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25
◈ 남존 (4)
* * *
새까만 머리칼과 흑포가 길게 펄럭인다.
“눈 뜨고 봐주기 힘들군. 무례가 도를 넘었다.”
신혈극마 진명조가 말했다.
“이곳은 본성의 원평일검장이다.”
유난히 짙은 흑발과 대주를 상징하는 옷단이 밤하늘마냥 함께 어우러졌다. 원평일검장에 앉아 있던 대주 몇 명이 놀란 낯빛으로 그의 등을 바라봤다.
“저거 방금…?”
“그새 대공(大功)이 있었나.”
대공.
큰 무공 증진을 이르는 말이다.
정연신도 여러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무당 장봉을 가린 진명조를 응시했다. 늘 그렇듯 본성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뒷모습에서 익숙한 기질을 느꼈기 때문이다.
언젠가 청색 시절에 항거불능의 존재감으로 정연신을 짓누른 혈염교주.
그 백발의 초월자가 입황성주에게 출수할 때 번졌던 영성이 진명조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미하게나마 몹시 서늘한 느낌으로.
‘또 다른 혈염교주의 수급을 취하셨다더니.’
천하에서 가장 고고하다는 혈귀의 영성이 당대 신검부대주에게 계승되었다.
영성(靈性).
신묘한 성질을 띤 의념으로, 내공과는 다른 힘이다. 빚어낸 이의 경지가 높을수록 오랫동안 세상에 남는다.
또한 그것이 내공의 힘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정연신의 자색 장포가 스스로 옷감을 수복할 수 있는 이유도 영성에 있다.
그리고.
공력이 옷감에 스며 있는 한, 장포의 영성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자색의 옷을 받을 당시에 건릉제가 해준 말이었다.
―짐의 사람, 북경에서 제일가는 마름질 장인이 만들었다. 신투(神偸)란 놈이 노릴 정도이니만큼 천하제일의 장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니라.
사천에서 전대 신검단주의 청염에 불타올랐던 백발 초월자의 영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혈염교의 귀족들은 피에 서린 선천지기(先天之氣)로 자신들끼리 격을 나누고 선대의 넋을 기린다. 오래도록 그 씨족의 정점에 있던 자라면 고승의 사리마냥 영성이 남을 만했다.
‘하지만.’
정연신은 생각했다.
그것을 온전히 수습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분명히 당대 신검부대주는 깊은 폐관수련이 필요한 상황일 것이다.
지금 원평일검장에 나온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회합이 어찌 진행되든, 스스로 고강해지는 것만 중시해도 되었을 텐데.
그때였다.
“정 공이 아니면… 용무는 없다……!”
여인의 억눌린 음성과 함께 소나무 같은 향이 훅 끼쳤다. 순간 정연신은 과거의 어느 정자를 떠올렸다.
오운산초채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던 용희명과 대주들, 그리고 소년의 외양으로 능청스레 정연신에게 금나수 대결을 걸어왔던 고검진인.
무당 면장(綿掌)의 파동이었다.
후웅!
진명조에게 목을 잡힌 장봉이 왼손으로 그의 팔을 휘감아 벗겨낸다. 강건하면서도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그리고 빨랐다.
순식간에 진명조의 팔을 떼어낸 그녀가 아래로 화악 꺼졌다.
다음 순간 장봉의 몸은 본래 진명조가 앉아 있었던 정연신의 옆자리에 당도해 있었다. 흰 소맷자락을 새털구름처럼 휘날리면서.
사락.
굉장히 표홀하다.
추진 경파의 진동 따위가 없는 게, 무당의 제운종이 분명했다. 굉장히 높은 곳을 디딘 듯한 그녀의 분위기와도 어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순백의 도포를 걸친 장봉이 흠칫했다. 어느새 붉은 안광을 혜성의 꼬리처럼 남긴 진명조가 그녀의 뒤를 점한 뒤였던 탓이다.
“원숭이처럼 뛰어다니는군.”
얼음장이 부서지는 듯한 뇌까림이었다.
“……!”
