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14
◈ 북경(6)
순간 정연신과 더불어 용희명의 모습마저 흐려졌다.
두 사람의 발을 받치고 있던 땅이 사방으로 뒤집힌 까닭이다. 곧이어 먹먹한 굉음이 공터를 채웠다.
그와 함께 황톳빛 분진이 구름처럼 일어난 것도 잠시, 손과 검이 맞닿은 지점에서 비롯된 무형의 충격파가 지면을 거칠게 훑으며 지나갔다.
화아아악―!
원형으로 번진 파문이 흙먼지를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때아닌 구경거리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수 명의 관리들이 모래를 뒤집어썼다.
하나같이 강건한 기파를 풍기고 있는데도 장풍 따위로 바람을 해치지 않은 것이다.
그들 중 적복을 입은 노년의 문관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분명히, 공력에 제한을 두었다고…….”
황제를 대신하여 수도 백성들의 살림살이와 민정을 맡아 다스리는 북경 부윤(府尹).
여전히 노회한 표정으로 여유를 가장하고 있는데, 미미하게 떨리는 눈꺼풀은 감추지 못한다.
이 자리의 관리들 중 대다수가 그러했다.
황색 무복을 걸친 중년인이 그들을 힐끗 훑어보더니 슬쩍 고개를 저었다.
“사람의 기교가 아닌 게지요. 흔히 유능제강과 혼동되곤 하는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묘리입니다. 맥없는 손짓으로도 천 근을 다스릴 수 있는 자들이라면, 일 푼의 공력을 운용한다 한들 초식에 실린 무게가 장강의 물살에 버금갈 수밖에 없지요.”
중년인은 마치 중얼거리듯 얘기했다.
곧이어 그가 붉고 푸른 용이 새겨진 자신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툭 튕기자, 전신에 묻은 먼지가 팔방으로 튀어 올라 흩어졌다.
“어찌 됐든 개안을 했습니다.”
공터에서 유일하게 찬탄의 기색을 숨기지 않는 중년인.
그가 바로 금의위의 대영반(大令班)이다.
명족의 피가 짙게 섞이지 않은 듯 둥그스름한 귀를 지녔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영반께선 저들이 제법 마음에 드셨나 보오.”
또 다른 적복의 노인이 조용히 묻는다.
순간 주변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앞서 정연신에게 자신을 군부의 수장이라 소개한 병부상서(兵部尙書)인데, 내뱉는 말에 높낮이가 없다시피 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영반의 자리를 근래에 제수받았으니, 신검단주와도 초면이겠지요.”
“나 역시 영반의 의중이 궁금하구려.”
몇 사람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뭐…….”
대영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느새 먼지 틈새로 드러난 두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마광익주와 신검단주.
정연신은 용희명과 한 손을 맞잡은 채, 다른 손으로 입신검의 칼날을 막아내고 있었다.
활짝 열린 귀와 기감으로는 북경 귀족들의 기척을, 오른손으로는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끼면서.
“네 상관을 죽일 셈이었나?”
입신검의 길쭉한 검신 너머로 용희명이 기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정연신에게는 능청스러움으로 와닿는 얼굴이다.
회심의 한 수로 내뻗은 환강의 발경력을 통째로 베어내며 내려왔던 일검 탓에. 그건 마치 공기가 아니라 공간을 참(斬)하는 듯했었다.
그는 무표정으로 분함을 삭였다. 심기 불편한 모습을 바깥에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야말로 군자라 했기에.
정연신은 무당 고검의 일 이후로 다시는 침상에서 몸부림치지 않겠다고 결의한 참이었다. 성년이 천하에 뜻을 세운 것이다.
‘자중해야지.’
그는 내심 다짐했다. 이 결심은 천하가 평탄한 땅으로 이뤄진 것처럼 만고에 변함이 없으리라.
정연신은 천천히 양손을 거두면서 입술을 뗐다.
“제가 졌습니다.”
“이번엔 비긴 걸로 하지. 네 출수가 몹시 놀라워서 공월무의 한 자락을 꺼냈으니까.”
“일곱 광채가 얼핏 보이긴 했습니다. 공월무였습니까?”
“용환검을 검신에 잠시 덮어씌우는 수법이었지. 시기적절한 출수 아닌가? 내 나름대로 용골(龍骨)이라 불리는 뼈를 지녔는데, 지금은 어깨가 다 뻐근하다 이놈아. 발경이 어찌나 강한지 원…….”
용희명은 입신검을 이리저리 회전시키며 빛을 뿌리다가, 허리춤 검집으로 칼을 단번에 꽂아 넣었다.
