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88
◈ 인연 (3)
검절에게 청염일식을 펼친 정연신은 탈진을 겪었다.
초식이란 몸과 내공을 전에 없던 방향으로 움직이는 법식이다.
파괴적인 몸놀림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일격 필살초라면 반동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검절과의 비무를 치른 뒤, 소년의 검초는 이전만큼 역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게 됐다.
천주진인 이후에 맞이한 상대들은 정가동공으로 이겨냈다. 온몸 경혈과 근육을 억지로 조이고, 북돋고, 팽창시켰다.
자연히 전신 힘줄의 뭉치들이 상당 부분 굳었다. 능법광륜기의 흐름을 전력으로 따라가지 못했다.
천주진인 이후로 흑색에 빗댈 만한 상대가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강호는 은원으로 엮인 세상이다. 무인이라면 상시 습격을 대비해야 한다.
무수한 인파가 지나다니는 관도에 와서는, 당연히 감각을 키워둘 수밖에 없었다.
강호인들이 감각도(感覺途)라 부르는 공부였다. 정연신은 맹회 본단을 나설 때부터 두부 혈도에 광륜기를 순환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들었다.
강대한 기파를 지닌 무인이 태염룡을 품평하는 얘기를.
“고양이마냥 몸을 세우고 있었군. 흥미로운 아해야, 나와 더불어 주취를 즐겨 보겠느냐? 이 몸이 언화련이다.”
다소 쉰 목소리였다. 발음도 분명치 않았다.
정연신은 초고수의 중얼거림을 분명히 감지했다. 주정뱅이 같은 여자의 음성이었다.
제삼자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듯했지만, 분명히 자신을 향한 말이 맞았다.
소년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올라가자.”
“그럽시다.”
태염룡이 묘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귀신 같은 눈치였다.
이미 귀와 눈 사이의 맥박이 불그스름하게 뛰고 있었다. 관자놀이 쪽 태양혈에서 진기의 흐름이 두드러졌다.
황보 소가주가 운용하는 열양지기는 어디에서나 눈에 띈다. 관도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힐끗거렸다.
무림맹회 본단을 나설 때부터 지금까지 그러했다. 태염룡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히 걸어온 참이었다.
그 역시 정연신의 몸 상태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 대주에게만 경계를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섬세한 진기 운용이 심력을 크게 소모한다 해도 그랬다.
일찍이 감각도를 끌어올렸다. 정연신에게 마음을 놓으라고 설득하면서.
태양신맥의 내공은 수명을 태워 무한정으로 솟아오른다 했다.
전신 기혈의 막힌 곳을 저절로 뚫어내고 열양공력을 채워내는 자질이다. 축기량만 따지면 제 대주 이상이었다.
‘내가 조오금 더 굼뜰 뿐이지.’
태염룡은 소년 대주를 안내하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당신이 조금 더 둔해. 용봉지회 때 정연신에게 들은 말이다. 지금 와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스윽.
청학루의 대문을 열었다.
한중제일의 주루 겸 객잔이라 했다. 벽면과 문 사이 경첩에 기름칠을 엄청나게 해놓았다.
별 소리도 없이 실내의 정경이 펼쳐졌다.
주황빛으로 줄지어 걸린 등롱, 소란스레 술잔을 찍고 안주를 집어 먹는 사람들, 이 층부터 사각으로 뚫려 올라가는 공간까지.
으레 방문객들을 훑어보곤 하는 시선들이 두 사람을 향해 쏠리다가 그대로 멎었다.
“…….”
상인과 무인을 가리지 않고 두루 자리한 곳이 조용해졌다.
산동 최강의 호족으로 살아온 태염룡의 기품은 대단했다. 양귀비를 그렇게 씹어대는데도 그늘진 눈에서 격조가 흘렀다.
태양신맥에서 비롯된 기도는 뜻을 품지 않아도 주변을 압박한다.
느긋하게 걸음을 떼서 들어오는데 문지방에 스치는 무명천 자락이 비단처럼 다가올 정도였다.
“대주가 겪어본 적 없는 분위기일 거요. 원래 술은 이런 데서 마시는 맛이거든.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가문의 정자가 아니라.”
나른하게 웃으며 손을 뒤에서 앞으로 슬쩍 움직인다.
뒷사람을 인도하는 품행에 익살맞은 구석이 있다. 묘하게도 어울렸다.
보기 드문 귀공자가 소년 한 명을 호종하는 모습이었다.
거친 질감의 흑포를 두르고 들어섰다. 오랜 전투를 겪은 탓에 흑단이 매끄러운 기운을 잃었다.
오히려 정연신의 머리칼이 더욱 반질거렸다. 타고난 윤기였다.
“저들은…….”
“몹시 눈에 익은데, 정녕?”
