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1
◈ 공개 비무
검에 불어닥치는 바람까지 감지하는 신검합일. 지금도 그때의 감각이 선명하다.
눈으로는 전혀 보지 못했던 청명의 기예를 검으로 읽을 수 있었다.
내공력. 진기란 신비로운 것이다.
굳이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지 않아도 상승의 영역을 보여준다.
‘진기의 본질은 대자연이야. 그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걸로 족하지 않을까.’
입황검 손잡이의 시린 감촉이 따스함으로 다가온다.
마광결의 구결을 따라 전신에서 솟아오른 진기가 몸 밖으로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약하디 약한 산들바람 같은 감각.
무너진 벽돌 옆에 우뚝 서 있는 또다른 탑을 미풍과 함께 조망했다.
벽돌탑의 이음매들을 일견하는 것만으로도 뚫린 듯 반투명한 심상이 세워졌다.
어느 정도의 힘과 각도로 어디를 때려야 하는지.
힘과 환경, 대상이 삼합(三合)을 그려 하나의 궤적을 창출했다. 일컬어 투로(鬪路)라 한다.
호흡이 가라앉고.
입황검을 검집 채로 쥔 오른손이 들려올라갔다.
육신의 힘을 북돋고자 하는 내공은 한 줌도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저 진기가 이끄는 일식(一式)을 따라 느긋하게 휘둘렀다.
순간 의식으로부터 세상이 색깔을 잃었다.
대흉근에서 시작된 근육의 뒤틀림이 삼각근과 상완근을 거치고 총지굴근(總指屈筋)에 이르러 힘의 길을 검처럼 벼리우고, 그것은 이내 한줄기 검로로 수렴하여 탑으로 나아갔다.
타격 직전에 온몸의 관절은 순간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최적의 순간과 최상의 타격.
턱! 우르르-
무너진 벽돌들의 모습은 마진이 부순 옆자리의 것과 비슷했다.
마광결을 얻었다. 실전에서 쓸 수 있도록 숙련해 나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정연신은 재미로 들떠오르는 마음을 애써 갈무리했다.
검집을 허리춤에 꽂아넣으며 마진을 힐끗 보는데, 청명과 비무했을 때보다도 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실전을 많이 경험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찰나에 생사가 오갈 때도 마광결을 풀어내자면, 역시 보통의 수련으로는 안 되겠습니다.”
“······.”
“몸에 새겨야 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잘 배웠습니다.”
신검단 십칠대 최강을 논한다는 마진.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그놈. 이상해.”
마광익의 고수 한 명이 중얼거렸다.
입황성의 ‘거칠 황(荒)’ 자가 양어깨와 등에 새겨진 청색 옷을 입은 사내였다.
자리의 모두가 같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화려한 주루에서 술을 마시던 열댓 명의 무인들. 바로 알아들은 듯한 얼굴이다.
근래 마광익 내부의 화제를 독차지하고 있는 소년 외에는 달리 없는 것이다.
“저도 그런 말 많이 들었습니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절세 기재였다고? 새삼스럽게.”
“입황시로 들어와서 기재란 말 안 들어본 무인이 입황성에 얼마나 있을까.”
“난 입황성에서 자란 탓에 잘 모르겠군.”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말에 옅은 주향이 깃들어 있다.
입황성의 존재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양양 거리에서도 손꼽히는 주루였다.
즐기는 자리에서 굳이 내공을 돌려 취기를 배출하는 이는 없었다.
금욕하여 수련에만 몰두하는 이들은 애초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마광익 고수가 말했다.
“그래. 잘 모르고 범상한 사람들이 천재, 기재들에게 주로 하는 말이지. ‘이상한 놈이다’란 이야기.”
“맞아. 여기 와서 평범해진 거지. 지나고 보니 좋지는 않다고.”
맞은편에서 붉어진 얼굴로 킬킬대며 입에 잔을 털어낸 이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한데 우리한테는 그놈이 이상하다, 이 말이지?”
고수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대주가 그런 얼굴 하는 거 본 사람 있나?”
“벌써 마광결을 능란하게 쓴다던데.”
“검 휘두르는 거 보면 몰라? 완전히 달라져서 태가 잡혔다. 청명이랑 한바탕 할 때는 부모 없이 자란 새끼 맹수 같았는데.”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더라고.”
자리에 없는 소년을 안주 삼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그나마 앳된 얼굴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저는 섬예 그 친구의 성정이 마음에 듭니다. 교만하지 않아요. 그 자질에.”
