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1
◈ 중단전
“···혈염교도 사건을 맡기면서 언급한 적이 있을 거다. 화산파가 자소단을 잃어버렸다 했지.”
“섬서지부가 그 일로 여력이 없다고 했지요. 덕분에 제가 혈사교검을 잡았고.”
“맞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지. 자소단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보물이다. 무림의 지보(至寶)와 같은 영약이지. 의심 받은 자들, 화산에 잘 보이고자 앞장 서서 그들을 추궁한 문파들, 이때다 싶어 은원을 갚으려 했던 타문파와 무인들까지. 섬서성의 온갖 방파들이 엮였어.”
“······무인들이 난립하겠군요.”
심각한 얼굴이 아니었다. 웬만한 소국보다 광활한 섬서 무림이 온통 휘말렸다.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부터 깨달았다. 검으로 천하를 행도한다는 자들이 섬서성 도처에 깔려 있었다.
모두가 시화무극권을 다듬어 줄 무림인들이다.
심기가 얼굴에 드러난 걸까. 막상 제안한 마진이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했다.
“화산파와 동행할 거다. 싸움이 일단락될 때까지 화산의 자소단 수색을 함께한다.”
“자파의 영단 찾는 걸 타문파의 무인이 돕는다······?”
“일종의 감시도 겸한다. 화산도 알고 있지. 이미 사파 무리와 한차례 큰 싸움이 있었는데, 서안에서 가장 크다는 객잔 하나가 통째로 무너졌어. 인명 피해가 엄청났다. 마광익의 역할은 폭풍의 중심인 화산파의 무력 행사를 자중시키는 거야.”
“화산이 받아들입니까?”
“화산파는 두 번째 소림사가 되고자 한다. 도문 대표로서 황실의 공증을 원해. 설령 네가 혼자 간다 해도 꽤 대접받을 수 있을 거다. 물론 견제도 있겠지만.”
“······.”
정연신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호에 이만큼 커다란 분쟁은 자주 있지 않겠지요. 명분이 갖추어졌으니, 실전에서 내키는 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겠군요.”
“그래. 네 자질의 특성상 수련에 비할 바 없는 성취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입황성의 이름으로 온갖 저명한 무인들과 마음껏 검을 나눠 볼 수 있는 기회지.”
이미 속으로 동의했다. 실전을 겪지 못한 무공은 이론과 다를 바 없다.
시화무극권은 이제 막 창시된 권공이라 초식이 부족한데, 이번 임무에서 채울 수 있을 듯했다.
구파의 무공을 견식할 기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넌 이미 임무 하나를 훌륭히 마치고 왔다. 이번에는 재량이야.”
“가겠습니다.”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일단 입황마가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광기를 가진 외조부가 어떻게 회유해 올지 몰랐기에.
혈족으로서 무언가 주고받는 순간 확실하게 엮인다. 나아가야 할 때 발목을 잡히는 수가 있었다.
‘공적도 쌓을 겸, 휴식기 없이 최대한 밖으로 나돌아다녀야겠어.’
결심을 굳힌 정연신이 고개를 들었다.
“인원은 어찌됩니까?”
“혈염교 때와 같다. 헌원창은 신입에, 청명과 백미려는 주루의 창천대 일로 받은 징계가 끝나지 않았지. 아주 적극적으로 지원하더군. 거기에 내가 함께 간다.”
“대주께서?”
“구파가 상대라면 신검단 대주급은 가야 격이 맞아.“
“언제쯤 출발합니까?”
“구성이 끝났으니 내일 곧바로 출행할 참이다. 돌아가는 즉시 짐을 꾸려.”
정연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의 무공을 사사하는 건 다녀와서 해야 할 듯했다.
지금은 시화무극권을 수습해야 할 때였다. 이번 임무의 경험이 크게 도움될 것이다.
* * *
화사하게 떨어지는 매화 몇 송이에 햇살이 연분홍빛으로 아롱진다.
명필 학사가 초서를 쓴 듯 흘림체로 불어온 바람은 꽃잎 무리와 함께 마광익 다섯 무인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다음 임무는 역참로가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군.’
정연신은 생각했다. 지나간 시간이 아까웠다.
늘어선 활짝 핀 매화들이 예전과 달리 압박감으로 다가온 까닭이었다. 세월은 도무지 멈추지를 않았다.
“아쉽습니다. 섬서 무림의 중심 아닙니까. 입황성 무복을 못 입다니.”
헌원창이 투덜거렸다.
그들은 눈에 띄는 입황성 무복 대신 평범한 옷들을 걸쳤다. 화산파의 체면 탓이었다.
“지금의 양양만큼 번화한 곳은 아닌 듯한데.”
정연신이 말했다. 그는 헌원창의 실없는 이야기를 받아넘기는 데 익숙해졌다.
언제 툴툴댔냐는 듯 히죽 웃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섬서 서안이면 온갖 고수들이 교류하는 대도시라 했소. 화산과 종남을 제외하고도 말이오.”
“그렇군요.”
담담하게 대꾸한 정연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달랐다.
