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34
◈ 보검 (7)
공기가 투명했다. 담벼락을 넘어온 바람이 문 틈새에 스미는 때였다.
겨울이 비집고 들어온 방에는 마광익주가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목제 의자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린 자세가 오연해 보였다.
느슨하게 턱을 올린 모습도 그랬다. 앞서 방에서 나간 태염룡이 질풍노도의 화신이라며 짐짓 감탄할 정도였다.
천하.
쉽게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강호는 몹시 광활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대지에 온갖 기인과 괴력난신이 살아갔다.
정연신도 반쯤 대강으로 얘기했다.
아직은 견문이 좁다. 십삼천 대방파들 가운데 반조차 눈에 담지 못했다. 산하 무맥의 파훼식으로는 십삼천의 세력 구도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힘들 터였다.
‘괜찮아.’
그저 섬서성 서안을 뒤흔드는 걸로 족하다.
파훼식으로써 서안 사마외도의 눈을 돌리고, 숨죽인 정파인이 놈들을 보다 쉽게 상대하도록 하는 게 먼저였다.
숨어있을 정혜와 위지묘화의 숨이 트였으면 했다. 무공과 상황 양면으로 그리되길 바랐다.
“고맙다.”
정연신은 제갈청아에게 재차 감사를 표했다.
태염룡과 헌원창이 객잔에 남은 숭여지문의 졸개들을 몰아낸 뒤였다.
두 사람은 갈도진과 소유랑을 포박했다. 마혈을 점해서 객방 하나에 가둬둔 뒤, 객잔에 딸린 별채를 대주가 쓰도록 해 줬다.
입황성 본성에서부터 십여 일을 달려 당도한 차였다.
―고된 여정은 무인들의 근육에도 피로를 선사하는 법이지. 별채에서 하루 꼬박 쉬쇼.
태염룡의 말을 뒤로하고 잠들었다.
침상의 재질이 몹시 좋았다. 십장생 자수가 들어간 이불도 목화솜을 한가득 넣은 듯 푹신했다.
홀로 쓰는 잠자리였다. 정연신은 마음껏 웅크릴 수 있었다. 새벽에 눈을 뜰 때까지였다.
―정보부터 뽑아내고 봐야 하지 않겠소? 십삼천이 득세한 곳의 소식은 타지에서 얻기 힘드니까. 관리 놈들도 다 매수된 모양이고.
―백 선배께 전언이 왔소. 다들 무사히 도착해서 흩어져 있다 하오. 백색들은 소빈이가 이끌어 왔고.
태염룡이 두 사파 놈들을 심문하러 간 사이, 헌원창은 조찬을 가지러 갔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귀히 자란 인물들이었다. 제대로 된 침소를 얻고서는 혈색이 뚜렷하게 피어났다.
그리고 지금.
붉은 자단목 다탁을 두고 대주와 마주 앉은 제갈청아도 그랬다. 하얀 얼굴이 생기를 띠고 있다.
대주와의 독대를 처음 겪는데도 담담한 표정. 하늘빛 비단에 묶인 흑발을 목 옆으로 쓸어내리는데, 정연신이 그 모습을 불편하게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예?”
“역시 근접 박투에서 잡아채이기 좋겠는데. 완성된 안법의 효용이 그토록 뛰어난가?”
“…….”
제갈청아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제 대주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다.
제갈가주를 닮아 속내를 읽기 힘든 표정은 여전했다. 그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보였다.
“아니다.”
정연신은 입을 다물었다.
몸이 그토록 둔한데 약점을 놔두는 이유를 모르겠다. 마광익을 책임지게 된 뒤로 염려가 많아진 까닭일까.
괜한 오지랖이 아니다. 대주의 심려였다. 큰일이라도 당하면 마음이 찢어질 테니까.
‘마광일조와 논해 봐야겠어.’
신임 대주는 상념을 접었다.
제갈청아에게 안법의 이치를 새겨듣던 와중이었다. 배울 거리가 많았다. 새로운 무공을 빚어내는 일은 늘 그랬는데, 안법 무공은 유난히 심오했다.
몸을 써서 타격하는 법이 아닌 까닭일까. 살펴 되새길 이치가 무궁무진한 편이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헌원창이 발끝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손으로는 조찬상을 들고 있었다. 입황신협은 독술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했다.
서안 길거리는 현재 사마외도의 본진이니, 점소이와 숙수를 몸소 감시하여 독을 살핀 것이다.
“음식은 안전하오. 헌데…….”
넓은 쟁반이 다탁 중앙에 놓였다.
흉년 탓에 요리가 다양하지는 않았다. 닭볶음인 궁보계정과 면이 넓적한 도삭면(刀削面)의 그릇들만 향긋한 내음을 풍겼다.
그 위로 헌원창이 서찰 하나를 건넸다.
돌돌 말린 종이에 채 마르지 않은 묵향이 깃들어 있었다.
말없이 받은 정연신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바깥에서부터 접근해 오던 기파를 느낀 차였다.