착검 직후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뗀 그가 양팔을 과장스레 벌리며 씩 웃는다.
“여하간, 본성의 자색으로 손색이 없는 신위야. 무공을 잃기 전의 원로원주 할아범과도 해볼 만할 거다.”
“과찬이십니다.”
정연신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하더니 곧장 펴졌다.
표정을 빠르게 지운 것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섣불리 입을 열지도 말자.
그때였다.
저벅.
“용 단주에게 믿는 구석이 있었구려. 황실에 지은 죄를 새로운 인사로 면피할 심산이었소?”
사례태감이 다가왔다. 붉게 늘어진 옷자락이 지면을 스치는 사이, 장장 칠 척에 달하는 체구가 태양을 가렸다.
용희명이 입매를 올린다. 앞서 태감에게 하대를 쏟아낸 그의 얼굴은, 정연신과 비무를 벌인 이후에 평온을 되찾았다.
“면피는 무슨. 그저 낭중지추인 것을.”
“확실히 그 정도면 여러 황족들의 관심을 돌릴 만하겠군.”
낮게 깔린 음성이 명부의 염왕 같다.
정연신은 소맷자락이 산산이 찢겨 나간 자신의 오른팔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용희명이 보여준 검격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다가온 까닭이다.
‘사례태감.’
수십 년간 당금 황제의 오른팔로 군림해 온 자. 달리 긴 수식은 필요 없다. 입황성의 자색 임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였다.
용희명이 알려주길, 동창과 서창, 대내행창의 수장으로서 모든 고관대작의 인사에 입김을 불어 넣는 인물이라 했다.
정일품 최고관직은 물론, 북벌에 임한 황실삼대고수의 북방군 내부 직책마저 그녀가 황제에게 고한 대로 이루어졌다고.
스윽.
가까이 다가온 태감이 정연신을 향해 시선을 내린다.
“이리 이르게 마주할 줄은 몰랐으나, 언제고 한 번은 보게 될 인물이라 여겼다.”
그녀가 말했다.
정연신은 고개를 들었다. 환골탈태 이후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일이 몹시 드물었는데, 태감의 면전에서는 눈동자마저 올려야 했다.
탈태가 뜻대로 이뤄졌다면 눈높이가 정반대였을진대.
불현듯 정연신이 산해경에 나오는 거인 반고(盤古)를 떠올릴 때였다.
그를 물끄러미 살피던 태감의 낯빛이 더욱 하얗게 물든다. 말 그대로 귀신처럼 보이는 얼굴.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패협은 무탈한가?”
“몹시 정정하십니다.”
“그렇군.”
사례태감이 자연스럽게 발을 비튼다. 길게 늘어진 관복과 함께 천천히 몸을 돌리는 모습. 과묵한 위정자의 품행이었다.
“조만간 기별하지.”
그녀가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주변에서 그들을 살피던 관리들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태감을 뒤따랐다.
그 무리와 별개로 금의위 대영반을 비롯한 몇몇은 정연신에게 짧게나마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
“명 공, 다시 뵙겠습니다.”
“…보중하십시오.”
환관 명여까지 등을 돌려 사라진 뒤.
돌연 용희명이 정연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얼핏 봐선 저 사례태감을 권세에 미친 종자로 받아들이기 십상이지만, 실은 뼛속까지 황상께 충성하는 인물이거든. 어지간해선 뜻을 굽힐 수가 없다는 말이지. 저자의 머리는 황권과 나라의 안위로만 가득할 거다.”
“…그렇군요.”
“조리와 이치를 누구보다 따지는 늙은이야. 나 정도 되니 저자에게 공대를 했다 하대를 했다 하지, 자색 옷을 입기 전까지는 네 자신을 낮출 필요가 있다. 혹시 독대할 일이 생긴다면 지체 높은 노인네를 대하듯이 해줘라. 얼굴만 젊지 네 외조부와 동년배다.”
“알겠습니다.”
정연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돌연 용희명이 씩 웃었다.
“잘했다.”
“예?”
“정정하다는 말 앞에 몹시를 붙이다니. 너는 자금성 한복판에서 관직을 맡아도 대성할 놈이다. 아주 감탄스러워.”
정연신은 상관의 말을 대충 흘려 넘겼다. 문지방에 어둑히 드리우는 땅거미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어느새 해가 저무는데, 하루를 어찌 보냈는지 헤아리기 힘들다.
입황성의 자색 승단에 적부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고관대작들은, 하나같이 좀처럼 속내를 헤아리기 힘든 존재였다.
* * *
이튿날 입궁 허락이 떨어졌다.
용무가 있다면 자금성을 자유롭게 드나들어도 된다는 연통이 온 것이다.
