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18
◈ 노을 (9)
* * *
세 신검단주가 호신강기 진여휘성천을 면밀히 살피는 순간.
정연신은 큰 충격에 대비했다.
손속에 사정을 둔다 해도 패협의 한 수다.
홀로 교룡을 데리고 사라질 만큼 고강했던 소림방장, 범허대사가 바로 면전에서 온전한 몸으로 백보신권(百步神拳)을 발휘했다고 여겨야 할 터였다.
어쩌면 패도 무공의 특성상 조금이나마 그 이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웅―
마연적의 손을 맞이한 복부에서 얕은 공명음이 일었다.
온 공간에 푸른빛으로 스민 장력이 그 소리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진다. 언뜻 보기엔 타점으로 집중된 모양새였다.
하지만 정연신의 얼굴엔 의아함이 어려 있었다. 별다른 충격이 없었던 것이다.
마연적은 그의 복직근 한가운데를 내가중수법마냥 툭 건드리고 말았다. 그런 뒤에 홀로 고개를 주억이며 정연신의 호신공부를 칭찬했다.
“깊게 살펴볼 것도 없다. 북력혼원황(北力混元荒)과 천단광갑마저 압도할 내공방벽이니라.”
“…둘 모두 처음 듣는 무공입니다.”
정연신은 존엄한 외조부에게 굳이 별스러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장 그의 곁에서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신천화로 족했으니까. 정겨우리만치 선명한 반응. 한쪽에는 어느새 팔을 털어 올린 용희명도 있었다.
“전대 어르신의 연배를 생각하면 별달리 이상할 것도 없지. 기력이 쇠할 만해.”
펄럭!
시대에 하나뿐인 신검단주의 소맷자락이 그 반동에 들쳐 올라간다.
단정한 문사풍의 복식에, 다소 빛바랜 자색의 옷단. 언젠가 남궁세가와 치른 생사결 비무에서 봤을 때보다 옅어진 빛깔이다. 달리 난세의 흔적이었다.
“태례장(太霓掌)이다. 팔성 공력이면 되겠지.”
그러면서 성큼성큼 걸어온 용희명의 팔에서 무지갯빛이 우웅― 명멸했고, 다음 순간 정연신은 단주의 손이 희끗하게 사라졌다가 자신의 복부 앞에서 나타나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당대 입신검주의 절세 장법.
용희명의 독문무공이다. 한번 직격당하면 강호 무림의 누구라도 예를 취하게 되는 수법이라 했다.
죽음으로 널브러지든, 장력을 감당하지 못해 자세가 무너지든.
그 손바닥이 정연신의 배에 닿은 순간 지면이 파도치듯 넘실거렸다. 말 그대로 땅이 곳곳에서 치솟아오른 것이다.
굉음은 그 이후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정연신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다.
이전에 느껴본 적이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충격이 복부 한복판에 꽂힌 까닭이다.
도검불침(刀劍不侵)의 이빨을 앞세운 교룡의 주둥이가 배를 송두리째 짓누르는 듯했다.
오의가 명백한 무공이었다.
온몸의 균형을 철저히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실로 악질이었다. 이런 장법을 맞고 체면치레를 할 수 있는 인물이 천하에 몇이나 될까.
‘본성의 위신이……!’
정연신은 전신의 경혈을 능법광륜기로 채워야 했다. 다리 쪽의 혈도에만 공력을 쏟아붓기엔, 당장 허리를 비롯한 상체로도 경파를 지탱하는 편이 옳았던 탓이다.
몰골 사납게 멀리까지 튕겨나가지 않으려면 온몸으로 버티는 게 맞았다.
호신강기를 시험한다고 했다.
여기서 공격초를 흘려내선 안 된다. 그건 용희명에게 또 한 번 패하는 것과 같다.
이 순간 정연신의 눈이 흰빛 안광으로 번뜩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입신검을 가진다. 근시일 내에 꼭.’
그렇게 억겁과 같은 찰나를 견뎠다.
장력이 사그라들 때까지.
콰가가가각!
그의 다리가 지면에 깊은 고랑을 새기며 밀려나더니, 이내 어느 지점에서 멈춘다.
동시에 장법의 여파로 인근을 흐리게 물들이던 흙먼지가 우웅 하고 사납게 풀어 헤쳐졌다.
마연적의 손짓에서 비롯된 장풍이었다.
“과했다. 죽고 싶으냐?”
하지만 용희명은 전대 신검단주의 꾸짖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장법을 내친 자신의 손바닥만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모습. 손 주변의 대기에선 이따금 불티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고절한 힘의 진동을 되받아낸 흔적이다.