공력 파동이 꽤나 강대한 편이었는데, 그 기질 역시 아주 단단했다. 돌연 발걸음을 돌리길래 잡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정연신은 서찰을 펼쳤다.
―어디에서 왔는지는 묻지 않겠소. 소설(小雪) 정오를 기하여, 대월협(大月峽) 아래에서 세를 겨룹시다. 진 쪽이 물러나는 거요.
짧은 글귀를 훑어보고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신중한데.”
헌원창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것마냥 기세등등히 와서는.”
제갈청아의 앞이라고 온전히 존대한다. 정연신은 희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벅.
곧장 창가로 향했다.
삼 층을 통째로 쓰는 방인지라 시야가 넓게 트였다. 눈길을 살짝 내리니 행낭이나 지게, 수레 따위를 등 뒤에 둔 사람들이 보인다.
바삐 오가고 있었다. 흉년에도 활기가 대단했다. 도시가 부유하기 때문일 터였다.
‘그래서 사파 강호인들이 불어난 거겠지.’
정연신의 눈매가 내려앉았다. 광활히 뻗은 관도의 양쪽으로 늘어진 점포와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검객과 그녀를 호종하는 수하들까지도.
숭여지문주, 찬마검(濽魔劍) 위일화.
마(魔)를 뿌린다는 별호 그대로였다. 치렁치렁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요사스러운 기파가 번지고 있다.
강건하면서도 불규칙적인 파동이었다. 제법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느껴졌다.
정연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창문 너머를 바라보면서.
“목미, 대필을 부탁한다.”
“예.”
가명으로 불린 제갈청아가 문방사우를 펼쳤다. 벼루에 먹을 올리고 붓과 종이를 준비한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호흡 만에 집필 준비를 마쳤다.
정연신은 창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일어나라.’
목울대 양옆에서 명치까지 이어지는 혈관이 움찔 반응했다. 내경동맥이었다.
신경 줄기들과 함께 미약한 광륜기로 채워진다. 곧장 안구에 들러 뇌까지 이어지는 세맥들마저 기파로 감싸였다.
우웅.
정연신은 기운을 몹시 세밀하게 운용했다.
관자놀이의 청명혈에서부터 눈 밑 사백혈, 눈꼬리 쪽 동자료혈과 미간의 찬죽혈로 순환하는 구조였다. 안구 전체가 뜨거워졌다.
모든 게 곧 정수리 백회혈로 수렴해야 할 흐름인데, 아직은 주화입마를 염려해야 할 단계였다. 운기의 짜임이 미진한 까닭이었다.
‘찰(察).’
통찰과 고찰의 의념을 싣는 순간.
시야에 흐릿한 상이 맺혔다. 관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활기가 눈으로 훅 끼쳐 왔다. 특별한 형체는 없었다.
신체에서 가장 크게 열린 감각기관이 조금 더 예민해졌다는 느낌일 뿐,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새삼 살펴지는 게 아니었다.
흐름을 백회혈의 감각 통로로 인도하지 못한 까닭일 터였다.
무심코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다른 기재들은 거기에서 동체 시력의 격변을 느껴요. 그만한 운기 흐름을 엮는 데 수십 년 수련을 들이지요.”
“아직은 쓸 게 못 되는군.”
정연신은 제갈청아의 말을 담담히 받았다.
녹빛 안광으로 대주를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얀 손가락으로 붓을 쥐면서다. 반듯이 펴져 있던 미간에 자그마한 주름이 스쳤다. 헌원창이 그녀를 보며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고소하다는 미소였다. 대설검은 파백총람을 대리 집필한 바 있는데, 명필 제갈청아에게 다음 자리를 빼앗긴 참이었다.
“숭여지문, 몸 쓰는 법.”
대주의 말이 떨어졌다. 팔짱을 낀 채 창가에 기댄 모습을 흘끗한 제갈청아가 따라 적기 시작했다.
“걷는 데에 전신 근육을 고루 쓴다. 대퇴근이 높게 올라오지 않아. 어느 하나 돌출되는 부위가 없으니 기질적으로 은밀한 보신경이다. 공력의 무게중심이 낮은 게, 변초로써 특별한 방향 전환을 가져가면 손쉽게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다. 방위를 읊어주지. 후천팔괘. 감, 곤, 건.”
“……썼어요.”
“양팔이 허리춤에서 미세하게 흔들린다. 흘러나오는 기파가 지닌 공력에 비해 고요해. 기습적인 검격을 주의해야 한다. 오른팔의 신전근지대, 상완이두근을 다졌으니 올려치는 쾌검에 능할 텐데, 손목 내관혈의 기운이 강성하지 않다.”
“잠시만요.”
“…됐나?”
“예.”
“칼날의 예기를 믿고 현란함을 취하는 검세야. 첫 합을 강검으로 내치면 필승을 논할 수 있겠다. 일격 승부를 걸어도 위험하지 않아. 파훼 경파의 진기 구조를 말할 테니 따로 적어 두도록 해.”
