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25
◈ 경천 (4)
침묵이 흘렀다.
모용 소가주가 키운 고수들의 시체를 뒤에 두고 예물 운운했다.
연화나타의 말에는 큰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이 순간 한쪽 어깨에 행낭을 대충 걸친 채 검 한 자루를 패용한 흑포 공자는, 산서 땅을 지배하려던 제갈가주를 죽인 인물이다.
대방파가 없는 산서에 한해서는 어떤 문주들보다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터다.
살문의 차기 주인조차 말을 골라야 하는 존재였다. 금존휘가 산서 민초들의 인망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다 해도 그랬다.
“…예물이라.”
살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히려 본문이 마광익주께 드려야지. 그게 맞소.”
“……?”
“선휘를 훌륭한 암검으로 벼려 주지 않았소? 금가의 빚이오. 굉장히 큰….”
금존휘가 웃음기 어린 말투로 얘기했다.
“내 한이 컸소. 천마총의 난 때는 이 몸도 어렸던지라, 모용세가의 암수로부터 선휘를 지키지 못한 어르신들을 원망하는 게 고작이었소이다. 어리석은 형이 못다 한 일을 마광익주께서 맡아준 셈이니…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마음 같아서는 가보라도 내어드리고 싶소. 어차피 쓸 수 있는 혈족도 없는데.”
잔잔히 울리는 목소리.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물 흐르듯 막힘없는 이야기도 그러했다.
금가의 빚.
다른 측면에서 헤아려 보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얘기다.
마광익주가 자신의 오른팔을 길러준 대가로 예물을 언급했는데, 오히려 자신들이 줘야 하는 입장이란 말.
헌원창의 뿌리와 정체성이 마광익보다 살문 쪽에 더 가깝다는 어조로 들렸다.
입바른 말로 마광익에게서 대설검을 찾아가고자 하는 걸까.
‘선을 더 넘으면, 검을 뽑으라고 해야겠다.’
정연신은 눈앞의 흑립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는데도 누군지 알겠다. 하관이 헌원창과 닮았다.
호쾌한 붓질로 그린 것마냥 선명히 내려오는 턱선이 거의 똑같다. 흑립의 둥근 챙 속에서 빛나는 안광은 청기린 남궁세진을 연상케 했다.
기도가 맑다.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자일진대.
그와 눈을 맞추던 흑립의 사내가 문득 빙그레 웃었다.
“그대라면 우리 구릿문의 어느 면을 고르든 정답으로 인정할 것이오. 뭐, 이쪽에서 감히 출수하지도 못하겠지만.”
헌원창의 거취 문제를 떠나서 크나큰 호의가 느껴졌다. 사문의 전통을 가볍게 말하는 언행도 그랬다.
살행의 목표, 천마총을 위협할 만한 자에게 구릿문의 앞뒤를 맞히게 한다는 풍습.
먼 하늘 너머의 도원향으로 간 초대 천마의 전능함이 가장 하찮은 동전에도 담겨 있다는 뜻이라 했다.
교리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렇게만 알려져 있었다.
그때 헌원창이 옆에서 슬쩍 나섰다.
“어릴 적 헤어진 친척 형님이오. 호는 살협, 이름은 금존휘.”
정연신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바가 맞았다. 헌원창과 핏줄로 이어진 형, 남궁세진과 닮은 대협의 기질을 지닌 자.
한 번만 참기로 했다.
그는 헌원창이 가문을 떠올릴 때마다 평안을 찾길 바랐다. 정가장과 달랐으면 했다.
이 순간 입황대협이 어떤 은원이든 모두 풀어내고 돌아가길 원하는 이유였다.
“이런, 정신이 없었군. 귀빈을 세워두고서… 외인에게는 처음으로 개방하는지라, 은혜도 모르고 주저했소.”
짐짓 멋쩍게 웃은 살협이 동굴 안쪽을 향해 손을 뻗는다. 다소 과장스러운 몸짓이었다.
“오월대살문, 금가살문의 후신에 온 걸 환영하오.”
* * *
긴 길을 내려왔다. 반 시진쯤 걸린 듯했다.
주변이 깜깜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흑인데, 먼 곳에서 불어오는 듯한 미풍은 느껴졌다.
정연신은 헌원창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협의 안내를 따랐다. 살수들의 무맥이다.
적이 많을 수밖에 없는 문파였다. 심처라고 할 만한 곳에 터를 잡은 것도 이해가 갔다.
“대주, 성문으로 들어올 때 일행이 있지 않았소? 두 명을 본 듯한데. 젊은 남녀 말이오.”
