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90
◈ 명족 나무 (2)
정연신과 입황성주, 그리고 신의.
보름에 걸친 세 사람의 여정은 기이하리만치 별일이 없었다.
칼을 든 무인들이 도처에서 산적 행세를 하고, 강가에선 물을 암기처럼 다루는 수공(水功)으로 도적 노릇을 한다는데도 일행은 난세를 온몸으로 겪지 않은 것이다.
마치 천하의 어지러운 인연들이 스스로 그들을 비켜 간 듯했다. 정확하게는 입황성주를 피해 버린 느낌이었다.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산길을 걷는다.
꿈결 같은 일이었다.
또한 그녀는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태평성대에 평범한 사제지간이 여행길에 오른다면 이러하리라 싶을 정도로.
벽곡단이나 건육 따위의 식량을 나눠 먹고, 불을 피우면서 쉬고, 날이 저물면 그 모닥불 맞은편의 까끌거리는 나무 둥치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잠드는 일들이 모두 그랬다.
근래의 난세를 생각한다면 다소 이상한 행태였다.
어떤 준마나 가마, 경공 따위를 이용하는 일도 없었다.
그 과정에서 정연신은 처음으로 스승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성
주와 수하의 관계를 넘어서서, 이제야 정말 참된 사제지간으로서 조금이나마 일상을 부대낀 것이다.
―그거 덜 익었습니다. 한데 스승님께서도 고기를 드셨습니까? 청안마검에게 명족은 숲의 친우지, 말과 돼지의 친우가 아니란 말은 들었는데…….
―검력(劍力)을 기르고 유지하자면 섭식이 먼저다. 내공 이전에 몸이 있으니, 풀만 먹어서는 무극에 이를 수 없느니라. 네 근본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정가동공 말씀이지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지난겨울부턴 멧돼지마저 귀해졌는데, 어검으로나마 사냥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겨울바람이 더 드세진 느낌이기도 해서 걱정이 조금 있었는데…….
―네 심어검(心馭劍)은 이미 훌륭하다.
―아.
―다만 마음을 일으키기 전에 찰나의 틈이 생기니, 명상에 매진하는 편이 좋다. 심신의 간극을 좁힌다면 어검이 더 쾌속해질 것이다.
―예, 그것도 고기 속이 덜 익은 겁니다. 이걸 드시지요.
―고맙다.
사부를 둔 강호인이 어릴 적에 쌓는 경험.
정연신은 보름간 그러한 고즈넉함을 마음에 갈무리할 수 있었다.
스승과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란 생각보다도 따스했다. 그 모든 게 몹시 귀중한 추억으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을 만큼.
이따금 짙어진 달빛을 멍하니 올려다볼 때면 신의가 천하목에 대해 말을 풀어주기도 했다.
―크다는 말은 당연히 들어봤겠지만, 그 빌어먹게 큰 나무 안쪽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일세. 도저히 마을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지.
―나무 속을 파내고 산단 말입니까?
―천하목은 두 겹이거든. 둥그스름한 외성과 내성이 나뉘어져 있는 셈이지. 겉껍질 바로 안쪽엔 촉한의 소열제(昭烈帝)처럼 귀 큰 종자들이 수천 명이나 살고 있네. 일컬어 외성이지. 진정으로 천하목의 본신이라 할 만한 나무는 그 안쪽, 가장 깊숙한 중심부에 있는데… 어지간한 명족도 감히 들어갈 수 없다네. 씨족의 역린에 가까운 장소지.
―들어갈 수 없다…?
―들여보내지 않는 걸세. 기나긴 세월을 무공만으로 채운 고수들이. 애초에 방계 주씨들이 외성의 경계무사를 자처하고 있으니 말 다 한 거 아닌가?
기존의 강호 질서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
여러모로 시간이 빠르게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 산 저 산을 걷다 보니 어느샌가 ‘천하목이다’란 스승의 음성이 영롱하게 울린 것이었다.
마치 웬 신묘한 진법의 생문(生門)만을 밟은 끝에 홀연히 목적지에 이른 것처럼.
천하목.
구름에 닿을 듯했다.
천하란 두 글자에 별다른 과장이 없다. 하늘과 땅을 이어붙인 것마냥 높아서다. 마치 흰 솜털처럼 갈기갈기 풀어 헤쳐진 구름들이 그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무언가 짙고도 무거운 느낌의 적막과 함께였다. 어디선가 묵직한 뿔피리 소리도 은은하게나마 들려 오는 것 같은데, 근원지가 헤아려지지 않았다.
압도적이란 말도 모자랐다.
‘이게…….’
정신이 조금쯤 혼미해졌다.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혼백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갈 듯한 기분.
어릴 적 홀로 밤공기를 가만히 볼 때 느끼곤 했던 감각이 느리게 끌려 올라오고 있었다.
강호의 불가사의다. 도무지 나무로 보이지 않는다.
“한데.”
정연신은 고동빛으로 이뤄진 성채를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들어갑니까?”