사람들이 조금씩 수군거렸다. 작금의 한중 번화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누가 봐도 앳된 검객이다. 수려한 용모에 특이한 행색. 흑색 장포의 왼쪽 소맷자락이 거칠게 뜯겨 날아갔다.
오른팔 옷단만 길게 내려와 있었다. 어깨에는 자그마한 거칠 황 자를 하얗게 새긴 채로.
정연신은 여벌로 가져온 마진의 옷을 걸쳤다. 천주진인의 검격에 기존 무복을 잃은 까닭이었다.
숙부의 장포는 품이 조금 더 넓고 움직이기 편했다. 난자당한 무복이 크게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무명소졸은 청학루의 총관으로, 오늘 실로 삼생의 영광을 맞이했습니다. 마광익주께서 이리 행차해 주시다니…….”
책임자로 보이는 사내가 나와서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점소이가 아니라 귀한 비단옷을 걸친 중년인이었다.
응대가 굉장히 빨랐다. 한중에서 떨친 소년의 무명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시키는 광경이기도 했다.
영천검귀와 심무련의 무공 군세를 내쫓았다는 사실 때문일까. 개파대전에서 얻은 명성과 함께 이미 민심을 가지게 된 듯했다.
‘나중에 쓸모가 있겠어.’
소년은 생각했다. 일전에 죽인 지부대인으로부터 입수한 문건을 떠올리면서다.
제갈가주가 심무련의 약탈을 일부러 방관했다는 증거가 있다.
세가주 정도 되는 절세고수들 중 다수가 앉아있는 맹회를 뒤집고도 무사하려면, 여러 가지를 등에 업어야 할 터였다.
‘명분, 민심, 최소한의 무력이 갖춰져야 해.’
제갈가주 축출. 대환단을 얻은 직후에 마광익주로서 이루어야 할 과제다.
제대로 성공하면 큰 공적으로 직결될 일이었다.
입황성의 대주급 인사에게는 임무를 재량으로 수행할 권한이 있다. 자색에 오르기까지 많은 공훈을 쌓아야 했다.
함께 마광일조를 구성한 청명과 백미려에게 익히 들었다. 입황신창 악수림을 앞지르려면 보통 공적들로는 힘들 거라고.
‘그냥 넘어가는 건 태염룡에게도 못 할 짓이야.’
황보세가는 민초들을 사사로이 부린 탓에 멸문당했다.
소년은 황보 소가주를 수하로 뒀다. 맹회가 크다 하여 제갈세가를 눈감아주기는 힘들다.
최소한 가주는 책임을 져야 했다. 신임 마광익주의 뜻이 그랬다.
“입황성의 대주께서 왕림하셨으니, 마땅히 격에 어울리는 자리를…….”
“가장 위층이 좋겠습니다.”
정연신이 총관이란 사내의 말을 끊었다.
마광익주에게 존대를 듣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잠시, 사내의 눈매가 난감함으로 축 처졌다.
“선객이 있습니다. 대주께도 신분을 밝혀 드리기 힘든…….”
“악예림과 선약이 있습니다.”
산동악가 후기지수의 기파를 느낀 정연신이 말했다. 곧장 총관의 안색이 환해졌다.
“아! 선남선녀가 어울리는 자리였군요!”
“선남선녀라. 딴에는 옳은 말이구나.”
웃음기 어린 음성이 들렸다. 예의 쉰 목소리였다.
혀가 휜 듯한 말을 태염룡도 인식한 듯했다. 황보 소가주의 칙칙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주의 마지막 관문이 맞는 것 같소. 언가제일권. 사람의 몸으로 호신강기를 성벽마냥 운용한다지.”
정연신은 말없이 고개를 까딱했다. 처음 대하는 초고수의 합석 제안에 등 돌리지 않은 이유였다.
소년의 눈은 많은 것을 꿰뚫어 본다. 몸이 온전치 않으니, 엄청난 위명을 지닌 상대를 먼저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태염룡의 말에 화들짝 놀란 총관의 인도로 끝 층까지 올랐다.
“모쪼록 흥취를 느끼시길 바랍니다.”
두 사람을 안내한 청학루의 총관은 그들이 대면하는 모습을 보지도 않고 내려갔다.
앞서 보인 태도와 다른 행태. 무림의 생리에 정통한 자다.
강호에서 객잔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장소인지 아는 것이다. 몸을 사리기 위해 내려간 것으로 봐야 했다.
“한중 제일이라더니, 과연…….”
태염룡이 중얼거릴 때였다.
널브러지듯이 벽에 몸을 기댄 여인이 정연신을 맞이했다. 반쯤 누운 채 술잔을 들어 올리는 자세였다.
맞은편에는 악예림이 고개를 비스듬히 내리고 있었다. 대작하던 상대가 부끄러운 듯했다.
“아.”
묘한 탄성이었다.
언가제일권. 권무공 언화련이 게슴츠레하게 눈웃음 짓는다.