수십 년째 간헐적으로 대리청정을 이어 가고 있다는 황태자의 직인이 찍힌 서찰이었다.
“지금은 안 갈 거다.”
용희명이 말했다.
“굳이 북경 능구렁이들의 한복판에 들어가서 시비에 휘말릴 필요는 없지. 황상께서도 계시지 않는데 말이다.”
“그럼 저는 가만히 있겠습니다.”
정연신은 전각의 대청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대답했다. 근래 들어 그는 자중의 화신이었다.
용희명의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곤혹스러움을 띤다.
“아니, 조금 나다녀도 좋다.”
“굳이…….”
“도시의 분위기가 묘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묘하게 요사스러운 기운들이 느껴지는 게… 제법 위험한 영물이 현현할 수도 있겠다 싶다. 어쩌면 안정과 권위를 지독시리 지향하는 여기 북경 사람들의 호감을 살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
“영물 말입니까?”
되묻는 정연신의 뇌리에 직감이 꽂힌다. 자색의 강호.
“내 개인적으로 알아보니, 황상께선 우리가 북경에 당도하기 직전에 출타하셨더군. 이 도시의 안위를 지키는 데 본성이 잠시 일조하길 원하신 모양이야.”
“전언 같은 것은 따로 없지 않았습니까?”
“글쎄, 글씨보다는 행동과 무공으로 말씀하시는 분인지라.”
고개를 내저어 보인 용희명이 말을 이었다.
“이리 추측해 봐도 직접 물어보는 것만 못하겠지. 차라리 잘된 듯싶군. 네 승단을 독촉할 겸, 내가 직접 찾아뵈어야겠다.”
황제와의 독대를 어렵지 않게 얘기한다.
입황성 자색의 지위를 방증하는 말. 혹은 신검단주란 직책이 지닌 상징성 덕분일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정연신이 밟아야 할 자리였다.
“물론, 황상만 찾는다고 될 일은 아니다. 태감의 말이 그리 틀린 게 아니야. 그분은 여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지. 주씨 황족과 신하들에게 국정을 맡기고 무공을 연마하기 바쁘다 해도, 근본적으로 나라를 손안에 쥐고 계시니.”
“고관대작들의 호의를 얻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대의, 민심, 무력, 필요성… 그 모든 게 하나로 모였을 때 나타나는 빛깔이 자색이지. 얻기가 지독하게 힘들어.”
용희명이 빙글거리며 문을 나섰다.
“태감이 기별할 거라 했으니 얘기나 나눠 봐라. 이미 천림대주와 선목령주의 호감을 산 놈이니, 크게 염려스럽진 않군.”
당대 신검단주는 그렇게 황제를 찾아오겠다며 정말로 사라져 버렸다. 여름 바람만 노을 사이로 공허하게 일렁였다.
정연신은 홀로 남겨졌다.
신검예치 연소하마저 자리를 비운 까닭이었다. 그의 본가가 북경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사례태감에게서 기별이 왔다. 만찬의 술자리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유려한 붓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정연신은 어스름이 깔리자마자 길을 나섰다.
“황 자… 마광익주?”
“용모만 봐도 알겠어. 드디어 나오셨군.”
“말세는 말세야. 음흉한 뜻을 품은 역적이 북경의 저잣거리를 멀쩡히 활보하는구만.”
“미쳤어?! 고수는 다 듣는다고!”
“사실 아닌가? 민생이 아니라 일신의 영달과 명예를 구하는…….”
“제발 조용히 좀…!”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거리는 북경 사람들을 지나친다. 그는 자금성을 길게 두르고 있는 해자의 물줄기를 따라 걸었다.
북경의 공기는 정가장이 있던 신야현처럼 맑았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묘한 적의도 정가장 식솔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밤이 짙어지면서 저마다 몸을 돌려 귀가하는 이들의 옷은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모두 비단이었다.
정연신에게는 모든 게 새로웠다. 시야를 스치는 성벽과 사람의 행색을 되새기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게 온갖 시선을 받으며 걷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당도했다.
주황빛으로 가득한 전각. 수많은 등롱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망이 밤공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이쪽으로 모시겠나이다.”
제법 사람처럼 생긴 하인이 그를 안내했다.
곧이어 정연신은 화려한 자단목을 앞에 두고 사례태감과 마주 앉게 됐다. 그녀는 여전히 붉은 관복에 묵빛 관모를 쓰고 있었다.
‘검소하군.’
정연신은 생각했다. 태감과 자신 사이에 놓인 상차림이 단출해서다. 하얀 호리병과 술잔 두 개, 그리고 안주인 듯한 전병이 전부였다.
