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46
◈ 징벌, 인연 (3)
여소향의 눈이 부릅뜨인다.
찰나였다.
모친의 터전을 멸문시킨 불구대천의 원수가 상대인 까닭일까. 정연신의 마음에 요악스러운 느낌이 일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나. 태연하고도 무심한 얼굴로.
―외유를 나서던 길이었지. 분에 넘치는 땅이 내려다보이더군. 자고로 비옥한 토양은 천하목의 먹잇감이 되는 법이니, 네 가문은 황폐화되어야 마땅했느니라.
―고작 그 이유로? 내 모친께서 고른 집안에는 민초들도 많았다.
―가련하도다. 종주의 높은 뜻에 일조하였으니 감사히 여기지는 못할망정.
십삼천 핵심 초고수와의 격전이 끝에 이르렀다.
정연신은 그녀의 하나뿐인 팔을 통째로 베어 올렸다. 패검종의 원로원주는 호신강기보다 검력으로 훨씬 유명한 자였다.
마광익주의 최후 절초를 맨몸으로 견딜 계제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투명하게 꽂히던 겨울 햇빛이 여소향의 오른팔에 아른아른 흔들린다. 싸움의 끝을 고하는 듯한 음영이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기어이.
“커허……!”
귀백신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입매를 잘게 경련하면서다.
이전의 고고한 표정이 부서졌다. 화상처럼 내달려간 고통이 노파의 뇌리를 저미는 듯했다.
발밑의 어검이 힘을 잃었다.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놈……!”
여소향이 몸을 뒤튼다. 몸뚱이와 두 다리만 남은 채였다.
허공에서 흩뿌려지는 피 속에서 갈 곳을 잃은 그녀의 공력이 투명하게 터져댔다. 세맥의 잔여 진기조차 엄청나게 거대했다.
정연신은 방심하지 않고 왼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상대는 한때 자색과도 자웅을 겨뤘을 인물이다.
패공과 세월로 영락한 자라 해도 수십 개의 구명절초를 지니고 있을 법했다. 발끝으로 어검을 부릴지도 모를 일이니, 완전히 짓눌러야 한다.
‘큭.’
입안으로 신음을 삼켰다.
청염일식은 전신 세맥의 내공을 검로에 완전히 일치시키는 검초다. 온몸 근육을 함께 혹사시킨다. 격발형 검식의 최후 절초답게 반동이 컸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녹진해져 오는데, 초식의 반탄력에 지금 몸을 맡겨선 안 될 노릇이었다.
‘한 수. 마지막 한 수만……!’
전신을 할퀴다시피 한 자상조차 이용해야 한다. 칼바람에 쓸리는 핏물 탓에 살갗마저 서늘해지는 와중이었다.
정연신은 출혈을 얼음물로 삼았다. 날카로운 통증들을 칼날처럼 모아 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다.
후우욱!
여소향과 함께 떨어지면서다.
이토록 짧은 체공 시간마저 초고수에게는 십수 합의 여유가 된다. 주먹 쥔 왼손으로 그녀의 복부를 후려쳤다.
쿵!
정통으로 작렬했다. 묵직한 경파가 여소향의 호신강기를 두드렸다. 권면에 몹시 단단한 질감이 끼쳤다. 노회한 초고수다웠다.
큼지막한 경맥의 상실로 내공 흐름이 뒤틀렸을진대, 무형의 진기 방패를 굳건히 세운 것이다. 힘 빠진 일격에 부서질 만큼 허술한 내공 방벽이 아니었다.
쿵! 쿵!
정연신은 권격을 멈추지 않았다. 날개뼈에서부터 주먹까지, 시화무극수의 진기 흐름을 거세게 순환시킨다.
혈도가 갈려 나가는 듯한 느낌. 정가동공으로 닦이지 않았다면 영구적인 손상을 봐야 할 터인데, 육신의 대종사에게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저 고통만 격해질 뿐이었다.
주먹에서 능법광륜기의 공력 파동이 만발했다. 제삼초 권화였다.
