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82
◈ 천하 (6)
* * *
순마련주와 칠사도가 양쪽으로 튕겨 날아간 직후.
청성파 장문인은 곧장 순마련주를 향해 쇄도했고, 아미의 백약 사태는 그윽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넓은 기감으로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공으로 초월에 이른 절세고수들.
급박한 순간이 닥쳤을 때 함께 행동하는 일이 드물다. 제각각으로 지닌 바 심상이 확고한 까닭이다.
심중을 짐작하기도 힘들다. 수양이 깊어 난신(亂神)과 요선(妖仙)을 두루 꿰뚫어 본다는 구파의 절대자들은 더욱 그렇다.
말로써 행동을 강제할 수도 없다. 초월적으로 고강하기에.
정연신도 마찬가지였다. 청성과 아미의 장문인들은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그에게 별다른 의중을 전하지 않았다.
정연신은 당연스럽게 여겼다.
순마련주와 청수 진인을 일별한 그는, 곧장 도약해 칠사도를 쫓으려 했다. 은원을 따진다면 은혜가 먼저였다.
인연에 있어 어릴 적부터 겪은 모자람이 컸다. 그는 오늘날까지 조급함과 결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스스로 크게 느끼지 않을 뿐.
―나의 크고 어린 태사야, 잠시 다녀올 곳들이 있단다.
빠르게 멀어지던 칠사도가 말을 건네기 전까지도 그랬다.
그녀로부터 처음으로 느껴진 의중이 있었다. 음성에서 분명한 거부의 의사가 묻어났다.
―전대 교주는 부처의 가르침을 교묘하게 뒤틀어서 교세를 늘려 왔어. 업보윤회(業報輪廻)를 가르치곤 했단다. 불신자의 피를 많이 취할수록 내세에 누릴 자유가 늘어난다고. 나한테는 잡종의 피에 입도 대지 말라고 했지만….
부드러운 속삭임이 귓전을 간질였다. 정연신은 십리광요의 시전을 무심코 멈췄다.
―본교의 업은 혈업(血業)이야. 이젠 전부 내 것이지. 내가 교주니까. 그리고 혈업은, 웬만한 고행으로는 불사르지 못해.
어조가 묘했다.
―슬프게 해서 미안해, 내 태사.
당씨 남매에 대한 얘기였다.
무언가 서글픈 광기가 어려 있었다. 집착과 소유욕이 여전히 끈적하게 다가오는 한편, 어떤 초탈함도 느껴졌다.
칠사도는 그렇게 떠났다.
그때 정연신은 완전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무언가를 새로이 느낀 듯한 청수 진인을 쫓아 내려온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이야기. 비어 버린 그림자가 허전했다.
이따금 청기린과 선룡, 당가 남매를 떠올릴 때 달빛처럼 밀려오는 고적함과 같았다.
마광익도, 동료 대주도 없다.
그는 혼자였다.
“무슨 생각 하니? 먼저 출수하지 않고.”
작고 영롱한 목소리가 옅은 상념을 흩어버린다.
정연신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미 신검 여뢰를 쥔 채 전신을 진기로 채우고 있었는데, 눈앞의 존재에게는 당장 검을 뻗어도 닿으리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수 계산.”
그가 말했다.
금시문주의 작은 얼굴이 옆으로 기웃했다.
“그런 게 필요한 자질이었던가.”
“정기신의 합일 전에는 늘 필요했다. 지금처럼 머리가 아팠지.”
“윗줄의 고수를 주로 상대했구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인다. 음성에 별다른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꾸미지 않는 여유가 느껴졌다.
등 뒤로는 거대한 산자락을 뒀고, 앞으로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마을의 한복판.
적막이 무겁다.
정연신은 사천제일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높이가 한참 아래인 그녀의 체구가 작게만 보이지 않는다. 무형의 격이 농밀한 존재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들어갈 틈이 없어.’
그는 생각했다.
