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10
◈ 북경(2)
구파가 이긴다.
소년 도사의 호언장담은 몹시 담담했다. 스스로 천하제일을 입에 담은 직후인데도.
팔대세가를 안중에 두지 않는 걸까.
고작해야 열두셋쯤 될까 싶은 연배로서는, 팔가 씨족을 미후처럼 대해야만 나올 수 있는 언행.
정연신은 어느새 안개처럼 자욱해진 술기운으로 머리가 간질간질한 와중에 과거를 떠올렸다.
백의와 청포, 흑포를 차례대로 걸치면서 뭇 팔가의 고수들과 부딪치던 나날들. 그 모든 싸움을 통틀어 십 할의 승산이 존재했던 적은 없다.
몇 년의 마을살이면 저잣거리의 들개조차 어지간한 아이보다 똑똑해지는 법인데, 강호의 칼 숲에서 수백 년간 살기 어린 재주를 쌓은 원숭이들은 어떨까.
정종과 패도 사이의 공부를 대대로 물려받은 강호 군벌. 그간 정연신이 겪은 무림 호족들이 그러했다.
‘기백이 대단하다. 이 아이는 내 마음에 공감할 수 있겠구나.’
정연신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자그마한 무당 제자의 호연지기가 기꺼워서였다.
산속에서 무공만 닦은 탓에 말버릇이 없고 물정 모르는 어린 도사. 말본새만 떼고 보면 정연신과 다르지 않다.
예법을 모르는 섬예라 할까. 이 순간 술 내음과 함께 동질감이 끼쳤다. 정연신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덕담이 흘러나왔다.
“그래, 구파가 이기겠지.”
멀리서 다리를 길게 꼬고 앉아 있던 여의천주 북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거 취한 거 아닌가?
옆에서는 소년 도사가 ‘원시안진’이란 도호를 내뱉었다.
“…언행은 석년의 패협과 같으나, 심성이라도 겸양을 품은 듯하니 다행이라 할 것이다.”
“도사의 욕은 고풍스럽군.”
정연신은 아무렇게나 뇌까렸다. 그는 안다. 무공이 고절한 아이라 해도 그 내면은 민초와 같다.
어린아이를 날 선 태도로 대해서는 안 되었다.
소년 도사의 표정이 묘해졌다.
“말이야 어떻든 별스러운 일이 아니니라. 그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는 듯싶다. 너는 정녕 흑포를 입고 비무에 나설 요량이냐?”
“자색의 장포는 입고 싶다고 입을 수 있는 게 아니야. 황실의 윤허와 성주님의 인정이 있어야만…….”
“지금 입고 있지 않느냐?”
정연신은 대충 들은 체 만 체 하며 소년 도사의 말을 넘겼다. 그리고 꽃봉오리 형상을 지닌 오운초의 꼭대기를 잡았다.
“섬예, 너도 알겠지만.”
어딘가 흐뭇한 낯으로 정연신을 보고 있던 용희명이 입을 열었다.
“이건 누가 신호를 주는 게 아니다. 멸섬대주의 말이 맞거든. 여기 이 오운초를 떼어내는 게 얼핏 보기엔 소소한 유희지만, 연수 합격에 앞서서 미리 합을 맞춰 보는 데는 또 이만한 게 없지. 눈치껏 떼자.”
“단주께서 누군가와 연수하시는 일도 있습니까?”
정연신은 오운초의 까끌까끌한 끄트머리를 검지와 엄지로 매만졌다.
오른편의 악수림이 손마디를 툭툭 부딪쳐 오며 장난을 거는데, 그는 초점을 잡고자 애쓰면서 용희명과 눈을 맞췄다.
“자색의 합공을 묻는군. 손발의 속도만 맞으면 못 할 것도 없지. 방파대전이 어디 일대일로만 이루어지던가? 오히려 난전이 더 많다.”
입꼬리를 피식 올린 용희명이 말을 잇는다.
“너도 알다시피… 절세고수랍시고 한날한시에 덤벼 오는 작자가 꼭 한 놈이란 법은 없거든. 어느 날 일진이 좋지 않아 태모산성의 벽천구궁진(霹天九窮陣) 같은 곳에 갇히기라도 하면, 그때는 또 영락없이 지원을 기다려야 하고. 여하간 무림 강호는 오라지게 넓다.”
태모산성. 사마외도 십삼천이다.
일전에 용희명을 격살하고자 짜인 천라지망에 은밀히 손을 보탠 문파였다. 다루는 공부가 오직 술법무공 하나뿐이라 했다.
강호가 넓다는 말 그대로다. 입황성을 둘러싼 합공의 위험은 몇 번을 되새겨도 모자랐다.
“신검단이 또다시 이렇게 모이기는 힘들다. 손이나 한번 맞춰 보고 흩어지자. 제법 재미있을 거다.”
신호가 없다더니, 그 말이 우연마냥 출수의 시발점으로 화했다.
더 듣고만 있기 힘들다는 것처럼 하후위진의 큼지막한 손가락이 꿈틀거린 직후였다.
뒤이어 용희명, 악수림, 천소소의 손끝이 움직인 순간.