후기지수의 영역을 넘어섰다는 호광성 환명오절의 제운종(梯雲縱)이, 혈귀라며 천대받기 일쑤인 보혈대주의 보신경을 떨치지 못했다.
게다가 그 모든 광경이 장내에 앉은 대주들의 눈에 그대로 비치는 중이었다.
하후위진은 아예 손뼉까지 치고 있는데, 찰나지간 정연신이 진명조를 묵례로 제지하지 않았다면 장봉의 머리는 암야휘혈마검에 쪼개졌을 것이다.
“…지금 무당산은 본파 장문인의 손에 반으로 갈라지기 직전이오.”
진명조를 등진 장봉이 또박또박 얘기했다. 당장 어떤 출수를 당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반투명한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눈매만 드러낸 모습. 이 순간 정연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푸르스름했다.
안법의 광채 탓인지 명족의 피가 섞인 주씨 혈통 때문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정연신은 곧바로 입을 뗐다.
“원평일검장의 회합을 방해할 이유로는 부족해. 사정을 똑바로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
“그 곡절이, 고검 사숙조께 있소.”
장봉 주세화가 힘겹게 내뱉었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
고검진인의 죽음.
정연신을 탓하고픈 마음을 애써 참는 걸까. 그간 정연신이 겪어본 다수의 강호인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물론 정연신에게도 지워지지 않을 쓰라림이 남아있었다.
애시당초 천극문주에게 한 번 패하지 않았다면, 무당 고검이란 천하의 협객이 눈감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절세대제전이 일어났던 항주.
자색이 움직였다. 무당은 안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참극이 일어났다.
‘애초에 단주님이 천극문주를 상대했다면…….’
누구의 죽음도 없지 않았을까.
어느샌가 싹을 틔운 정연신의 다급함은, 용희명에 대한 열등감에도 뿌리내리고 있었다.
여기서 주세화가 자신을 탓한다 해도 묵묵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을 만큼. 단주 대리, 입신검의 예정된 주인, 어떤 협객의 죽음도 허락하지 않는 시대의 초인…….
그때 주세화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사숙조님과 끝까지 함께 있었다던 멸섬대주를 찾아봤지만, 연통이 닿지 않았소. 이곳으로 걸음할 수밖에 없었지. 묵신군 신황 이전에 사숙조와 말을 나눠본 인물이 섬예 정 공, 당신이니까. 청컨대 무당산에 올라 본파의 우환을 제거해 줄 수는 없겠소?”
“…….”
올곧은 무당 제자의 말에 정연신이 잠시 침묵할 때였다.
네 사람의 말소리가 농밀한 기파에 섞여 울렸다.
점잖은 목소리가 둘, 예의 단정한 청년의 음성이 하나, 그리고 다소 잠긴 듯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하나였다.
“이러지 마시오. 불시에 입황성의 담벼락을 넘은 것은 몹시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일이나, 빈도들은 그저 본파의 제자를 말리고자 걸음한 것뿐이외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남궁 소협, 굳이 우리가 손을 나눌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본래는 기별을 넣고 절차를 따를 심산이었…!”
“진인들께선 방파대전으로 무너진 서쪽의 성벽을 넘어오셨습니다. 이 같은 시기에 그런 모욕과 무례는 없지요. 남은 말씀들은 뇌옥에서 해주십시오. 본성의 옥사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창천 선배님, 제가 앞으로…….”
“백기린, 그쯤 하지. 심극기린을 익혔다 하여 너무 앞으로 나가진 말게. 자네의 검세가 날카로워질수록, 무당의 태극 공부 또한… 이보게, 잠시… 이 썩을 놈이.”
무당 도사가 둘.
그리고 임시 순천익주와 창천대주.
쩌저저저정!
충돌을 빚은 모양으로, 기파의 영향력이 점차로 가까워져 온다. 말 그대로 화탄처럼 폭발하는 바람 줄기들과 함께였다.
“아.”
주세화가 정연신의 곁에서 작은 탄성을 토했다.
“두 분 사숙께서 날 잡으러 온 모양이오. 웬 미치광이가 맑은 눈으로 달려들기에 가까스로 지나쳤더니.”
