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13
◈ 북경(5)
* * *
신검단주와 마광익주가 북경에 들어왔다는 풍문은 장안의 화제였다.
뭇 권세가와 양민, 무인 등 씨족과 신분을 불문하고 온갖 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입황성.
무림 강호에서 민생의 안녕을 지키는 황립 방파.
신검단 산하 십칠대주가 근래에 보인 행태와 별개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숱한 이야깃거리를 낳는다.
여느 관아와 달리 피바람과 호쾌함을 몰고 다니는 까닭이다.
심지어 정연신은 오늘 바깥에서 자신의 용모를 품평하는 수군거림마저 들었다.
신검단에 대한 관심이 그 정도였다.
개중 입신검(入神劍)의 주인이라 하면, 정일품의 최고위 관리조차 함부로 독대를 청하기 힘들다고 알려진 신분.
북경에 발을 들이자마자 입궁 허락이 떨어져야 한다. 천하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궁궐이 자금성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용희명과 정연신, 연소하는 사흘이 넘도록 북경 내에 마련되어 있는 입황성의 전각에 머물러야 했다.
전각이 격 떨어지는 장소라 할 수는 없었다.
십수 명의 하인들이 안채와 마당을 쓸고 닦고 관리하는 데다, 본성의 청색 고수가 빈객을 접대하는 자로서 상주하고 있기에.
하지만 입황성 신검단주가 입궁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시간을 죽일 만한 곳은 더더욱 아니었다.
북경의 정치라 했다.
접견에 걸리는 시간으로 과오의 무게를 인식시키는.
하지만 이번 일이 황제의 지시일지, 혹은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정을 담당하는 이가 벌인 일인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겠지.’
정연신은 천천히 호흡을 갈무리했다.
입에서 길게 흘러나온 날숨이 바람에 실려 흩어진다. 앞서 한차례 자욱하게 피어올랐던 흙먼지와 함께.
북경에 들어온 뒤부터 지금까지 연전연패였다.
무공을 다듬어 보자고 했던 용희명은 정말로 정연신과 손속을 나눠 줬다.
그들은 공력의 양에 제한을 걸어둔 채 검법과 권각법, 그리고 둘 모두를 섞는 방식으로 비무에 임했다.
그 과정에서 정연신은 용희명에게 몇 번이고 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하지만 매 싸움마다 얻는 것이 컸기에 즐겁기만 했다.
언뜻 공월무에 대한 심득이 희미하게나마 다가올 때도 있어서, 이 순간 불청객들의 방문이 달갑지 않을 정도였다.
“동공을 익힌 놈이 그렇게 심호흡까지 해 버리면.”
용희명이 대문 쪽을 등진 채 웃는다.
“무섭지 않느냐.”
그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사아아―
신검단주의 몸을 감싼 자색 유삼이 바람을 따라 살랑인다.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압박감을 내뿜고 있는 관리의 존재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 정연신이 보기에 퍽 어울리는 행태였다.
“여기서 또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정연신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 순간 문지방을 밟고 있는 인물의 복색이 범상치 않아서다.
화려한 홍색 관복에, 머리를 준엄하게 덮고 있는 묵빛 관모.
심지어 허리에는 황금 문양이 수놓인 복대까지 차고 있는데, 표면이 날붙이처럼 번들거리는 게 연검(軟劍)인 듯했다.
풀어서 펼치면 채찍마냥 낭창거리는 칼로 변할 터였다.
병장기를 의복처럼 패용한 채 황궁을 드나드는 자.
황제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 황명을 직속으로 받드는 인물일 것이다.
“저치, 그러니까 사례태감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군? 상당한 무공을 익힌 북경 명문가 영애들의 눈길은 불처사(佛處士:돌부처)처럼 대하더니.”
용희명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정연신은 구태여 그 영애들이 돌멩이와 다를 바 없노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제갈가주 격살 임무를 나갔을 때, 공야세가의 남매로부터 천년 세파를 견디는 바위의 자질을 보고 진정한 어른이 됐던 것이다.
“그래, 기별을 넣어도 감감무소식이던 태감께서 어인 일로 행차하셨는가?”