무색으로 이지러져 꽃다발처럼 피어나는 경력이다. 힘이 힘을 때리며 거듭된 발경력을 만들었다.
‘네 무공을 폐한다.’
여소향의 하단전 어림에 무더기로 내리꽂았다. 내공 방벽이 경파의 파편과 함께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줄곧 상성이 좋지 않았던 패공 진기가 능법광륜기에 풀어 헤쳐진다. 이내 정연신의 권격이 하단전까지 파고들었다.
쩌저저정!
주먹을 갖다 댄 순간, 스물네 번의 타격이 들어갔다. 노괴물의 복부에서 반투명한 꽃잎들이 흩날리는 듯했다. 전부가 경파의 부스러기들이었다.
호신강기를 파쇄하고, 하단전의 단단한 내공 껍질을 산산조각으로 박살 냈다. 여소향의 입에서 핏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땅바닥이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방심하지 않아.’
정연신은 피투성이가 된 왼쪽 어깨를 젖혔다. 환강을 시전할 여력은 없으나, 진벽으로 족하다.
얼굴의 주름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여소향의 중단전을 향해 마지막 권격을 뻗었다.
시화무극수 제이초였다. 남은 힘의 흐름이 모조리 주먹으로 수렴한 순간.
그의 권면이 명치를 살짝 건드렸다.
오랜 시간 회전한 광륜으로부터 최후의 공력이 뻗어나갔다.
쿠웅!
묵직한 경파가 터졌다. 깊게 파고들어 가서 중단전까지 부숴 버렸다. 파삭거리는 타격감을 분명히 느꼈다.
“허어―!”
노괴물이 고통 어린 헛숨을 내뱉는 순간, 두 초고수는 동시에 수풀 바닥으로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풀잎 새로 짧게 울렸다. 주변으로 잘게 흩어진 핏물들과 함께였다.
여소향의 오른팔은 그 뒤편으로 나동그라졌다.
시대를 풍미한 검객의 팔이 흙바닥을 검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언제 격렬한 폭음을 터뜨려댔느냔 듯이.
몹시 을씨년스러운 광경이었다.
후우.
짧은 날숨과 함께, 정연신이 천천히 무릎을 짚고 일어서는 동안.
지켜보던 군중들은 제각각의 행색으로 경악을 표했다.
입을 멍하게 벌리든,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묘한 감상을 드러내든, 누구 한 명도 목소리를 내뱉지 못했다.
귀백신검의 어검 전설이 깨졌다.
“…….”
고작 몇 호흡이 흘렀을 뿐인데 모든 이들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협곡 도처에서 지켜보던 민초들부터 언덕 가까이로 접근한 강호인들까지 그랬다.
패검종 원로원주가 앳된 신예에게 패했다. 오른팔이 날아가고 무참히 격타당하는 광경을 모두가 봤다.
그녀는 대방파가 셋이나 터 잡은 섬서에서도 능히 손꼽히는 초고수로서 긴 생애를 살아왔는데, 오늘 신예를 징치하려 내려왔다가 도리어 꺾여버린 것이다. 아주 참혹하게.
대월협의 크고 느릿한 바람결에 당혹과 불신, 충격이 맴돌았다.
적막에서 자유로운 자는 한 명이었다. 광예채주를 가장한 입황성 마광익주.
정연신은 무릎에서 손을 떼며 맨몸 상체를 곧게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힘겹게 입술을 뗐다.
“훌륭한, 선법이었어.”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건만, 세상사가 참으로 묘하군요.”
옆으로 다가선 제갈현이 말했다. 제갈세가의 대공자로서 깊은 심기로 경악을 갈무리하면서였다.
그는 생각했다. 삼 년 내에 강호 상층부의 판도가 바뀔지도 모르겠노라고.
선룡 제갈현은 맹회의 정문에서 자신의 부채에 올라탔던 마광익주를 떠올렸다.