“가끔은 황망할 정도로 맹랑하던데. 어차피 진짜 성품은 큰 임무 한 번 나갔다 오면 바로 알게 되지.”
“어찌됐든 그 정도 자질이면 성주께서도 눈여겨 보시지 않았을까?”
“마지막 입황시에서 성주를 뵈었을 텐데, 그분의 눈이라면 단번에 꿰뚫었겠지. 어떤 안배가 있을지도 몰라.”
“별 문제가 없다면 장차 세인들이 입황성을 논할 때 먼저 꼽을 만한 고수가 될 거야. 금방 백색에서 청색으로 올라오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지. 살아남는다면.”
몇몇 고수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저놈들 하는 말이 우습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마광익 무인 한 명이 한쪽 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옆에 있던 여인이 기세를 피워올리며 씨익 웃었다.
“배가 아픈 거 아니겠나. 자기네 대주에게 섬예든 백기린이든 하나는 꼭 데려와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는데, 결국 한 명도 못 건졌으니.”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졌다.
동시에.
콰앙!
옆쪽 벽면이 박살났다.
진기가 담겨 폭발하듯 사방으로 튀는 파편들을 저마다 젓가락이나 술잔으로 튕겨내는 마광익 고수들.
피식피식 웃는 게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듯, 느긋해 보이는 손짓에 저마다 고절한 무학의 이치가 담겨 있다.
“마광익 고수들께서 즐기시는데 미안하게 됐군.”
마찬가지로 입황성 청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었다.
사내 한 명이 나서서 이야기하는데, 말과는 달리 전신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있는 대로 진기를 끌어올린 것이다.
“거 알면 조용히 나가는 게 어떤가. 금방 흥취가 오르던 참이었거든. 우리 막내 자질이 대단해서.”
이미 기세를 내뿜으며 존재감을 발하고 있던 여인이 빙글거리며 말했다.
선명한 이목구비와 함께 차가운 눈매가 웃음을 만들고 있다.
누가 봐도 약을 올리는 얼굴. 원래 싸우지 않으려던 이도 칼을 뽑게 만들 법한 도발이었다.
“일련검매(日蓮劍魅). 해보자는 건가?”
“너희 창천대가 먼저 그러자는 줄 알았는데. 자질이 좀 있어봤자 마광익에서는 한계가 뻔하다? 이거야 말로 싸우자는 거 아닌가? 옆에서 우리가 듣는 걸 알고도 재수없는 악담이나 지껄인 것들이.”
말이 끝으로 갈수록 이를 짓씹는 듯한 어조가 강해졌다.
어절이 지날수록 기세도 더해지고 있었다.
이내 자기 화를 못 참고 벌떡 일어선 여인이 창천대 무인들을 노려보았다.
“검 뽑아봐. 잘난 창천대 청천검법(晴天劍法) 십팔초나 한 번 보자.”
“일련검매 백미려(白薇麗)! 언행을 삼가라!”
“네가 뭐라고 명령을 듣지? 열 초식 내에 박살을 내줄 테니 들어와!”
양양제일주루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 * *
“선배들이 창천대 무인들과 한바탕했다는 이야기 들었소?!”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며 방으로 들어온 헌원창이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정연신이 입을 열었다.
“입황성은 나름대로 율법이 있는 곳 아니었습니까? 본성 무인들끼리 연무장 외에서 무공으로 다투는 거, 징계 사유인 걸로 아는데.”
“성의 율법서는 또 언제 챙겨봤소이까? 하여간 맞는 것 같군. 외출 금지령이 떨어졌다고 다들 죽상이시던데.”
“뭔 이유로 싸웠답니까?”
“그게 글쎄, 주루에서 술자리를 가지던 중 창천대 무인이 시비를 걸었다고 하오. 정 공자를 두고 마광익에서는 개화하지 못할 재능이라 했다고.”
“······그런 걸로 칼부림을 한단 말입니까.”
“공자께서는 아직 무림을 잘 모르시는군. 그게 이 강호의 본질이오!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가 시퍼런 검으로 되돌아오고, 그런 걸 막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명성을 떨치고 강호를 종횡하는 거요. 오히려 좋아할 일이지 않소? 입황성 선배들께서 신입을 위해 화를 내주셨다니! 나였다면 몸 둘 바를 몰랐을 텐데!”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입황신협.
‘그냥 마광익을 욕해서 화낸 거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어이가 없어진 정연신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거 기회인데?’