고개를 내리고 있던 용희명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새겨졌다.
“…몸소 제대로 겪어 보니, 이건 공격초가 따로 없는데.”
제 성질대로 만들었군. 그가 중얼거렸다.
당대 입신검주의 평가는 그처럼 평온하면서도 신랄했다. 하지만 정연신은 그의 말을 담대하게 흘렸다.
옛 성현은 인(仁)이 없는 자의 말을 귀담아듣지 말라고 했다. 용희명의 장법은 상대에게 굴욕을 주기 제격이었다. 제 주인의 성품대로.
천하는 더 나은 신검단주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정연신은 담담히 확신했다.
한편 신천화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흥미롭군.]안법을 쓴 걸까. 새까만 번갯불이 일렁이는 눈. 정연신은 그녀의 흑안에서 어떤 아득함을 느꼈다.
[무공의 공능이 반탄력에 몰려 있어. 나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공격적인데, 그 탓에 무딘 면이 있단 말이지. 요령이 좋은 초식에는 제대로 반응하지 않겠는걸. 물론 힘뿐인 공격초를 받아치기엔 더할 나위 없겠다만…….]그녀가 느릿하게 말을 맺는다.
정연신은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항주, 검을 든 생사결.
몸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쳐 떨어지던 왼팔.
그는 천극문주의 절초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몸 곳곳에 무수한 자상도 새겨야 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 다시 생사결을 치른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패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천하였다.
하지만 신천화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신검단주란 어떤 상황에서도 패하지 않아야 하는 위계다. 당연히 모든 방면으로 능통해야 해. 채울 부분을 찾았으니, 네 호신강기도 보신경처럼 전방위로 나아가는 게 맞아.]“…동의합니다.”
[내가 요결을 몇 가지 알려주마. 먼저 진기를 노끈처럼 옭아매어 두는 형태부터 제안하고 싶은데, 물론 네 호신강기의 기질은 유지해야겠지. 그러니까 다름 아닌 혈도 안쪽에서 별자리마냥 미리 공력을 짜두는 방식에, 육합(六合)의 묘리를 빌려서….]그녀의 말은 유수처럼 이어졌고, 정연신은 그 자리에서 모든 조언을 즉각적으로 이해하며 몸 바깥으로 구현해냈다.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생각과 해석이 덧대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신묘한 영성 어린 중얼거림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합(合)을 말씀하시니 천간합(天干合)이 떠오르는군요. 여기서 음양의 합일을 조화가 아니라 충돌로 해석하면, 제 환강이란 무공과도 맥을 같이하게 되는데… 아, 혜안이 대단하십니다. 이처럼 극성의 반발력을 구현하면 호신강기가 어떤 공격에든 반응하겠지요. 꺼지지 않는 벼락에 손을 넣을 사람도 없지 않을까 싶은데, 과연, 전전대께선 정말로 박학다식한 분이었…….”
종래에는 그러한 혼잣말마저 멎었다.
살짝 내리깔린 눈꺼풀. 내면으로 침잠한 것이다. 신천화가 의도했던 바와는 정반대로 가는 독백을 안개처럼 남긴 채였다.
그녀와 마연적의 눈이 마주쳤다.
[예의범절에 밝은 친구로군. 네 피를 온전히 이었다고?]“반은 그렇소.”
마연적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뇌까렸다.
“…이거면 되겠군.”
어느샌가 다시금 무표정해진 용희명이 웬 큼지막한 암석을 들고 오더니, 그것을 맨손으로 조각내기 시작하는 한편.
마연적과 신천화는 그 같은 후배들의 기행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다 헛짓인 줄 알았소. 본성 지하에 별 잡스러운 법보들을 쌓아 올릴 때만 해도. …또한 당신이란 망령을 직접 목도하기 전까지도.”
“그래 봤자 다시 나타나지 않을 귀신이.”
[아쉬운가 보구나?]“본인을 과대평가하시는군.”
[나는 조금쯤 미련이 생기는데.]“…….”
팔방은 심연 같은 어스름으로 가득했지만, 신검단 입신검과 인연이 있는 네 사람의 머리 위에는 보이지 않는 태양이 떠 있었다.
몹시 자연스럽게 짧고도 긴 시간이 흘렀다.
다시 눈을 뜬 정연신, 암석으로 웬 의자를 깎아낸 용희명, 언행이 유아독존을 논할지언정 그들 곁을 떠나지 않는 마연적과 신천화까지.
“그 의자는 뭡니까?”
“내 수련의 일환이다. 후배는 탐내지 말도록.”
“수련이라 하심은……?”
