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53
◈ 복마전 (6)
* * *
정연신은 빈자리를 멍하게 응시했다.
‘언제 올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체조차 되지 못한 무언가가 제법 오랫동안 입을 나불거린 듯했지만, 애초에 그 몸뚱이는 태모산성의 성주를 불러내기 위한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마광익에서 쓰는 보령옥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암천제 초열.
폭군에 가까운 명족 옥황상제라고 들었다.
천하에 불가능한 것이 없는 초월자. 지닌바 술법무공의 성취가 하늘에 닿은 절세고수.
강호 무림을 대표하는 이름이 ‘삼봉진인’이었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늙은이로, 명 건국 이전부터 살아온 대노괴(大老怪)다.
‘누구한테 들었더라.’
정연신은 멍하게 서 있다가 홀로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그리고 내심 짧게 탄성을 토했다. 아, 원로원주님.
―알아두게. 당시의 초열은 사마외도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저 백도를 걷는 자로서 무당파의 개파조사와 연을 맺었네. 생전의 삼봉진인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본 노괴물인 걸세. 당연히 성주님보다도 연배가 한참 높지. 그 탓에 호사가들이 강호 무림의 배분을 논할 때도 항상 예외에 둔다네.
―그렇다면 외조부님과 원로원주님도 병아리…….
―늙으면 귀가 막히곤 한다네. 방금 무어라고?
―원로원주께서 한창때를 보내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늙수레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선했다.
원로원주 신벽은 앞서 신검단 집결령을 내렸던 용희명에게만 인색할 뿐, 평상시에는 성품이 담백하고 인망도 두터운 인물이었다.
―여하간 내가 전전대 원로원주께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그자는 천하에서 가장 상서롭다는 도가 삼청력(三清力)을 접한 뒤에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했네. 무당과 소림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신위를 떨쳤기 때문일세. 그자는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점차로 손속이 과격해졌고, 그렇게 사마외도로 접어드는 와중에 술법무공의 천적과 같은 이들을 역으로 격살해 버리곤 했다더군.
정연신이 노을 진 깃발의 출정식을 선사받았을 때, 곧장 떠나려던 그를 붙잡고 노파심에 쏟아낸 신벽의 이야기.
일찍이 장삼봉과 교류했던 초열의 술법은 어떤 종류의 힘에도 방해받지 않고 천재지변을 일으켰다.
본래 교역과 교통의 요충지였던 하남성 신야현의 지형을 통째로 바꿔서 고립시킨 것도 어떤 괴력난신과 암천제의 싸움이라 했다.
그만한 경지라면.
당연히 후계자의 죽음을 멀리서도 알아챌 것이다.
‘늦든 빠르든.’
정연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율하낭랑이 천극문의 세 검객에게 포위된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파지직―
그들 사이에서 시퍼런 번갯불이 몇 줄기의 실타래 같은 모습으로 명멸했다.
앞서 율하낭랑의 검격에 깊숙한 자상을 입은 칼잡이조차도 그 검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천극문의 취검맹호였다.
“계속 쓰리네.”
쓴웃음을 짓는다. 도발이 좋게 풀리지 않았다는 듯이.
정연신의 눈에는 피로 물든 그녀의 복부가 어찌 조치되어 있는지 훤히 보였다.
검상 내부를 복근으로 조인 뒤에, 영성을 품은 신공(神功)의 진기로 그 부위를 접합해 버렸다.
언젠가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지언정 당장은 전력에서 이탈하지 않은 것이다. 입황성 흑색 셋을 논했던 핏덩이의 말이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천극문의 검객들은 화산 장문인과 입황성 자색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
그러고도 물러설 기색이 없다. 검 손잡이를 쥔 모습으로 달인의 풍모만 드러낼 뿐이다.
일각쯤은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건지도 모른다.
반투명한 손가락이 정연신의 시야로 끼어들었다. 귀신이 되다가 만 소천무적이 설백처럼 희디흰 손을 흔들어 보인 것이다.
정연신은 신경 쓰지 않았다. 딱히 시야가 가려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라면 졸음기.