어디를 살펴도 입구가 없는데, 방문인의 발경력을 시험하는 장소로 보이진 않는다. 그때 무심코 손가락을 움직이는 그를 힐끗 본 신의가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아니 잠깐.”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정연신은 반사적으로 얘기했다. 스승이 있는 자리에서 경거망동하는 군자는 없는 법인데, 근래에 자신에 대한 뜬소문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그 탓에 일부러 귓속을 무디게 만들었다 해도 입황성주의 곁에선 신경이 쓰였다. 좋은 모습만 보여도 모자란 판국이기에.
“몇 가지를 당부해도 되겠는가?”
그렇게 물은 신의는 확답을 듣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심호흡을 지양해 주게.”
“예?”
“자네쯤 되는 절세고수들의 들숨은 몹시 많은 자연지기를 앗아간다네. 가뜩이나 지기(地氣)가 땅에 떨어진 요즘 같은 때에, 이 천하목의 영역에서 자네가 보란 듯이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그건 도발일세. 아주 효과적인 도발이지. 물론 내 익히 자네가 격장지계에 능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건 조금 격이 다르다고 봐도 좋네.”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정연신은 조용히 되물었다.
광 자로 시작되는 어떤 말이 무슨 뜻인지 청명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본성으로 발길을 돌리는 순간에도 특유의 모호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보다 수다스러운 악수림과 신소빈 역시 대충 얼버무리거나 딴청만 피웠더랬다.
“음?”
안하무인 격인 태도로 이야기를 늘어놓던 신의가 움찔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구체적으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글쎄, 잘 모르겠군. 뜬소문이니 신경 쓰지 말게. 여하간 두 번째는 발소리일세. 안으로 들어가면, 되도록 조심히 걸어 주게.”
“…….”
“오감이 어지간한 기감보다 예민한 미치광이들뿐이거든. 예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 괜한 시비에 걸릴 수도 있네. 그치들은 세속의 지위나 법도에 얽매이지도 않아서… 못 볼 꼴을 보게 될 수도 있단 말이지. 마땅히 긴장해야 해.”
“못 볼 꼴이라면…?”
“굳이 듣고 싶지 않을 걸세.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더 말씀해 주실 게 없다면 여기까지만 듣지요. 스승님, 제가 기별하겠습니다.”
정연신은 느릿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당장 그의 천명을 극복하고자 온 것이 아니라 해도, 다름 아닌 천하목이 코앞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저들의 경계엔 타협이 없다는 걸세. 거기서 섣불리 일보라도 더 나아가면…!”
드물게 당황한 신의가 손사래를 치며 다가오려던 찰나, 돌연 허공에서 가느다란 광망이 번뜩이더니 새하얀 파문을 꼬리처럼 물고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정확히 정연신의 발 앞쪽.
굉음과 함께 지반이 원형으로 내려앉았다. 격렬한 진동이 번지며 사방으로 실금을 그었고, 온갖 방향으로 튀어 나간 지면의 파편들이 쇳조각처럼 쩌저정거리며 주변을 거칠게 파헤쳤다.
그처럼 크게 폭발한 먼지구름이 사그라들기까진 몇 호흡의 시간이 필요했다.
“…….”
움푹 꺼진 땅 한가운데.
기다란 쇠창살이 화살마냥 박혀 있다. 그 끝부분에선 하얀 깃대가 잔상을 일으키며 부르르 진동하고 있었다. 일격에 실린 힘이 지축마저 뚫고 들어간 듯했다.
쿠구궁―
깃대의 움직임을 따라 지반이 은은하게 흔들린다. 천재지변에 가까운 경파가 준엄한 경고처럼 땅으로 스민 것이다.
그 바로 앞.
“말로 해도 될 텐데.”
정연신의 몸은 거대한 충격파를 정통으로 맞이하고도 온전했다.
애초에 몸을 노리고 떨어진 일격이 아니었던 까닭인데, 그의 장포는 별무리처럼 은은한 광채에 덧씌워진 채 펄럭이지 않았다.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그는 묵묵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고동빛 나무껍질을 밟고 수직으로 서 있는 인영.
자신의 몸만큼 커다란 대궁(大弓)을 내려 쥔 모습에서 절세고수 특유의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거리가 일 리쯤 되는데도 미풍처럼 일렁이며 정연신의 살갗을 훑어내리는 기운. 전신공력을 증폭시키는 영성이 그만큼 농밀한 것이었다.
새털구름과 햇빛을 등지고도 그 몸선이 뚜렷했다.
날렵하면서도 탄력적인 느낌이 달인지경까지 묻어나는 게, 궁술을 연마한 자로서 완성에 이른 육체였다.
“…천하제일궁은 암야전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연신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허명이었던 겁니까?”
그 말에 어느샌가 멀찍이 물러서 있던 신의가 고개를 저었다.
“속세의 풍문 중에선 더러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는 법이라네. 칼을 찬 무뢰배들은 제 세상이 전부인 양 이름을 날리지 않은 달인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네만… 무공이 깊은 만큼 자존심도 강해서 말일세. 혹, 자네도 천하제일궁을 격살했다는 명성에 취해 있었나?”