“여기에 앉아서 이 땅의 괴력난신들을 상대할 요량이다. 양팔의 투로를 조금 더 다채롭게 만들 수 있겠지. 내 용환검도 보다 완전해질 테고.”
“굳이…?”
손발을 섞고, 검을 나눴다.
[네 품에 괴황지가 있군. 법력의 효용을 일찍 깨달았어. 어쩐지 신묘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법보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조언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이리 줘 봐라. 내가 장난질을 칠 수 있겠어.]많은 일이 정연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극도로 어두운 공간에 그들뿐이었다.
한 번씩 심연이 혀를 세운 것마냥 끈적한 바람이 네 사람의 살갗을 스쳤지만, 누구 한 명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기가 연신 어둑하게 찢어졌다.
* * *
광활한 강이었다.
넓은 물길 속에서 일그러진 태양이 흘렀다.
그렇게 장강을 가득 채운 오후의 햇살은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중이었고, 그렇게 끝없이 떠내려가는 광채를 겉옷마냥 두른 강물에선 몽환적인 빛무리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장강 유역.
먼 윗대의 선대 태황후와 삼봉진인이 강물의 상류에서 손을 나눈 이래, 언제까지고 맑은 빛을 품고 있다 하여 상청(常淸)이라 불리는 장소다.
“본성은 어떻게 됐을까요?”
돌멩이 뭍에 선 청색 장포의 소녀가 거센 강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말했다. 유난스럽게 분명한 발음에 뚜렷한 힘이 깃든 음성이었다.
애꾸눈의 흑포 검객, 마광익주 청명이 그녀와 나란히 선 채 대충 대꾸했다.
“정 공이 알아서 하셨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한 사람이 그 넓은 전장을 다 틀어막을 순 없어요. 싸움은 어떻게든 이겼겠지만, 분명히 본성 무인들 중에서 죽은 사람들이 나왔을 거라고요.”
“그거야 필연이지.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는.”
청명은 무던하게 말했다.
하지만 청색고수 신소빈은 그 말에 제대로 된 반박을 던지지 못했다.
돌연 강가의 측면에서 솟구친 화탄이 옆자리에 꽂힌 까닭이었다.
투웅―! 콰아아아아앙!!
땅이 우지끈 내려앉으면서 사방으로 날카로운 파편들이 비산하려던 찰나, 옆으로 팔을 뻗은 신소빈의 손 그림자가 무수한 꽃잎들처럼 불어나며 그대로 폭발을 찍어 눌러 버린다.
쿠우우웅―
시화무극수, 권화(拳花)의 응용초였다. 일찍이 청색 시절 벽력탄에 애를 먹었던 정연신이 알려준 수법이기도 했다.
신소빈은 청색의 정연신이었다.
이 순간 청명과 신소빈 뒤에는 마광익 무인들이 제각각의 자세로 서 있었다.
“혈라광후! 과연 광야일멸의 제자다!”
화탄을 쏘아낸 배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터진다.
만상수로채.
난세를 상징하는 대방파였다.
쏴아아아아!
어느새 상청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배들이 있었다. 앞쪽이 뾰족한 데다 널찍한 돛을 제각각 둘, 혹은 그 이상씩 달고 있는 전함의 무리였다.
족히 서른 척을 넘기는 규모인지라 위압감이 대단했는데, 검극마냥 물길을 가르는 속도마저 빨랐다.
새로이 십삼천으로 불리기 시작한 수적들의 전함.
다수의 선원이 양손으로 추진 경파를 내뿜으며 배의 운행을 북돋는데, 그 압도적인 광경은 당대 마광익주의 눈길을 붙잡지 못했다.
전함들의 반대쪽에 홀연히 나타난 이들 때문이었다.
“저거……?”
명백히 수면을 밟고 선 백여 마리의 전투마. 저마다 우람한 풍채에 선명히 갈라진 근육에서 흐린 기파가 새어 나오고 있다.
그 위에 앉은 채 언월도와 도끼를 내려 쥐고 맨몸으로 상반신을 드러낸 인영들.
기마술로 등평도수(登平渡水)를 쓰는 것이다.
잔잔하게 파도치는 물결과 함께 인마의 무리가 환영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불현듯 그 강물에 깔려있던 햇볕이 석양 특유의 붉은 아지랑이를 띤 것도 동시였다.
마광익주 청명의 입이 느리게 열렸다.
“…광예결, 발동.”
순간 마광익 고수들이 허여멀건 빛으로 화했다. 동시에 대기가 쿠릉 하고 울렸다.
이 자리에 대성하지 못한 자가 없는 무공.
극성의 광예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