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38
◈ 개안 (2)
전장에서 가장 고요한 자리였다.
협곡에 늘어선 채 주목하는 이들이 많았다. 구경 온 인물들의 머릿수가 사마외도 방파의 인원을 넘어섰다.
서안 칠대문중의 종주들이 그렇게 유도했다.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
위일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원수가 정확히 맞혔다. 그녀의 안법 절학은 서안 땅에서 유명했다. 검마문주와 싸우면서 숭여지문주를 살피고 있었다.
어느새 중천에서 멀어진 태양이 보였다. 겨울 햇살이 유독 무겁게 내려앉았다. 협곡 아래에 낀 수풀들이 뒤편에서 학살당하는 제자들의 비명을 따라 흔들렸다.
건조한 협곡에 메마른 활기가 흐른다. 대월협에서 관중평야로 이어지는 능선이 칼날처럼 비쳐 들었다.
‘방금 보인 한 수.’
그 무수한 잔상의 향연들.
놈이 연성한 내공과 무관했다.
몸을 쓰는 감각 자체가 달랐다.
암동월시법이 인정한 바다. 어떻게 닦았는지 모를 몸으로 무수히 많은 자세를 안정적으로 풀어낸다. 완전히 자질의 영역에 있는 문제였다.
기재란 말이 모자라다. 천고소무(千古所無). 오랜 세월 동안 없던 것이란 말을 사람에게 붙일 만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질시가 들 정도였다. 저런 감각을 지닌 놈은 어떤 감각으로 천하를 살아갈까.
그래서.
숭여지문주 위일화는 원수의 정체를 인정했다.
놈은 진정으로 신검단의 대주였다.
한중에서 벌어진 무림맹 개파대전이 섬예란 별호를 알렸다. 맹회의 본단이 섬서 한중이었다. 마찬가지로 섬서 사람인 종주들의 귀에 풍문이 들어왔다.
믿기 힘든 소문들 중에 연배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당대 마광익주는 몹시 어린 자라 했다.
지금도 뭇 사람들이 불신하는 얘기였다. 천하가 넓고 소식통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탓이었다.
헌데, 혹여 사실이라면.
진정 낮은 연배로 입황성 흑색의 위계에 올랐다면 실로 비범한 재능을 지녔을 것이다. 출신이 얼마나 뛰어나든 마찬가지였다. 강호의 신비로 봐야 했다.
눈앞에 있는 자가 그랬다. 몸을 쓰는 자질만으로 암동월시법을 벗어났다. 수려한 용모에는 앳된 티가 감돌았다.
명적 소리와 함께 놈 앞에서 현현한 광검 무리도 입황성의 정예로 볼 만했다.
저놈이 아니면 누구도 당대 마광익주가 될 수 없다.
반쪽짜리 강호인이 그녀의 삶을 망쳤다. 관부와 강호에 애매하게 발을 걸친 회색분자가 서안 강호에 개입했다.
제 잘난 듯 감히 칠대문중의 일에 훼방을 놓았다.
“이…….”
위일화의 눈썹이 매섭게 치솟기 시작했다. 분노가 공황을 이겼다. 노화를 띤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렇게 될 줄 몰랐나? 민생을 그리 망가뜨리고도.”
마광익주 정연신은 차분히 물었다.
분노는 그에게도 있었다.
이 잡것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임무라서 수행한다는 느낌이었다. 본래는 이놈들이 패검종의 원로원주를 데려오길 바랐다.
귀백신검 여소향. 패검종파 사마외도의 총책임자라 했다.
그녀라면 사라진 종남제자들의 행방을 알 것이다.
설령 그녀가 하계에 무관심한 신선처럼 행세한다 해도, 여기 모인 잡것들을 정리한다면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정가장의 지맥을 살핀 장본인이라.’
패검종주와는 또 다른 은원이다.
지금 정연신의 뇌리에 자리한 자는 귀백신검뿐이었다. 곧 완성될 안법 역시 온전히 그녀를 분쇄하는 데 중점을 뒀다.