혈염교주에게 공력을 잃은 십전문주, 무공 자체가 정연신과 상극인 순마련주와는 다르다.
온전히 무(武)를 겨뤄야 하는 상대.
약점이 없다. 경지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정연신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금시문은 수치를 모르나?”
“수치?”
“방금 도망친 민초들을 쫓는 무리가 있어. 네 문파의 기척이다. 아이까지 잡아서 뭘 하려는 거지?”
정연신은 기감으로 놈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과거 금시문에서 마주한 자들.
대도를 쓰는 늙은 호법을 비롯해, 온갖 기문병기를 지닌 영물 사냥꾼들이 마을사람들을 뒤쫓는 기척이 느껴졌다.
금시문주의 입술이 작게 꿈틀했다. 얼핏 비죽이는 모습으로도 비쳤다.
“너 때문이야. 법보랑 공양물을 다시 모아야 하니까. 여기서 교룡의 진법을 다시 열 거야.”
“뭐?”
“영물은 순정한 선천지기를 좋아하거든. 아이 하나가 어른 둘보다 나아.”
선천지기.
사람이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기운. 살아갈수록 탁기가 쌓인다. 아이를 잡아먹는 요괴의 이야기가 민간에 흔한 이유다.
정연신의 눈매가 날을 세웠다.
사마외도 십삼천답다. 사고관 자체가 뒤틀려 있다.
“남전계퇴(南煎鷄腿)만 못한…….”
“응? 난 닭다리 튀긴 거 좋아하는데.”
금시문주의 태평한 말은 귀에 와닿지 않았다. 그녀와 맞서는 동시에 민초를 지킨다? 가능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어불성설에 가깝다.
어찌해야 할까.
“내가, 가겠네…!”
뒤에서 울린 목소리. 두 마디 사이에 기침이 섞였다. 청성의 장문인이 검으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서고 있었다.
정연신은 뒤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선두에 금시문의 좌호법이 있습니다. 진인께선 중한 내상을 입으신 듯한데, 거동이 염려됩니다.”
“치천용살공을… 각별히 주의하게. 본파의 청운적하검이 맥을 쓰지 못하더군.”
정연신의 우려를 무시하고 조언을 건넨다.
청수 진인은 청성파의 장문령부를 쥔 지 얼마되지 않은 장문인이었다. 도사라 해도 패기를 지녔다.
문주가 아닌 호법에게 고전해선 안 되는 것이다.
“공력 대 공력으로, 맞붙어선 아니 되네. 되도록이면 발경과 기교, 혹은 다른 기운으로…….”
그는 문득 말끝을 흐렸다. 금시문주와 마광익주의 연배 차이를 떠올린 까닭이다.
세월의 풍랑을 끊임없이 맞은 절벽과 일개 조약돌 정도의 격차가 존재했다.
‘법력을 지닌 건 몹시 놀랍다. 허나 초식이 그 기운에 맞추어져 있을진대…….’
화중암왕은 여러모로 유명했다. 귀한 씨족을 연상케 하는 외모는 물론 믿기 힘든 연배도 그랬다.
무인이 한 종류의 진기를 수족처럼 운용하고자 들이는 세월이 얼마인가. 연마가 끝이 없다.
이종의 공력을 주화입마 없이 몸 안에 담아내는 것도 문제였다.
청수 진인은 소탐대실을 떠올렸다. 민초를 지키려다 마광익주를 잃느니, 여기서 체면을 차리지 않고 합공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때였다.
“가십시오.”
정연신의 기다란 머리칼이 반쯤 솟아올랐다. 후욱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였다.
그의 머릿결을 따라 올올이 번져 나가는 무색의 기류. 몹시 요사스럽고도 고아한 공력 파동이었다.
“그 진기는……!”
그 뒷모습을 본 청수 진인의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눈동자 위로는 어릴 적 먼발치에서나 본 혈염교주의 모습이 스쳤다.