“듣던 것보다 용모가 출중하구나. 몇 년 후가 가늠이 되지 않아. 언가권에 뭉개지기 아까운걸.”
“너도 침상을 차겠어. 내일 말이다.”
가벼운 언행에 대수롭지 않은 말로 대꾸했다.
입술과 달리 소년의 눈썹은 움직이지 않았다. 새까만 눈동자로 언화련을 유심히 살폈다.
양쪽이 민소매인 무복을 입었다. 팔뚝 이두와 삼두의 굴곡이 바로 보였다.
언뜻 비치는 푸른 핏줄이 강건한 내공으로 맥동하고 있다.
영천검귀 백서군과 완전히 다르게 짜인 몸이 인상적이었다. 권법가의 육신은 온전한 검객과 달랐다.
언화련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주안공을 익힌 걸까.
불혹의 연배로 알려져 있는데, 미소를 만든 입가에 주름이 한 점도 없다. 악예림의 누이로 보일 정도였다.
“입황성의 아해야, 뭘 그리 보느냐?”
“뭐.”
소년의 대답은 짧았다.
적수들에게는 단답이 편했다. 근래에 부쩍 이렇게 되었다.
언화련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린 마광익주의 언행이 오히려 기꺼운 듯했다.
가늘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기파로 흔들린다. 호승심을 일으킨 초고수의 공력 파동이었다.
“눈초리가 몹시 음흉해서 그렇다. 흑심을 접는 편이 좋을 게다. 이 몸을 하수로 내려다볼 실력이 아니면 말이지. 아무나 낭군으로 들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거든. 곧 가주가 될지도 모를 몸인지라.”
그녀가 말했다.
태염룡마냥 실없는 농담을 해댄다.
‘차기 가주라.’
수개월 전, 심무련주가 언가주의 목을 분질렀다. 일대 사건이었다.
패검종주가 청성파 장문인을 죽인 일과 더불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입황성 총관부도 자색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규정지었다.
언가제일권.
권무공 언화련의 또 다른 명호는 진주언가의 궁여지책이었다. 세가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위명을 높였다.
언가는 팔대세가의 일익이다. 권법 명가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무림세가란 세상 도처에서 왕족으로 행세하는 호족 가문이었다.
제각각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했다. 보통의 위명으로는 강력한 위세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강호 문파의 명성과 권세는…… 상징적인 고수에게서 비롯되는 법이라지. 본성의 성주님처럼.’
소년은 생각했다.
진주언가의 일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언화련이 죽은 가주를 대신하게 됐다.
못해도 흑색의 무위를 지닌 초고수란 의미였다. 그래서 피하지 않고 걸음했다.
상대가 동격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상승 영역에서는 나비의 날갯짓조차 검초의 정교함에 영향을 미치기에.
‘대환단까지 일 보 거리야. 언화련이 마지막이다.’
한편 악예림의 눈은 언화련과 정연신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몹시 크게 떠진 채였다.
대뜸 서로 평대하는 양상이 낯설다. 정파 강호에서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이었다.
정연신의 연배가 한참 아래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직위로 배분을 갈음하는 입황성의 특성이 없었다면, 진작에 명숙들의 질타를 받았을 일이다.
‘이런 소년이 남궁 가가를 인정한 거야…….’
그녀의 생각과 별개로 두 초고수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개파대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일이었다.
마광익주와 언가제일권. 지금 한중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중 가장 크다고 할 만했다.
늘어져 있던 언화련이 주안상을 더듬거리더니, 이내 옥병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씩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취객이었다. 초고수들 중에 기인이 아닌 자가 없다는 말이 맞는 듯했다.
“잘생긴 아해의 시중을 받아보고 싶구나. 한 잔 따라보겠느냐?”
소년을 향해 술병을 건넨다. 태염룡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언가 아주머니께서 주화입마에 든 듯한데. 언행이 나보다 자유분방하지 않나.”
“딱 너 정도지. 괜찮아.”
어린 마광익주가 대꾸했다.
소년은 조용히 다가가 한 손으로 옥병을 받았다. 환히 웃다시피 한 언화련이 잔을 내밀었다.
수작이라도 한번 부려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든 채였다.
탁.
정연신은 묵묵히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동시에 심장의 광륜에서 내공이 풀려나왔다. 그대로 술병을 쥔 장심까지 질주했다.
우웅.
옥병 속의 두강주에 육중한 기파가 실렸다. 마광익주의 공력이 대작으로 말미암아 상대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선선한 바람이 흘러들어오는 청학루 끝 층의 풍취에 초고수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쥐죽은 듯한 침묵 속에서, 나지막한 진동이 가을바람을 쓸어내렸다.
순간.
언화련의 팔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술잔을 든 손등의 핏줄이 꿈틀했다.
소년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본 대주의 술시중이다. 주도를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