―빈도의 말이 제대로 닿지 않은 모양이군. 정녕 마광익주가 흑색의 자격으로 화산지약에 임한단 말인가?
불문의 혜광심어(慧光心語)마냥 웅웅거리는 의념. 정연신의 좌측에서 작은 팔 하나가 끼어들었다.
소년 도사였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파고들어 와 천소소의 손등을 아래로 밀어냈다.
숫제 시간을 가르는 듯한 금나수. 손짓 한 번에 실린 무리(武理)가 엄청나게 현묘했다.
―그것이 강호의 통념에도, 정정당당의 이치에도 어긋나는 일임을 보여줘야겠다. 너는 물러나 있거라.
“……!”
천소소의 새하얀 손끝이 잎사귀 면을 훑으며 떨어질 때였다. 돌연 정연신이 소년 도사의 손을 움켜쥐었다.
우웅―
무채색 파동이 일었다. 시화무극수 특유의 강맹한 경파에 공기가 반투명하게 일그러진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소년 도사가 손목을 한 번 돌리는 것으로 정연신의 손을 떼어낸 까닭이다.
그 손짓에 깃든 힘은 강건하면서도 몹시 부드러웠고, 이 순간에도 신검정 바깥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나가는 강물처럼 고고했다.
‘무당 면장(綿掌)……?’
정연신은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는 구파의 신공절학 하나를 떠올리며 사고의 흐름을 가속시켰다.
키이잉!
정수리 백회혈에서 울린 소리였다. 찰나가 끝도 없이 분절되어 순간순간이 늘어나는 느낌.
주변이 느릿해지는 한편 홀로 쾌속하게 움직이는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소년 도사의 손이 그 속을 태연스럽게 가르고 올라갔다. 오운초의 꼭대기를 향해서다.
그의 무당 면장은 정연신의 절세 영역에서도 속도를 잃지 않았다.
‘빠르다.’
정연신은 다시 한번 시화무극수를 일으켰다. 여름 햇살을 맞은 것처럼 화악 일렁이는 공기.
툭―
굳건한 힘이 실린 손아귀로 소년의 손목을 잡아챈 순간, 검과 소나무가 새겨진 무당파의 도포 자락이 부드럽게 치솟았다.
그대로 팔꿈치를 크게 꺾은 소년이 정연신의 팔뚝을 툭 쳐서 떨어뜨리기까지 찰나였다.
큼지막한 녹빛 꽃봉오리 아래와 꼭대기 사이.
그 간격 안에서 두 줄기 궤적이 흐릿하게 엉키며 쩡쩡거리는 울림을 퍼뜨린다.
상대의 손을 떨치고, 잡히고, 다시 풀어내길 반복하는 양상.
무림 강호에서는 굉장히 사소한 일조차 싸움의 빌미가 되곤 한다지만, 정연신은 자신이 그 당사자가 될 줄 몰랐다.
지금도 스스로의 마음이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신검단이 오운초를 떼어냈으면 했다.
―네 의념이 아주 강렬하구나. 해검지(解劍地) 건너편의 폭포가 따로 없어. 그래, 이런 무위를 지닌 이가 어찌 자색으로 행세하지 않는단 말이냐?
그때였다.
한 팔로 자그마한 원을 그린 소년 도사가 정연신의 손등을 탁 짚었다.
순간 무지막지한 힘이 끼쳤다. 마치 장강의 물길을 손바닥으로 뿜어낸 듯했다.
무당 면장. 정연신은 취한 와중에 직감했다.
합을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이 쏟아낸 힘이 자신을 향해 고스란히 되돌아온 것이다. 보이지 않는 태극의 흐름을 타고.
정연신의 손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동시에 소년 도사의 의념이 울렸다.
―네 신분과 고강함을 스스로 알거라. 나와 금나수를 이만큼이나 겨룰 수 있는 강호인은 천하를 뒤져도 몇 없을 게다.
무당파 장법은 어떤 문파의 장법과 겨뤄도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다고 했다.
금나수는 말할 것도 없다. 상대의 출수를 봉쇄하는 데 오의를 둔 수법이니까.
‘그렇다면.’
정연신의 손아귀에서 벼락이 부딪친 듯한 마찰음이 일었다. 장법공부 환강의 전조였다.
그 패도적인 기세가 바로 옆자리까지 이르게 전해진 걸까. 순간 소년 도사의 얼굴에 기겁한 기색이 떠올랐다.
―야 이놈아! 어찌 그런 것을…! 다 부술 셈이었더냐!
그로써 정연신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무당의 고절한 태극 역시 환강을 지워내지는 못한다.
어차피 금나수로는 이길 길이 없으니 그 하나로 족했다. 큰 그림으로 따지면 그가 이긴 셈이었기 때문에.
스윽.
백옥 같은 손이 부드럽게 올라와 오운초의 꼭대기를 잡는다.
선목령주 천소소였다.
그녀는 삼화취정의 초고수다. 정연신과 소년 도사가 합을 나눈 찰나에 멈춰 있을 리가 없다.