그가 짐짓 장난스럽게 묻는다. 앞서 화살을 쏘아낸 인영을 향해 고개를 한껏 치켜올린 모습인데, 신의는 정연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예스럽게 말을 이었다.
“풍문에 몹시 어두운 곳이라 광야일멸의 명성이 닿지 않았을 텐데… 천하목 깊숙한 곳에 터 잡은 치천궁백(致天弓魄)이 어찌 입구까지 나와 있단 말인가?”
이야기를 건네는 건지, 홀로 독백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정연신은 입황성주를 돌아봤다.
스윽.
심신의 수양으로 자색 제일을 논하는 군자. 선공을 당해 열이 머리까지 뻗친 와중에도 스승에게 묻는 것이 먼저다. 지금 이곳에서 손을 써도 될는지.
“스승님.”
“자색은.”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스스로 처신해도 된다.”
“제가 경거망동해서 스승님의 체면을 욕보이기라도 하면….”
“체면.”
입황성주가 그의 말을 되뇐다. 미세하게나마 작게 올라간 입매. 언젠가 정연신에게 고수가 되면 머리를 길러 보는 것도 좋겠다고 했을 때와 같았다.
“네 의중에 비하면 작다.”
정연신은 더 묻지 않았다.
쾅!
그대로 발밑을 박차고 솟아오른다.
이미 반구형으로 패여 있던 지반이 한층 더 내려앉으며 굉음을 터뜨렸고, 정연신의 신형은 자줏빛 벼락마냥 희끗하게 이지러지더니 한 줄기 수직으로 명멸했다.
마침내 높디높은 천하목의 나무껍질과 평행을 그려 버린 동선을 따라 거친 마찰음이 콰각거리며 길게 이어졌다.
‘다른 입구가 없어.’
강풍보다 빠르게 뛰어오른 정연신은 생각했다.
이미 신의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은 뒤였다.
입황성주의 지위는 귀한 씨족을 통틀어도 비견될 자가 없을 만큼 지고하지만, 이방인을 빈객으로 삼아 줄 인물은 천하목에 몇 없을 거라고. 폐쇄적이기로는 북경의 자금성보다 더하다는 말과 함께였다.
진정한 복마전.
아직도 입황성주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차피 한 번은 들어가야 할 장소였다. 간절함을 담아 말이라도 나눠 봐야 했다.
스윽.
그때쯤 대궁을 든 인영은 늪지에 발 들인 것마냥 껍질 속으로 몸을 담그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문이라도 있는 듯했다.
“네게 허락된 곳이 아니야.”
무미건조한 음성이 울린다. 천하목 치천궁백. 푸르스름한 나뭇잎과 풀잎들을 머리에 엮어 관처럼 쓰고 있는 행색에, 주저 없이 등을 돌리며 드러낸 녹빛 머리칼이 입황성주와도 닮아 있었다.
혈육이라도 되는 걸까.
적어도 중원제일의 신비지처(神祕之處)라 불리는 천하목 내부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지닌 건 확실했다.
사락.
정연신을 끝까지 바라보지도 않고 나무껍질 안쪽으로 스며든다.
녹색의 머리카락 몇 가닥만이 실타래처럼 남아 껍질 표면을 쓸어내리다 끊어졌을 뿐이다. 이 순간 한발 늦게 그 높이까지 이른 정연신을 희롱하는 것처럼.
그녀의 기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지간한 금강석보다도 단단하다는 천하목의 껍질만 남겨두고. 곧이어 아래쪽에서 신의의 탄식이 울렸다.
“자네, 꼼짝없이 시험을 봐야겠구만…!”
그 찰나.
시간이 느릿하게 흘렀다.
적어도 정연신의 뇌리에선 그랬다. 앞서 신의가 귀찮다는 듯이 던져 준 말들이 머릿속에서 강물처럼 흐를 정도였다.
― 이방인이 천하목에 들어서려면 갖은 시험을 봐야 하네. 무위, 성품, 학식, 사승 관계, 그간의 강호 행적… 자격을 내리기 전에 아주 많은 걸 헤아리지. 뭐, 당연하지 않나? 내가 알기론 천하의 신검단주, 그러니까 그 망검(亡劍) 용희명도 예외가 아니었네. 문제는 그 시험이란 것이… 소림의 범동삼십육관문(汎動三十六關門)을 방불케 한다는 걸세. 당연히 그걸 감당할 만한 무위가 있어도 돌파하는 데만 수십 일을 헤아려야 하는지라, 별 시간도 없는 자네 스승이 뭔 생각을 하는 건지 당최…….
정연신은 느릿하게 여뢰를 뽑아 올렸다.
스릉.
발검의 궤적을 따라 나무껍질에 희미한 선이 새겨진다. 치천궁백이 천하를 오시하듯 내뿜던 공력 파동이 미미하게 남은 지점이었다.
허공에 떠올라 있던 정연신은 추락 직전에 그 검흔으로 발을 스윽 뻗었고, 동시에 그의 몸은 연기마냥 그 틈새로 빨려 들어갔다. 언젠가 천극문주가 그랬던 것처럼.
시험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