“그렇게 가볍게 말할 말코들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있던 악수림이 툭 내뱉듯이 대꾸했다. 한쪽에서 율령대주 운소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칠존성(太和七尊星)입니다. 무당파 칠성검진의 일곱 축으로 간택된 초고수들이지요. 아주 강합니다.”
운소유의 음성이 나지막하게 깔렸다. 동시에 악수림이 고개를 저었다.
“뭐 먹을 게 있다고 둘이나 내려왔대? 무당산에 뚫린 문이면 보통 고수들만으론 막기 힘들 건데. 뭐 그거보다 더 급한 일이라도 있나?”
“본파의 장문진인 때문이오.”
주세화가 낮게 속삭였다.
“몇 해 전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경지에 오르신 뒤, 도인에게 있어선 안 될 입마를 해소하시던 중에…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을 들으셨으니.”
“거기까지.”
그녀의 말을 끊은 정연신이 고개를 돌렸다.
“진 선배님, 싸움을 말려주시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그때까지도 주세화의 온몸을 찢어버릴 것처럼 서 있던 진명조는 잠시 침묵했다.
귀한 적옥처럼 붉은 광채가 흐르는 눈이 정연신의 시선과 맞닿는다. 이내 진명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검대의 편제는….”
“편히 말씀하십시오.”
“저 두루마리, 결국은 정 공께서 가져오신 인명록대로 결정되는 것입니까?”
“죄송합니다.”
정연신은 주세화의 어깨 너머 진명조를 향해 양손을 모아 올렸다. 짙은 확신이 어린 말과 함께였다.
“후배는 이 이상 완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진명조는 그 이상 정연신의 결정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곧바로 몸을 돌리는 모습이 신검부대주의 좌(坐)에 어울렸다.
언젠가 법력을 오래 쬐어 호흡이 가빠지던 혈염교의 귀족들과 다르게 천천히 회합장을 걸어 나가는 모습도 그랬다.
어깨가 매끄러운 곡선으로 조금 늘어진 게, 앞으로 맡게 될 중책의 무거움을 실감한 모습이었다.
“장봉도 함께 나가라. 회합이 끝나는 즉시 기별할 테니까.”
정연신이 원탁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신임 신검부대주가 보여준 책임감과 배려를 머릿속에 새겨두면서.
그 역시 단주 대리가 배워야 할 덕목이었다.
* * *
정연신은 다시 강호로 발 딛기 전에 짚어야 할 일들을 처리했다.
신검단 십칠대의 전체적인 편제.
여의천과 천룡대를 비롯해 험지에서 임무 중인 무력대들의 현황.
정가동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백색 외에는 피해가 전무하다는 입황마가의 보고.
그 밖의 산하 가문에 몸담고 있던 고수들이 신검단의 편제에 들어오고자 한다는 낭보.
그리고 현재 입황성에 남은 본성 고수들의 새로운 임무와 파견 지역까지.
“단주 대리, 늦어서 송구하오.”
그 와중에 창천대주와 임시 순천익주, 신임 신검부대주가 차례대로 돌아와 착석했다.
남궁화신의 뺨 양쪽엔 각각 창천대 무검벽혼장(無劍霹魂掌)의 장흔과 보혈대 섬혈조법(閃血爪法)의 손톱자국이 깊게 새겨져 있었지만, 그 멍들고 피난 상처들을 유심히 보는 대주는 없었다.
“…천림대주께선 항주와 그 인근을 맡아주십시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앞서 남궁화신에게 송두리째 뚫린 벽면이 거뭇한 밤공기로 채워질 정도였다.
사아아―
겨울바람이 장내의 먼지를 희끗하게 밀어내는 가운데.
정연신은 천천히 악수림과 시선을 맞췄다. 무채색의 전광이 일렁이는 그녀의 눈동자. 입황제일창의 자그마한 얼굴은 별다른 표정을 담고 있지 않았다.
“악 선배님.”
그녀는 회합 내내 필요한 말만 던졌다.
여느 때처럼 과장스럽게라도 창을 드는 일이 없었다. 눈꼬리도 다소 내려가 있는 모습이었다.
