체라는 말은 기분이 좀 나쁘지만.. 그래, 맞아. 그 여자가 처음이었을 거야.”
“..여자라고?”
그런데 왜 자꾸만 불안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일까.
나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되물었다.
“그 여자. 어떻게 생겼지?”
“나도 제대로 보진 못했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야겠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당시에는 아직 우리도 온전한 자아를 찾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자아가 없었다고?
없던 자아가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닐 테고.
그 말이 옳다면 란은 어떻게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 변명은 그만두자.
나는 이미 그 정답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여자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건.. 보리스가 그 여자를 조종하는 데 실패한 건가?”
“그래, 맞아. 실패했지. 그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부숴버리고 밖으로 나가버렸거든. 아마도 이천 년 전쯤의 이야기일 거야.”
“..이천 년이라고?”
용사의 부활이 그렇게 일찍부터 이뤄졌다는 건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랜 시간이다.
설마 파라켈수스만이 아니라 보리스 역시도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왔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뱀파이어와의 혼혈이라지만 예상했던 나이와 너무 다르다.
‘가만, 그러면 란과 다른 용사들도 그만큼의 시간을 살아왔다는 건가?’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놓고도 고작 그 정도의 자아만을 각성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는 것 같네. 그 용사가 란과 무명, 웡 레이의 자아를 각성시킨 거야.’
확신과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과거부터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그 여자였군. 지금까지 계속 연금술사들을 공격해 왔던 것이.”
“..뭐라고?”
나는 란의 질문에 답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연금술사들의 세력이 지나치게 작다는 사실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무려 삼천 년의 세월 동안 암약했다기엔 너무나도 초라했던 세력.
그리고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던 자기 은폐까지.
“란, 용사 중에 너희 이후의 성공작이 있었나?”
“..네 말대로. 보리스는 우리 세 사람 이외의 용사들을 부활시키지 못했어.”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불완전했던 예지가 점점 분명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여자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게 있나? 사소한 거라도 좋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하지만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지.”
란의 시선이 내 검을 향해 미끄러진다.
“그 여자는 분명 너와 같은 검술을 쓰고 있었어.”
“여명검..”
란은 알고 있을까?
그 말의 의미가 나에게 얼마나 무겁게 다가오는지.
‘이렇게 특징적인 검을 못 알아보긴 힘들겠지. 설령 이천 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말이야.’
아마 란이 뭔가를 착각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다.
그녀는 분명, 여명검을 본 거겠지.
그리고 내가 아는 용사 중에 여명검을 쓰는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클라리스 아르나드. 내가 유일하게 인정했던 최초의 용사.
그리고 나의 손으로 그 목숨을 빼앗았던..
사상 최초로 마왕 벨제뷔트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최강의 용사.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네.”
“그럴 수밖에.”
복잡한 마음을 숨기기가 힘들다.
희석되어 버린 증오와 아득한 기억.
그리고 그 위로 덧씌워지는 지난 꿈의 환영까지.
삼천 년이라는 시간은 내 마음에 변화를 주기에 충분했으니까.
* * *
거대한 수조에는 정체 모를 녹색의 액체가 들어차 있다.
무수히 조각난 기포들이 꿈틀거린다.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무언가.
정체불명의 남자가 서서히 몸을 바로 세운다.
“돌아왔군.”
남자를 맞이하는 것은 연금술사들의 수장, 파라켈수스다.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파라켈수스의 주먹이 이내 수조를 내리친다.
쩌적!
그와 동시에 완벽하게 박살이 나버리는 수조.
그 안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은 화상투성이의 남자, 보리스다.
“푸학!”
“보리스.”
파라켈수스의 싸늘한 눈빛이 그에게 닿는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반응이다.
보리스는 분명 그의 오른팔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남자였을 텐데.
하긴, 이번에는 보리스의 실수가 컸다.
귀중한 용사들을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 상대에게 정보까지 넘겨주고 말았으니까.
그나마 다행히 그의 영혼을 수거한 덕에 많은 정보를 빼앗기진 않았지만 그게 전부다.
때마침 등장한 뱀파이어가 없었다면 그 이상의 정보를 빼앗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야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너의 해명이 듣고 싶구나. 이 실수를 어떻게 만회할 작정이냐.”
“주, 주인님. 그자는 위험합니다.”
“..뭐라고?”
그런데 보리스의 반응이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언제나 광기에 물들어 있던 과거와는 달리, 마치 공포에 질린 것만 같은 얼굴.
지난 수천 년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 아닌가.
“그자 말입니다! 데이브! 데이브 클락!”
심지어 보통 겁에 질린 게 아닌 것 같은 눈치다.
오죽했으면 파라켈수스의 당혹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굴겠는가.
“..그 남자가 어쨌다는 거냐? 고작해야 마왕의 화신에 불과한 것을.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흔한 걸림돌 중 하나일 뿐이지 않으냐.”
“아뇨, 틀렸습니다!”
“..보리스?”
대체 그의 충성스러운 종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평소라면 그의 말에 반박한다는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주인님!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아직 마르지 않은 보리스의 손이 파라켈수스의 바짓단을 붙잡는다.
평소 광기에 젖어 있던 그 눈동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설명해라.’
파라켈수스는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리스를 일으켜 세운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보리스의 몸이 그제야 안심한 듯 멎는다.
“그 남자는..”
그런데 하필 지금 실험실에 경종이 울리기 시작하는 것일까.
파라켈수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야 할 것 같구나.”
“그 남자는.. 분명..”
멍한 얼굴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보리스.
파라켈수스는 그런 보리스를 뒤로한 채 문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