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40
◈ 강호 인명록 (6)
* * *
따스한 방이었다.
거센 바람이 벽을 때리지만, 한겨울의 밤공기는 계속해서 방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저 덧없이 웅웅거리며 안락한 괴리감을 일으킬 뿐.
큼지막한 창문은 그렇게 장성처럼 북풍을 막았다. 그리고 사람이 피워낸 등롱의 불빛에 몸을 맡겼다.
위로 올라간 채 이따금 부들부들 떨리는 양팔의 그림자를 화폭처럼 담아내면서.
문득 젊은 여인의 음성이 단단한 느낌으로 울렸다.
“사숙, 팔이 내려갑니다. 언젠간 이보다 오랫동안 검법을 펼치셔야 할지도 모르는 일인데도요.”
자그마한 양손이 다시금 살그머니 올라간다. 여인의 목소리가 온화해졌다.
“옳지. 잘하셨습니다. 사숙은 더 잘해 내실 거예요.”
“장문사질, 저 힘들어요.”
여덟 살 어림의 앳된 아이가 웅얼거렸다. 몹시 단정하게 무릎 꿇은 자세로, 짧은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린 채였다.
하지만 아이와 마주 앉은 여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강호에서 의지를 관철하기란 그처럼 힘든 법이랍니다. 사숙께선 힘도 없이 여러 명숙들께 무례를 범하고도 대가를 치르지 않으셨으니, 저라도 무림 강호의 이치를 알려드려야 해요. 이러지 않으면 본파가 언제 사숙을 잃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서당을 부수셨던 일과는 달라요. 이해하시지요?”
“네에…….”
유난히 이목구비가 또렷한 아이, 정혜의 말끝이 기다랗게 늘어졌다. 납득했다기보단 풀이 죽은 모습.
위지묘화의 새까만 머리카락에 꽂혀 있던 깃털 장식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곧 그녀의 아름답고도 뚜렷한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강한 힘이 없으면, 섣불리 속마음을 드러내선 안 돼요. 그것이 강호입니다. 사숙의 숙부… 정 소협의 그림자가 언제까지고 사숙을 지켜줄 수는 없어요. 강호의 이름 없는 들판과 산길은 밝아도 조용하고, 어두울 때는 심연으로 변하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잔소리를 쏟아내는 이유가 있다.
정혜는 당대 팽가주와 겨뤘다.
정확히는 옆을 지나치던 중 돌연히 달려들었다고 해야 한다.
서안의 저잣거리. 풍채 좋은 팽가인들의 선두에서 신검단주 대리의 성품을 혹평한 팽가인후에게.
―이 아이, 그 아이인가? 어처구니가 없군. 광야일멸을 조심해야 한다고만 했을 뿐인데…!
―광야일멸은 나쁜 말이야!
―누가 지었는지 기가 막히는 별호이긴 해.
팽가인후는 중년인마냥 껄껄 웃고는 그녀의 팔에 강제로 안긴 정혜를 위지묘화에게 인도했다.
아이가 자신의 팔을 물고 있든 말든 개의치 않으면서였다.
―그쪽이 운중검룡인가? 못해도 나와 호각이겠어. 몸에 두른 검기(劍氣)를 보니 확실히 명불허전인데, 피차 젊은 수장으로서 통하는 바가 있겠지. 언제 한번 대작이나 해.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오싹하긴 했어. 천하오검의 조카를 건드렸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심지어 본가는 이미 가주까지 바뀌어 버렸는데.
물론 그건 내게 퍽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녀의 웃음기 어린 귀엣말을 끝으로 팽가인들은 멀어졌다.
크고도 작은 사건이 끝맺어지기까지의 과정은 그처럼 짧았다. 위지묘화로서는 섬뜩해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명리에 밝고 이해득실을 따지는 세가였기에 망정이지, 당장 앞만 보는 낭인이나 자존심 높은 고수였다면…….’