손님 대접이 박한 건지, 흉년에 솔선수범하여 청백리 행세를 하는 건지 모를 노릇.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네.”
태감이 입을 열었다. 앞서 입황성의 전각에서 보여준 품행에 비해 조금쯤 누그러진 어조였다.
“북방 요족의 군세가 장성을 무너뜨리고 있네. 상당수의 황족 고수들이 황군과 함께 북진했고, 망둥이처럼 날뛰는 강호인들은 입황성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자네도 알 걸세. 황실이 민생에 손을 뗀 듯 보일 테니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혼란스러운 시국에… 신검단의 흑검(黑劍)들이 제 안위를 도모하고자 집결했네. 한곳에 모인다면 북경을 위협하고도 남을 힘이, 민생 안정의 기치를 향해서만 휘둘러져야 할 검이 스스로 뜻을 품고 움직인 걸세.”
태감의 음성은 나지막했다. 천장이 뚫려 있어 밤하늘이 훤히 보이는 정자에 조용히 내리깔렸다.
“거기서 불신과 의문이 생기지. 입황성의 힘이 어느 검객의 이기어검처럼 제 뜻대로 움직일 수도 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거늘, 어떤 관리의 목이든 벨 수 있는 자색의 권위를 또 하나 얹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관아가 과도한 부담을 지는 게 아닌가? 당금의 신검단이 정녕 대의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들인가?”
“…….”
“이렇듯 황실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네.”
스윽.
태감의 붉은 소맷자락이 탁자를 스쳤다. 어느새 술병을 쥔 그녀가 정연신의 잔에 그것을 기울였다.
투명한 물줄기가 졸졸거리며 술잔을 채운다. 곧이어 잔 안에 만월이 담겼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창백한 빛을 드리우고 있는 보름달이.
태감이 정연신의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 술잔이 천하의 민생일세. 잔을 가득 채운 만월은 민가를 침습하기 시작한 강호라 할 수 있지.”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무림은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고, 기근을 맞이한 강호인들은 폭급한 성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 시작했네. 본래 사람에게 허락된 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지금에 이르러 입황성조차 강호를 감당치 못하고 한데 뭉쳐야 하는 지경까지 왔지.”
“그렇지요.”
정연신은 담담히 인정했다.
광활한 땅 위에 반수 이상의 십삼천이 난립해 있고, 무수히 많은 중소문파들이 약탈을 기치로 이합집산하는 가운데 종적을 쫓기 힘든 고수들마저 천하를 배회하고 있는 형국.
북방 요족을 비롯한 새외의 위협도 존재한다.
강호만 봐도 그렇다. 영역을 괴력난신까지 넓히면 어찌 될까.
“우리 황실은 건국 이래로 무림 말살 정책을 수차례 펼쳤네만, 무공이란 게 몹시 신비로운 탓에 환란을 겪으면 겪을수록 신묘해지고 고강해지기만 하더군. 도통 사라지지가 않아. 자네도 그렇지. 가문이 참변을 겪었는데도 이리 살아있지 않나.”
“…….”
“애초에 이러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황실의 중론을 형성하고 있네. 천하 민생을 두루 살피지 못하는 신검단이 예전만큼의 가치를 지녔느냔 걸세. 자색을 셋씩이나 가진다 한들, 강호에서 비롯된 혼란은 그 이상으로 넓어지고 있으니. 여기에 담긴 만월처럼.”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희미한 풀벌레 소리가 달밤의 적막을 느리게 찔러댔다.
태감이 기다란 검지를 뻗어 정연신의 잔을 툭 건드렸다.
“이제 대답해 보게. 이 서슬 퍼런 보름달을 신검단이 눌러둘 수 있는가? 난세를 딛고 강자들만 살아남을, 더욱 강성해질 무림에 대해 어찌 생각하지? 자네는 오 년 뒤, 십 년 뒤까지도 흑검의 집결 없이 명줄을 붙들 수 있겠나?”
얼굴이 달빛보다 하얗게 질려있는 황실 거인의 눈이 정연신을 담는다.
그는 올곧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태감이 말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대로다.
오른쪽 소매가 잘려 나간 흑포를 걸친 채 술을 내려다보는 청년의 모습.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어떤 기백을 기대했던 걸까. 사례태감의 얼굴에 미미한 실망감이 어릴 때였다.
“그저, 오 년 후에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정연신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소인이.”
그가 손가락으로 잔을 감아쥔 순간, 술의 표면에 푸르스름한 빛으로 담긴 보름달이 느릿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이 나라의 강호입니다.”
정연신은 차분하게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