용희명이 몸을 돌리며 물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용희명의 지시 탓에 일부러 열어놓았던 전각의 대문 주변은 그동안 문전성시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사례태감이란 자와 환관 한 명이 전부였다. 둘 모두 명족이었다.
‘음?’
문득 정연신의 눈에 반가움이 맺혔다. 사례태감을 호종하고 있는 명족 환관과 눈이 마주친 까닭이다.
흑색 승단 당시, 황태손의 부름에 응한 정연신에게 영물 제비를 선사해 준 인물.
“명 공(公), 그간 무탈히 지내셨는지요? 저는 백연을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 제법 친해지기도 했지요.”
“…무탈했습니다.”
말 한마디에 삶의 질곡이 녹아 있는 듯했다. 정연신의 얼굴에 희미한 의구심이 어릴 때였다.
“북경에 당도해서.”
사례태감이 입을 뗐다.
“어찌 그토록 여유롭게 앉아 있을 수 있나 했거늘.”
그녀의 푸르스름한 눈이 잠깐이나마 정연신을 담을 때, 그는 모종의 서늘함을 느꼈다.
고관대작의 몸에 밴 기세일까. 말과 필묵으로 사람 목숨과 나라의 큰일을 주관하는 자다웠다.
“후학 양성에 흥겨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소. 신검단주란 자가.”
사례태감이 옷소매를 여미며 말을 맺었다.
“당치 않은 얘기를 하는군.”
그녀와 마주한 용희명의 뒷모습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미 완성에 가까워진 무인을 두고 양성이라? 그건 본성의 마광익주를 욕보이는 말이지. 언젠가 날을 잡아서 사과해야 할 거요.”
“적반하장이로군. 귀공의 입궁이 유예된 이유를 모를 리 없으련만.”
“황상께서 공사다망하신 까닭이겠지. 그도 아니면, 오랜 태자 생활로 실의에 빠져 계신 전하를 대신하여 전권을 휘두르고 다니는 어느 고관대작 때문일지도 모르고.”
용희명이 웃음기 서린 음성으로 사례태감을 비꼰다.
북경에서 다른 이가 내뱉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날아갈 말일 텐데, 신검단주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사례태감의 표정은 무심했다.
“한순간이나마 그대가 모은 힘은 북경을 도모할 만했소. 입황성 신검단의 힘은 흩어져 있을 때 가치가 생기는 법. 귀공이 궁문 아래에 거적을 깔고 엎드려 죄를 청해도 모자랄 판국임을 알 터인데.”
“그건 태감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지. 내 장담하건대 황상께서는 생각이 다를 거요.”
“유감이로군. 그대의 서찰에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은 탓에, 차마 황상께 기별을 드리지 못했소.”
피식 웃은 용희명이 한 손으로 자신의 허리춤을 짚었다.
“이참에 신검단을 한번 눌러놓고 싶나 보군. 황상께선 자리를 비우셨을 텐데, 내 기감을 뭘로 보는 건가?”
“…….”
“더 긴말할 것 없지. 당금 천하는 흉년으로 도탄에 빠지기 직전이고, 입황성의 전력 손실은 북경에서 붓질만 하는 자들이 헤아리기 힘든 수준이다. 이 거대하고 암담한 분위기를 쇄신하고 천하를 질주할… 본성의 새로운 자색이 필요하니 협조해 줬으면 한다.”
용희명의 하대는 몹시 자연스러웠다. 몸에 밴 압도적인 기세가 그렇게 만들었다.
동시에, 별다른 동요도 없이 그와 마주한 사례태감의 기백 역시 돋보였다.
“그대의 일을 말하는 게 어떻소?”
“이 일이 우선이다. 내 죄과는 내가 감당할 테니 염려 말고.”
“자색의 임명은 그리 가벼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오. 황상께선 고금에 드문 성군으로서 뭇 관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 그대도 자색 승단을 겪은 적이 있으니 알 거요. 그 많은 적부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는 많은 시일이…….”
“비무나 보고 가라. 물정에 밝고 영특한 자들일수록, 직접 목도한 보석의 가치만 헤아리는 법이지. 마침 잘됐군.”