‘패검종의 원로원주를 저리 만들게 될 줄은…… 정 대주의 업적이 몹시 크다. 보통 일이 아니야. 맹회가 뒤집어지겠군. 개파대전 때와는 파급력이 다를 터. 각 계파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힘들겠다.’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저걸 기어이 잡아 버리는구만. 언제 봐도 기이한 감각이란 말이지.”
반대편에서 태염룡이 다가왔다. 앞서 찬음쌍마의 일격을 막고자 다급히 쇄도하던 모습과는 판이했다.
터벅터벅 딛는 발걸음이 팔(八) 자에 가깝다. 허나 한량 같은 몸가짐도 오래 가지 못했다. 돌연히 멎었다.
한켠에 널브러져 있던 검 한 자루가 둥실 떠오른 탓이었다.
이기어검.
여령 찬음쌍마를 역으로 쓰러지게 만들고, 귀백신검에게 엄청난 견제를 가한 보검이 홀로 이동했다.
아래쪽 절벽을 향해서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연신은 묘한 음성을 들었다.
―얼굴을 들 데가 없어 네게 다가서지 못하겠다. 근시일 내에 찾아가마. 문전박대만은…… 하지 말아다오. 내가 미안하다.
다소 쉰 듯하면서도 고운 목소리. 언젠가 접한 바 있는 음성이다.
‘영천검귀 백서군. 하남성의 검존…….’
정연신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맥락 없이 도움을 주고는 영문 모를 이야기만 남긴다. 뭔데.
정가장과 연이 있는 인물이라 했다. 범상한 인연은 아닌 걸까. 오늘 일만 놓고 보면 그리 생각된다.
구명의 은혜를 받지 않았나. 귀백신검과 찬음쌍마의 합공이면 여느 대문파의 문주들조차 쉽게 보지는 못할 터였다.
이내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포권을 해 주고 싶으나 사파 두령을 가장한 탓에 그러지 못했다.
허나 그것으로 족했던 걸까.
순간 백서군의 보검이 살짝 흔들렸다. 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절벽 아래로 빛살처럼 사라진다. 아스라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만 남기면서.
곁에 있던 제갈현과 태염룡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강호 최상층부의 인연쯤 되면 어지간한 무공 비급과 동격으로 취급된다. 함부로 캐물을 계제가 아니었다.
“허어어…….”
폐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였다.
귀백신검 여소향이 가느다란 숨을 몰아쉬었다. 정연신의 발치에 쓰러진 채였다. 업보가 그녀의 양팔을 앗아갔다.
왼팔은 종남검선에게, 오른팔은 마광익주에게. 추락 직전에 마혈을 짚여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자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희미한 말소리 정도만 낼 만했다.
노괴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정연신이 입을 열었다.
“널 심문할 거다.”
“흐, 흐… 우스운, 소리를…….”
여소향이 입꼬리를 올렸다. 한마디도 끌어내지 못할 것이라 말하는 듯했다. 굉장한 결기였다.
팔 한쪽을 잃은 데다 하단전과 중단전마저 부서졌는데, 여전히 무인다운 기백을 발한다. 몸에서 아직 채 흩어지지 않은 공력도 굉장했다.
정연신의 머리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싸우기 전에 큰소리를 쳤지. 부끄럽지 않나? 지금 패자의 배짱보다 더 우스운 게…….”
정말로 의아했던 탓에 말끝을 흐리자, 여소향이 입을 다물었다.
정연신은 더 이상 노괴물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십삼천의 수뇌이니만큼 보통 심문으로는 입을 열지 않을 터였다.
‘고문에는 재주가 없지만…….’
괜찮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새까맣게 물결치는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련검매 백미려였다.
하얀 얼굴에 걱정 어린 표정으로 달려오고 있다. 변복 탓에 재질이 거친데도 유려하게 펄럭이는 흰색 옷자락이 돋보였다.
그녀는 순정한 마공 진기를 지녔다.
그런데도 보혈대주 진 선배와 같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청명과 함께 마광익에서 가장 믿음직한 선배였다.
