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74
◈ 무위 (2)
입황성 일행은 청보화를 뒤따라 수풀들의 요새에 들어섰다. 정연신만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명족의 안법으로 한참을 훑어보더니, 암묵적으로 옆자리를 허락한 것이다.
“곧장 축객할 수도 있으나, 어찌 됐든 환영하네.”
천주지문.
문파이자 마을이라 했다.
은밀히 알려진 대로 몹시 넓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산세를 모두 문중으로 쓰는 듯한데, 끝이 없이 펼쳐진 땅의 전역에 신령스러운 느낌이 깃들어 있다.
한겨울에 푸른빛 선명히 살랑이는 잎새들부터 그랬다. 몽환적인 질감이 느껴졌다.
입황성의 고위 인사가 아니었다면 발을 들이기도 어려웠을 곳이다.
‘술법진.’
정연신은 신묘한 기운을 살갗으로 느끼며 두 눈으로 훑었다. 널따랗게 번진 산들바람이 주변을 반투명히 휘감은 모양새였다.
주변을 둘러싼 고목들의 잎사귀가 흐리게 나풀거리는데, 절경이 따로 없었다.
혈염교 본단을 감췄던 이염혈령진과 유사한 공능이다.
산세 입구에서 느낀 것보다 짙다. 이러면 찾으려야 찾기가 힘들 터였다.
개방과 하오문조차 천주지문에 대한 정보를 구하지 못할 만했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암야전이 이 산을 파헤치고 있다 하던데, 사실인지요?”
“늘 그랬네. 그자들과는 오래된 선조들로부터 엮인 악연이 깊지. 기질적으로 양립하기 힘든 자들일세. 명족이 아니라 암족(暗族)으로 불려야 마땅한 것들이지.”
천주지문의 문주, 청보화가 대답했다. 그녀는 풀잎 끝단을 밟으며 허공을 부유하는 것마냥 걷고 있었다.
뒤쪽에 증손자인 청명이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도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청명은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뒷머리에 손깍지를 꼈다.
작게 흘러내린 청색 소맷자락 위로 굴강한 검객의 핏줄이 새파랗게 꿈틀거렸다.
“독문무공을 견주는 비무라…… 대주가 아니면 믿음이 안 간단 말이지. 이왕 온 거, 호수 너머로는 가 봐야 하는데. 우리 애송이들이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신소빈이 가느다란 속눈썹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호수 너머? 어째서요?”
“아우가 누워 있거든. 청수(淸樹)라고 하는데, 우리 대주와 정반대로 활기찬 아이야. 뭐, 정이 많은 건 꽤나 비슷해.”
“응? 마검 선배한테 동생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걸요.”
“무덤 얘기야. 십 년쯤 됐나. 정찰을 나갔다가 암야전의 궁술 절기에 당했어. 십리일살(十里一殺)이라고, 일격의 근원지를 파악하기 힘든 무공이지. 워낙 빛살 같아서 아무도 잡아내지 못했어.”
“아.”
신소빈이 입을 다물 때였다.
앞서 걷던 정연신은 짐짓 담담한 척 입술을 뗐다.
“흉수가 누구지? 초고수일 텐데.”
“괜히 얘기했네. 우리 대주, 눈매에 힘이 들어가 있는데…… 보아하니 아직 못 잡은 모양이야.”
청명은 쉽사리 얘기해 주지 않았다. 증조모인 청보화의 뒷모습을 힐끗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혈족의 일이니 대답을 강요하기 힘들다.
청안마검이란 별호는 아우의 원수를 갚고자 독하게 내치던 손속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입황성의 청색고수들은 수시로 단독 임무와 보상을 받아 갈 수 있으니, 강호에서 손꼽히는 살수 집단인 암야전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무림을 종횡하고 수행을 쌓은 것일지도 모른다.
신비롭게만 다가오던 선배 검객의 내면을 접한 느낌.
정연신은 문득 직감했다. 요양이 순탄치 않으리라고. 녹진해진 전신 혈도와 근육이 더욱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청 문주님, 입황성에 지원을 청하지 않은 연유가 궁금합니다.”
그가 물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명족 노인이 입을 연다.