용희명이 양팔을 슬쩍 펼쳐 보인다.
동시에 정연신은 멀리 자금성 쪽에서 이곳을 향해 질주해 오는 기척들을 느꼈다.
하나같이 무거운 공력 파동. 언젠가 입황마가의 주연정에게서 느낀 적 있는 황실무공의 흔적이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사례태감이 그토록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기며 궁을 빠져나가는데, 자금성의 쥐새끼가 내는 소리에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뭇 관리들이 가만히 있을까?”
용희명이 웃었다.
* * *
비단 관복을 걸친 자들이 입황성 전각의 공터에 모였다. 정연신이 들은 바, 하나같이 면면이 화려했다.
도찰원, 동창, 금의위는 물론 오군도독부와 각지의 포정사마저 있었다.
용희명은 그들 앞에서 자신과 손을 나눠보자고 말했다. 정연신은 거절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합니까?”
용희명이 그와 마주 선 채 웃었다.
“당연하지. 가용 진기에 제한을 걸어두지 않으면 북경이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영락없이 역적이다.”
“알겠습니다.”
정연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변의 관리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근래에 정말로 보검처럼 벼려지고 있는 싸움의 감각을, 당대 신검단주에게 시험할 생각만 가득했다.
“출중한 기백이군.”
용희명이 입꼬리를 올린다.
“표정만 봐도 알겠다. 섬예, 너는 지금 네 상관을…….”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짓던 용희명의 웃음이 돌연 짙어졌다. 칼을 뽑지도 않았건만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검기를 연상케 한다.
삼 장 거리에서 그가 한 발 다가서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이길 생각인가?”
그 순간 정연신은 용희명의 검권(劍圈)이 펼쳐졌음을 느꼈다. 등줄기에서 소름이 오싹 돋았던 것이다.
주변의 정경이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멀어졌다.
비무는 이미 시작됐다. 말려들면 손도 못 쓰고 당할 것이다.
심장에서 불처럼 끓어오른 능법광륜기가 전신으로 펼쳐지며 온몸 근맥을 조율했다.
동시에 몸 바깥으로 진기를 내뿜어 연무장 전체를 그의 권역으로 삼는다. 희끄무레한 안개가 발밑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순간 용희명의 허리춤에서부터 번뜩인 검광(劍光)이 하얀 운무를 일직선으로 찢어발겼다.
‘전보다 더 빨라…!’
환익보를 후퇴 보법으로 밟아 간신히 피한 정연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전날 삼십 합을 겨루고 패했을 때보다 일 할은 더 빠른 참격이었다.
용희명이 아직 한창때의 고수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체됨을 혐오하는 입황성에서도 그 성장 속도가 유난히 두드러지는 자였다.
‘적어도 백중세는 이뤄야 해.’
기운을 조율하며 신법 풍신으로 파고든다. 그때 점차 짙어지는 안개를 뚫고 무섭게 날아든 검광이 그의 소매를 스쳐 왔다.
동시에 시화무극수의 경력을 모으고 상체를 옆으로 비튼 정연신의 양손이 입신검의 검신을 후려치듯이 밀어냈다. 무게감 있는 방어초였다.
쩌엉!
입신검이 맹렬한 공명음을 토했다. 정연신의 손에서도 둔중한 진동이 전해졌다.
용희명처럼 화려하게 몰아치는 절세고수에게 선공을 빼앗긴 상황이라면, 표홀함은 오히려 독이다.
기세를 되찾아오지 않으면 패배할 것이 자명했다. 정연신은 양손에 흐르는 내력의 경로를 각기 달리했다.
텅!
재차 연환되어 뻗어오는 용희명의 검격을 다시 한번 시화무극수로 차단하며 찰나지간 우수를 권세(拳勢)로 전환해 뻗는다.
말아 쥔 주먹, 제이초 진벽의 강맹한 경력이 축적의 과정을 생략하고 용희명의 명치를 향해 한 줄기 포탄처럼 나아갔다.
하지만 용희명이 검격 기교는 상상을 초월했다.
쩌정!
그가 질풍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내지른 팔꿈치 일격이 정연신의 주먹과 부딪치며 진벽의 기세를 약화시킨다.