황실에서 마련해 준 객실.
위지묘화는 어린 사숙의 팔이 달달거리며 떨리는 광경을 외면했다. 정혜는 혼이 나야 한다. 이처럼 종남 장문인의 권위를 크게 내세워서라도.
“해시(亥時)가 되면 팔을 내리세요. 저는 팽가의 처소에 다녀오겠습니다.”
“팽가…?”
정혜가 이름난 권법가의 주먹만 한 머리를 살그머니 들어 올린다. 위지묘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팽가 또한 사숙처럼 대가를 치러야지요. 백주 대로에서 본파의 은공을 모욕했으니, 사과를 받아올 생각입니다. 사숙과 달리 제겐 힘이 있으니까요.”
조곤조곤하게 말을 맺자 아이의 표정이 환해진다. 양팔이 많이 아픈지 찡그려진 얼굴로 헤― 하고 웃는 입매.
위지묘화는 정혜처럼 살짝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그리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 * *
천경무과.
천하를 대상으로 한 비무대회이자 몹시 특별한 징집 행사였다. 온갖 이권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황실이 내건 방문(榜文)은 보상들이 적힌 글귀로 가득했다.
흉년을 견딜 식량과 드물게 비옥한 토지가 첫째로 쓰였다. 그 세세한 내용은 무공 고수들을 빈객으로 둔 대상단들마저 탐낼 정도였다.
심지어 천경무과에 급제한 이들의 제자와 혈육을 온전히 지켜주겠다는 장담도 있었다.
일개 지역 강호 수준의 행사가 아니다.
규모가 달랐다.
근래에 이르러 쌀 한 톨에도 칼부림이 나는 세상. 당연히 천하 강호가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천경무과가 펼쳐지고 있는 종남산으로.
“본파에 처소를 배정할 수 없다는 겁니까? 실력이 먼저라더니, 이래서야 허명만 따지는 게 아닙니까?”
“본관은 금선팔법을 사사한 궁중의 무인이다. 나와 손을 겨루어 자격을 증명하는 방법도 있다. 자신이 없다면 알려준 기일에 올라오도록.”
사소한 다툼이 비일비재했다.
그 와중에 본래 무너져 있던 도관과 전각들은 북경의 철족들의 손에서 다시금 웅장해졌다.
산 아래의 마을이 전에 없던 인파로 가득 찼다. 수많은 객잔과 주루가 단시일에 걸쳐 세워졌음은 물론이다.
일각에선 새 황실이 종남파를 다음 대 소림과 무당으로 여긴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하필 종남산이라. 이유가 뭘까? 역시 광야일멸의 조카 때문인가? 새 황제와 태자가 그자와 긴밀히 연을 맺었던 걸로 아는데.”
“아무리 그래도 설마! 차라리 종남검선의 흔적을 간절히 찾다 못해 별의별 기이한 안법을 지닌 무림인들마저 끌어들였다고 보는 게…….”
“글쎄? 설령 웬 놈이 검선의 기연을 얻는다 한들, 그걸 날름 삼켰으면 삼켰지, 황실에 갖다 바칠 리는 없지 않나?”
“자그마치 주씨 황족들일세. 죽은 종남검선은 못 찾아도, 이 산에 있는 무인들만큼은 모조리 그 눈동자 안에 들어 있다고 봐야지. 천하제일의 안법은 대대로 황실이 보유하지 않았나. 신투 혹은 주광신개가 아니면 그 눈을 속이기 힘들 걸세.”
“하긴, 황태자가 적법하게 황위를 이었으니… 실전된 무학은 없겠어. 숭례삼중궁의 독문무공만 빼면.”
드넓은 산자락과 마을 도처에서 수군거리는 이들.
이제 종남산의 밤은 고요하지 않다.
몹시 소란스러웠다.
산자락 중턱에서 웬 전각의 쪽문이 열리건 말건.