우웅―
오운초를 투명하게 둘러싸고 있던 용희명의 공력이 사그라든다.
소년 도사가 멈칫한 사이, 신검단의 다섯 사람은 오운초의 잎사귀를 대수롭지 않게 뜯어 내렸다.
동시에 정연신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푸른 꽃잎처럼 활짝 펼쳐진 오운산초채. 언젠가 정연신이 정가장에서 본 것과 같았다. 향긋한 내음이 번져 왔다.
“말로 하시면 될 것이지. 누가 무림인 아니랄까 봐.”
용희명이 툭 던지듯 말했다.
정연신을 망연히 올려다보던 소년 도사가 헛기침을 뱉었다.
“풍수지리를 떠나서 길한 땅은 아닌 듯싶구나.”
“그런 것 같소. 무당산 높은 곳에 매달려 있던 체면이 여러 번 떨어졌구려.”
씩 웃으며 대꾸하는 용희명. 정연신에게서 시선을 뗀 소년 도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십단금(十段錦)을 시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개세적인 절학이 언급된다. 무당파 십단금. 천하의 모든 장법을 통틀어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달리 헤아리자면 환강을 상대하는 데 있어 십단금 말고는 꺼낼 장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용희명이 다소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화산지약을 기약하시오. 그때 겨뤄 보면 되겠지.”
순간 소년 도사의 얼굴이 제 연배의 낯짝처럼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다음을 기약해서 무얼 하겠나? 흑색으로 나온다 하는데!”
“그리 노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소. 무당은 황상께서도 특별히 총애하시는 문파로, 그 제자들의 무위 역시 천하에 두려울 게 없을진대.”
“이놈이 정말……?”
긴 호흡을 내뱉은 소년 도사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더 이상 용희명을 보지 않고 정연신을 향해 술잔을 들어 올려 보였다.
“너를 무공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 탓에, 이 자리에서 큰 결례를 범했다. 깊이 사죄할 터이니 이 한 잔을 받아주겠느냐?”
“그럼, 그럼. 실수를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그 연배에는 그래도 돼.”
정연신은 짐짓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몽글몽글했다. 주기(酒氣)를 몸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공력을 끌어낸 까닭이었다.
“…그래, 한 잔 받거라.”
소년 도사가 그를 향해 잔을 건넨다. 순간 투명한 술 위로 눈부신 햇볕이 반짝였다. 정종 내공이 물속으로 스며들었을 때 일어나는 광경.
정연신도 안다. 진기가 순정할수록 물이 선명해진다 했다.
언젠가 하남성 법회에 현현한 소림 방장의 일화 덕에 유명해졌다.
마음에 부처를 비추면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노라고 가르침을 베풀면서, 등 뒤의 호숫물을 거울로 만들어 뭇 민초들에게 설법했다는 이야기.
지금 정연신에게 내밀어진 술잔도 비스듬히 기울어진 태양을 선명하게 담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내공이 실렸다는 의미. 잔을 받아내려면 보통의 수법으로는 안 될 것이다.
“앞서 나눈 손속으로는 충분치 않더구나. 네 성취를 한번 제대로 가늠해 보고자 한다.”
소년 도사가 말했다.
정연신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했다. 아이답게 호승심이 깊구나.
그가 술잔을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안 되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용희명이 그 잔을 턱 잡았다.
순간 술잔에 담겨 있던 태양이 거짓말처럼 지워졌다. 신기에 가까운 내공 운용. 신검단주 용희명의 한 수였다.
“무당 면장을 경험하는 것쯤이야, 이제 자색의 강호를 살아갈 섬예에게도 큰 경험이 되겠지만.”
그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진기 운용의 기법을, 다른 누구도 아닌 구파의 신선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진인께서는 선을 지켜주셔야 하오.”
“…내가 괜히 걸음했구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만 가시오. 자리를 파하겠소.”
“오냐. 여기서 더 할 말은 없구나. 다음을 기약하겠느니라.”
순간 소년의 신형이 온데간데없이 흩어졌다.
그저 선선한 바람 한 줄기만 남아 정자를 훑어내렸다. 몸으로 구름을 구현한 듯한 보신경이었다.
“그나저나.”
잔을 쭉 들이킨 용희명이 웃었다. 그의 눈이 정연신에게 향했다.
“천하의 무당 고검을 그리 대할 수 있는 인물은 본성에 몇 없을 거다. 내가 오늘 귀한 구경을 했어.”
“예?”
정연신은 다소 느리게 반문했다.
* * *
부유한 대도시 무창을 낀 까닭인지, 이른 새벽부터 닭이 우는 소리가 여명을 훑고 지나갔다.
신검단의 대주들이 정자 뒤편의 객잔에서 하룻밤을 보낸 참이다. 객잔의 주인장이 주렴 바깥에서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이걸로 되겠습니까? 요즘은 이부자리 하나도 몹시 귀할 텐데…….”
“아니, 아닙니다! 모신 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이니, 이대로 가신다 해도 이 일을 대대손손 자랑하겠습니다!”
정연신이 간밤에 찢어진 포단(蒲團:이불)값을 치를 때였다. 누군가가 멀리서 그의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