동시에 쇠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나선을 그리며 되돌아온 입신검이 정연신의 두 손과 차례로 부딪치며 권격 투로(鬪路)를 호쾌하게 제압했다.
‘흐름을 되돌려야 해……!’
용희명이 손을 섞는 것에 주력한 그때, 어검의 묘리를 따라 움직인 광륜기의 안개가 한 차례 요동쳤다.
정연신의 권역이다. 허공에 퍼진 광륜기가 전신을 파고들어 적의 속도를 둔화하고 근력과 반응을 약화시킨다.
용희명이 아차 한 표정을 짓는 순간 정연신의 투로는 나선, 진벽, 권화로 전환되어 반격과 방어, 허초를 차례대로 뻗어냈다.
동시에 박투와 같은 근접전이 펼쳐졌다.
환상 혹은 늪처럼 일격도 허용하지 않고 모조리 흘려내는 권장법을 보여주는 정연신은 이미 십전완미의 무인에 가까웠으며, 지척에서 검을 수족처럼 움직여 그 투로를 헤집는 용희명의 검공은 경이의 영역에 있었다.
마광익주와 신검단주.
사방으로 비산하며 승천하는 무채색 진기의 파편들이 용희명의 시야를 끊임없이 교란한다.
주고받는 손속은 서로 먹구름을 때리는 것마냥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용희명은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파고드는 광륜기의 파동에 미세하게나마 점차로 느려졌다.
스악!
그러나 마냥 밀리지도 않았다. 입신검이 주변에 깔린 광륜기의 안개를 연신 사방으로 흩어내면서 일점(一点)을 노렸다.
새하얀 궤적이 푸르스름하게 물든 정연신의 양손과 얽혀 들어가며 격한 충돌음을 내뱉었다.
각 초식의 변화가 무수한 궤적을 만들고, 검과 손의 부딪침이 굉음과 함께 오싹한 폭발을 일으켰다.
쩌저정!
검풍에 찢긴 정연신의 소맷자락이 너울거리며 흩어진다.
정연신은 칠십 초를 겨루던 도중 어느 순간부터 용희명의 검력과 검속이 줄어들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특유의 강건한 내공으로 광륜기의 침투를 막고 있는 모양이었다.
능법광륜기가 발하는 신공의 법력은 내력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는데, 진기로 섬세한 발열을 일으킬 수 있는 고수에게는 또 달랐다.
이래서는 끝이 없다.
검초를 퍼붓고 있는 용희명이 그만큼 빠르게 지칠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환골탈태조차 하지 않고도 절세고수가 되었다는 그의 체력은 그야말로 끝 간 데 모르는 것.
오히려 최근까지 내가기공을 중점적으로 수련한 정연신이 먼저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
‘여기서 건다.’
오른쪽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가던 검신을 비스듬히 위로 밀어 올리며 오른손 장심에 의념을 집중했다.
최근에 터득한 내공 운용법을 꺼내려는 것이다. 정연신의 양손이 무당파의 양의심공(兩意心功)이라도 익힌 것마냥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수는 기파를 끌어모으고 좌수는 공세를 차단한다.
순간 정연신의 기도가 더욱 고요하게 가라앉자 용희명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곧이어 용희명의 화려한 자색 소매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피할 수도 있으련만 그는 정면으로 부딪치는 쪽을 택한 듯했다.
쩌엉―!
시화무극수의 희끗한 궤적들이 돌연 강하게 떨쳐낸 용희명의 일 검에 파훼 당한다.
정연신이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다시 손을 뻗어내자 용희명도 팔을 뻗었다. 서로의 손을 쥐어 잡아 봉쇄한 상태. 피차 팔다리가 길어 간합 역시 넓었다.
그때 용희명의 기수식이 상단세로 변하고, 하늘로 치켜든 입신검이 발하는 무형의 검기가 태양을 가리며 무시무시한 힘을 드러냈다.
그가 천지를 양단할 기세로 입신검을 내리그을 때.
‘환강.’
정연신 또한 체내에서 일곱 번 회전시킨 능법광륜기를 환강 구결에 따라 손바닥으로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