정혜의 위치는 그녀가 알아봐 줄 것이다. 진기를 주입하는 것부터가 무시무시한 고문일 터였다.
한편.
“귀백신검이, 귀백신검이 졌다!”
“재기불능…… 아니, 죽은 거 아닌가?”
“강호에 또 하나의 초신성이 피어났군. 가히 괴력난신에 가깝다.”
“알려! 알려야 해!”
협곡 전역에서 뒤늦은 난리 통이 일어났다. 강호를 축소해 놓은 듯했다.
사방에서 전서구가 날갯짓을 해댔고, 몇몇 군중들은 정연신과 그 일행을 유심히 살폈다.
저벅.
정연신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귀백신검을 힐끗하고 태염룡을 향해 짧게 턱짓한 직후였다.
‘내가 들쳐 업으라고?’ 따위의 반문을 무시하면서 발을 디뎠다. 몇 안 남은 수풀에 비친 태양빛이 소란스레 반짝였다.
* * *
명나라는 제국이다.
국력의 근원인 민생을 허투루 내버려 두지 않는다.
대명률 위에서 칼질을 일삼는 강호인을 가만히 두면 백성이 피해를 입고, 그리하여 민심이 흉흉해지거나 공납이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치세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관과 무림은 불가분이다.
따로 떨어질 수가 없다. 강호가 민생 위에 펼쳐진 세상인 까닭이다.
객잔과 여러 상점으로부터 자릿세를 걷고 사는 흑도 방파조차 마을의 지현에게 상납금을 바친다.
입황성 백색무사의 방문을 받지 않으려거든 그래야 했다. 그들은 웬만한 낭인 십수 명분의 무력을 지녔고, 작은 문파쯤은 단독 임무로 깨부수러 온다.
어떤 식으로든 관리가 입황성에 고변하는 순간 여러 문파의 현판이 내려가곤 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상납이었다.
흉년.
부패한 관리와 강호 문파의 합작이 어느 때보다 극성에 이르는 시기.
두두두―
호화스러운 마차가 관도를 달렸다. 두 마리 준마가 이끄는 가운데 흙먼지가 길게 이어졌다.
드넓은 길거리가 숨을 죽였다. 좌우로 뻗어 있는 점포와 상점들의 창문이 슬쩍 닫히거나 열렸다.
목이 달아나지 않으려거든 쥐 죽은 듯 있어야 했다.
그간 관망하고 있던 지부대인이 행차한 것이다.
민란에 가깝던 섬서 서안부의 방파대전이 종식됐다. 대도시의 이권이 걸린 질서 조율이 이루어질 차례였다.
마차에서 흘러나온 음성들이 요란한 바퀴 소리에 섞였다.
“광예채주라.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 내 기껏 은자를 자루로 뿌렸는데, 그 미친놈들이 온통 사라졌단 말이지. 땅 밑으로 말일세.”
“사파 강호의 생리 아니겠습니까? 저들끼리 멸문하고 멸문당하지요.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무리에게 어떤 신의를 기대하겠나이까.”
“본관의 헤아림이 부족했다는 겐가?”
“아닙니다. 소생은 그저…….”
“그저 농인 것을. 사람 참.”
“여하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귀백신검마저 이겨 먹은 사파의 두령이라 했습니다. 필시 극악무도한 무뢰배일 테지요.”
“본관의 태생을 모르는가? 비천한 무인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공은 글자를 깊이 알아야 하는 공부이니, 무위가 그만큼 높다면 불학무식한 자는 아닐 터. 관무불가침이란 물정 모르는 자들이나 입에 담는 말이지.”
“암요. 알지요.”
“그자가 한낮에 방문한 대명의 지부대인을 어찌할 수는 없다. 이 몸은 그저 처세에만 조금쯤 신경을 기울이면 돼. 너야말로 입을 다물고 있거라. 구태여 성질을 자극하지 않도록. 공납을 두 배로 거두어 줄 종자들 아닌가.”
“예, 지부 어른.”
그때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목적지에 당도한 것이다. 별채를 지닌 객잔 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