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93
◈ 검뢰섬릉식
검성의 검을 받아낸다.
무거운 과제였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몹시 비범한 일이기도 했다.
재해를 견딘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정연신은 임무 출행 시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디뎌야 할 영역이야.’
일검으로 섭리를 가른다는 검객들이 있다.
신검단주, 무당파 장문인, 사도 십삼천의 천극문주(天剋門主), 근래에 청성파 장문인을 격살했다는 패검종주까지.
천하에는 자색급 괴력난신들이 못해도 대방파의 숫자만큼 존재한다.
그들은 세대를 제패했다. 그래서 절세고수다.
이름이 고금을 넘나들었다. 호사가들은 강호사에 별호를 남긴 전대 절대자들과 그들을 비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검성 현소백의 위명도 마찬가지였다.
민간에서는 검선 여동빈의 환생으로 받아들여졌다. 정연신을 예우하여 내치는 검격조차 쉽게 감당하기 힘들 터다.
일 합에 몇 번의 방어초를 가져가야 할지 알 수 없다. 맹회에서 소년에게 남은 유일한 걸림돌이었다.
천주진인이 거기에 도움을 주겠노라고 말한 직후.
세 명의 귀빈 가운데 둘이 흠칫했다. 점창과 화산의 장문제자들이 몸가짐을 바꾼다.
천주진인이 사전에 주지시키지 않은 이야기인 걸까.
네 사람이 자리한 탁상 옆의 연못에 투명한 파랑이 번졌다. 인기척으로 울린 진동이 동심원을 그린다.
단풍 몇 잎을 싣고 흔들리는 물결 위에서, 하얗고 붉게 내리쬐던 햇살이 조용히 요동쳤다.
동석한 이들의 심정을 드러내듯이.
“이런.”
출중한 기파를 지닌 여인이 중얼거린다.
묵색 보검을 차고 주홍빛 비단 경장을 걸쳤다. 새까만 머리칼이 검집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기세를 날카롭게 벼려둔 반면에, 커다란 눈 옆으로 처진 눈매는 선량해 보인다. 구파 무인의 맑은 기백이 여려 있었다.
소검후 취소옥.
화산잠룡 유현과 함께 허리를 바로 세울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십수 년간 천하에 위명을 떨친 화산검절이 검법을 논한 것이다.
천주진인은 일전에 청염일식을 이름 짓지 못해 아쉬워한 바 있다. 그의 명명에 쌀을 몇 가마니든 바칠 이들이 수두룩하다고 농했다.
논검은 또 다르다.
화산은 무당과 더불어 정종무맥에서 손꼽히는 검파였다. 화산검절의 조언에는, 어지러운 세태의 구휼미에 버금가는 가치가 있었다.
동격의 초고수들조차 검론(劍論)을 청한다 했다. 강호의 뭇 검객들이 한마디조차 바라 마지않는다.
소검후가 살며시 입술을 뗐다.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였다.
“자리를 피할까요? 제가 진인의 뜻을 모르고 왔답니다.”
“그러지 말게. 우리네 수행자들이 운남을 행도할 때 점창파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경우가 없네. 자네는 장문제자이자 사일검법의 적통 계승자이니, 들어두고 도움이 된다면 빈도의 보람이 클 걸세. 구파의 동량지재가 마광익주와 교분을 쌓는 것도 권할 만한 일이지.”
천주진인은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내용과 대비되는 말투다. 화산파의 검사들은 대개 이랬다. 서악의 험한 산세에서 수련하여 돌산 같은 기질을 지녔다.
상시로 무심해 보이는 표정이 검객의 표상으로 다가왔다. 유현이 특이한 경우였다.
소검후가 희미하게 웃었다.
“과분한 말씀 감사해요. 헌데, 저와 정 대주님은 이미 친하답니다. 사천에서 양양까지나 함께한 데다 심무련 군세를 토벌하러도 동행했죠. 도움을 드리긴커녕 은혜만 입긴 했는데…….”
다소 맹해 보이는 미소가 왠지 익살스럽다. 그녀의 눈길은 어느새 소년을 향하고 있었다.
정연신은 마땅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맙다 하기 애매한 맥락인 데다 선뜻 낯간지럽게 답례하기도 힘들었다.
그저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으니, 옆자리에 가부좌를 튼 유현의 준수한 콧잔등에 주름이 졌다.
사숙의 앞이라고 웃음을 참는 듯했다.
소년은 동년배 말코 친우를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진인의 저의가 궁금합니다. 제 검법이 아직 온전하지 않다 하나, 진인께서 입황성 무인에게 은덕을 베푸시는 이유로는 부족합니다. 본성은 구파와 달리 수행 동도도 아니지 않습니까.”
“원시안진(元始安鎭).”
천주진인이 도호를 읊조렸다.
“자네는 유현과도 선연을 맺었네. 명줄을 두 번 이어주지 않았나. 자하신공을 전수받은 화산 장문제자의 목숨은 가볍지 않아. 평생을 두고 보은해야 할 일이나, 유현의 기량이 부족한 탓에 빈도가 보답하는 걸세.”
그렇다면 빚이 아니다.