머릿속에 몽실몽실한 구름이 낀 듯했다. 이무기 내단의 파편을 상단전으로 소화시키는 중인데, 간헐적으로 전신의 감각이 무뎌졌다 살아나길 반복한다.
이따금 주변의 풍경과 손끝에 닿는 바람 줄기가 꿈처럼 몽롱하게 와닿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항상 시간과 싸우고 있으니까.
“이렇게 되고 보니,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인 듯싶어.”
율하낭랑이 새하얀 보검을 한 바퀴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근시일 내에 십삼천주 둘이 닥쳐올지도 모르는데, 그녀의 음성은 다소 익살스러웠다.
“이제는 자네도 알았겠지만… 눈을 왜 그렇게 뜨나? 혹, 수마가 찾아온 건가?”
“…….”
“이 친구야.”
“경청하고 있습니다.”
“자색의 장포를 입었으니, 이제 자네도 알았을 터. 구파는 대대로 자연지기가 충만한 성산(聖山)에 세워진 산중문파로서 천하를 지켜 왔네. 민가 바깥에서 출몰하는 괴력난신들을 상대하는 데 큰 힘을 쏟고 있지.”
“장문인의 노고가 큰 줄로 압니다.”
정연신은 몸 내부에서 광륜기를 돌리며 대꾸했다. 그리고 내심 입매에 침 따위가 흐르지 않았는지 감각으로 살폈다.
“비무대회가 그리 끝난 이후로, 화산지회에 참여했던 구파는 곧장 본산을 살펴야 했네. 다행히 본파나 무당은 그것이 가능했네만… 본산이 사천에 있는 청성과 아미는 달랐지. 사천에서 거대한 인면지주가 현현한 까닭에 아미의 장문사태께서 그쪽으로 가셨고, 청성의 장문인께선 전서구가 활발히 오가는 속가문파에 먼저 들러 사천의 동태를 보고받기로 하셨네. 그러다가…….”
“이 항주 땅에 먼저 와 버렸고, 본문의 문주께 비명횡사할 뻔했죠.”
뒤편에서 검을 쥔 청년이 율하낭랑의 말을 가로챘다.
천중오검객 중 은검절.
나른하게 내려앉은 눈매가 돋보이는데, 그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단아한 일직선으로 뻗은 검을 쥐고 있다.
연배는 짐작되지 않는다. 머리 양옆으로 날카롭게 솟은 귀 때문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검을 연마했을지 헤아리기 힘들었다.
“곧 문주께서 오실 거예요. 굳이 여기서 칼을 맞댈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 사매도 많이 다쳤는데.”
은검절이 몸을 이리저리 건들거리며 말을 맺었다.
그는 이 순간 복부가 핏물로 흥건한 취검맹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모든 신경을 율하낭랑과 정연신에게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비치는 게, 인상과 달리 칼날 같은 기감을 지닌 듯했다.
어느 한 명도 만만하지 않다.
검문(劍門)으로서 무당파와 쌍벽을 이룬다는 천극문.
쿠구궁―
세 초고수의 발밑에서부터 바닥으로 은은한 진동이 번지고 있었다. 이미 검진을 온전히 발동시킨 모양새였다.
공세로 나가서 천운이 따른다면 대문파의 수장을 도모할 수도 있고, 저대로 수세를 지킨다면 언젠가 죽고 말지언정 사흘 밤낮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검단의 대주들이 오래도록 합격진을 익히면 저렇게 될 터였다.
“들어와도 좋소.”
어느새 장포의 끝자락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펄럭이고 있는 용력검귀의 말이었다.
율하낭랑이 그들을 느릿하게 둘러봤다.
검진의 어느 부분을 무너뜨려야 이 대치 형국을 빠르게 끝낼 수 있을지 살피는 기색. 그녀는 짐짓 자연스레 정연신에게 말을 건넸다.
“저들의 얘기를 어찌 생각하는가? 정녕 고검진인께서 외도제일검에게 변고를 당하셨을까?”