“순수한 혈통의 가치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자들에게 도움받는다? 아니 될 일이야. 입황성과의 연은 갈수록 옅어질 수밖에 없네. 그들에게서 우리 씨족의 흔적을 찾기란 점차로 어려워진 까닭일세.”
청보화의 말소리는 한 맺힌 노랫가락 같았다. 힘이 실린 채 이어졌다.
“성주는 더 이상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지 않고, 낯선 대지에 뿌리내린 씨족은 새것을 만들기보다 한족들의 헌것을 가다듬지. 건국기에 힘없는 씨족을 유린한 옛 무공들을 말일세.”
“무공에 큰 의미를 부여하시나 봅니다.”
정연신으로서는 크게 와닿지 않는 기질이었다. 그에게 무공은 삶을 연장시켜 줄 수단에 불과했다.
타고난 상단전 덕에 무학을 즐길 수 있다 해도, 본질은 잊히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청보화가 낮게 웃었다.
“더하여, 입황성의 손발은 심히 부족하지 않나? 신검단주가 저 지경이니 그쪽의 형세를 짐작할 만하네. 그 강대했던 신검단 십칠대의 세가 기울어지고 있겠지. 단주라도 서둘러 회복시키고자 본문에 온 게 아닌가. 더불어 자네도.”
불현듯 어린 대주를 흘긋 돌아본다.
몹시 큰 키에, 허리를 단단히 펴고 걷는 노파의 눈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었다.
강대한 공력을 안광으로 연신 번뜩이는데 마냥 패도적으로 와닿지 않는 것도 그러했다. 오래된 명족 문파의 수장은 고목나무 같은 자였다.
정연신은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서 상처 많은 태풍을 봤다. 얼기설기 갈라진 소용돌이였다.
‘보통의 완성도는 저 눈에 차지 않겠구나.’
마광익주는 생각했다. 그간 자신이 만든 무공들이 천주지문의 눈높이를 넘어설 수 있을까.
옆 뒤에서 걷고 있는 신소빈과 헌원창의 기척이 유난히 활기차게 느껴지는 와중에, 그는 회복과 암야전이라는 과제를 맞이했다.
* * *
“봉공(奉公). 천주지문이 문을 한차례 열었나이다.”
“지맥을 짚어 봤나?”
“예. 근시일 내에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천뢰궁단(天雷弓團)을 대기시켜라. 다시 나오는 놈들을 친다.”
“봉공이시여, 자칫하면 입황성의 눈에 발각될지도 모릅니다.”
“흉년, 난세. 놈들의 정보력이 가장 취약해지는 시기다.”
“…속하의 기우가 과했습니다.”
“그래. 그간 놈들이 신검단 십칠대를 무리 없이 운용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냐. 거렁뱅이, 잡배들과는 궤가 다른 관아의 소식통을 썼기 때문이지. 천하 전역에 펼쳐진 관청과 역참 말이다.”
“…….”
“허나 흉년의 벼슬아치들은 토착 문파의 위협과 뇌물에 굴하지 않는 청백리가 될 수 없다. 재물을 욕심내지 않고 품행이 깨끗한 관리는 태평성대에나 나오는 법이니, 근래의 입황성은 맹인 검객과 다를 바 없느니라. 놈들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열일곱 보검을 망나니처럼 휘둘러대는 거다. 덩치만 터무니없이 커서는.”
“천주지문은 대개 입황성에게만 문을 개방합니다. 어쩌면 만신창이가 된 신검단주가 호송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자를 호위하는 대주급 인사가 함께 왕림했을지도…….”
“마광익주를 생각하고 있다.”
“허면 더욱 은밀히 접근해야 합니다. 당대 마광익주에게 죽은 초고수가 많습니다. 사천과 섬서에서는 연배를 넘어선 괴력난신이란 말이 흔하게 퍼지고 있다 했습니다.”
“들었다. 스스로 법력 무공을 창안하여 쓰는 자. 귀백신검과 섬서제일마가 상극 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귀천했다지.”