세상의 모든 명족들이 숭배하는 천하목의 과실을 취하려면 얼마나 큰 공을 세워야 할 것인가.
그 과정에 동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리 없다.
강호인들의 신뢰란 목숨 빚을 주고받는 게 최고라지만, 할 수 있는 한 미리 호감을 쌓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타산적인 신뢰가 낯부끄럽고 웃기긴 한데.’
일단 살고 봐야 할 일이었다.
입황성주에게 크게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그는 진실로 요절하고 싶지 않았다.
천하목의 열매는 반드시 먹어야 했다.
“듣고 보니 헌원 형의 말이 맞습니다. 화가 나는군. 나 하나로 선배들이 노하여 검까지 나눠야 했다는 게.”
정연신은 벌떡 일어섰다.
“그렇지! 바로 그거요! 역시 공자는 도리를 아는 협사로군!”
‘협사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박수까지 치는 헌원창 탓에 머쓱해질 뻔했지만, 애써 차분한 분노를 만들며 방을 나섰다.
뒤따라 오는 발걸음에서 정연신을 향한 기대감이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마광익 연무장으로 갔다.
제각각 늘어져 있는 일부 선배들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욱 쳐져 보였다.
외출 금지령이란 것이 생각보다 큰 징계인 듯했다.
정가동공의 운기에 해가 될까 술 한 잔 마셔 보지 못한 정연신으로서는 알기 힘든 심정이었다.
“막내들이네.”
“오늘은 가르침이 없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수련하려고?”
“백색일 때는 안 그래도 돼.”
“아니지. 백색은 더 그래야 한다. 바람직한 태도야.”
선배들이 두 막내를 반겼다. 포권으로 답례한 정연신은 그대로 걸어가 마광익 대주 마진 앞에 섰다.
“막히는 게 있나? 묻도록 해라.”
너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생각해 봐야겠다며 돌아갔던 마진이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그와 같은 극강의 고수가 육신의 피로를 쉽게 느낄 리 없으니, 그때 했던 말처럼 정연신에게 심력을 쏟은 듯 보였다.
‘이걸 보니 정말 진심으로 임하게 될 것 같은데.’
정연신은 생각했다. 곧바로 입을 여는데 마음이 좀 더 편해져 있었다.
“비무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 아무나 골라봐라. 누구든 해 줄 거다.”
이마를 쓸며 대답하는 마진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마광익이 아니라, 창천대와 겨루고 싶습니다.”
순간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그가 왜 창천대를 입에 담았는지 모두가 아는 것이다.
“······어제 일을 들었나본데, 굳이 그런 데에 격분할 필요 없다. 마음을 가라앉혀.”
‘흥분 안 했는데.’
정연신을 내려다보는 마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기특함이 담겨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저 예전부터 흠모해 온 청천검법을 견식하고 싶을 뿐입니다.”
“전혀 진정을 하지 않는구나. 혈기가 넘쳐도 문제인데.”
그러나 뒤편으로 보이는 마광익 선배들의 낯은 전혀 문제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대견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들이 많았다.
구파의 고수들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백전의 무사들이 벌써부터 자랑스럽다는 눈빛을 발경처럼 일으킨다.
의도한 바 이상의 반응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우선 입부터 열었다.
“마광결로 고명한 검법을 대적해 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대주.”
‘마광결의 실전 경험도 쌓고, 상승 검법도 견식하고, 선배들의 호감도 얻고.’
일석삼조라는 생각이었다. 심지어 마지막은 벌써 이룬 듯했다.
“진심이냐? 입황성 신검단이란 울타리에 함께 있어도 마광익은 아니다. 너는 창천대와 같은 무학을 익히지 않았고, 함께 전투에 임한 적도 없지. 적당한 손속으로 봐줄 리가 없다.”
“바라는 바입니다.”
정연신의 짧은 대답. 주변에서 휘파람이 터져나왔다.
“입황성을 대표할 만한 기상이다!”
“장성한 모습을 보고 싶군.”
“적당히 버티기만 해도 다음대 마광익을 맡길 만할 거야.”
그 가운데 마진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황성은 강호 무림의 중심. 무공과 기백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세상이다. 마광익의 명예를 위해 패기를 드높인 열다섯 소년 검사를 좋지 않게 볼 고수는 없었다.
“좋다. 창천대주에게 전하지.”
하루 뒤.
마광익 섬예와 창천대 무사의 비무가 성사됐다. 명목상 교류 대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