소년은 마음을 편히 가지기로 했다.
칠사도의 도움으로 능법광륜기를 만들고는 은원에 민감해졌다. 강호는 은혜와 원한의 세계였다.
모든 명성과 위세가 은원에서 비롯되고 은원으로 매듭지어진다.
사파의 고수들조차 은혜를 원한으로 갚으면 강호에서 행세하기 힘들어졌다. 시대정신에 깃든 도리였다.
이제는 입황성 무력대의 수장으로서 아무에게나 도움을 받아선 안 된다.
상대가 백도 정파에서 가장 공명정대한 무맥이라 해도 그러했다.
향후 거취에 영향을 줄 일을 최대한 배제해야 온전히 민생을 위해 칼을 쓸 수 있다.
동년배 소년 도사가 눈썹을 찡긋거렸다. 네 사정을 안다는 듯 이해심이 깃든 장난기였다.
정연신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입술을 뗐다.
“경청하겠습니다.”
“가르침이라 칭하기도 무안한 수련법을 알려주겠네. 말 그대로 자그마한 단초일세.”
희미하게 미소 지은 천주진인이 허공으로 손짓했다.
스악!
무형의 경파가 뻗어 나갔다. 엄청나게 날카로운 공력 파동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날았다.
연못가에 고즈넉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소나무에서 가지 하나가 떨어진다. 길고 뭉툭한 줄기였다.
천주진인은 부드럽게 잡아챘다.
“우리 장문인은 몹시 유한 사람일세. 제자에게 좀처럼 회초리를 들지 않네. 그래서 빈도가 했지.”
그의 말에 유현이 움찔한다. 허나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연신과 소검후의 눈길은 천주진인의 손에 쏠려 있었다. 우둘투둘한 소나무 가지를 쓸어내는 손길이 묘했다.
스윽.
한 번 가볍게 훑어내는데 다양한 형태의 기파가 흘러나온다. 공기를 때리는 파동이 온갖 방향으로 종횡했다.
무색으로 산란하는 햇볕 같았다. 천주진인의 손아귀에서 움트고 있는 법식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두꺼운 나뭇가지가 일자로 고르게 다듬어졌다.
굳은살을 두른 손끝이 협봉검의 형태를 자아낸다. 달인의 기행이다.
천주진인은 앉은 자리에서 폭이 좁은 목검을 만들었다.
세 호흡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떨어진 껍질들이 소복이 쌓였다.
“본파 매화검법의 제일초 매화노방(梅花路傍)부터, 일곱 번째 초식인 매화빈분(梅花頻紛)을 일으키다 말았네. 장심의 내공 운용을 재빠르게 다음 초식으로 전환하는 수법일세. 공력 기수식을 연환시켰지.”
검법을 펼치다 멈춤으로써 생기는 잔여 경파로 나무를 다듬었다는 얘기다.
정연신의 눈이 빛났다. 무공 수련에 이처럼 재미있는 방법이 있을 줄 몰랐다.
화산파는 예로부터 검파로 유명했다. 역사가 오래된 문파는 이렇게나 특이하다. 훈육법조차 남다른 면이 있었다.
마광익주의 얼굴에 마침내 소년 같은 면모가 어린다. 치켜올린 눈매에서 호기심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천주진인이 웃었다.
“손안에 자네의 검법 묘리를 모두 담아보게. 몇 초식을 거치든 껍질이 가지런히 벗겨져야 해. 검초마다 지향하는 바가 천차만별일 테니, 진기 운용에 무수히 많은 변화를 주어야 제대로 된 목검을 만들 수 있네. 길을 걷다 꺾은 나뭇가지로 적수를 맞이했다는 고수의 이야기를 들어봤겠지? 그러한 일화의 연장으로 봐도 좋네. 경파가 제대로 실리려면 날이 들어야 하니까.”
검식 연환의 오의를 체득하는 수련법이다. 말로는 별거 아니라 해도 문파 비전임이 분명했다.
화산파의 매화검법처럼 완성된 무공을 연마하는 자들보다, 오히려 다듬어지지 않은 검법을 지닌 정연신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연환에 틈이 있다면 율령대주에게 광화검류를 파훼당했을 때와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각각의 초식이 강력하다 해도 그랬다.
“목검을 만든다…….”
소년이 되뇌었다.
후배 검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주진인이 물었다.
“한번 해보겠나?”
“예.”
정연신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전의 기감과 별개로 판단이 왔다.
고절한 연환이 없기에 모든 초식을 관통하는 기질도 없고, 그 탓에 이름도 없던 검법은 맹회에서 분명히 완성된다.
“마침 상록수가 있으니 잘 되었어. 소나무는 우직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아주 까탈스럽네. 연마하기로는 제일이지.”
천주진인은 또 하나 몽둥이 같은 나뭇가지를 잘라냈다. 언제 봐도 날카로운 경파가 하늘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번에는 정연신이 머리 위로 잡아들었다. 까끌한 감촉이 손아귀에 감겼다. 몹시 두꺼웠다.