나른하면서도 매혹적이고, 천하에 홀로 존재하는 듯한 기도를 만방으로 내뿜던…….
이래선 더욱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다. 기경할 만한 자질도 놀랍지만, 그건 둘째다. 법력에 숨어 혈공을 연성한 게 아닌가.
“소협이 어찌……?”
“신혈극마 선배께서 큰 영감이 되셨습니다.”
혈염교의 귀족마냥 매끄러워진 음성에 진중함이 담겼다. 굉장한 공경이 묻어나왔다.
신혈극마 진명조. 청성의 장문인 역시 강호인으로서 익히 알고 있던 이름이다.
“입황성 보혈대주, 그렇군……!”
청수 진인은 더 묻지 않고 즉각적으로 몸을 돌렸다. 곧이어 한차례 비틀거리더니,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 올려 대기를 툭툭 찼다.
청성 보신경, 청하임풍(菁下臨風). 발이 북 치는 듯한 소리를 낼 때마다 신형도 급격히 멀어졌다.
금시문주는 별달리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의 적황빛 눈은 정연신을 투명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천재는 그래. 재주 하나에 만족을 못 해.”
그녀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정연신은 여뢰를 고쳐 잡았다.
“시작하자.”
“아니면 너, 화신술(化身術)을 쓴 교룡이니?”
긴장감이 없는 목소리.
주변의 대기는 달랐다. 반투명하게 요동치며 급속도로 짜부라졌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컸다.
열 걸음 거리.
정연신은 한 발로 좁혔다. 검파를 쥔 손아귀로부터 강풍이 길게 너울졌다. 아직도 술병을 든 금시문주의 얼굴. 그대로 여뢰를 올려 쳤다.
검뢰섬릉식, 심극기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마냥 허공에 새겨지던 빛줄기가 쾅 끊어졌다. 금시문주의 호리병에 막힌 것이다.
검날을 맞댄 면을 타고 금이 번져 나가는데도 깨지지 않았다.
달콤한 술 내음이 훅 끼쳤다.
“마실래?”
금시문주가 작게 말했다. 순간 그녀의 몸에서 굵직한 금빛 파동이 번져 나왔다.
삽시간에 정연신의 몸을 훑고 주변을 쓸어내는 기파. 단순한 공력 파동이 아니다. 정연신은 전신의 진기가 일제히 굳어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금시문주가 활짝 편 손으로 그의 가슴을 사락 쓸어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황금빛 파문이 흑색 장포에 스몄다.
충격파가 움텄다. 치천용살공의 진기, 그리고 번천참룡식.
콰아아아앙!
정연신은 그대로 튕겨 나갔다. 피신한 아이가 타고 있던 그네를 우지끈 박살내는 감촉이 먼저였다.
이내 마을 건너편의 절벽에 쿵― 처박히는 충격이 등을 타고 들어왔다.
흐릿한 분진이 솟구쳐 오른다. 돌 부스러기가 벽면을 긁으며 떨어져 내렸다.
일격에 몇 장 거리를 이동한 걸까.
느낌이 왔다.
‘이자는 달라.’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과 같지 않다.
빠르게 끝낼 수가 없다. 단기 결전의 무공은 본디 완벽하고도 의표를 찌르는 한 수로, 상대의 호흡과 실수를 찌르는 수법. 금시문주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사천제일미, 사천제일인.
대방파만 여섯인 사천성 전역을 통틀어 가장 존귀하다는 의미다. 입황성이 상대하자면 천하에 두루 인정받는 자색을 보내야 했다.
“진법을 방해하지 말았어야지. 넌 좋은 눈요깃거리였는데.”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시야에 가득 찼다.
금시문주였다.
그녀의 참룡천린신술(斬龍踐鱗身術)은 강호사대신법 중 하나라고 했다.
교룡의 기나긴 몸통을 능히 타 오르고도 남을 거라고. 보신경이 인외의 경지를 넘보는 것이다.
