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0
◈ 입성 (2)
“그래. 난 바람을 잘 느끼거든.”
사내가 웃었다. 푸른 두건, 더 푸른 눈동자였다.
“열 살 꼬마의 삼재검법에도 검풍이 있지. 검을 어떻게, 무슨 느낌으로 휘두르는지 알 수 있어. 여기 마광익에서는 백미려라는 친구의 검이 재지 넘치는데, 꼭 지도를 받아봐. 아주 감각적이야.”
“해보죠.”
정연신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진기를 돌리자 옷자락이 조그맣게 팔락이기 시작한다.
흥미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던 마광익 무인들의 시선에 이채가 어리는 가운데 전신으로 일어나는 정가동공의 공능.
“청명(淸明)이라고 해. 여기 양양에서 나고 자랐지.”
“신야, 정연신입니다.”
“그래. 그런 곳도 있구나.”
청명이 가볍게 웃었다. 이름처럼 맑은 기도였다. 정연신은 입황성에서 지급받은 검에 손을 가져갔다.
입황검(入荒劍). 본래 쓰던 가문의 철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등품이었는데, 검명 소리가 너무 맑고 커서 옆방의 헌원창이 뛰어들어왔을 정도였다.
‘소문으로는 여기에 키 작은 철족(鐵族)들의 대장간이 있다던데.’
풍문이 사실이라면 기본적으로 지급하는 검의 품질이 이토록 좋은 게 당연하다 할 것이다.
아름다움과 강함으로 유명한 명족들과 달리, 철족은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아도 야장 기술만은 독보적이라고 했다.
“가겠습니다.”
“그래. 네 쾌검이 일절이라던데. 한 번 보자.”
“그럼.”
검파를 쥔 손에서부터 일주일 간 익숙해진 떨림이 올라왔다.
정연신은 청명이 검을 뽑기 전, 그의 두 손에 박인 갑주와 같은 굳은살을 보았다.
지금 소매 사이로 내비치는 단단한 잔근육과 올곧은 자세는 드높은 무력을 방증한다.
언제 설렁거렸냐는 듯 뇌리를 꿰뚫는 듯한 눈빛이 사뭇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신경 쓸 거 없어. 기량을 보여 주는 자리야.’
모두 지웠다. 정연신은 자신의 기감에 청명이 내뱉는 호흡만 남겨 두었다. 들숨, 아주 천천히 내쉬는 날숨.
‘지금.’
왼발로 가야 할 진기가 반대쪽으로 흘러 겹쳐진다. 쿵 소리가 울렸다.
오른발 시극경의 도약 한 번에 청명의 상체가 눈에 박힐 듯 가까워졌다.
딛고 있던 바닥을 부수고 입황검을 뽑았다.
다섯 보 거리가 한 줄기 발검과 함께 베어져 흩어진다.
잔뜩 수축된 근육과 내공력을 폭발시키듯 개방하고 쾌검결의 검격을 이어 쳤다.
태풍 속을 유영하는 듯한 소리가 북을 치듯 귓전을 때리고 하복부가 짜릿해졌다.
검명을 얻은 그는 또 한 번 달라졌다.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쾅!
감당하기 힘든 검력과 부딪쳤다. 옆구리가 비었음을 보고 들어갔는데, 불현듯 시야가 하얗게 흔들렸다.
몸이 날 듯이 튕겨 나가는 와중에 엄청난 충격이 손아귀를 타고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검을 언제 들어올렸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생각보다······’
날아가기 직전에 오른쪽 무릎의 양구(梁丘)와 혈해(血海), 슬양관(膝陽關)에 진기를 집중했다.
무릎 양옆 비복근이 맹수의 근육처럼 꿈틀거린 순간 오른발이 연무장 바닥에 박힌다.
동시에 발꿈치 용천혈에서부터 진기를 폭발시켰다.
콰직! 화아악!
‘할 만해.’
몸이 오른발을 축으로 반 바퀴 돌았다. 오히려 뒤쪽 사각을 잡은 것이다.
몸과 함께 반원을 그리는 입황검의 궤적 끝에 청명의 목 뒤 승모근이 있다.
대기를 휘장마냥 잘라버리는 소리 뒤에 갑자기 청명의 전신이 맥동하듯 꿈틀거렸다.
그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다시 한 번 눈앞이 새하얗게 변색됐다.
청명의 검이 가까워진 것이다.
촤아아악!
‘전사경(纏絲勁), 제대로 회전했어.’
봐서 알아챈 것이 아니다.
손아귀에서 웅웅거리는 검이 공기의 결을 대신 감지해 준다.
바람을 느낀다는 청명의 말에 모처럼 얻은 영감이 이 순간 신검합일의 경지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쩌엉!
징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진기를 담은 경력(勁力)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옷자락 여기저기를 찢어놓는다.