“목검 한 자루를 말끔히 벼려 보게. 그걸로 끝이야. 검초가 온전히 하나의 식으로 묶이게 될 걸세.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검법이지. 자네라면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믿네.”
정연신은 천주진인의 말을 들으며 공력을 일으켰다.
심장에서 광륜이 회전하고, 빛의 수레바퀴에서 일어난 능법광륜기가 곧장 장심까지 흘러들어왔다.
동시에 손바닥 노궁혈 안으로 깃든 경파가 바람처럼 휘몰아쳤다.
이름 없는 검법의 첫 번째 초식이었다.
파악!
껍질 면이 갈려 들어가는 느낌이 선명히 전해졌는데, 잔여 경파를 모아 두 번째 초식을 전개하려는 순간 나뭇가지가 퍼석거리며 부서진다.
작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정연신의 손을 훑어냈다.
곁에 있던 유현이 탄성을 터뜨렸다. 나지막한 외침과 함께였다. 네가 못 하는 것도 있구나!
“웃지 마라.”
생소한 실패를 맛본 소년이 뇌까리듯 말했다. 또래 친우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데도 자연스럽게 나온 태도였다.
유현의 미소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맞은편에서 지켜보던 소검후가 웃음기 어린 날숨을 뱉는다.
“쉽지 않지? 아무리 자네라도 그럴 걸세. 초식이 고절할수록 힘든 수련이야.”
“칼날 한 줄기를 만들기도 어렵겠습니다.”
“양날검까지 가지 않고 목도를 만드는 것만 해도 상당한 경지일세. 자네의 검초라면 더욱 그렇지. 그래, 우선 외날검을 목표로 해 보게.”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소년의 포권에 천주진인이 마주 손을 모아 올린다. 옛 인연으로 하대하고 있다 해도 마광익주다.
연배를 떠나 매화검수들의 수장과 동격으로 대해 주는 모습이었다.
“가르침이라 칭하기도 민망한 수련법일세. 다만, 자네가 힘든 만큼 성취했을 때의 효용도 굉장할 터이니, 자그마한 보은으로 말미암아 정진해 주게. 입황성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일세. 자네 정도의 무력이면 백성 수천을 살릴 수도 있겠지.”
천주진인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비단 사마외도만 일컫는 얘기가 아니었다. 무림맹의 입장이 명료한 까닭이었다.
구파의 신선들이 속세의 일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주요 수뇌가 세가로 이루어진 맹회는 입황성의 전복을 꿈꿨다.
강호는 자유로운 고수들의 세상이어야 했다.
무림세가란 그런 땅에서 이합집산하는 씨족이었다.
사마외도와 부딪쳐 이름을 얻었다. 여유가 되는 한 민초를 도와서 협명을 떨쳤다.
천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무력으로 이득을 취했다.
수시로 객잔과 관제묘를 부숴대도 관무불가침이란 말을 외치며 구름 위를 거닐었다.
그처럼 순수한 생태야말로 뭇 세가들이 이름과 권세, 부를 얻기 좋은 세상이었다.
허나 원나라를 몰아낸 뒤에는 명 황실이 들어섰고, 무공으로 힘을 키운 지방호족들의 난립은 어느 때보다 금기시되었다.
입황성의 서슬 퍼런 칼날에 강호가 숨죽였다. 민생의 질서가 최우선 기치로 자리했다.
무림 문파들은 억눌렸다. 자연히 불만이 쌓였다. 황보세가 멸문과 남궁 직계의 멸족이 불러온 파장도 대단했다.
무림 호족들이 제 잇속을 챙기는 데 수단을 가리지 않게 될 만큼.
그러한 사정을.
정연신은 구파의 귀빈들을 배웅한 뒤에 실감했다. 두 번째 시도로 외날 목검을 만들어낸 직후였다.
“목도 뭐냐……!”
하얗게 질린 소년 도사의 얼굴이 뇌리에서 채 가라앉기도 전에, 어린 마광익주는 제갈청아를 대문 안으로 들였다.
개파대전이 끝나면 자세를 굽히고 찾아오라 했다. 예정된 방문이었다.
언가제일권이 마광익주의 손끝에 쓰러진 일로 소란스러운 지금.
수려한 소년 대주와 긴장으로 경직된 소녀가 연못가에서 마주 섰다.
갈색으로 녹슨 솔잎들이 건조한 바람과 함께 흩어지고 있었다.
유난히 새파란 쪽빛으로 펼쳐진 하늘 아래, 정연신은 용건을 물었다. 목검 한 자루를 내려 쥔 채였다.
“얘기해라.”
마광익주의 담담한 시선에 제갈청아가 몸을 떨었다.
언화련과의 비무를 본 까닭일까. 언제고 무심히 다물려 있던 작은 입술이 조금쯤 마른 듯했다.
소녀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제 말을 들으면, 짧은 시간에 다수를 돌파하셔야 해요. 이름난 정예 무인들을…….”
“얘기하라고.”
돌연 무릎에서 시큰함을 느낀 소년이 미간을 좁혔다.
밤에 주로 아프더니 낮에도 이러는데, 어느새 익숙해진 통증이 짜증을 불러왔다. 또, 또 간합 바꿔서 수련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