‘중단거리를 좁히는 데 묘리가 있어. 속도는 신법 풍신 이상. 십리광요보다는 느려. 동선을 길게 가져가면…….’
뇌리가 광륜처럼 빠르게 회전했다.
손에 든 여뢰를 놓아버렸다. 심상에서 생겨난 부채의 용이 검을 휘감아 지탱했다. 어검술. 금시문주의 아미가 길게 굽어진 순간.
쩌어어어어어엉―!
검극이 그녀의 복부를 찍어 올리며 그대로 솟구쳤다. 어느새 금시문주의 전신은 푸른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교룡의 숨결을 막아낸다는 호신강기. 이기어검을 직격으로 맞고도 관통당하지 않은 몸이 불덩이처럼 위로, 위로 치솟았다.
통증은 느끼는 듯했다. 여뢰에 찍혀 올라가는 와중에도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호리병을 입술에 댄다.
꽃잎으로 고통을 삭이는 양귀비쟁이처럼.
내공의 수발 속도, 무공의 범용성, 일격에 실린 발경력이 모두 초월적인 자.
삼화취정을 이루기 전이었다면 손을 섞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제 식대로 환골탈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괴력난신, 교룡 격의 영물로 봐야 해.’
움푹 우그러져 있던 정연신의 가슴이 우두둑 펴졌다. 정가동공의 묘리였다.
가슴께의 경맥을 부풀리고 박살 난 갈빗대를 공력으로 휘감아 원상태로 맞춘 것이다. 머릿속을 하얗게 옥죄는 통증이 치달았다.
정연신은 새파란 안광을 번뜩였다.
뇌리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 가슴 아래에서 투지가 격랑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익힌 바 모든 구결이 전신 경맥에서, 심장의 광륜에서, 백회혈에서 쏟아져나와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길 반복한다.
기억 속 당가 남매의 입매에 새겨져 있던 호선이 획으로 풀려나와 섬예무맥 절초의 응용식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필히 이겨야 한다. 반드시 죽인다.
쾅!
정연신은 다리를 뻗어 절벽을 찍었다. 눈으로는 상공을 바라봤다.
금시문주가 작은 손으로 여뢰를 감싸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어떤 초식을 발휘할 듯했다.
[제대로 된 관중이 없는 게 아쉽구나. 이왕 삼도천을 건너는 길이니, 네 진가를 알아보는 뭇 고수들이 지켜봐 주어야 마땅한데.]먼 곳에서 아주 희미하게 울렸다. 내공으로 탁하게 변조된 음성. 십전문주의 진기 구조를 닮은 공력이 느껴졌다.
정연신은 앞으로 만나는 모든 적의 머리를 치리라 다짐했다.
저벅.
두 다리로 봉우리의 옆면을 딛고 섰다. 발치에서 십리광요의 빛무리가 안개처럼 번졌다.
한 발, 두 발.
광활한 절벽을 거꾸로 오르기 시작한다.
부딪쳐 오는 바람이 점차로 강해졌다. 걸음걸이가 질주로 바뀌기까지 찰나였다.
보폭을 아주 크게 넓혔다.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며 시야에 비치는 정경이 수백 줄기의 선으로 화했다.
퀴유우우우―!
하늘로 솟구친 금시문주를 급격히 따라붙는 신형.
그가 스친 벽면의 군데군데에 솟은 나무와 이끼, 큼지막한 바위가 창백하게 물들며 그대로 터져 나갔다.
활짝 펼친 양손에서는 독문 혈공과 입황성주의 월령조화결 기파가 불그스름하고 희뿌옇게 회오리치며 따라오고 있었다.
“저기, 저기 있습니다!”
“금시문주에, 마광익주……?”
비무제전 당사자들의 종적을 찾아 고개를 내민 이들이 그 광경을 목도했다.
두 절세고수의 신형이 하나로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