대형 상단은 물론 온갖 잡상인들까지 거리를 채운 양양보다는 한결 정돈된 멋이 있었다.
건국 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번성한 도시인 까닭인 듯했다.
일행은 이백 년 전통을 지녔다는 거대한 객잔 앞에서 내렸다.
겉모습만큼은 거의 주루에 가까웠다.
그들은 도시를 거칠 때면 허름한 곳에서 묵는 법이 없었다. 입황성의 재력이라고.
말에서 내린 마진이 입을 열었다.
“서안은 종남파의 영역이다. 화산이 마음대로 들쑤실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우리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으······. 본성에 들어오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검보다 말과 친해지게 될 줄은.”
헌원창이 자신의 허리와 허벅지를 두드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객잔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정연신은 강렬한 기운의 군집을 느꼈다.
“입황성 고수들께서 오셨군. 기다렸소.”
일사불란하게 줄지어 나오는 남녀 도사들이 있었다.
십수 명은 넘는데 번잡하지가 않았다.
다가오는 사람들이 거대한 칼 한 자루처럼 느껴졌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모두의 하얀 무복 끝단에 새겨진 매화 자수였다.
‘화산파!’
선두에 선 장년의 검객은 날카로운 인상만큼이나 가공할 기파를 풍겼다. 마진을 처음 대면했을 때와 필적하는 느낌이었다.
“천주 진인(川柱 眞人). 오래 계셨나보군. 길이 험하여 겨우 시일을 맞출 수 있었소.”
마진이 짧게 포권했다.
정연신은 옆에서 흠칫하는 헌원창의 기척을 느꼈다.
입을 열고 호들갑 떨지 않은 걸 칭찬해 줘야 할까.
‘매화검수들의 수장.’
화산검절(華山劒絶) 천주라고 했다. 유명한 도명이었다.
이름이 섬서성에서만 머무르지 않을 정도였다.
화산파 최정예 검객들을 이끄는 극강의 초고수가 직접 하산한 것이다.
“마광익주, 일련검매, 청안마검(靑眼魔劍). 다 아는 얼굴들이군.”
천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마검?’
청안마검 청명. 별호는 처음 들었다. 굉장히 의외였다. 적과는 어찌 싸우길래.
청명을 돌아보니 그저 싱긋 웃어줄 뿐이다.
진평현에서는 혈염교도와 가볍게 검을 나눈 것밖에 보지 못했다.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소개는 필요없겠지. 일전에 나눈 검으로 충분할 터.”
마광익 전원과 매화검수들의 충돌은 엄청나게 유명한 사건이었다.
입황성 쪽에서는 사상사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화산파는 어땠는지 모를 일이었다.
“입황성 측에서 이 일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 알겠군. 제아무리 마광익이라 해도 제자까지 대동하고.”
천주 진인의 칼날 같은 눈초리가 정연신을 관통할 듯했지만, 그는 무던하게 흘러 넘겼다.
입황성주와 전대 신검단주를 대하고 온 참이다.
화산검절이 대단한 고수라 해도 거기에 미치지는 않는다.
‘음?’
정연신은 문득 화산파 고수들 사이에 있는 또래 검객을 보았다.
나른한 인상이었다. 세상 만사가 하찮다는 듯 작게 하품까지 한다.
시선이 마주치자 픽 웃고는 하늘을 올려다 보는 소년 도사.
잠깐 가만히 있던 마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건······.”
“거기 있는 입황성 제자도 예사롭지 않은 듯한데. 우리 장문인의 제자와 검으로 교분을 나눠보게 하는 건 어떻소? 서로 인정했다 하나 피차 동행이 불편할 터, 작은 여흥이 될 거요.”
천주가 마진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기를 꺾어보겠다는 거군.’
화산파도 이 동행이 감시의 일종이라는 걸 안다고 했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검파다. 황실 때문에 허락했다 해도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리 없다.
일행이 될 상황에 주축 고수들끼리 검을 나누기 애매하니, 문파의 미래로 우열을 가려 보겠다는 것이다.
“입황성 제자?”
불현듯 멍하게 뇌까리는 헌원창이었다.
백색무사가 되지 못한 입황성의 수행자들.
정연신이 창천대 청색고수와 겨룰 때 구경 온 마광익 아이들이 그랬다.
공인된 신분이 아니다. 본성 내부의 사제 관계가 인정되지 않는 까닭이다.
어릴 적부터 수련하여 백색을 입기 전인 신분을 의례적으로 입황성의 제자라 일컬을 뿐.
당사자의 얼굴만 변하지 않는 가운데, 나머지 마광익 네 사람의 표정이 묘해졌다.
‘자색의 절대고수쯤 되는 게 아니면 기도만으로 실력을 읽기는 힘든가보군. 내 진기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그럴 수도 있고. 기파가 약할 테니.’
작은 깨우침을 얻은 정연신이 말했다.
“대주.”
“음?”
마진이 돌아보자, 그는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입황검의 검파를 툭 쳤다.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사숙께서 또 번거로운 걸······. 오 초 정도면 괜찮습니까.”