패검종 원로원주, 패검종주의 유모.
서안 칠대문중이란 놈들은 징치받아야 마땅할 디딤돌이다. 자신을 서안 지배의 공물로 삼아 죽이고자 한 속내를 꿰뚫은 지 오래였다.
놈들은 민초들의 목숨도 가볍게 다뤘다. 여기서 끝맺고 귀백신검이 찾아오도록 만들어야 했다.
툭.
검마문주가 남긴 칼의 파편을 걷어찼다. 모래알에 황금빛으로 스며 있던 햇볕이 사방으로 이지러졌다.
순간 위일화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이리 무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타지의 무인이 감히!”
“대치가 길었지.”
정연신은 제 할 말만 하며 검을 뽑아 내렸다.
섬서 서안은 온갖 나라들의 수도였다. 능히 대주급 임무지가 될 만했다. 사마외도 칠대문중 또한 굉장히 유명한 문파들이다.
일의 규모가 무지막지하게 커진 만큼, 임무 하나가 끝맺어지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드는 듯했다.
이래선 안 된다. 단기 결전은 정연신의 삶에 깃든 요결이었다.
스윽.
대도시 서안의 만인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협곡 위쪽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북명의 새하얀 검극이 하늘을 짚었다.
귀밑머리를 스친 상단세였다. 온몸에서 일어난 경파가 옅은 흙먼지를 사방으로 밀어냈다.
검뢰섬릉식, 심극기린.
“이제.”
정연신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열 호흡 이상 쓰지 않겠다.”
* * *
호광성 양양.
입황마가는 격변을 맞이했다.
황실 무공 금선팔법을 볼모로 삼던 주연정이 축출되었다. 완전히 내몰렸다. 실각이란 말이 옳을 정도였다.
방계 황족이란 신분도 무의미했다. 세월을 되돌린 태상가주의 위신이 지고한 까닭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패협 마연적이 돌아왔다. 석년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외양 그대로 강철을 닮은 절세고수였다.
“저, 저…… 도대체 무슨…….”
“허어, 참말이었다니.”
“내가 목도한 게 사실이었단 말인가!”
“대체 어찌?”
“자네들, 아무것도 모르는군. 당대 마광익주께서…….”
“닥쳐! 경거망동할 일이냐?”
오래된 신검이 새롭게 담금질되어 막강한 힘을 담았다. 귀환이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당장은 세상이 몰라야 했다.
그리되면, 패협의 무공은 천하 강호를 아울러 무궁무진한 효용을 발할 수밖에 없다.
온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암검이 될 터였다. 입황성이 열세인 때에 큰 무력을 얻은 것이다.
패협의 반로환동을 아는 자들은 마가의 식솔들뿐이었다.
주연정을 따른 자들조차 태상가주의 말 한마디에 단전을 폐했다. 누군가가 발설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함구를 믿을 만했다.
그런 한편으로, 마가주 마진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왼쪽의 흑색 소맷자락을 헐렁거리며 걷는 순간에도 고민했다. 승단식이 마무리되고 각 무력대의 잔여 무인들이 임무를 나가기 시작한 때였다.
본성의 길이 황량해진 만큼 마진의 마음도 허허로웠다.
‘정가동공…….’
오른손에 낀 서책이 무거웠다. 조카 정연신이 새롭게 집필한 비급이었다.
온갖 세맥과 전신 혈도를 모두 다루는 원본이 아니다. 동공의 큰 흐름을 이루는 얼개만 기록되어 있다. 굉장히 열화된 사본에 가깝다는 의미다.
숙부와 조부가 조카의 신공을 가문에 풀기 꺼린 탓에 만들어졌다. 정연신이 그들에게 선사했다.
―오히려 이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익히기 쉬운 까닭이지요. 장담하건대 원숭이도 연성할 수 있을 겁니다.
차분한 필체로 작성된 서찰과 함께 보내졌다. 조카가 마광익주로서 승단식의 심사관으로 임하기 전날이었다.
사안이 중한 까닭에 청안마검 청명이 몸소 전달해 줬다.