“제 언행과 결정에.”
정연신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농은 없습니다. 작명에 소질이 없어 선배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을지라도.”
“…….”
“오늘 저희가 나눈 이야기들이, 대총관께서 저와 함께 논한 최상의 편제입니다.”
“…너, 아무리 그래도…….”
후욱!
악수림의 까만 머리칼 끝이 어깨를 스친다. 공력 파동의 전조였다. 삼화취정의 깊이로는 흑색들 중 수위를 다투는 만큼, 마음의 일렁임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정연신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이제.”
“내가 정식으로 이의를….”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뭐?”
“아무도.”
정연신이 낮게 중얼거린다. 무언가가 무뎌진 느낌의 독백이었다. 이가 많이 나가버린 칼날 같은 기질이기도 했다.
“…….”
단주 대리가 불가능한 일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누구도 굳이 그것을 짚어 주거나 별다른 조언을 던지지 않았다.
다만 잠시 동안 저마다 침묵할 뿐이었다. 악수림의 입술도 천천히 다물어졌다.
“직함이 무엇이든 좋습니다. 본성을 지켜주세요. 선배님들을 믿고, 잠시 무당산에서 도리를 다하고 오겠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가뭄을 맞이한 땅처럼 금이 간 벽면을 타고 웅웅거리는 바람만 존재했다. 장내는 한겨울의 대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문득 무극전주가 손바닥으로 삼매진화의 불꽃을 피워올리기 전까지.
* * *
정연신은 잠들지 않았다.
반드시 끝내야 할 모종의 일들을 더 처리한 뒤에, 동이 틀 때쯤 입황성주의 내성에서 나왔다.
모두 세 명. 장봉을 비롯해 아직도 낯선 무당파의 고수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가지요.”
정연신은 사람의 머리 하나보다 조금 큰 석함(石函)을 비단보에 묶어 들었다. 대리석으로 조각된 상자였다.
다른 짐은 없다.
매듭을 내려 쥔 손아귀에 청아한 향기만 가득했다.
무당 도사들의 묵직한 시선이 상자에 얹어졌지만, 정연신은 그들의 어깨 너머로 눈길을 던졌다.
자색의 여인이 긴 머리칼을 한 줄기로 휘날리며 서 있었던 까닭이다. 맑은 햇살이 섞인 안개 속에서.
“움직일 힘이 남았다. 네가 보약이야.”
신천화가 그를 향해 턱짓했다.
“무당산까지만 같이 가보지. 예감이 영 좋지 않아서.”
정연신의 입매에 희미한 곡선이 맺혔다.
“예, 좋습니다.”
그는 담담히 대답했다.
장봉이 새삼스럽다는 눈빛을 띠었지만, 정연신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긴 다리를 덮은 자색 옷감에 새벽녘의 주홍빛이 은은하게 덧칠되고 있었다.
나이 열여덟의 새해였다.
* * *
일행이 무당산에 당도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분명히 며칠 밤낮을 몹시 빠르게 질주했지만, 적어도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한 정연신에겐 잠시였다.
천하의 모든 구파 중 무당파가 양양에서 가장 가까운 까닭도 있었다.
그럼에도 몹시 긴 거리는 꿈결처럼 쾌속하게 좁혀졌다.
천하 검파의 으뜸.
고금제일에 한없이 가까웠다는 삼봉 무맥의 발원지.
“…….”
그 땅에서 정연신이 처음으로 본 것은.
쩌저저저적―!!
거대한 산봉우리가 희멀건 구름과 함께 수직으로 갈라지는 광경이었다.
그가 알기로 무당파 도관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 저렇게 쪼개질 수가 없는 장소였다.
잠시간 정연신과 똑같은 당혹감을 느꼈던 걸까. 장봉 주세화의 외침은 한발 늦게 울렸다.
[장문인!]메아리처럼 퍼진 음성과 함께 정연신은 그 자리에서 땅을 박찼다.
화아아아악!
언젠가 장삼봉이 디뎠던 대지에 희미한 별자리가 새겨진다.
십리광요의 추진 경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