앞에서 천주를 올려다 본 소년 도사가 나른한 음성으로 물었다. 작은 목소리도 아니었다.
이 정도 무례는 범해도 된다는 걸까.
화산파 장문인의 제자라는 신분 치고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배울 게 있을 거다. 전력으로 임하라.”
“뭘 배우라 하시는지. 마광익 마광결은 감각의 무공이라 들었는데.”
소년이 한숨을 쉬며 걸어 나왔다. 동시에 객잔 앞은 때 아닌 비무대가 되었다.
무림의 싸움은 이렇듯 뜬금없이 일어날 때가 많다고 했다.
‘재미있네.’
정연신은 정가장에서 쾌검결의 영감을 준 종남파 고수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종남 무공을 견식하지 못했다. 화산파 무학은 얼마나 깊을까.
마광익과 화산파의 고수들이 넓은 원을 그리며 섰다.
서안은 작은 도시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나 기웃거리던 행인들이 호들갑을 떨며 구경꾼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팔방에서 화산파를 속삭였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나?”
“소리를 낮추게. 화산파일세!”
“화산의 검선들께서 우리 서안에 오셨다고?”
“비무라도 할 참인가 본데. 참으로 귀한 구경을 하겠어. 저 비범한 소년 도사 좀 보게. 기운이 신령스럽구만.”
“무림인들끼리 가르침을 주고 받나보군. 역시 도문 화산인가. 참으로 아량이 넓어!”
정연신은 내심 웃었다. 민초들 속에서 기수식을 취하는 건 또 신선했다.
쾌검식이 시험이었던 첫 번째 입황시 이후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섰다. 정연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초지적을 말하던데.”
“기분 상했나? 미안해. 딱히 얕보는 건 아냐. 오늘 아침 수련이 고됐거든.”
소년 도사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화산파의 유현(流炫)이야.”
“정연신.”
그는 짧게 대답했다. 평복을 입은 상황에서 마광익을 입에 담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가르침 받는 입장에서 예의없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렸다.
일부는 유현이란 이름에 크게 놀라며 소리치기도 했다. 서안 무림인들도 있었던 것이다.
“화산의 잠룡!”
“화산파 장문 진인의 제자가 절세 기재라던데. 이렇게 직접 볼 줄이야!”
“낙영장법(落英掌法)과 육합신검(六合神劍)을 대성했다는 풍문을 들었지. 직접 보니 명불허전이군. 생각보다도 어려.”
“다음대 화산의 미래라 했네. 이미 자하신공(紫霞神功)의 사사에 들어갔다는 말도 있었지.”
수식이 화려했다. 정연신의 미소가 짙어졌다.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두 무인이 마주섰으면 무공으로 말할 뿐이다.
그가 한걸음 내디디려던 순간이었다. 유현의 몸이 소리없이 커졌다.
명족의 발놀림과도 닮아 있는 보법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말로만 듣던 화산파 암향표(暗香飄)인 듯했다.
화악!
전진 보법과 함께 들려 올라갔던 손이 내리찍혔다. 활짝 펼친 손바닥이 꽃무늬처럼 늘어졌다.
직접 보게 된 구파의 무공은 술법으로 보일 만큼 신묘하고 화려했다.
‘낙영장법인가. 군더더기가 아니라 변초가 많은 거야. 초식을 파훼할 수 없도록.’
마음이 흥미로 물든다. 하나씩 깨부수면 똑같은 변초를 얻지 않을까.
터엉!
주먹 쥔 손등으로 튕겨냈다. 순간적으로 부딪친 장력이 가벼웠다.
정연신의 경력이 힘을 잃지 않고 뻗어나가 회오리로 몰아칠 정도였다.
시화무극권 제일초, ‘나선’이었다.
콰아아-!
“흡?!”
반응할 줄 몰랐던 걸까. 당혹감으로 물든 유현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경파가 스친 것만으로도 그랬다.
“무슨······!”
상식 밖의 힘이라는 듯 아연실색하는 모습이 의아하다.
그가 유현만큼의 공력을 지녔다면 방금 일격으로 목을 분질렀을 것이다.
터억.
이번에는 이쪽이 나아갈 차례였다. 주춤 물러선 유현을 따라 정연신은 그대로 한걸음 전진했다.
허리 뒤에서부터 내지른 정권은 시위를 떠난 강철 화살 같았다.
제이초, 진벽(進霹)의 발울림이 주먹에서 천둥을 불러왔다.
콰앙!
비산하는 힘의 파편에 땅거죽이 뒤집어졌다. 중천에 뜬 태양의 빛무리가 분진을 타고 흐려질 정도였다.
정연신의 눈은 정확히 정면을 응시했다.
먼지투성이가 된 유현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경력의 여파를 해소하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여 준 장법과 성질이 같았다. 화산파 낙영장법.
시화무극권 제삼초의 영감이 되기에 충분할 듯했다.
정연신은 즐겁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길게. 나는 십 초쯤 하고 싶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