팔이 위쪽으로 크게 튕겨 올랐다.
검을 놓치지 않은 게 스스로 용하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힘의 충돌이었다.
후욱!
그대로 누워버리듯 몸을 뒤쪽으로 떨궜다.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이다.
바닥에 박아놓은 오른발 덕에 시전이 쉬웠다.
코끝으로 새하얀 검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미처 내려가지 못한 머리칼이 잘려나가는 광경이 오싹하게 다가왔다.
정연신은 바닥에 박혀 있던 발을 뽑아올리며 그대로 걷어찼다.
회피를 예상한 헛발질과 함께 공중제비를 돌아 땅으로 내려서는 몸.
그는 곧장 검을 내려 쥐고 투명한 눈길로 청명을 응시했다.
올려 찬 발끝에 뭔가 걸렸다 싶었더니, 두건이 벗겨져 있었다.
‘역시 명족이었군.’
검첨처럼 뾰족한 귀와 금빛 머리칼은 한족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요즘 명족을 자주 본 정연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다음은 시극경을 입황검에······ 응?’
완전히 몰입하고 있던 그는 문득 주변이 침묵으로 가득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서운 상대였던 청명조차 황망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언제부터였는지 장내의 모두가 경악 어린 시선으로 정연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쨌든 청명의 정체는 비밀이 아닌 듯했다.
“······.”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비무를 이어나갈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은 느꼈다.
언제 막 썼냐는 듯이 새 검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은 정연신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저 어땠습니까? 재능을 본다면서요.”
“······.”
“몇 수는 더 봐줬다는 거 압니다. 솔직히 말해 주세요.”
“어······.”
매화검수들과 맞상대했다는 마광익 고수들은 물론, 남궁제일검과 검을 나눴다는 청명조차 말하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그저 정연신을 빤히 응시했다. 잠시 후에야 마진이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너. 몇 살이라고 했나.”
“열다섯인데, 그게 중요합니까? 적은 연배를 봐주지 않으니 지금의 성취만이 중요한 법입니다.”
정연신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자칫 요절하게 생긴 판에 나이를 따져서 뭘 한단 말인가.
그러나 정연신의 뒷말은 아무도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인의 생명이라는 검을 갑자기 내던진 청명부터, 마광익 무인들이 저마다 늘어져서 한마디씩 하기 시작한 것이다.
믿기 어려운 방만함이었다.
“저건 괴이다.”
“아니. 하늘의 실수라고 해야 맞다.”
“용봉지회도 다녀왔는데 저런 건 못 봤어. 날 때부터 감각도(感覺途)를 익혀도 저렇지는 않을진대.”
“우리 도시에서는 내가 절세 기재였거늘.”
“절세는 얼어죽을.”
마진은 그들을 굳이 조용히시키지 않고 헌원창을 향해 손짓했다.
“다음. 헌원창, 산서에서 왔다고.”
“저, 저 말입니까? 지금?”
“자리에 서라. 내가 봐 주마.”
울상을 지은 헌원창의 비무는 마광익 중 누구도 집중해서 보지 않았다.
같은 배분이 된 정연신만이 배워서 가져갈 게 없는지 눈여겨볼 뿐이었다.
* * *
“마광결은 병장기를 가리지 않는 무공이다.”
마침 며칠 전에 임무를 다녀왔다는 마진은 곧바로 가르침에 들어갔다.
광활한 중원 각지로 나가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몇 달은 우습게 넘기는 일이 다반사라, 귀환 이후에는 최소한 한달여 휴식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정연신은 헌원창과 함께 입황성 마광결을 사사하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생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절기를 배우는 셈이었다.
“검도창권장(劍刀槍拳掌), 수각부봉편(手脚斧棒鞭). 그밖의 수많은 기문병기들. 마광결은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제대로 익힌다면 말이야.”
“어찌 그런 게 가능합니까? 그럼 검파들이 구태여 검을 익힐 필요도 없을진대.”
눈두덩이 푸르게 부어 있는 헌원창이 물었다.
마진은 말로 가르칠 때만큼은 천하에서 가장 그릇이 넓은 은사인 양, 모든 질문에 조곤조곤 대답해 주었다.
“결이 달라. 마광결은 몸 쓰는 법이다. 사람의 손과 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모든 고찰이지. 궁(弓)을 제외하고는 근접 백타(白打)에서부터 중장거리 창까지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리고 덧붙였다.
“때문에 얕지. 헌원창. 네 말대로 오롯이 칼 쓰는 법만 궁구한 검파와는 검의 깊이로 비교할 수 없다. 하나 우리는 송문고검(松紋古劍) 하나만 잡고 우화등선을 위해 혼자 검을 돌려대는 무당파 도사들이 아니다.”