“낭랑.”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전에 없이 친근한 부름 때문이 아니다. 돌연 율하낭랑의 어깨를 짚은 정연신이 허공을 거꾸로 타 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하게 쾌속한 공중제비였다. 이 순간 하늘을 스치는 그의 발끝에서 새하얀 파동이 퍼져 나갔다.
“시간이 귀합니다.”
환익보.
쿠릉!
정연신이 율하낭랑을 넘어서 땅을 내디딘 순간, 바닥이 물결처럼 출렁이며 둔중한 진동을 내뱉었다.
동시에 천극문의 초고수들이 자아내고 있던 반투명한 원형의 기파가 한꺼번에 흩어져 날아갔다.
“……!”
합격진의 공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발걸음.
적측의 선두에 있던 용력검귀가 커다란 눈을 부릅뜬다. 그 일보(一步) 탓에 무방비한 상태로 입황성의 자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콰콰콰콰콰―!
정연신이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어느새 환강의 나선 장력을 두른 팔에서 반투명한 회오리가 몰아쳤다. 일격에 머리를 박살 낼 심산이었다.
그때.
“무서운 젊은이로군. 일단 거기까지만 하는 게 어떤가?”
등 뒤.
장내에 없던 목소리였다. 저잣거리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중년 사내의 투박한 기질이 느껴졌다.
하지만 짙었다. 음성에 어린 존재감이 남달랐다.
별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말소리가 칼처럼 목덜미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마치 당장 손을 거두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검에 난도질당할 듯했다.
정연신은 고속으로 출수하던 와중에 깨달았다.
‘천극문주.’
일검에 섭리를 가른다는 절세검객. 태모산성주에게 협력 중인 반역도.
틈을 보여선 안 되는 자다.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해도 일단은 손을 거두는 게 옳다.
정연신은 그러지 않았다.
푸화확―!
그의 손바닥이 용력검귀의 얼굴을 터뜨리고 지나갔다. 일곱 번 중첩된 환강이다.
일말의 저항감도 없었다. 호신강기와 육편의 폭발음이 을씨년스럽게 울렸다.
곧이어 장력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뼛조각이며 핏방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철썩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취검맹호와 은검절의 눈에 비대한 경악이 스쳤다.
“…아주 잘했네.”
천극문주로 추정되는 중년인의 목소리였다.
다소 과장스러운 기질이 느껴진 탓에 진심인지 가식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마치 언행으로 변검이나 환검 따위를 펼치는 듯했다.
정연신은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스윽.
눈에 허여멀건 백태가 낀 중년의 맹인이 머리 위 삿갓을 들어 올린다.
다른 손으로는 네 자쯤 되는 길이의 검을 들었는데, 율하낭랑이 정연신을 등진 채 그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맹인이 들고 온 것으로 보이는 목함이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그 자그마한 충격으로 열린 덮개에서 웬 사람의 얼굴이 나왔다. 정연신이 아는 얼굴이었다.
굉장히 낯이 익었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 정말로 이곳이 꿈속인가 의심스러울 만큼.
“…진인.”
무당파 고검진인.
그 앳된 소년의 이목구비 그대로 머리만 존재했다.
잠시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용력검귀와 고검진인. 무게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강호사에 육중한 존재감을 새겼던 두 사람의 죽음이 드러난 순간, 이 항주는 난세를 대표하는 땅으로 바뀌었다.
“…….”
아주 잠깐 눈꺼풀을 내렸다가 올린 정연신의 눈에서 새하얀 광망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가 여뢰를 고쳐 쥔 순간.
[장소를 옮기지.]또 다른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났고, 정연신은 찰나지간에 자신의 발밑에서 압축되었다가 벼락처럼 터져 나가는 공기를 느꼈다.
콰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그의 몸을 튕겨냈다.
말 그대로 쏜살이 된 듯했다. 삽시간에 고층 전각의 꼭대기에서 벗어나 머나먼 항주의 물길을 향해 쏘아지는 신형. 거친 부유감과 함께 귓가를 세차게 때리는 강풍이 느껴졌다.
정연신은 허공에서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시야에서 급격히 작아지고 있는 염천각의 꼭대기 쪽.