그 유쾌하고 밝으면서도 묘하게 날카로운 명족 검객은 웃는 듯 찡그리는 듯 기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전대 대주로서 속내를 읽히 힘든 청명에게 익숙했다. 간단한 안부만 묻고 헤어졌다.
그리고 몹시 후회했다.
조카를 떠올리면서였다. 마진은 생각했다. 얼굴이라도 볼 것을.
그간 아주 공사다망했다. 주연정 파벌을 정리하고 공과를 묻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을 썼다.
가문의 위신을 바로 세우자면 그래야 했다. 이제야 조금쯤 여유가 생겼을 정도였다.
저벅.
고요해진 본성 내성으로 들어섰다. 시야가 환해졌다. 순백의 대리석 벽면이 팔방을 둘러싼 까닭이었다.
성주의 거처에 당도했다. 입황성에서 가장 적막이 깊은 곳이었다.
스윽.
수문 무사 여섯 명이 그에게 예를 취했다. 말 없는 포권이었다.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쳤다. 나락살 마진은 본래 오만한 초고수였다. 기질이 그랬다. 오래된 죄책감을 일으키는 조카 앞에서나 쩔쩔맬 뿐이었다.
무사들도 익숙하다는 듯 손을 내렸다.
마진은 잠시 멈칫했다.
‘아니…… 혹, 연신이가 내게 배웠나? 마가 핏줄답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하던데…….’
실없는 생각과 함께 층계를 올랐다. 둥글게 이어진 계단이 내성 꼭대기에서 멈췄다. 거대한 석문이 자리한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
멸망한 단씨 왕실에서만 쓰인 극상의 흑석이었다. 몹시 새까만 게 내성의 적막과 어울렸다.
성주 집무실.
두꺼운 울림과 함께 문이 열렸다. 몹시 자연스러운 허공섭물이었다. 한때 악수림에게 도전할 만했던 마진이 느끼기에도 새삼 경외스러울 정도였다.
‘이곳도 오랜만이로군.’
빈 소맷자락을 정돈한 그가 문지방을 넘었다.
청아한 수풀 내음이 끼쳐 왔다. 눈앞으로는 용처럼 몸을 뒤튼 나무줄기들이 시야를 채웠다.
입동이 지났는데도 푸른 잎사귀를 사방으로 뻗어낸다. 무성한 풀냄새가 과하지 않고 향긋했다.
좌우로 낯익은 인물들이 자리해 있었다.
허나 마진은 정면만 바라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아 올리면서다. 입황성의 예법이었다.
“성주님을 배알합니다.”
“마가주.”
영롱한 목소리가 울렸다.
입황성주였다.
굵은 나무줄기에 비스듬히 앉아있다. 녹빛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은 윤기 이상의 무언가를 띠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천하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느낌을 일으킨다.
숲의 심연이 담긴 듯한 눈도 그랬다. 진녹색 눈동자에서 삼라만상의 이치가 감돌았다.
마진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고자 왔네?”
좌측에서 명랑하게 울렸다. 마진은 시선을 살짝 틀었다. 흑색 장포를 입고 가부좌를 튼 소녀였다. 등 뒤로 기다란 창이 대충 널브러져 있다.
그녀도 마진을 힐끗 쳐다보는데, 새까만 단발에서 햇볕이 은은하게 물결쳤다.
입황신창 악수림이었다.
마진이 미간을 모았다.
“신검부대주께서 어인 일로?”
“벌 받는 중이야. 너 못 들었구나?”
“무슨.”
“그 맹회에서 온 예씨 애랑 한바탕했어. 섬예 곁에서 어슬렁거리려고 하길래. 성주께 무례하게 굴 때부터 거슬렸는데 말이야.”
악수림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진의 미간 주름이 짙어졌다.
“맹회의 인물이 연신이를?”