‘무당파 태극검(太極劍)을 저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정연신은 언제고 한 번은 견식하고 싶은 검법이라고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우리 입황성의 무(武)는 언제나 격전이다. 단독 임무조차 난전을 전제로 생각해라. 싸움이라는 건 변수의 집합체! 발을 잘못 디뎌 무너진 자세에서도 검을 고집할 텐가? 마광결을 익히면 그 순간 칼을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된다. 선택의 격이 달라 살아남는 경우가 많아.”
마진이 잠시 정연신을 보았다.
청명의 두건을 날렸던 발길질을 생각하는 듯했다.
반대로 정연신은 비무가 끝난 뒤 냅다 검을 집어던졌던 청명을 떠올렸다.
“오······. 과연.”
어느새 감화된 입황신협이 감탄사를 토했다.
정연신의 옆에 정좌하고 있는 그를 힐끗 본 마진의 눈이 묘한 빛을 띠었다.
“하나 마광결은 그만큼 타고난 응용력과 통찰력을 요하는 무공이다.
두 가지가 부족하면 강제로 몸에 새길 만큼 노력해야 하지. 그러나 심려 마라.”
그가 입매 아래의 흉터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걸 대신해 주는 게 나와 마광익의 역할이니까. 입황시를 통과했다는 사실 자체로 자질은 검증되었다. 잘 따라온다면 너희는 다음 임무를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헌원창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 * *
“어으으······.”
다음날 마광익 연무장에 시체와 비슷한 것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몸에 새긴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던 듯, 마진은 마광결의 구결을 알려주고 실전 같은 비무로 숙련된 마광결을 보여주었다. 헌원창의 몸에.
“내 마광결 백타는 정교하지. 네가 움직일 수 있음을 안다. 널브러지지 않은 것만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대로 복기하여 성취를 이끌어내라.”
헌원창을 향해 무심히 말한 마진이 정연신을 돌아보았다.
그의 모습은 헌원창에 비하면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양 멀쩡했다.
새까만 입황검을 허리에 차고 백색 무복 옷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
아직 풋내가 나는 외모와 달리 분위기는 이미 입황성의 무인이다.
“너는 끝마쳤군. 구결의 핵심은 깨달았나?”
“융통무애(融通無碍)입니다.”
“···맞다. 몸은 어떤 상황에서든 움직일 구석이 있다. 투로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거침없이 이어지는 게 마광의 진결(眞結)이다. 통찰과 창의성, 응용력. 구결을 온전히 알았다면, 이제 너는 투로의 오의를 깨달아야 해.”
“투로의 오의?”
“이건 말로 지껄여 봤자 불여일견이다.”
마진이 연무장 한켠에 있는 벽돌탑 앞에 섰다.
입황성 구성원들이 목재를 잘라 쓰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명족인 성주를 의식하여 전각부터 온 사방이 석조 건물이니, 수련용 통나무 같은 걸 세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봐라.”
순간 마진의 몸에 강력한 기세가 머물렀다. 그리고 곧장 다시 훅 사라졌다.
완전히 힘을 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 듯했다.
그는 그대로 정권을 뻗었고, 굳은살 가득 박인 주먹이 탑의 일면을 가격했다.
터억!
피부의 외공(外功)을 얼마나 단련했기에 거침없이 둔탁한 소리가 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동시에 벽돌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최적의 순간과 최상의 타격. 투로는 그걸 그리는 궤적이다. 완벽한 투로를 따르면 극상의 타격이 나온다. 안법의 영역이라 할 수도 있지만, 내가 전하고자 하는 건 별개의 이치지. 안법은 상대의 공격을 보는 것이다. 하나 네가 그리는 투로는 이미 본능의 영역에서 시작돼. 자신의 공격은 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마진은 손조차 털지 않고 정연신을 돌아보았다. 탑의 잔해를 바라보던 정연신이 생각했다.
‘하인들이 고생일 것 같은데.’
입황성 하인들의 급여는 얼마나 많을지 생각해 본 그는 곧바로 잡념을 털었다.
‘시기적절하게 몸 쓰는 법이네.’
힘을 어느 순간 어디서 터뜨릴지 포착하라는 의미였다.
삽시간에 오의를 통찰한 정연신이 손을 풀었다.
“이건 숙련의 영역이다. 한 번 본 걸로 어찌할 수 없어. 연성할수록 본능적으로 최적의 투로를 찾아낸다. 네가 평생을 두고 숙제로 삼아야 할 일이지.”
“그렇습니까······?”
아닌 듯한데. 정연신은 생각했다.
어느새 거기서 더욱더 나아간 영감이 머릿속에서 작렬하는 번갯불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이거 다르게 할 수 있겠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정연신의 눈에 하늘빛 광채가 스치고, 그의 손이 살짝 들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