짧게 중첩된 메아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헌원창의 목소리다.
정연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천법의 안광으로 눈을 푸르게 밝힌 채였다.
온몸으로 뿜어낸 기파의 흐름을 안구에서 재구성시켜 눅눅한 동굴 벽을 모조리 훑고 있었다.
“모용 소가주가 습격했을 때 튕겨 나가서,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는 건 봤는데…….”
“깊은 교분을 맺은 사이가 아닌 게로군? 신분을 물어도 되겠소?”
“심무련주의 딸일 게다. 참황적도 군유린.”
앞장서서 걷던 살협 금존휘가 말했다.
등 뒤를 푸르스름하게 비추는 마광익주의 안광이 신경 쓰였는지, 차마 돌아보지는 못하고 종종 어깨의 삼각근만 꿈틀거리던 참이었다.
그때 화들짝 놀란 헌원창의 외침이 번졌다.
“심무련주의 자식이라고?!”
동굴을 먹먹하게 채우는 메아리를 뚫고 살협의 음성이 노랫가락마냥 울렸다.
“확실해. 이 형님은 원로 늙은이들과 달리 용모파기를 일일이 수집해 외우거든. 산서를 떨쳐 울리는 연화나타도 몰라본 죽검과는 달라. 본문 정도의 정보력이면 산서에서는 하오문과 개방 바로 다음인데, 이 좋은 걸 썩히다가 죽어 나가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다. 제 힘에 취한 강호인들을 닮아서는. 바깥에서 객사한 노인네들도 그렇고.”
“대주, 독 같은 걸 먹은 건 아니오? 은침! 은침이 어디 있더라…….”
품 이곳저곳을 뒤지는 소리에 살협 금존휘의 음성이 한풀 꺾였다. 그는 다소 가라앉은 기색으로 어느새 눈앞을 막아선 석문을 열어젖혔다.
“도착했다.”
구구궁―
세로 일직선을 뚫고 흘러들어오는 횃불의 빛무리.
곧장 지하 광장이 드러났다. 깊은 동굴 속에 펼쳐진 모습이 연무장이라 해도 될 만큼 거대했다.
묵향이 물씬 풍겼다.
굉장히 이색적인 모습이 펼쳐졌다.
지하를 가득 채운 석재 탁상에 반투명한 기파가 끊임없이 내려앉고 있는데, 그 속에 입황성 총관부의 문사들마냥 곧게 자리한 흑의 무인들이 붓을 들고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전음을 끊임없이 받아적는 듯했다.
중얼거리는 말소리들이 염불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정연신 일행이 들어오든 말든 맡은 일에만 집중했다. 얼핏 보기에는 제정신이 아닌 모습으로 비칠 정도였다.
“자금성, 북경의 출정식… 황실 삼대고수가 일만 군세와 함께 출행. 북방의 투신에게 대적할 무공을 황제가 손수 창안 후 하사했다는 풍문이….”
“사천성, 금시문주가 당가주에게 생사결을 청함. 만천화우의 요결과 번천참룡식(飜天斬龍式)의 교환을 두고…….”
“순마련주가 명교 소교주에게 격살당함. 불벼락이 실제로 내리꽂히는 일천 합의 승부였다고 전해짐. 소천무적 야율진이 순마련 본단의 한복판에서 선언하길, 본인의 사술이 초대 천마에게 가장 가까운 상격(上格)의 수법이라 함. 명교의 잔존 세력이 순마련을 온전히 흡수할지 지켜보겠음. 기묘한 조화 탓에 신강 땅에서 나가지 못하는 자들이 속출 중이니, 본문에서는 다음 소식을 기다리지 않는 편이…….”
천리지청술(千里地廳術)과 백리전음(百里傳音)을 섞어 쓰는 걸까.
고절하게 짜인 소식망의 일부가 그대로 비친다. 소통 무공을 일정 이상 익힌 무인들이 역참마냥 띄엄띄엄 늘어져서 전서구나 인마를 대신하는 것이다.
구파와 동일선상에서 거론되는 개방 정도나 가능할 듯싶었는데, 지금 동굴 천장에서 내려앉는 전음의 기파들이 살문의 저력을 방증하고 있었다.
물정 모르는 민초가 본다면 어떤 초월적인 광경으로 받아들일 만했다.
허나 정연신은 다른 쪽에 놀랐다. 저절로 눈썹이 치켜올려졌다.
들어서자마자 들은 소식이 모두 심상치 않다. 개중 두어 개는 그와 직결된 정보이기도 했다.