“정말 가관이었지. 너, 숙부 노릇 하려면 알아서 잘 좀 쳐내야 할 거야. 얼마 전에는 신씨네에서 매파를 보내니 어쩌니 하던데. 웬만큼 고절하고 호탕한 사람이 아니면 배필로 부족하단 거 알지? 잘하라고. 우리 섬예의 뜻이 제일 중요하지만.”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악수림이 입꼬리를 올렸다. 약을 올리는 듯했다.
반대편에서 호랑이 울음 같은 헛기침이 터지는데도 생긋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다소 꿋꿋해 보였다.
‘본인 얘기 아닌가?’
마진이 익히 아는 모습이다. 패협을 상관으로 뒀을 때의 입황신창이 저랬다. 곧 죽어도 반골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
부친의 성품과 악수림의 자질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죽였소?”
“아니. 무공이 말도 안 되게 고강하더라. 제대로 했으면 팔다리 하나쯤 못 쓰게 만들어 줬겠지만, 도중에 관뒀어. 본의는 아니었는데…….”
악수림이 말끝을 흐렸다.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면서다. 묵묵한 입황성주를 가운데 둔 채, 건너편에서 가부좌를 튼 패협이 눈매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수려하고도 짙은 얼굴선에 어떤 고집이 넘쳐 흐르는 듯했다. 젊음을 되찾은 마진의 아버지였다.
그 사건을 부친이 중재한 듯했다. 소름 끼치는 전음 따위를 날렸을 것이다.
어느 안전에서 율법을 어기는가, 내 단단히 징치하리라. 더 들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부친은 예로부터 그랬다.
‘본인부터 징치해야 하실 분이…….’
마진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저런 성품으로 나라의 안위와 직결되는 임무를 어찌 받을까.
마가에 제대로 된 인물은 당대 가주뿐이다. 실로 통탄스러운 사실이었다. 무슨 일로 성주를 접견하고 있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보고를 드리고자 왔습니다.”
마진은 성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본가의 가전무공을 새로 들이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고해야 할 사안인지라, 안부를 여쭐 겸 기별을 넣었나이다.”
입황성주는 무신(武神)이다. 본성에 편입된 모든 무학을 관할한다.
천금무고와 신검단, 본성 산하 가문들의 무공을 전부 열람할 권한을 지녔다. 없던 무공을 창안하여 내부로 들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입황성주의 허가를 거쳐야 했다. 건국 이후에 이루어진 개파 당시에 본성 무공을 집대성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관례로 자리했다.
“마가의 홍복이구나.”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엇인지 말해 보라.”
“…정가동공입니다.”
마진은 부복한 채 대답했다.
입황성주의 눈이 가느다란 속눈썹에 잠시 가려졌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것이다.
잎새에서 산란된 햇빛이 그녀의 눈가에 내려앉았다. 미려한 눈시울 아래로 깊은 음영이 아롱졌다.
새하얀 얼굴에서 절세의 무공을 방증하는 미(美)가 흘렀다.
여전히 의중을 짐작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뗐다.
“섬예의 것을 말함인가?”
“예, 마가가 은혜를 입었나이다.”
“네 말이 옳다. 합화신공에 어울리겠구나.”
“가문의 일이 많아 길게 뵐 수 없음이 송구할 따름입니다. 짧게나마 보고를 올렸으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관례는 관례일 뿐이다. 성주는 율법 위에 있다. 뭇 대주와 가주들이 새로운 무학을 고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실로 모든 무공을 훑어보지는 않았다. 의례적인 보고였다.
그 편이 아랫사람들에게도 편했다. 성주의 품평은 초고수들조차 긴장시키는 법이었다.
스윽.
서책을 쥔 마진이 일어섰다.
열화 비급이라 해도 정가동공이다. 무공의 의념을 이루는 서두는 원본과 같다.
사천성에서 마진과 마연적이 함께 읽었던 첫 장과 동일했다. 조카의 개인사가 서술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마가의 치부는 만방에 알려져도 된다. 허나 연신이의 의념이 들어간 요결은…… 그래, 일기와 같다 했지.’
마진은 지레 안도했다.
성주의 맑은 음성이 울리기 전까지였다.
“이리 가져와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