“여령의 소령주가 죽은 자리도 숙고해야 합니다. 전대 수석호법과 수왕문주를 한 자리에서 격살했습니다. 양양에서 개선행진까지 해 가며 업적을 알렸다는데…… 그간의 행적을 놓고 보면, 오만한 성품이 흠보다는 장점으로 자리 잡은 초고수일 듯합니다.”
“뇌화궁진(雷華弓陣)을 짜라. 열흘 이상 공력을 모아두면, 그 기운을 본좌가 취하여 십리일살을 가하겠다.”
* * *
정오의 태양이 눈부셨다.
넓게 펼쳐진 화원에 햇살이 고요히 스며 있는데, 주변을 성벽마냥 둘러싼 고목들로 푸른 장소였다.
“…….”
침묵만이 존재했다. 함께 자리한 자들이 많은데도 그랬다.
천주지문의 삼십여 무인.
고수 아닌 자가 없다.
엄청나게 높이 치솟은 나뭇가지를 딛고 선 채 팔짱을 끼거나 뒷짐을 진 남녀노소, 고개를 위로 꺾어서 올려다봐야 할 나무줄기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소년 소녀들…….
누에나방을 기르는 양잠(養蠶) 기법이 발달한 듯 질 좋은 비단옷을 가지각색으로 걸쳤고, 저마다 신검의 칼날 같은 귀를 지녔다.
온몸에 바람결 같은 기세를 두른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옷자락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모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간의 사정을 모두 헤아리고 있는 듯, 입황성 일행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한다.
계곡의 물결이 굽이쳐 흐르는 소리와 소슬바람이 풀꽃을 매만지는 기척만 유별나게 뚜렷했다.
“그거 내리고, 이리 와.”
정연신이 말했다.
뒤에 있던 태염룡이 기다렸다는 것마냥 신검단주의 가마를 덩그러니 내려두고 왔다. 뒤쪽 손잡이를 쥐고 있던 헌원창과 함께였다.
그때까지도 코 고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천하제일을 다투는 자색 검객은 홀로 태평했다.
“대주님을 믿는 거라니까요.”
대주의 팔꿈치에 어깨를 붙인 신소빈이 작게 속닥거렸다.
길게 땋인 머리칼의 끝단이 정연신의 팔뚝을 간질이는데, 그는 움찔하기보다 부러움을 느꼈다. 소빈이에게는 아직 질풍노도의 시기가 오지 않았나 보구나.
‘어려서 좋겠다.’
정연신은 이 년 조금 넘게 남은 수명을 헤아리다가 입을 열었다.
“소빈아. 처음은 너다.”
동시에 움찔 반응한 그녀의 맑은 눈망울이 정연신을 올려다본다.
“짐작했어요. 뭘 보여 줄까요?”
“네 마음대로.”
마광익주가 명했다.
합, 하고 기합을 지른 신소빈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한 줄기로 흔들리는 머리칼에 햇볕이 물결치는데, 수풀을 밟는 발밑에서부터 흐릿한 아지랑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환익보의 전조였다.
그녀는 정연신의 정통 무맥을 계승했다.
타고난 감각으로 섬예의 개별 무공을 적재적소에 쓴다.
적의 빈틈을 찌르는 마광결 투로는 결정적인 순간에만 사용하는데, 감각이 따르는 한 그러는 편이 일대일 생사결에 적합하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양쪽이 두루 집대성된 광예결은 집단전에서만 운용했다. 그리 해도 되는 재능이었다.
“대종사들의 시대는 저물었네.”
천주지문 측에서도 몇 사람이 걸어 나왔다. 가운데에 청보화가 있었다.
“달마대사, 장삼봉, 천마…….”
그녀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옛것을 추앙하는 자들이 새것을 비웃고 조롱하는 시대일세. 건국 때부터 그러했네. 선대 조사들의 뜻이 깃든 무공으로 우리 씨족의 미색을 탐했지. 남녀를 불문하고 말일세. 그래서 우리는 옛 무맥을 배척하고, 그들의 문물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네. 오래된 결정이지.”
“많은 모순이 보입니다.”
우두커니 선 정연신이 담담히 지적했다. 청보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건 아집과 무(武)뿐일세. 허나 그조차 본문의 전통이지. 자네 같은 대종사의 눈에 우리가 거슬린다면, 그 손에서 만들어진 무공으로 본문의 견문을 찢어발기면 될 일이네.”