금시문주가 당가주에게 비무를 신청했다는 풍문부터 강호를 뒤흔들 만한데, 순마련주와 명교 소교주의 소식은 그 이상이다.
‘소교주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순천익에 이어 천림대와 선목령마저 신강으로 향한 지 오래였다.
풍문이 엇갈린 걸까. 명나라의 땅덩어리는 어지간한 사람의 인식을 넓힐 만큼 광활하다. 어떤 소식이 정확하게 제때 도달하는 일이 드물다는 의미다.
아직까지 마광익주 정연신의 얼굴을 모르는 강호인들이 지천에 널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기껏 도착한 문건이 실제 사실에 어긋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세 개 무력대의 임무 완수도 같은 맥락에서 헤아릴 만하다.
순마련주의 죽음이 먼저고, 그 뒤에 대주 세 명이 명교의 소교주를 격살했다는 소식이 오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정연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괜찮을 거요.”
헌원창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입을 다문 정연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문득 그의 시야에 넓은 벽면이 들어왔다. 소식을 받아 적고 있는 살문의 제자들 너머, 혜성의 꼬리가 내달린 것마냥 긴 흔적이 새겨진 동굴 벽.
아니다.
자세히 보니 석제 기둥이었다. 흔적이 새겨진 벽을 못과 정으로 도려내서 가져와 붙인 듯했다.
무공을 익힌 이들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든 작업의 편린이 비쳤다.
‘검흔……?’
정연신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내 사제 하나가 황보세가의 소가주와 입황신가의 후계자를 데리러 갔소. 곧 올 거요. 그나마 제대로 된 본문의 원로 어르신들과 함께 말이오. 음? 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살협이 묘한 탄성을 터뜨렸다.
“그대 정도 되는 검객이라면 눈을 빼앗길 만하지. 본문에게는 잊어선 안 될 치욕에 불과하지만.”
“치욕이라면?”
“모용세가주의 검흔이오. 십수 년 전에 온전히 있던 천마총을 산산조각 낸…….”
살협 금존휘가 말끝을 흐렸다. 매사에 유쾌하고 풍류를 찾을 것 같은 그도 사문의 은원 앞에서는 가벼운 언행을 보이기 힘든 듯했다.
“잊지 않겠다는 결기가 담겼지. 저걸 파훼하려고 면벽수련만 하다가 백치가 된 원로들만 십수 명인데… 어르신들의 옹고집이 워낙 강한 탓에 그대로 두고 있소. 내가 문주가 되기만 하면 단번에 부수고자 하는데…….”
정연신은 듣지 않았다.
우두커니 선 채 삼 장은 될 법한 검흔을 마주했다. 금존휘의 말이 귓전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돌연히 두 눈에서 뻗어나간 시천법의 푸른 빛줄기가 거친 벽면을 훑어냈다. 동굴 바닥을 서늘하게 쓸고 지나가는 미풍과 함께였다.
연화나타는 문득 중얼거렸다.
“손아귀에 힘이 빠져 있군.”
“무어라 하셨소……?”
“그런데 어떻게 유성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검격을…….”
그때였다.
정연신의 목소리는 돌연히 내뱉어진 살문도들의 말에 덮였다. 평이한 어조에서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청비(靑匕)가 이질적인 혈염교의 사공 흔적을 발견. 분주 설원에 직선으로 새겨진 핏물의 흔적이 사흘째 지워지지 않는 중. 요사스러운 절세미인이 흠양현(欽陽县)의 우물 마을을 가로질렀다는 첩보로 미루어, 혈염교의 칠사도로 추정. 거동이 아주 불편해 보였다는 첨언이….”
“백도(白刀)가 가로되, 분주 북단의 설원에서 심무련주의 흔적을 발견. 반경 백 장을 나선으로 파헤친 무장휘황공(無張輝晃功)의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음. 심무련주 군위후는 본신의 격조와 달리 개방 거지조차 손수 문초하는 자이니, 산서의 모든 문도들에게 일러 안가로 대피하라 전할 것. 심무련의 무공 군세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중.”
“흑검(黑劍)이 가로되, 태원부 남단과 요주의 경계에서 반으로 갈라진 구름을 목도함. 모용가주의 유성검(流星劍)과 허공답보로 사료됨. 태원에 퍼진 문도들을 한 시진 내로 복귀시킬 것. 지급(至急:매우 급함), 지급임.”
그리고.
쿵! 쿠웅! 쿠우우웅―!
묵직한 굉음이 번져 왔다. 흡사 유성이 쏟아지는 듯한 진동. 벽면 곳곳에서 돌가루가 작은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주변이 삽시간에 희끄무레한 먼지로 둘러싸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