콰릉!
천둥처럼 허공을 날아서 그를 향해 따라붙는 사내가 보였다. 먼저 나섰던 천극문주와는 외양이 달랐다.
새까만 머리칼을 걷어 올려서 묶은 망건(網巾)의 양옆까지 치솟은 귀가 돋보였다. 태양을 형상화한 듯한 금빛 문양이 순백의 장포에 새겨져 있었다.
정연신이 총관부에서 보고 받은 용모파기와 일치하는 외양.
암천제 초열이다.
‘방금은…….’
기척마저도 없이 현현한 태모산성주의 일격이었다. 성주가 소성주의 죽음을 느끼고 염천각으로 올라왔던 것이다.
술법무공의 발동 속도가 빛살처럼 빨랐다.
그간 정연신이 겪어본 모든 쾌검을 통틀어도 손꼽힐 만큼 쾌속한 기예였다.
속도가 실전에 맞춰져 있는 게, 기감으로 추정되는 전투방식이 소천무적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보시게. 조곤조곤 말이라도 나눠 보지, 항주에 오자마자 소성주와 용력이를 함께 죽일 건 뭔가?”
한 손으로 삿갓의 정수리 부분을 누른 맹인이 멀리 옆쪽에서 날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수군이 오가는 물길까지 당도할 심산인 듯했다. 그들의 등 뒤로 반짝거리는 강물이 가까워졌다.
염천각 인근에 무언가 귀중한 것이라도 있는 걸까.
그도 아니면 방파대전의 결전 병기인 천중오검객을 더 이상 잃을 수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양쪽이 모두 유력했다. 흑색이 열일곱인 입황성 신검단조차도 대주를 셋씩이나 잃으면 치명적인 형국을 맞이할 테니까.
그리고 천극문주와 정연신의 사이.
“정신 단단히 차리게. 지금부터…….”
율하낭랑이 큰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왔다. 그녀 역시 두 사람과 함께 튕겨 날아온 것이다.
태모산성주의 가공할 술력(術力)이 엿보이는 한편으로, 그녀 스스로 폭발에 몸을 맡긴 모양새였다.
항주의 민초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정연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들 넷은 결코 민가에서 싸움을 벌여선 안 된다.
이미 강호의 전설이 되어있는 십삼천주 둘에, 구파 장문인마저 섞였다. 격노와 몽롱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지언정 앞뒤 구분은 가능했다.
그는 율하낭랑의 조언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낭랑.”
“음?”
정연신은 그녀의 등허리를 한 손으로 훑어 올렸다.
사락.
이미 구명지은을 주고받은 사이였다. 율하낭랑은 그녀의 허리에 매여 있던 연검(軟劍)을 뽑아낸 정연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무얼 하려고…?”
스릉―
얼핏 요대로 보이는 백색의 검이 낭창거리며 휘어진다. 철족의 솜씨가 들어간 건지 한 점의 광채도 없다.
본래 검이란 소모품이고, 율하낭랑의 허리띠는 여분의 병장기를 갈음하고 있었다. 눈썰미 있는 절세고수라면 당연히 알아차릴 만했다.
정연신은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던졌다.
그 손짓을 따라 일직선의 빛줄기가 허공을 질주했다.
부아아아아아앙―!
내공을 머금고 꼿꼿이 세워진 연검은 정연신이 튕겨진 궤적을 그대로 거슬러 날아갔다.
검에 깃든 영성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간격이 엄청나게 벌어지는 와중에도 힘을 잃지 않았다.
그 거리가 십여 리.
율하낭랑의 눈이 서서히 커졌고.
삽시간에 염천각을 가로지른 연검은 채찍처럼 휘어지며 취검맹호와 은검절의 목을 훑었다.
그들이 찰나지간 빛살처럼 휘두른 검이 그 칼날을 조금씩 밀어냈지만, 곧이어 연검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파동에 목울대의 상처가 벌어지더니 그대로 터져 나갔다.
어검술에 실린 검가(劍歌).
희뿌연 충격파에 홱 꺾이며 분리된 머리통들이 허공으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