곧이어 그녀의 주름진 손가락이 뒤쪽을 멀리 가리켰다.
“저게 천하목에서 가장 굵은 줄기일세. 천주(天柱). 하늘의 신령스러운 기둥이지. 저 아래에 자네들이 원하는 호수가 있네.”
앞서 청명의 사제라는 정난송이 ‘신령스러운 기둥’을 운운했다.
그 말이 과하지 않았다.
정연신은 문득 깨달았다. 동시에 눈앞이 환해지는 듯한 충격을 감내했다.
지금껏 하늘이라 착각하고 있던 것이, 실은 시야를 전부 채우고도 무지막지하게 광활히 뻗어나가는 푸른빛 나무줄기였다.
이 순간 골짜기 전체를 덮고 있다. 갈색이 아니라 투명하게 이지러지는 껍질로 하늘을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무공을 볼 걸세. 무공의 완성도를.”
청보화가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청명의 사제란 자가 나섰다. 암녹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사내. 정난송이라고 불린 검객이었다.
그는 곧장 마주한 신소빈을 바라보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로 정연신을 응시했다.
“당신이 저 파문제자의 상관이라 들었소.”
“맞다.”
마광익주는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 순간 정난송의 눈에 시린 빛이 스쳤다.
“감당하기 힘든 검을 품었구려. 저 청명이란 자는 너무나 날카로운 탓에 사람 간의 신의마저 베어 버리는 자요. 내 언젠가 저자의 검을 부러뜨리고자 긴 시간을 고련했는데, 아직도 자신이 없을 정도요.”
“그렇군.”
“이 소녀의 무공으로 당신을 가늠해 보겠소. 본래 독문무공에는 많은 것이 담기는 법이니, 당신의 그릇과 심성을 헤아릴 수 있을 거요. 우리 씨족의 눈은 당신네 한족과 다르오.”
“그렇지 않아도 네 무공이 대단하다는 게 느껴진다. 안법 진기의 얼개를 몹시 필사적으로 짠 데다, 양발 용천혈에서 번지는 균형감으로 짐작하건대 마음을 검처럼 벼려 둔 게 분명해. 경이로운 일념이다. 본 대주가 견문을 넓혔어.”
정연신은 다소 감탄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조카 덕분이었다. 둔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을 깨쳤다.
자연스레 하수들의 노력이 눈에 비치게 됐는데, 저건 원숭이가 말을 하고 있는 격이었다.
기파를 저렇게 뭉툭하게 다루는 감각으로 저만한 수행을 쌓다니.
“마, 말씀 감사하오.”
정난송이 고개를 설핏 돌리며 말을 더듬었다.
명족 고수들로 둘러싸인 장내에 선선한 바람이 스친다. 초고수 마광익주의 겸손에 움튼 기파인 듯했다.
조금이나마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비무 준비가 이루어졌다.
“시작하지.”
천주지문의 문주가 웃음기 깃든 음성으로 말한 직후였다.
가늘게 뜬 눈으로 정난송을 노려보던 신소빈이 권법 기수식을 취했다. 한쪽 발로 땅을 내리찍으면서였다.
쿵!
강력한 진각이 수풀 바닥을 울렸다. 사방으로 깊은 진동이 퍼지는 가운데, 그녀가 휘두른 팔을 따라 어깨 옆에서부터 사방으로 회오리치는 풀잎들.
화아악―!
전방이 일그러졌다. 진각 한 번에 맺힌 경력이 주먹을 타고 대기를 찢어발긴다.
곱게 땋은 머리칼이 확 풀려나오며 새까맣게 휘날렸다. 정난송이 미처 검을 들어 올릴 새도 없었다.
그의 눈썹이 치켜올라간 순간, 하얀 주먹이 명치를 강타했다. 대기를 희게 긁어대는 경파의 줄기들과 함께였다.
쾅!
정난송의 몸이 뒤로 튕겼다. 날카롭게 소용돌이치는 바람 속에서 수풀들이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
둔탁하게 널브러지는 소리가 울리자마자 골짜기에 침묵이 스몄다.
일초지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