끼이익―
당금 종남파 최고 배분의 인사에게 배정된 처소였다. 근래에 의념이 무공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공부하고 있는 아이의 거처이기도 했다.
“조심조심(操心操心).”
정혜는 공월무 살금살금을 펼치다가 스스로 낸 목소리에 흠칫했다.
이내 단풍잎 같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종종걸음 치는 모습. 아직은 의념이 저절로 울리는 경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지러운 시기였다.
정중산 등 몇 없는 종남제자들은 밤잠마저 거르며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만큼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온갖 권세가들이 제자로 거두라며 들이미는 아이들, 은밀히 연줄을 대고자 밤중에 찾아오는 상단주들, 그 밖에도 별별 기상천외한 용무를 지닌 손님들까지.
게다가 위지묘화마저 작은 은원을 매듭짓고자 팽가로 간 상황.
정혜에게 요즘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산에 올랐다.
사박.
앳된 소녀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움직인다.
다행히 근래의 종남산은 정혜 또래의 아이들로 가득했다. 대개 북경 귀족가에서 데려온 기재들이었다.
당연히 누구도 자그마한 기척을 새삼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비무 준비와 은밀한 회합 등 모두가 저마다의 일로 바쁜 형편이었다.
‘오늘도 가야 해.’
언젠가부터 매일 밤 정혜에게 들려오는 속삭임이 있었다. 원래도 몹시 작게나마 타통되어 있던 백회혈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무언가였다.
아이는 당연히 위지묘화에게 그것을 얘기했고, 위지묘화 역시 어린 사숙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이한 목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효령암(嚆零岩)이란 바위가 있는 종남산 중턱. 깎아지른 협곡을 마주 보는 장소일 뿐이었다.
[이리 오거라.]그럼에도 꿈결 같은 이끌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혜는 계속 산에 올랐고, 이제는 모든 종남제자들이 아이의 등산을 그러려니 넘겼다.
괜스레 효령암에 손자국을 남기는 것도 장법 수련의 일환으로 비치기만 했다. 홀로 오르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괜찮았으니까.
그처럼 아이에게 익숙해져 있던 길.
오늘은 달랐다.
사아악―
산길 양옆에서 어둠이 연기처럼 어른거렸다. 그 흐름은 은밀하고도 길게 이어졌다.
아이가 끝내 큼지막한 바위 앞에서 후아 하고 내공의 날숨을 내뱉을 때까지였다.
불현듯 꺼끌꺼끌한 목소리들이 도처에서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없구나. 헛걸음인가.”
“그럴 리가. 가장 좋은 위치에서 의뢰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사로이 환강을 탐하지 마라. 우리가 서로를 죽이느니 정해진 대가만 받고 흩어지는 편이 낫다.”
정혜는 움찔했다.
셋 중 익숙한 음성이 있었던 까닭이다.
—종남 속가의 반무일(潘撫日)입니다. 먼저 간 반악… 대명이와는 개봉에서 깊은 친분을 나눴지요. 인연이란 것이 이렇게 묘합니다. 여하간 당금 본파의 최고 어른께서 이처럼 무공에 밝으니, 제 마음이 다 놓이기도 하고…….
언젠가 아이에게 문안을 여쭸던 속가문파의 문주. 게다가 할아버지인 정반악의 친우라며 손을 꼭 잡아준 적도 있다.
공력으로 일그러진 목소리였지만, 정혜의 감각은 그러한 왜곡마저 꿰뚫어 냈다.
소녀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날것의 무림 강호를 접한 아이의 반응은 몹시 순수했다.
정혜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무일이 아저씨…?”
곧장 일그러진 음성이 돌아왔다.
“…이 아이, 검선 노사부의 곁으로 보내야겠다. 삼도천 말이다.”
“이거 미친놈 아닌가? 감당은 가능하고? 신검단 광야일멸이 온 강호를 뒤집어엎을 텐데, 나는 반대다.”