어조의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였다. 심히 무던하게 흘러나왔다. 되묻는 음성도 그러했다.
“여백은 충분하겠지? 여기까지는 아무나 알겠지만, 주석에 강박을 가진 사람들도 있던데.”
“…….”
제갈청아의 무표정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촘촘한 속눈썹을 살짝 올린다.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저런 인물이 만드는 안법은 어떤 공능을 지니게 될까.
‘모르겠어.’
입매에 살짝 힘을 준 그녀가 다시 붓을 들었다.
* * *
‘저건 괴물이다.’
찬마검 위일화는 걸음을 바삐 놀렸다.
사마외도에서 수백 번 목숨을 구해준 감각으로 물러섰다.
숭여지문은 여령의 지파였다. 십삼천 여령의 정보력은 개방과도 견주어질 정도다. 비전 안법이 보통 고절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여령주에게 암동월시법(暗動越時法)을 하사받았다. 절세 안법이었다. 가히 성은이라 할 만했다.
새까맣게 번뜩이는 눈동자로 두령이란 자를 꿰뚫어 봤다. 투시에 가까운 공능이었다. 담장과 석벽을 격하고 지닌 바 기운을 살폈다.
그리고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터질 듯한 심장을 내공 호흡으로 갈무리하면서.
‘천하에 저런 자가 또……!’
내공의 밀도가 어마어마했다.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기질을 살피지는 못했다. 암동월시법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저 위일화의 한계가 그랬다.
초고수가 눌러 감춘 공력의 성질을 뚫어볼 성취라면, 진작에 서안 무림을 일통했을 터였다.
그녀는 곧장 북명객잔으로 돌아왔다.
단번에 꼭대기의 독방까지 올라가 태사의에 앉았다. 종남 속가문파를 쫓아내고 얻은 거점이다.
흑단목을 통째로 깎아낸 의자가 위일화의 왕좌였다. 묵색 팔걸이부터 범상치 않았다. 그녀에게 여느 때와 같은 전능감을 선사했다.
서안 사마외도의 군왕.
사아아―
서늘한 감촉이 삽시간에 데워진다.
온몸에서 열양공력이 흘러나왔다. 발치 앞으로 무릎 꿇은 제자들 열댓 명의 등에 땀이 맺혔다.
살짝 주름진 그녀의 눈매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위일화는 짧게 뇌까렸다. 이게 본좌다.
“연통을 보내라. 서안 전역으로.”
그녀가 말했다.
“패검종파든 뭐든 계파를 가리지 마라. 소백문, 참절각(斬絶閣), 대령위진파(大靈威震派), 검마문(劍魔門), 종천도문(終天刀門), 휘월가(輝月家)…… 모든 곳에 기별해라. 각개로 대적하기 힘든 초고수가 왔노라고.”
* * *
사흘이 흘렀다.
날이 좋았다. 울창한 산세가 초겨울의 안개를 길게 입었다.
땅밑으로 고개를 숙인 풀들이 흐릿한 공기를 토했다.
맑은 햇살을 침묵 속에서 쬐는 광경. 이르게 배를 채운 들짐승들이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와중이었다.
폭포의 물살로 요란한 호숫가에 살얼음이 드문드문 꼈다. 개중 한 점 위에 새까만 피풍의로 온몸을 감싼 사내가 서 있었다.
보혈대주 진명조였다.
무지갯빛으로 아롱지는 살얼음을 밟은 모습이 안정적이었다.
발 앞꿈치만 모아 서 있는데도 전혀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쪽은 오히려 그의 뇌리였다.
진명조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염병할.’
차마 내뱉지 못했다. 입 모양만 작게 만들었다.
산등성이를 올라오는 후배의 기파가 느껴졌다. 몹시 흉악했다. 극히 미세한 법력 기파가 벌써부터 살갗을 갈기갈기 저민다.
초고수로서 날 선 감각을 지닌 까닭에 더욱 뚜렷이 다가왔다.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웠다.
근래에 간혹 눈을 번뜩이는 모습도 아주 기이했다. 마주할 때마다 곤욕인데, 선배 된 체면으로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솔직히 확신이 없었다.
내면으로 그토록 엄청난 비명을 질러댔다.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후배는 진정 모르는 걸까. 실은 모든 걸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신혈극마 진명조는 온갖 생각을 홀로 떠올리고, 부정하고, 다시 떠올렸다.
수십 번째 반복된 사고였다. 그러다 끝내 한 쪽으로 수렴하고 말았다. 몇 번이고 그랬듯이.
망할, 아니겠지.
‘오는군.’
그는 억지로 입매에 힘을 줬다.
무표정도 아무렇게나 취해선 안 된다.
볼근에서 작은 광대근, 입꼬리 올림근으로 이어지는 근육 뭉치를 외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고고한 기도를 만드는 법식이 존재했다.
만들어진 냉랭함이었다.
후배의 머리가 능선으로 채 올라오기 전에, 진명조는 싸늘하게 뇌까렸다.
“늦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