“나 또한.”
저벅.
목소리의 주인들이 어둑한 풀숲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세 명의 중년인이었는데, 저마다 보이지 않는 기세를 스멀스멀 뿜어내고 있었다.
발밑의 수풀들이 스스로 드러눕는 광경. 당연히 고수라고 불릴 만한 기파였다.
개중 한 명이 담담하게 말했다.
“있지도 않을 일에 겁먹지 마라. 간단한 내가중수법이면 오늘 일을 잊을 거다. 작은 충격으로 족해.”
“어차피 천단광갑(天緞鑛鉀)이면 환강이 부럽지 않을 테고, 무엇보다 그 환강이란 무공은 광야일멸의 손에서만 검증이 되었지. 다른 이가 익혀서 절세의 장력을 보였다는 풍문은 못 들어봤다. 반면에 북방 괴물들의 무공은… 말해 무엇하겠나?”
천단광갑을 언급한 인영의 손가락이 탁 하고 움직였다. 지풍(指風)을 발출한 것이었다.
파악!
애꿎은 흙바닥이 터졌다. 정혜가 먼저 한 걸음을 폴짝 물러섰던 탓이다.
예리한 직감이 묻어나는 후퇴 보법. 세 사람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상단전 자질이…?”
“큰일이다. 백치가 아니면 안 되겠어.”
우웅―
셋 중 둘의 신형이 귀신처럼 늘어지더니 원을 만든다. 포위망의 중심에 정혜를 둔 광경. 그제야 아이의 얼굴이 미미한 두려움을 띠었다.
“아저씨, 왜…?”
문사풍으로 단아한 인상을 지닌 중년인, 반무일이 느리게 대답했다.
“종남검선이 남겼을지도 모를 기연을 원하는 존재가 있다. 네게서 무얼 보았기에 한낱 어린아이를 좇으라 한 것인지 의문이었는데, 지금 보니 조금 알겠구나. 타고난 상단전의 공능에 종남 무공… 여기서 무엇을 발견해도 진작에 했을 아이야.”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어조.
일을 의뢰한 자가 멀리서 북풍처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반무일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빠르게 말했다.
“이제 됐다. 우리가 찾아보마. 미안하구나… 반악의 손녀야. 네 호신강기의 성취가 다행히 북방 강호의 수작을 앞지르진 못했으니, 가는 길이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뭉클거리던 기세가 화악 하고 넓게 번졌다.
억지로 피워올렸기에 들불처럼 일어나는 살기. 인근의 수풀들이 거대한 동심원의 형태로 누워버렸고, 곧이어 그 모든 이파리들은 스스로 일어나 역방향으로 다시 뒤집어졌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강대한 바람을 맞닥뜨린 것처럼.
“……!”
세 중년인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어느새 인근이 환해져 있었던 탓인데, 홀연히 나타나 그들을 둘러싼 이들의 숫자가 백여 명에 가까웠다.
심지어 하나같이 휘황한 금빛의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북경 황실 직속의 고수들을 뜻하는 행색.
반무일의 눈동자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거대한 포위망 속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이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종남 장문인, 팽가주, 제갈가주, 공손가주 대리, 소림승, 금의위 부영반, 그리고 저자… 이 나라 사례태감……!’
정혜의 호신강기였다.
사락!
불현듯 훤칠한 소년이 정혜와 반무일 사이에 내려선다. 매화를 수놓은 도포와 무표정한 얼굴이 인상적인 모습.
한편 어느새 반투명한 무색의 꽃잎들이 그들의 눈동자를 희롱하듯 날카롭게 휘날리고 있었다. 개중 다수는 정혜의 눈을 쉴 새 없이 가렸다.
소년 도사가 말했다.
“하나는 없어도 되지요?”
반무일의 목에 붉은 실선이 새겨졌다. 곧이어 그의 머리가 툭 떨어지더니 을씨년스럽게 땅을 굴렀다.